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성
시간의 향기를 품은 쓰시마..
Tsushima Island
여행을 너무 많이 다녔거나,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며 한탄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친구들과 함께 여행에 관한 수다를 떨다보면 누구랄 것 없이 서로 경쟁하듯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한 여행의 환상을 키워간다.
혹시 그곳을 갔다 온 친구가 있다고 하면 그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영웅담 같은 그의 여행기에 귀를 기울이며 언젠가 그곳을 가보리라는 다짐을 하곤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의 방랑벽에 불을 지피는 것이며 스릴을 안겨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행은 언제나 미지에 세계에 접근할 때면 상상력을 동원 기대감에 머릿속을 총천연색으로 부풀어 오르게 한다.
그러고 나서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는 주변의 새로운 환경을 해석하느라 감각에 과부화가 걸리는 것처럼 짜릿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날은 일찍 서두르고 주위환경의 적응하며 사소한 일들조차도 두드려져 보이고, 사고는 명확해지고, 에너지는 끓어오르게 된다,
이렇게 늘 여행은 일상의 습관을 떨구어내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일면(一面)을 또 발견하게 해준다.
여행에 관한 소셜미디어에 범람하는 정보들을 챙겨 팩색(packsack)에 넣고
한번뿐인 인생 나를 위한 에코 힐링을 챙겼다 .
쓰시마 (Tsushima Island) 対馬島
그냥 가까운 데로 가서 사나흘만 있다 왔으면 좋겠다.
쓰시마에 가고 싶어!
페리호에서 섬여행 밑그림을 그리다 생각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
지금 대마도에서 걷거나 반하거나 …….
이곳에서 제대로 즐기려면 문밖을 나서야한다.
생각보다 바람은 온화하고 전경은 힐링 산소 곡창지대이다.
타박타박 걸어나 볼까?
쉬엄쉬엄 걸어도 울창한 숲이 반기고 탁 트인 바다가 시원하게 다가온다.
바다가 이렇게 자연의 향기를 품은 체 거품을 토한다.
“ 나 그냥 이렇게 살다 갈까,”
“이렇게 인생 탕진하면서 살까“
그냥 이대로 사나흘만 있다 갔으면 좋겠어. 라고 중얼거렸다.
“쓰시마”(對馬島)를 외쳤다. 그래 쓰시마이다,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않는다. 이곳에 다녀온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천천히 섬 여행.
산과 바다 그라고 바닷길과 갈매기가 함께하는 힐링로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바닷길과 섬. 미지의 세계인 섬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설렘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그 희열과 성취감, 만족감은 배가 된다.
섬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낳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짙푸른 바다위에 보석처럼 뿌려져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그 섬은 회색빛 도심에서 쌓인 심신의 피로를 말끔하게 날려버릴 수 있는 최적의 힐링 플레이스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한 시인의 시구처럼 쓰시마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섬이다.
시간의 향기를 품은 공간에 시간이 피해가듯 예전 모습 그대로 따뜻하게 반겨준다. 좁은 도로와 나무마다 느껴지는 자연이 숨 쉬는 냄새 조금만 속살을 걷고 숲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들.
첫날은 이즈하라에서 IN 히타카즈 OUT 일정을 잡았다.
섬 전체의 90%가 울창한 숲인 구석구석 소풍길 따라 작은 일본을 즐기려 길 따라 사진도 찍으며 바람도 쐬어본다.
휴식을 위한 여행이라면 대개는 이즈하라에서 머물며 작은 일본을 줄길 수 있다 . 쓰시마 역사 민속자료관을 나와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에 들렸다. 조선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황녀의 결혼 봉축이라고 하니 축복받은 결혼인가라는 의문을 받는다. 나라 잃은 설음속 덕혜옹주는 19살이던 193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인 “소” “다카유키” 백작과 결혼한다. 시댁이 대마도였던 셈이라 결혼식은 도교에서 올렸고 덕혜옹주가 대마도를 찾은 건 결혼한 후 단 한번 인사차 방문 한 것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대마도에 덕혜옹주의 결혼 봉축 기념비가 세워지게 된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61세 때 후궁에 몸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7살 때 약혼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일본은 덕혜옹주를 13살 때 도쿄로 강제유학을 보내 고종과 때여 놓는다. 식민지의 공주라는 괴롭힘으로 정신 질환까지 얻게 된다. 조선과 일본은 한나라라는 內鮮一體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마도 도주의 세손과 결혼 시켰다. 강제결혼을 한 덕혜옹주는 결혼 전부터 앓았던 정신질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봉축 기념비
(李王家 宗伯爵家 御結婚奉祝記念碑)”
대마도내 거주하는 한인들이 세운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약 2만 명의 동포들이 대마도로 끌려가서 숯굽는 일, 군사시설 건설 등의 강제 노역을 당한 우리 동포들이 옹주의 대마도 방문을 환영하기 위하여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를 서기 1931년 10월 팔번궁신사 경내에 건립했다.
서기 1955년 6월 다카유키와 덕혜옹주가 이혼을 한 후 대마도 일본인들은 야박하게도 이 기념비를 뽑아, 금석성 풀밭에 내동댕이쳐 끌어내렸다.
지금 서있는 기념비는 서기 1999년 7월 14일 부터 부산 대마도 직항 페리호의 취항으로 한국관광객이 모여들자 방치해 둔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부족한 관광객에게 볼거리 하나 더 제공하여 돈벌이를 해야겠다는 일본인들의 얄팍한 속셈으로 관광거리 목적으로 2001년 11월 10일 되세운 것이다.
외롭게 서 있는 덕혜옹주 기념비는 덕혜 옹주의 쓸쓸했던 삶과 닮아 보였다. 파란만장한 삶이 담겨있는 덕혜옹주 봉축기념비를 뒤로 하고 가네이시 성 정원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가네이시성은 17세기 때부터 대마도 번주 저택이던 정원으로 유적을 복원한곳으로 산기슭에서 나오는 물을 배수시키는 구조로 인공섬이 있고 주위에 연못을 만들었다. 일본 본토와는 다른 디자인으로 가치가 있다고 도 한다.
자료관 오른 쪽으로 산길을 따라가면 산 높이 600m안 되는 아리아케산 산책로가 있다. 정상까지는 약 2시간 정도 오르는 코스이다. 산 정상에는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만든 성터이지만 돌담만 있을 뿐이다. 힘들게 오른 산에서 이즈하라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가장 번화한 이주하라 항구마을은 대마도를 여행하면서 반드시 보게 되는 곳이다. 쇼핑몰과 맛집이 있기 때문이다. 항구도시 멋을 물씬 풍기는 이즈하라마을 골목 곳곳을 누비는 즐거움도 있지만, 한국역사의 흔적을 찾아 가다보면 더욱 의미가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게 한다.
대마도 역사민속자료관
고려문과 조선 통신사의 비
하치만궁 신사에서 나와 왼쪽 마을로 들어서서 10여분 정도를 걸어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려문도 있다, 고려문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문이라고 한다. 조선에서 통신사들이 들이 오면 이 문을 통과해 맞이하였기 때문이란다.
이주하라 항구 마을 중앙에 있는 대마역사 민속자료관은 대마도의 역사적인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눈에 띄는 것은 한반도 양식의 세향동검과 청동거울,백제,가야등에서 전래된 청자와 불상, 17m 길이의 조선통신사 행렬도등이 있다. 역사자료관을 나오면 근처에 조선 통신사비가 우뚝 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조선 통신사를 실제로 보내기 시작한 것은 1429년 세종 때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구가 우리나라에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제를 요청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 역할과 바쿠후 쇼군(실질적이 나랏일을 맡고 있던 장군)즉위를 축하사절로서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일본에 간 통신사와 일본 관리들은 학문이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통신사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1811년까지 12번의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외교사절로 파견했는데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가 한 번 올 때 움직이는 인원이 300-500명 정도였단다. 대마도 번에서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들인 비용이 그 당시 돈으로 100만 냥 정도였다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5580역 정도가 된단다. 일본이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3년 정도 준비를 했다고 하니 비용과 기간을 헤아려 보니 우리나라 통신사는 귀빈중의 귀빈이었던 모양이다.
이즈하라 수선사(슈젠지)
이즈하라 시내 동남부 원성산 자락 주택가에 자리한 수선사는 조그만 왜식 사찰이다.
겉으로 봐서는 딱히 고색이 느껴지지 않으나 백재 말기인 656년 백제 비구니인 법묘라는 분이 세운 암자였다고 한다. 초대 주지부터 10대까지 백제비구니가 절을 관리했다고 하며 16세기부터 비구승이 머물면서 수선암이 되였다가 명치 유신때 부터 수선사로 변경 되였다고 한다,
그 수선사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서 있다.
최익현은 어떤 분인가?
최익현(崔益鉉, 1833~1906, 면암.勉庵) 선생은 경기 포천 출생으로 조선 말 학자이자 관리였으며 애국지사였다.
대원군을 탄핵(彈劾)하여 제주도, 흑산도로 유배된 적도 있으며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 구한말 제자인 임방찬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항쟁하다가 왜군에게 체포, 대마도에 억류 단식사(斷食死)로 순직하였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일본 놈이 준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여 굶어 죽었다고 전해 오는데, 사실은 굶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이곳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한국인의 기지를 일본 사람에게 알리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여 조선을 향하여 절하고 한국인의 학자다운 풍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일인들조차도 면암선생을 모두 존경하였다고 한다.
대마도의 아름다운 풍경 볼 수 있는 전망대
대마도 최북단 와나우라의 한국전망대는 대한민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전망대로 부산까지 49.5km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전망대 뒤로 작은 박물관도 있어 산교육적인 장소로 활용할 수 있다.
날씨가 좋고 구름이 없다면 부산시의 거리가 보인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라 휴대폰을 켜보니 우리 휴대폰이 그대로 통화가 된다.
이전망대는 설계부터 우리나라 학자들이 자문을 하고 재료도 우리 것을 가져다 사용하여 한국에 있는 전망대에 오른 듯한 느낌을 준다.
장대한 바다와 고기잡이배들이 불빛 등을 켜 놓은 채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매년 6월이면 전망대 주변으로 수국이 만발하여, 바다와 들꽃을 보면서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 센보마키 산의 언덕에는 대마도 북부 최고봉인 미타케와 함께 해협을 항해하는 배들이 목표지점으로 삼았던 산이며, 664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동북지방 등에서 징발되어 기타규슈의 요지 등을 경비하던 사카모리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풍차가 돌고 있는 센보마키산은 산책하기엔 험난하여 가지 않는 것이 좋다.
풀로 뒤덥힌 곳이라 이동하기도 쉽지 않고 안내표지가 작아 겨우 찾을 수 있다.
보리와 메밀 씨를 천 섬(千儀 :센보)정도 뿌릴수 있는 웅대한 산이라는 의미의 일본어로 센보마키야마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시대 일본수군이 백재의 요청으로 중국 당나라와 싸웠지만 패배한 다음해에 적들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봉화대를 설치한 곳이 지금의 센보야키산으로 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한눈에 펄처저 이곳에 봉화대를 설치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산위에는 최근에 600kw 풍속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바다와 대한민국이 보이는 조망이 장대하다.
한번뿐인 인생 나를 위한 힐링 로드
"You only live once. "
지난해에 가장 핫한 키워드는 바로 YOLO 이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니 지금 이 순간을 줄기라는 뜻이다.
시간이 모자라도 함께 떠날 사람이 없어도 꿈꿔왔던 여행만큼은 반드시 떠나는 시간을 챙겨보자,
돌아 갈 수 없는 세월을 걷지만 기억하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