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해서 무얼 얻는가? / 도원 스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집착에 얽매이게 됩니다.
어떤 이는 집착하는 자신을 경계하면서도 순간순간 그 경계심을 놓치며
집착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길 바라는데,
이것도 큰 집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집착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제일 먼저 집착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겨봐야 합니다.
집착하게 되면 결국 자기 마음의 골만 깊어집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집착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나무관세음보살을 자꾸 불러보세요.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수시로 그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관세음보살을 부르라 이 말입니다.
집착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그 때는 상대가 변해도 변한 줄 모릅니다.
상대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했다고 해서
원망하면 집착을 벗을 수 없습니다.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더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이해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이만큼 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못해주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 반드시 양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됩니다.
나한테 안 맞아도 양보할 줄 알아야 화합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죄 가운데 가장 나쁜 죄가 화합해서
잘사는 대중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욕심 없이 사람을 대해야 하는데, 욕심을 갖고 대하니까
제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저마다 욕심을 부린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보면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웃을 생각하지도 않고,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든 알 바 없다는 식이에요.
대가도 없는데 굳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참음은 대가없는 참음이 돼야 해요.
극기라는 말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조정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화를 삭이고 표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신경질 부린다고 무엇이 달라집니까.
신경질 부리는 순간 나를 속이는 것입니다.
노력한 대가만큼 받아서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설혹 대가보다도 덜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을 저축하는 것이니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오늘 업을 지으면 내일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말은 복을 잘 지어서 그 결과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좋은 인(因)을 짓지 않고 어떻게 좋은 과(果)를 바라겠습니까.
좋은 인을 짓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을 착하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복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복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은 자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 세상에 벌어질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내가 있음으로 해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가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한 것이니,
좋고 나쁨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내 업으로 여기고 그 업을 녹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능히 참는 것을 보살심이라 하고,
참지 못하면 중생심인 것입니다.
그냥 참는 것하고 욕된 것을 참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욕된 것을 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까지도 능히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욕입니다.
그리고 인욕은 하심할 줄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
경계에 부닥치면 가르침을 잊고 본성이 드러나기 쉽습니다.
그때마다 다시 챙겨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전부 남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늘 땅 물 불 공기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나를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니,
그 은혜가 막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마움을 몰라요.
왜 자연재해가 많아졌겠습니까. 아끼고 돌봐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사람 인(人)자는 서로 더불어 의지하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인데 혼자만 잘 살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 광활한 천지 속에 나 혼자 있다고 해봐야 살 수 없습니다.
이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거지요.
그렇게 보면 고맙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에게 고마운 생각을 갖는다면 불평할 게 없지요.
내 생각과 행동이 남에게 어떤 피해가 가는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이 많이 부족합니다. 교육으로 이것을 극복해야 하는데,
요즘은 상급학교 진학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느라
인성교육은 무시하고 있어요. 그러니 인성이 메마르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법당에서 법문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법문이 끝나고 공양 간에 가면 딴 행동을 합니다.
불과 몇 분도 안돼서 법문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그럴 바에야 법문을 왜 듣습니까.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왜 들으려 합니까.
법문이 너무 흔합니다.
어려운 속에서도 법문을 들으려는 마음이 일어나야
진짜 법문이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말을 해준다고 해서 법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들은 대로 따르려고 노력해야 법문인 것입니다.
사경을 왜 합니까. 사경을 하면 공덕이 되고
공부가 된다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경을 하면서 온갖 욕심이 머리속에 꽉 차 있으면
공덕이 되고 공부가 되겠습니까.
법문이 되고 안 되고는 말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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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원 스님은?
도원 스님은 192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41년에 파계사에서 고송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51년에 동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월정사와 파계사 주지를 거쳐 학교법인 능인학원 이사장과
조계종 선관위원장 및 중앙종회의원, 동국학원 이사를
지내는 등 종단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 후 1997년부터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부터 2004년 3월까지는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는 원로의원으로 있으면서
파계사 대비암에서 10년째 주석해오고 있다.
강직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신도들을 대상으로 경전 강의를 하고 있을 정도로
신도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