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나직 남실거리는 쪽빛 속삭임
- 윤삼현 동화집 ‘백년을 기다린 대나무꽃’ .(김민하, '새책에 말 걸기' 무등일보사 발행 <아트 플러스>, 8쪽, 2017.7.19)
아동문학평론가이고 시인인 윤삼현 동화작가가 동화모음 ‘백년을 기다린 대나무꽃’을 냈다. 짤막한 9편의 단편들을 따라가면 그 끝에 어김없이 돋아있는 희망을 만날 수 있는데, 이 희망 속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작가의 마음이 어른거린다. “소박한 오이비누냄새” “구수한 흙냄새” 풍겨나는 말갛고 상냥스런 마음이.
동화집은 우선 소재가 다양하다. 주인공으로 시골버스, 꽃바람, 철마, 두루미가 나오고, 눈 먼 소녀, 키 작은 장애우, 소록도 한센인, 결손가정 소년이 등장한다. 작가가 눈여겨보는 대상은 대부분 낡아빠진 사물이거나 소외된 이웃들이다.
표제작 ‘백년을 기다린 대나무꽃’은 선이 굵은 동화다. ‘익호장군’에서 알 수 있듯, ‘충장로’ 거리 이름의 주인공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이 작품의 모델이다. 욕심 없고 곧은 장군의 성정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그만의 똑똑한 빛깔과 미더움”을 가진 갑옷참대를 함께 그렸다. 대꽃은 억울한 장군의 죽음을 끝이 아닌 미래의 가능성으로 열어둔 희망의 상징 같다.
철조망에 다리를 다친 두루미와 녹슨 철마의 만남을 통해 눈 먼 소녀와 기관사 한씨의 추억을 기억해내는 서정성 짙은 단편 ‘철마와 소녀’, 삼촌과 애인의 헤어짐을 견우직녀에 빗대 이야기한 ‘칠석날 밤’. 두 작품에는 분단의 아픔이 들어있고, 바람과 소년의 삶을 전해주는 ‘소록도의 꽃바람’에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설움이 담겨있다.
이밖에도 이웃의 정이 묻어나는 ‘시골 버스 3001호’, 강력계 형사의 선함이 도드라지는 ‘분무기 형사’, 엄마를 기다리는 ‘과일집 아저씨와 곤줄박이’, 상처를 딛고 성장한 ‘가을비’, 놀림 받아도 힘차게 일어서는 ‘뿡뿡이 언니’는 서로를 돌아보고 아픔을 극복한 일상을 그린 따뜻한 작품들이다.
걸출한 역사 인물과 속을 비운 참대숲, 집 나간 엄마와 길 잃은 곤줄박이, 남북 분단과 칠월칠석 설화, 녹슨 철마와 뒤처진 두루미. 단편들에 복선처럼 깔아놓은 유사한 상황들은 시적 비유 같다. 특히 깔끔한 구성력과 윤삼현 특유의 섬세한 문체는 동화에 생기를 더한다.
동화들은 전라도를 배경으로 향토적 정서가 가득하다. 오래 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과 지금 여기 숨 쉬는 사람들이 낯익게 느껴지는 건 사투리 때문일까. 대사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사투리는 넘치지 않게 정겹다.
또, 단편들을 들여다보면 주고받는 마음들이 배어나온다. 이것은 속삭임처럼 나직한데, 우정, 기개, 용기, 그리움 같은, 우리가 보듬고 싶은 것들이 그 사이에서 쪽빛으로 남실거린다.
“대나무는 뿌리가 아주 강해.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대나무는 뿌리 뽑힐 일이 없다네. 그 질긴 뿌리가 분명코 푸른 참대숲을 다시 일구어 놓을 거네.”(‘백년을 기다린 대나무꽃’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준 눈 먼 소녀도 어딘가에 필시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늙은 철마에게 또 하나의 그리움이 돋아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낡고 닳는 일은 두렵지만 늙은 철마는 힘찬 기적소리와 그리움을 키워가기로 마음먹었다.”(‘철마와 소녀’에서)
역사든 개인의 삶이든 고단함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두텁게 쌓인 어둠의 더께를 털고 작가는 생생한 상상력을 덧입혀 그 속 어딘가에 있을 희망의 틈을 끝내 찾아내 보여준다.
순박한 자연의 향기와 지혜로운 삶의 덕목이 촘촘히 포개어 있는 윤삼현의 ‘백년을 기다린 대나무꽃’. 비쩍 마른 세상을 촉촉이 적셔주는 푸른 빗방울 같은 동화집이다. (20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