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 스님의 걱정거리 / 성재헌의 스승과 제자
구멍 뚫린 방장서도 정진하는 모습으로 일관
부지런함 대명사 양기 스님
부실한 집 걱정하는 학인에
자신을 위한 공부 소홀한 채
겉치레에 신경 쓴다며 질책
송나라 1035년, 균주(筠州) 구봉산(九峰山)에서
황제의 명을 받든 방회(方會)선사는 멀리 양기산(楊岐山) 보통선원(普通禪院)으로 향했다.
산 높고 골 깊은 곳에 자리한 터에 몇 년간 주지(住持) 자리가 비었던 탓에 그 절은 황폐했다.
법당은 기둥이 삭아 틀어지고 요사는 기와가 벗겨져 흙덩어리가 처마로 굴렀지만
시운(時運)이 기울어 황후장상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고
인적이 드물어 선량한 단월들의 보시 역시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살림살이는 궁벽했다. 구봉산을 떠날 때 사십여 명의 납자가 그를 따랐고,
보통선원에서 법상에 오른 뒤로는
명성이 천하에 퍼져 몰려드는 납자들로 절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다.
그들을 수용하기에 요사가 너무 비좁았고,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엔 양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스님은 산비탈을 개간해 부족한 양식을 조달하면서도
찾아온 납자들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도리어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외진 양기산에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박복한 늙은이를
가을비 찬바람에 이리 찾아주시니 기쁘기 그지없구려.”
스님의 일과는 정확했다.
새벽종이 치면 제일 먼저 부처님 전에 예배하고,
아침이면 큰 방에 둘러앉아 죽 한 그릇씩 나눠먹고,
보청(普請)을 알리는 종이 치면 제일 먼저 괭이를 지고 밭으로 나서고,
점심을 먹고 나면 대중과 함께 선상에 앉아 꼿꼿이 허리를 폈다 꾸벅꾸벅 졸다 하였다.
그리고 저녁종이 울리면 어김없이 법상에 올랐다.
하지만 거창한 법문도 기묘한 거량도 없이
가만히 앉았다가 그냥 내려오기 일쑤였다.
한번은 새로 온 납자 하나가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법상 앞으로 나섰다.
납자는 제방의 격식에 따라 공손히 절을 하고 물었다.
“석상 초원(石霜楚圓)선사로부터 물려받은 스님의 종지는 무엇입니까?”
스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가 찾는 종지라면 제방에 널려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특별한 종지가 없네.”
“그럼 스님께서 하시는 일은 뭡니까?”
“그저 함께 밭을 갈아 다 같이 밥을 먹을 뿐이지.”
“한 회상의 주인이 되어 법상에 오르셨으면
대중을 인도하는 말씀이 한 마디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주장자를 던지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횡설수설하면 뒤에 앉아계신 석가노인께서 비웃지 않겠나.”
신참 납자가 대뜸 쏘아붙였다.
“종지도 모르고 법문도 하지 않으실 거면 뭐 하러 법상은 매일 올라갑니까?”
신참의 당돌함에도 양기 스님은 웃으셨다.
“하지만 세상은 참 공평해. 내 아둔하고 언변도 시원찮지만
부지런함만큼은 타고났지. 나는 이 부지런함으로 못난 구석을 보완한다네.”
스님의 그 부지런함은 묘한 구석이 있었다.
대중들의 안위는 물론 오가는 객들의 안부까지 일일이 챙기면서도
당신 자신의 일만큼은 늘 뒷전이었다.
정월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겨우내 쌓인 눈을 겨우 견디던 방장 서까래가 결국 내려앉고 말았다.
흙더미가 와르르 쏟아진 방안으로 하늘이 뻐끔하게 드러났지만
스님은 방안의 흙만 간단히 치우고 어김없이 일과를 수행하셨다.
온 대중이 ‘무슨 말씀이 있으시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여느 때처럼 운력을 하고, 참선을 하고,
저녁 법회를 마친 뒤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방장으로 돌아가셨다.
그날 밤새도록 싸락눈이 내렸다.
다음날 아침 예불을 마치고도 스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스승의 잠자리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한
수좌 법연(法演)이 몇몇 고참 납자와 함께 방장실을 찾았다.
“스님, 법연입니다.”
문을 연 납자들은 송구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들이친 눈발이 바닥은 물론 침상에까지 수북했다.
급히 눈을 쓸고 납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스님, 죄송합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서까래 무너진 게 자네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건물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나의 박복함을 탓해야지.
게다가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말세에는 수미산과 드넓은 바다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무상의 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법인데 어떻게 뜻대로 만족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수좌 법연이 나섰다.
“저희가 재주는 없지만 정성껏 수리해보겠습니다.”
양기 스님이 손사래를 쳤다.
“아서게. 살림을 주관하고 절집을 건사하는 건 주지인 내 몫이지 자네들 몫이 아닐세.”
“어른이 편치 않으신데 학인들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양기 스님이 정색을 하고 꾸짖으셨다.
“지금 자네가 내 걱정을 하는가?
내 걱정은 무너진 서까래가 아니라 바로 자네들일세.
나야 소한 대한 다 지났으니 얼어 죽을 일도 없네. 며칠 추위에 떨면 그만이지.
하지만 자네들은 장차 어쩌려는가.
어린 나이에 출가해 사십 오십이 되도록 마음자리를 밝히지 못해
손발을 놀리는 것조차 자연스럽지가 못하니,
장차 생사의 거센 파도가 닥치면 그 곤욕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어쩌자고 자신을 위한 공부는 등한히 한 채 집수리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법연과 납자들은 입을 닫고 조용히 방장에서 물러났다.
그날 저녁 법상에 오른 양기 스님이 게송을 읊으셨다.
양기산 잠시 머무는 집에 벽이 성글어 /
진주처럼 흩날린 눈발이 침상에 가득 /
목을 움츠리고 남몰래 탄식하다가 /
가만히 생각해보니, 옛 사람들 다 나무아래 살았지.
2013. 02. 04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