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21 수정
임천택의 증손녀 아자리아 대전 한남대 유학오다 (천도교회월보 2013.3월호)
2013. 8. 30 방영된 KBS파노라마 <아자리아의 아리랑>
http://www.tudou.com/v/FP0jzv2yitM/&resourceId=0_04_02_99&tid=0/v.swf
케이비에스에서 아자리아와 동행하여 쿠바 각지의 한인 유적지 취재. 임은엽, 임은희, 은석, 임은조의 부인 등을 취재. 마탄사스 산카를로스 묘 취재=김귀희 묘에는 십자가, 임천택묘에는 십자가 표시없음,
Azaria Lim was the first student from Cuba to study in Korea
아리랑티비 2014.1.03일 방영 / 기숙사 생활, 한국생활, 이민사 등 조명 함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4744
배영옥 시인의 글에서
[한국과 쿠바는 아직 미수교 상태다. 그럼에도 쿠바 전역에는 대략 1100여 명의 한인 후손이 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쩌다 이들은 먼 이국에서 이름도 얼굴도 생소한 쿠바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호세 마르티 문화원의 직원인 세르히오 임은 독립운동가인 임천택의 후손이다. 한인 3세 화가인 알리시아 데 라 캄파 박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유명한 화가다. 이들은 1921년 멕시코에서 증기선을 타고 쿠바를 향해 떠나온 한인의 후손이다. 최근 활발해진 한·쿠바 민간 차원의 교류에 이곳 한인사회는 무척 고무되어 있다. 2014년 8월 아바나의 미라마르에는 한인 후손 문화회관(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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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5/07/06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에서 2013년 9월 이곳으로 파견돼 한국어 강좌 강의 계획표를 짜고 배울 학생을 선발한 김 교수는 "수료생들은 기본 생활에 필요한 한국어 학습 능력을 키웠다"면서 "학생들이 의사를 우리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 가르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 강좌가 자리를 잡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아바나 무역관의 서정혁 관장이 수료식에 참석해 축사에서 학생들의 성공을 기원했다.,,,,,,,,,,,,,,,,쿠바 이민 한인 1세로 일제강점기 치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큰 힘을 보탠 임천택 선생의 증손녀인 베아트리스 본데스 데 오키 루이스는 "내 뿌리는 한국에 있다"면서 "한국 문화와 역사를 늘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임천택(1903-1985) 선생 관련한 자료는
일제시대에 발행된 [천도교회월보]나 [신인간]에 보면 종종 등장한다.
청수 모시는 것, 시일예식, 성미실행 하는 것 등 천도교 신앙을 하는 천도교인을 한번도 본적도 만난 적도 없었지만,
이역만리 쿠바에서 천도교신앙을 독실하게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도교종리원(교구)까지 설립 인준을 받으셨다.
기적이 있다면 이것이 기적!
쿠바의 천도교 관련 자료는 1930년~1937 사이의 것만 남아 있다.
[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C14T/205 쿠바의 천도교]
"임 선생은 1930년 3월 카르데나스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개설해 교리사업을 펼치며 민족혼을 심기 위해 애썼으나 1937년 천도교 본부(중앙교회)의 최린 일파가 친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분노해 종교시설을 폐쇄하고 감리교인이 됐다."
- 부산일보 2003.3.28일자 [독립운동과 임천택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C14T/201 ]
1937년 이후 천도교당을 패쇄했다는 기록은 사실이나,
임천택이 감리교인이 되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임.
임천택 은 1938~1955까지는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의 혼란기에는 한국과 연락을 할 수 없었고
1956년부터 다시 천도교 중앙총부와 연락을 재개하며
성미 납부, 포덕 백년 축하금, 신인간지-한국사상지- 동학회보-천도교개요 등 잡지 책자 등을 통해
천도교신앙을 평생 유지한다.
이러한 사실은 1956~1960년간의 신인간지에 상세히 기록되어있고,
평생 천도교신앙을 했다는 것을 그의 가족들이 증언하고 있다.
임천택 후손 등 관련 참고자료
임천택 쿠바종리원장이 딸 임은엽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C14T/198
쿠바혁명 전후의 한인사회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C14T/200
[쿠바이민사_ 임천택 선생의 따님이 지은 책 . http://gino.khan.kr/114
임천택 과 천도교중앙총부는 1956에 다시 연락됨.
1957년 7월 신인간지에 다시 등장
1959.12 신인간지에 성미 천도교백년 기금 등 기사.
1960. 12 임천택 기고 기사.
1961년 이후에는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한국-쿠바 외교단절로 연락 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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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추가 2015. 7. 2
700여 한인후예 권익 대변·한글학교 운영
20060124T110756 | 수정시간: 2009-01-11 [19:20:33] | 32면
그의 장남인 쿠바 동방대학 경제학 교수인 넬슨 장 림(43)씨는 1년 전부터 경희대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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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ovegen.co.kr/career/young1829/fc_20060102/
2015.7.15 추가
그의 이름은 넬손 임. 한인 이민 3세로서, 현재 경희대학교 국제교류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는 1905년, 최초의 조선 이민자들 중 멕시코에서 일부 쿠바로 유입된 이민자의 후손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외관상 모습은 여느 한국인 중년 아저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야 한국을 체험하기 시작한 그가 말하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중년 아저씨의 지극히 일상적인 그것과 한국과 쿠바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다르다. 웃어른들로부터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한국을 이제 그는 오감(五感)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는 쿠바의 산티아고 데 쿠바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이러한 그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경위는 사실 간단하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는 그의 가족사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쿠바의 한인 사회에서 주요한 인사였으며, 쿠바 사회에서 한인의 위치를 신장하고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이러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그가 자연스레 터득한 것은 한국계 쿠바인으로서의 정체성. 이러한 정체성의 끈을 이어받은 그는 한국 행과 한국에 대한 공부를 선택하였다.
물론 그가 한국에 오기까지 여러 제반 상황들도 협조적이었다. 재외동포재단의 후원을 통해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었으며 그가 재직하고 있었던 산티아고 데 쿠바 대학교의 협조도 그가 한국 행을 택하는데 일조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우는 목적은 그가 한국에 온 이유만큼이나 간단하다. 한국어를 배워서 다시 쿠바의 한인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는 것. 한국에 오기까지 거의 할 수 없었던 한국어도 이제 웬만큼 읽고 쓸 수 있단다. 매일 아침 3시간씩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으며 이처럼 간단 명료한 학습의 목적에 최근 가속도가 붙어, 그는 하루가 다르게 ‘한국어’로 ‘한국’을 이야기하고 이해한다. 한국에서의 배움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하는 쿠바의 한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에서 그의 한국, 한국어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쿠바의 상호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에게, 한국에서의 생활은 언어만을 배우기에는 아까운 듯 하다.
그는 틈이 나면 서울의 시내로 종종 외출을 하는데, 경복궁과 같은 오래된 서울부터 코엑스 몰과 같이 첨단의 서울까지. 모두 그에게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경복궁과 경복궁 내부의 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을 통해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단다. 또한 전자제품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아 용산 전자상가에 갔었는데, 상가를 가득 매운 물건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쿠바에서는 가전제품이 귀하고 쉽게 살 수 없기에 더더욱 별천지처럼 느껴졌다는 그, 그에게 한국생활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의 한국 체류생활에도 예상치 못한 아쉬운 점 역시 있다. 무엇보다도 비싼 물가.
“음식의 가격은 비슷하지만, 공산품 특히 옷의 가격은 매우 비싸네요.”
또한 그는 친구를 사귀기 조금 어려운 점도 어려운 점으로 들었다. 현재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외국의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학부 대학생 나이인지라, 자신을 조금은 어려워하고,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 점 역시 친구 사귀기 힘든 부분이라 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국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으로 말문을 선회한다. 한국 날씨, 한국 음식도 너무 잘 맞고, 전체적인 생활환경이 만족스럽다고 답한 그는 화제를 한국의 구체적인 환경에서 한국인(人)에 대한 인상으로 옮겨갔다.
“한국인은 쿠바인에 비해 훨씬 규칙을 존중하고 진솔한 면이 있지요. 권위를 인정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한다는 점이 매우 보기 좋아요.” 기숙사 내에서의 금연을 다들 준수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에서 합리성을 보았다는 그. 그에게 한국은 더 이상 이방인의 딴 세계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 살아 숨쉬고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생동하는 터전이다.
앞으로 박사과정도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힌 그에게, 그러면 한국에서의 체류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가족들이 섭섭해 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멋쩍은 얼굴로 아내나 아이들이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가족들이 어느 정도 걱정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가족들 모두 대체로 자신의 꿈과 목표를 지지해 주는 편이라는 답했다.
쿠바의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쿠바인인 그에게, 두 나라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그의 꿈과 목표의 미래시제를 기대해 본다.
글,사진_정연욱 / 10기 학생기자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03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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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akis.or.krwww.lakis.or.kr/board/read1/18/35
헤르니모 임에 대한 추억 / 부산외대 서성철
첫댓글 참고자료 중 임천택의 따님 임은조의 인터뷰에 보면 평생 천도교를 신앙했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천도교간판 내리고 감리교했다는 신문기사와는 다르다. 어느 것이 바른 것인지 사실관계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2013년 2월 26일 입국한 아자리아 씨는 한남대 영어전용 특성화 단과대학인 린튼글로벌칼리지(Linton Global College)에서 글로벌커뮤니케이션(Global Communication) 분야를 전공계획 /칼리지 전화 042-629-85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26년부터 국내와 연결하여 천도교(天道敎)의 사상과 교리를 받아들였다. 특히 천도교를 확산시키려고『신한민보(新韓民報)』에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사상과 천도교 교리를 실었다. 1930년 3월 23일에는 쿠바에서는 처음으로 카르데나스에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을 설립하였다. 1933년에 국내의 천도교 청년당원이 된 뒤, 이듬해 3월 8일에는 ‘덕암(德菴)’이라는 도호(道號)와 도첩(道帖)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7년에 최린(崔麟, 1878∼1958)의 친일 행각을 전해 듣고는 다시 개신교 감리교인이 되었다>
...끝부분 < .....>은 잘못된 기록. 근거: 신인간 1959.7, 12월, 1960년 12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