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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원형 카자크족의 역사와 율부린너 주연의 대장 부리바!
유럽을 지향하며 나토에 가입하려다가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직면한 동슬라브족의 나라
"우크라이나" 의 국호는 Оукраина)에서 유래하였는데 우(Оу)는 전치사아고 크라이
(краи)는 땅, 영토, 변경, 경계를, 나(на)는 접미사로 역사적으로는 소러시아라 불렸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가 공동의 조상으로 여기는 키예프 루스(키예프공국)
가 1240년에 몽골에 멸망한 이후에는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의 경계였으며 "카자크인" 들로 부터 나라가 형성됩니다.
우크라이나 국가를 형성한 카자크 Cossack(코사크) 족을 생각하면 먼저 율부린너가 주연한
영화 “대장 부리바” Taras Bulba 와 톨스토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전쟁과 평화” 에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하자 집요하게 프랑스군을 추격하던 코자크 기병이 떠오릅니다.
카자크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일대에 있었던 슬라브계 군사집단으로 혈연에
따른 민족이라기 보다는 특정 지역에서 형성된 종족으로 러시아의 돈 카자크
( 쿠반 카자크)와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는 기원부터 서로 달리하니
카자크는 오랜기간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 명칭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카자키)라고 부르고 원조인 우크라이나어로는 Козаки(코자키), 폴란드
어로는 Kozacy(코자치) 영어로는 Cossack(코삭, 코사크)라고 하며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
과는 발음이 비슷하니,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 와 Казахи 로 한 글자 차이라 혼동하기
쉬운데 그러나 카자크는 슬라브계이고 반면에 카자흐는 튀르크계 민족으로 둘은 전혀 다릅니다.
카자크에 대한 어원은 튀르크어로 '얽매이지 않은 자들' 이란 뜻의 카자크(Qazaq) 라고 본다
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같은 어원이지만, 달리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 를
뜻하는 중앙아시아의 '카즈마크' 에서 나왔다고 하며, 골루봅스키는 폴로베츠인들
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쓰인 '카자크' 란 단어가 러시아어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2. 역사
1) 노보고르드와 키예프공국 :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벨로루시의 기원은 노보고르드공국
과 키예프공국으로 잡으니, 8세기말 부터 스웨덴에 살던 노르드인(바이킹) 루스족(Rus 바랑기아인)
이 바다를 건너 러시아땅에 도착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라도가 호수변에 요새를 건설해 정착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교역에 목적을 두었으나 점차 많은 노르드인들이 합류하며 세력이 강해집니다.
그러자 노르드인(바이킹) 루스족(Rus 바랑기아인) 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진출하며
토착 슬라브족들을 정복하거나 교류하며 정착지를 넓혀나갔으니 “루스 카간국”
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나라 이름인 러시아(rus + sia) 는 루스족(노르만 바이킹)
에서 유래하는데 9세기 초중반 루스족은 노브고로드 일대까지 진출하여 정착합니다.
이주해온 루스인은 토착민인 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들에게 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 하니... 저항해 루스인들을 북쪽으로 내쫓았지만 현지 부족들 간에 싸움이 멈추지 않자
루스인(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에 통치해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니 “류리크”가 이끄는
루스인은 노브고로드역에 정착촌을 만들어 862년 노브고로드 루스(노브고로드 공국)를 건국합니다.
이 “노브고로드 루스”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공동 기원이 되는 나라이니 러시아
에서는 1862년 건국 1,000주년 기념 행사를 하기도 했는데, 최초의 노브고로드
루스는 순수 루스인(바이킹)들로만 구성된 나라였을 수도 있지만, 루스인들과 이들
보다 먼저 현지에 정착해 있었던 슬라브인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는 주변 슬라브인들을 복속하며 적극적
인 팽창을 했기 때문에 슬라브인들이 피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지배계층은
루스인들이었고 노브고로드 공국과 키예프 공국은 노르드인들의 문화가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2) 카자크(코사크) : 우크라이나인에게 카자크는 러시아와 차별되는 우크라이나 국가의 원형을 만든
민족이지만 러시아인에게 카자크는 러시아의 변경을 개척한 애국주의의 상징인데, 러시아 돈강의
돈 카자크(쿠반 카자크) 와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의 자포로제 카자크로 대별되니 유사한 역사적
배경과 경로를 거쳐 '경계인 집단' 으로 출발했으나 결과적으로 다른 역사 과정의 길을 걷게됩니다.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자포로제 카자크” 는... 폴란드, 루스 차르국, 크림 칸국 및
오스만 제국과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자립을 추구
했으니, 폴란드는 자포로제 카자크를 폴란드 사회에 편입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겱구에는 카자크 및 왕국 내 루스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칩니다.
자포로제 카자크의 저항은 폴란드의 운명에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으며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는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카자크 헤트만국
을 해체하고 '소러시아' 관구를 설치했으니 이로써 자포로제 카자크의 역사도 종언을
맞았지만..... 자포로제 카자크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돈 카자크”는 일찌감치 러시아 치하에 편입되었고 어느정도 자치를 허용받는
대가로 차르를 위해 복무하는 특수한 군사집단으로 변모했으니 군사적 카스트가 된
것인데, 폴란드가 카자크를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이 실패한데 비해
러시아는 성공했으니 돈 카자크는 “러시아 제국의 선봉이 되어 영토팽창”에 앞장섭니다.
“돈 카자크”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는 물론 극동의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영토 개척(침략)의 선봉이었으니 러시아 내전을 거쳐 소련이 수립되는 격동기에 카자크는
'봉건제의 잔재' 로 탄압받으면서도 명맥을 계속 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기병
병과의 해체로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전통적인 사회조직과 자치권도 완전히 해체됩니다.
나치 독일에 부역한 백계 카자크들로 인해 소련에 충성한 카자크 역시 '잠재적 배신자'
로 여겨져 백안시당하고 억압받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 카자크는 러시아 영토팽창
애국주의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으며 긍정적인 면모가 부각되었으니 그 결과 카자크
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카자크 문화의 복원과 부흥이 정부 차원에서 장려되고 있습니다.
3.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1) 기원 및 형성 과정
카자크가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1240년에 키에프 공국이 몽골의 침략으로 몰락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하는 15-16세기 무렵인데, 그 전인 13세기 몽골 제국
의 키예프 대공국 침략 이전에도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에 존재했다고 여겨지며,
카람진도 카자크는 1223년 몽골군의 동유럽 침략 이전에도 존재했었다고 말합니다.
우크라이나 스텝지대는 슬라브족이 이주해 오기 전부터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알란
같은 백인 유목민족들이 정착해 번성했으며, 이후 슬라브족이 들어오니 서로 통혼
하고 슬라브족의 문화에 동화되었는데... 그들의 후손이 우크라이나인이니 우크라
이나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포로제 카자크”도 이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키예프 루스(러시아인의 키예프공국)가 13세기 중반에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몽골인들이 세운 킵차크 칸국(금장칸국) 도 얼마지나지 않아 약화되고 후신 칸국들로
분열되자, 우크라이나 일대는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스텝지대에
맞닿은 드네프르 강 유역 일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남동부 변경으로 편입됩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지역에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우크라이나 일대는
여전히 '열린 국경' 으로 남아있었으니... 이 지역은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이 맞닿는 경계로 폴란드-리투아니아 부터
모스크바 공국에 이르기 까지 동유럽 일대에서 봉건제도가 빠르게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농노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 “루스계 농민” 들을 비롯해서 봉건제의
신분제적 질서 안에 자리잡지 못한 여러 집단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변경지대인 드네프르강 하류자포로지예 지역으로 몰려들어, 현지 카자크 집단
에 합류하면서 카자크는 급속히 세력이 확대되어 확고한 사회조직으로 형성됩니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스텝 지대에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과 모스크바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등에서 정부와 지주의 억압을 피하고자,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스텝
으로 들어온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카자크 집단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드네프르
강 하류 지역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서는 그곳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합니다.
남쪽 “크림반도 타타르인”들의 침략 때문에 재산을 가지고 이동해야 하니 유목도 겸했으나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는 매우 비옥하여 농사가 쉽고 소출이 높다보니 농업도 병행되었는데,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이 계속해서 심각한 위협을 가하자 이들 '자유인 집단' 은 자체적인 무장을 하면서 농노
대신에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인 의식”을 갖춘 세대가 지도 세대로 떠오르는 세대교체가 이루어 집니다.
“자포로제 카자크”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은 1492년 크림 칸국은 키예프 사람들과 체르카시 사람이
타타르 선박을 불질렀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렉산드라스 대공은 우크라이나
카자크들 사이에서 범인을 찾아내겠노라고 약속했으나, 다음 해에 체르카시의 방백인 보흐단
글린스키 공은 오차키브에 있는 투르크 요새를 파괴했는데 칸은 이 사람들을 카자크들이라 불렀습니다.
2) 우크라이나 자포르제 카자크의 역사
자포로제 카자크가 역사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이며...... 16세기 중후반에
카자크는 드네프르강 하류를 장악한채 명목상으로 “폴란드 왕국의 신민”이지만 실제
로는 “독자적으로 운영”됐으니 폴란드 정부, 크림 칸국이나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같은 주변세력들과 교섭 또는 협력을 하거나 무력분쟁에 참여하는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몽골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발생한 힘의 공백과 이어서 벌어진 여러 “국가간의 각축전”,
그리고 동유럽 일대에서 급속히 진행된 “봉건화”라는 두 현상이 맞물리면서 카자크가
급속히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자포리자 카자크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왕국의 봉신이었습니다.
이후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카자크(러시아 남부에 자유 농민 코사크)가 반란을 일으키자
1651년 베레스테츠코에서 63,000명 폴란드군은 140,000명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의 피해도 엄청 심한
데다가 국력이 계속 소모되어 대홍수(Potop) 시기라고 불리는 쇠퇴기로 접어듭니다.
“카자크는 코사크”라고도 발음되는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남부에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으로, 드니프로강 하류와
돈강과 우랄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14세기에 드니프로강의 자포리자 카자크와 돈강
의 돈 카자크가 생겼으니 자포리자 카자크는 처음에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왕국의 봉신입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로 부터의 압력이 증가하면서 17세기 중반 “흐멜니츠키 봉기”라고 부르는
무장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카자크 수장국”을 수립했으며, 그 뒤 1654년에
페레야슬라프 조약으로 카자크 수장국은 러시아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돈 카자크는
16세기에 정립되었으며 러시아 차르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에 협조합니다.
3) 생활 및 문화
농민들은 “크림반도의 타타르족” 이 갑자기 습격해오면 요새로 피신하여 총안으로 사격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 나가 일할 때 반드시 총과 군도로 무장”을 했으니 크림 타타르족들이
끊임없이 출몰했던 까닭에..... 그들의 위험으로 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카자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에서 용병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거나 국경 지대 마을
에서 반 자치 조직을 유지하며 폴란드 정부의 통제를 받는 '등록 카자크' 와 요새화된
그들만의 수도, 드네프르강 유역의 자포로제에서 경제적으로는 궁핍하지만 자유
롭고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시치 카자크' 로 나뉩니다.
카자크는 폴란드왕의 봉신이고 폴란드군 예하 부대로 되었기 때문에 폴란드 왕국과 오스만 터키
제국과의 전쟁에서 폴란드군을 도왔는데, 폴란드 왕국도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령하면 자신들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자포로제 카자크들을 도와주었으며 자포로제 카자크는
바다에서도 유명했는데 이들은 작은 배로 흑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해 “해적”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발트해 전쟁에서도 “배를 인력으로 북방까지 운송”해 명성을 떨쳤으니 자포로제 카자크는
그리스 정교회 신앙과는 다른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정부와 종교와 가치관이 달라 갈등도
있었으나, 카자크 최대의 위협을 크림 타타르족과 오스만 제국으로 생각했기에 큰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으니 '공생 관계' 가 폴란드 정부와 등록 카자크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자포로제 카자크는 “시치(Sicz)란 요새화된 마을”에 거주했으며 “헤트만(Hetman)”이라 불리는 단장
아래 단결된 공동체로 기본적으로 평등 사회였기에, 단장은 많은 카자크들에게 존경을 받는 원로들
중에서 선출되었으며 평시에는 단장에게 농담도 하고 모욕도 했지만 전시에는 단장이 생사여탈권
을 갖고 있었으니, 헤트만은 지지를 받지 못하면 축출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종신직 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한 자에게는 누군가 대신 빚을 갚아줄 때 까지 대포에 얼굴을 마주한 채 묶어
둔다는 법이나, 물건을 훔친 자가 잡히면 마을 한복판에 묶어놓고 옆에 몽둥이를 놓아
두는 형을 선고했으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1대씩 치고 가라는 것이며, 그리고 동족 중
누군가가 “노예” 로 끌려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었습니다.
4) 자립을 위한 노력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에 의한 위협이 줄어들자 폴란드는 코사크를 종교적 문제로 박해하기
시작했으니 폴란드는 가톨릭을 믿고 카자크는 그리스 정교회를 믿었기 때문인데, 일부
카자크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지주들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이런 박해에 자유로운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은 “폴란드에 대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모스크바가 이반 뇌제의 사망후 시작된 동란의 시대가 종료된후 동부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을 때,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지도자인 보흐단 지노비 미하일로비치
흐멜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가 밀리게 되자
모스크바로 귀순하면서 체결한 페레야슬라프 회의 덕분에 종식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혼란에서 벗어난 로마노프 왕조가 우크라이나 카자크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니 폴란드,
러시아, 스웨덴 3국이 얽히는 대전쟁인 대홍수(역사)가 일어나게 되니...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로
후일 율 브리너 주연 영화로 유명해진 “타라스 불바(대장 부리바)”가 바로 이 투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카자크에 대해 자치를 인정해 주고 몇가지 의무를 수행하도록
했으니 카자크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위하여 군사력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해
주는 대신에 세금이나 부역, 농노제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나 이들의 자치
특권은 얼마 가지 못해 박탈당했고 농노와 같이 세금을 내고 부역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불만이 쌓이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으니 헤트만인 이반 마제파
가 흐멜니츠키와 같이 자포로제 카자크들을 규합해서 스웨덴의 칼 12세와 편 먹고 러시아
제국에 대항했는데 이것이 대북방전쟁이지만, 표트르 대제 집권 시기 한창 강성하던
러시아제국에 패하면서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더욱 더 박해를 받게 됩니다.
카자크(코사크)는 1707년 불라빈 난과 1708년 마제파 난 1775년 푸가초프 난이 진압된후 드니프로강
하류 자포리자 카자크가 해산당하는데, 18세기 말엽이 되면 카자크는 소슬로비예라는 특수 군사신분
을 이루니 중세 서유럽의 기사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 러시아 제국의 북방 전쟁, 7년 전쟁, 크림 전쟁,
나폴레옹전쟁, 코카서스전쟁, 러시아-페르시아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됩니다
5)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 흑해에서 해적질 : 카자크는 유목민족답지 않게 해적질에도 나섰으니...
17세기 초엔 차이키란 소형 선박을 300척 가량 건조한 후 흑해를 휩쓸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 근교까지 약탈하고 크림 반도의 노예시장을 털며 그 곳을 지키던 14,000
명의 병력을 몰살시켜 버릴 정도로 활약하는 통에 흑해는 한때 '카자크 해' 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메흐메트 4세가 보낸 오스만 제국 원정군을 패배시킨후 메흐메트가 항복을 권고
하는 편지를 보내자 어마어마한 욕설이 담긴 편지를 보내 보복했는데 다만
이들이 보냈다는 편지의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18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만
현재 남아있어 그 사본이 원본을 얼마나 정확히 필사한 것인지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편지의 판본 또한 여러 개가 있으니 현재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과정에서 과장됐거나 창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사실이야 어찌 됐든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일리야 레핀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그림을 그린 덕에 이야기 자체는 널리 알려졌습니다.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하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하느님으로 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수호자로서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카자크인들이 어떠한 저항
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4세의 편지에 대해 헤트만 이반 시르코(1610~1680)를
비롯한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술탄의 편지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정성과 마음과 혼
을 담은 답장을 보냈는데..... “자포로제 카자크들이 튀르크놈 술탄 새끼에게 보낸다”
로 시작해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할 5원짜리 10원짜리 욕설로 가득한 흉측한 내용입니다!
6) 제정 러시아로의 편입과 해체
결국 예카테리나 2세가 자포르제 카자크들의 공동체인 세치를 없애면서 러시아
제국의 직할령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흐멜니츠키도 이러한 결말을 예측하고
대홍수 전쟁 말기에 러시아와 손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자포로제 카자크는 결국 러시아 제국에 종속되게 됩니다.
몇몇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돈 카자크, 즉 쿠반 카자크에 흡수되고 러시아군에 종속되어
나폴레옹에 맞선 1812년 조국전쟁 시기에 유럽을 휩쓸며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
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민요들이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으로
전파되고 돈 카자크와 서유럽 국가에서 용맹과 잔혹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돈 카자크에 합류하지 않은 나머지 대부분의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며 돈 카자크와는 다른 길을 걸어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
했으니 시간이 흐르고 우열곡절 과정을 거친 끝에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에도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사태와 동부 우크라이나 무력개입
으로 인한 돈바스 전쟁 등, 우크라이나 중부와 서부의 친서방파 우크라이나인들과
남부와 동부의 친러파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 내의 여론이 서로 분리될 것이라
는 러시아의 생각과는 반대로 서로 같이 분노하고 합심해서 러시아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4. 영화 대장 부리바(타라스 불리바)
16세기에 오스만 터키 제국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폴란드는 기마족인 코사크
(카자크)족과 동맹을 맺고 대항하는데 코사크족의 대장 부리바(율부리너)
는 터키군을 물리치지만, 위기를 넘긴 폴란드는 동맹을 배신하고 코사크족
을 공격하니 대장 부리바는 복수를 맹세하며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버립니다.
부리바는 두 아들을 폴란드로 보내 공부시키니 폴란드에서 멸시와 차별을 꿋꿋하게
견디며 성장해 형인 안드레이(토니 커티스)는 폴란드 귀족의 딸인 나탈리아
(크리스틴 카우프만)와 사랑에 빠지는데, 나탈리아를 사랑하는 알랙스
대위가 시비를 걸어와 싸우다가 알랙스를 죽이게 되고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한 대장 부리바는 장성한 두 아들을 데리고 폴란드와의 전쟁에 나섰는데
코사크 족장 니콜라스가 폴란드와 협정을 맺었기 때문에 전쟁을 할수 없다고 반대
하지만 부리바는 폴란드군의 드보르성을 쳐들어가는데 견고한 성벽과 대포로 무장한
성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자 부리바는 성을 포위한 채 양식과 물이 떨어질 때 까지 기다립니다.
드보르성에서는 식량이 떨어져 가고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코사크족에서도내분이 생겨
절반이 전쟁을 포기하고 돌아 가버렸으며 안드레이는 아버지 몰래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 사랑하는
나탈리아를 만나지만 들켜 잡히고 분노한 폴란드군은 나탈리아를 화형에 처하기로 하자 안드레이는
나탈리아를 살리기 위해 코사크족의 소 떼를 성 안으로 몰고 와서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합니다.
나탈리아는 안드레이에게 조국의 배반자고 되지 말라고 울며 애원하지만 안드레이는
폴란드군 옷을 입고 성 밖으로 나가 소 떼를 성안으로 몰고 오다가 코사크족의
경비병에 들켜 부리바와 마주치니 부리바는 격노한느데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
듯이 이제 네 생명을 내가 거두겠다." 부리바는 아들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폴란드군은 코사크족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고 기세가 별거 아니라고 판단하자 성안의 모든
병사를 동원해 성을 나와 코사크족을 공격하니 열세에 몰린 부리바는 후퇴하자 폴란드
군은 추격해 오는데 그러나 초원으로 돌아간 줄만 알았던 코사크족의 다른 족장들이
다시 힘을 합쳐 폴란드군을 포위해 전멸시키니 전쟁은 코사크족 대장 부리바가 승리합니다.
한편 풀려난 나탈리아는 그녀의 사랑을 찾아 초원으로 달려 나왔으나 이미 안드레이는 대답 없는
주검이 되었으니 그녀는 오열하는데 동생 오스텝이 형을 고향 초원으로 데리고 가서 묻겠다고
하자.... 부리바는 이제 이 드보르의 초원도 나의 조국이니 안드레이를 여기에 묻겠다고 말합니다.
토니 커티스와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저 (타라스 불리바) 라는 영화를 찍으면서 그만
실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토니 커티스는 12년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19세가 된 크리스틴 카우프만과 재혼하지만 5년후 1968년에 이혼합니다.
그 해 1968년에 또 결혼을 한 커티스는 이혼과 결혼을 반복하며 6번의 결혼을 하는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렸고, 크리스틴 카우프만도 이후 3번의 결혼을 더 했으며
정식 결혼 외에도 워렌 비티와 에릭 클랩튼과 같은 유명 스타들과의 염문도 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