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창조 설화 - 에누마 엘리쉬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는 고대 바벨론의 가장 대표적인 창조 서사시로서 우주론적인 이 서사시의 첫 구절 및 제목이며, 그 뜻은 “저 높은 곳에서 신들이 있을 때”이다. 이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는 질서의 신과 혼돈의 신 사이의 투쟁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무질서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고 승리한 창조의 신 마르둑(Marduk)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각 토판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판 1 : 우주의 생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신의 족보가 있는데, 압수(Apsu, 담수)와 티아맛(Tiamat, 바닷물)의 결합에 의한 물의 혼돈으로부터 많은 신들이 탄생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 신들이 탄생함으로써 점증되는 소란으로 압수의 휴식이 방해되자 압수는 어린 신들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압수의 아들들 중의 하나인 에아(Ea)가 압수를 살해하고, 이러한 위기 가둔데서 또다른 일단의 신들이 탄생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마르둑(Marduk)이다. 그러자 여신인 티아맛은 남편 죽음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킹구(Kingu)를 부추키게 되고, 에아와 신들은 티아맛과 킹구와 맞서기를 두려워하게 된다.
토판 2 : 이에 에아는 그의 조부 안샤(Anshar)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나, 안샤는 마르둑이 영웅이라 말한다. 그리고 에아는 마르둑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게 되고, 마르둑은 출전에 앞서 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신들에게 만일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자신을 제일 높은 신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토판 3 : 마르둑의 요청이 수락되어진다.
토판 4 : 신들은 마르둑을 위해 왕좌를 건립하고 전 우주를 다스릴 왕권을 주었으며, 안샤의 말대로 파괴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마르둑에게 홀과 보좌와 왕의 조끼를 주고 꺾을 수 없는 무기를 주면서 티아맛을 물리쳐 달라고 한다. 마르둑은 티아맛과 격렬한 싸움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고 티아맛을 죽인 후 그 몸을 양분하여 그 반쪽으로 하늘을, 다른 반쪽으로 땅을 만든다.
토판 5 : 티아맛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마르둑은 별과 달, 태양 등의 각종 광명체를 궁창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르둑은 신들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토판 6 : 마르둑은 자신들을 섬기게 할 목적으로, 킹구를 죽여 그의 피와 흙을 혼합시켜 룰루(Lullu)를 만들고 인간이라 부른다. 그리고 다른 신들은 마르둑에 의하여 구원을 얻게 되자 마르둑을 위하여 신전을 건설하고 신들은 각자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토판 7 : 마르둑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이름 50여 가지가 열거되고 바벨론의 최고의 신으로 승격되며 맺는 말로 끝맺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바벨론의 에누마 엘리쉬는, 우주의 기원이나 형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만들어진 작품이라기 보다는 바벨론의 정치적 우월성과 함무라비 대왕의 정치적 부상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형성을 신화적인 용어로써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창조 설화라 보는 것이 좋겠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우주론적 질서와 혼돈의 전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매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년축제에서 재연되었다. 비록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제의적 재연을 통하여 창조 신 마르둑이 있는 바벨론이 우주의 중심지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원전 1792-1750년경, 제국을 건설 중이던 함무라비 왕은 바벨론을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만들었다. 또한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둑을 신들의 회의(Divine Assembly)의 우두머리로 등극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군사적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함무라비 왕은 메소포타미아의 고전적 창조 이야기인 에누마 엘리쉬 이야기를 개편하여 발간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