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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조카의 딸 결혼식에 갔다. 우리 가족은 손자 녀석까지 총출동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중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척들이 와서 인사를 했다. 어느새 내가 모임의 가장 어른이 되었다. 결혼식 참여였지만 우리가 어제처럼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주말행사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어제는 그곳에서 우리 모임을 가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돌아가신 큰 형의 딸이 우리가 모인 자리에 와서 우리를 둘러보며 부럽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우리가 자리를 함께 한 것이 무척 기뻤다. 나는 함께 가자고 강요한 적이 없다. 아니 내 의견을 피력한 적도 없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모두가 참석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 모일 수 있는 것은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쫄딱 망한 집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쫄딱 망했는데도 우린 그렇게 모인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기 전에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행복한 집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유발할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으면 당연히 더 많이 찾아오게 되고, 만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의식 속에는 돈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돈이 만남의 동인이 되는 경우는 예의바르고, 공손할 수는 있어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은 없거나 의심을 받을만하다. 우리는 내가 죽어도 싸울 일이 없다. 내가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돈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돈이 없으니 내 권위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그것은 다만 내게 대한 믿음과 신뢰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와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돈 없는 행복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우리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가난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행복하다.
사실 어제 만난 친척들 모두가 힘든 인생을 살았다. 속속히 들여다보면 제대로 살고 있는 가족이 거의 없다. 인생은 苦이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거기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일 수도 있다.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믿는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나는 주님 안에서 최소한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 가족들은 나만큼 돌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런 나를 신뢰할 정도로 미치기는 했다. 내가 우리 가족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가족들은 안다. 경제가 모든 것인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돈 없는 행복을 상상할 수 없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나 역시 그것을 주장하거나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우리 가족의 사고 속에는 그것이 실재한다. 돈이 없어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돈이 없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 가족을 통해 느끼고, 그것을 만끽하고 있다.
오랜 병수발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돌아가시기 전 길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간병했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안다. 하지만 병수발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난이다. 가난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난은 거의 즉각적으로 사람들을 단절시킨다. 오죽하면 내가 가난이 노숙자들에게서 나는 냄새보다 더 독하다는 말을 했겠는가. 물론 나와 관계를 단절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을 한다. 그 생각은 내게 관계를 단절한 것보다 더 섭섭하다. 실제로 나는 그만큼 가난해졌다. 정말 동전 한 푼 없이 집에서 쫓겨났다. 욥의 부인의 말처럼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세월이었다. 특히 돈 못 버는 가장이라는 굴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도 죽음은 내 옆에서, 아니 내 귀에 속삭였다. 뛰어내리라고, 부딪혀버리라고, 빠져버리라고… 기회만 닿으면, 아니 기회에 맞게 정말 실감나는 소리로 다가왔다. 그 유혹을 거절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붙들어주시는 분이 계셨다. 그리고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오늘에 이르렀고 그렇게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물론 지금도 언제라도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것은 그런 유혹의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죽음은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는 죽음이 아니라 감사와 행복 속에 기대를 가지고 죽는 죽음이 되었다.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기에 복음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어제 단순히 결혼식에 참여한 것이었지만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에 대한 감사함으로 감격했던 시간이었다. 내 판단이었고, 내 생각일 뿐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어제 성령의 감동을 그렇게 진하게 느꼈다.
[작정하고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핸드북], 데이비드 잰슨 저자(글) · 최태선 번역대장간, 2024
내가 번역했던 공동체에 관한 책이 출판되었다. 처음 번역을 시작한 때로부터 햇수로는 3년이 지났다. 그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공동체를 향한 내 열망이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책을 번역한 후에 책모임을 하고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꿈꾸기도 했다. 주님께서 나를 공동체로 이끄시기 위해 내 삶을 견인하셨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열망도, 공동체에 관한 내 꿈도 접었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고, 나 자신의 성숙과 인격이 공동체를 이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더 깊이 깨달았다. 주님은 책의 출판을 그렇게 늦추심으로 나를 보게 하셨다. 이 역시 감사한 일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에서 나오는 비참한 결론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감동을 통해 깨닫게 된 사실이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바울 사도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나는 내 가족들에게 내가 죽어도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둘 사이에 끼여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여생으로 공동체라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 시대 한 복판에 건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나는 바울 사도처럼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더 바라기에 살아도, 죽어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오늘도 감사한 주일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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