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역시 광산구에 고봉로라는 길이 있고
광산구 광곡길 133에는 황소가 누운 모양을 닮은 백우산기슭에 월봉서원이 있다
" 임금님은 이익을 독점하지 말고 반드시 백성과 이익을 함께 해야 한다 " 고 말씀하신
광주의 고고한 학자이신 고봉 기대승 선생님을 기리기위해서다
조선시대 사화는 세상사의 혼란에 고향으로 낙향하는 사림들이 많았으니
광주의 명문가 였던 기씨 성의 가문도 기묘사화를 피해 광주로 내려와서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 최고의 학자에 이름을 올린 고봉 기대승 선생님이 태어 난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고봉 선생님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해서
고통받는 백성을 구하고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성리학의 근본에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그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성리학의 시조인 주자의 주자대전을 교과서로 삼고 학문을 연구했는데
고봉 선생님은 31세 때 홀로 공부해서 백권이 넘는 주자대전의 핵심내용을
일일이 주석을 붙여 성리학의 안내서로 불려지는 " 주자 목록 " 을 완성하게 된다
학문적 성과를 이룬 젊은 선비 기대승 선생님 출연에 세상이 술렁일 정도로 놀라워 했다 한다
그후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 선생님은 32세로 성균관 대사성인 이황 선생님을 찾았고
그 때부터 서로의 학설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주제는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성리학의 주 개념인 사단 칠정이였다
사단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을 말하고
칠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말한다
나이가 26세 차이가 났지만 8년에 걸친 두 분의 학문적 논쟁은
120 편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자신들의 학문을 발전시켜 나갔고
순수한 사상 토론은 월봉서원 장판각에
이황 선생님과 기대승 선생님이 편지로 주고 받았던 학문 논쟁이 목판 형태로 남아있다
13년 동안 편지를 두 분 께서는 주고 받으면서도
얼굴을 대하기는 평생 4 번 뿐이였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경쟁자이자 스승과 제자로
이황 선생님이 돌아 가시기 한 달 전까지 계속 되었다 한다
고봉 선생님은 명종 9년부터 선조 5년까지 임금님 께 학문을 가르치면서
함께 정치 토론을 하는 경연관으로 참여 했고
민생을 강조하면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한다고 했다
임금님 께서 정치만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근본이 없는 것이고
마음만 있고 백성에게 균등히 분배하는 정사가 없으면
혜택이 아래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 하신 고봉 선생님..
기대승 선생님의 올 곧은 언행에 감동한 선조대왕의 명으로 지어진
" 논사록 ( 기대승 선생님이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을 모은 책 ) "은
조선 임금님들의 교과서롤 불리게 된다
고봉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 성군의 정조 대왕 께서는
논사록을 읽어보시고 크게 감명을 받으신 후에
"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선생님의 마음 " 을 기려
하사한 것이 있으니 바로 월봉서원과 빙월당이다
기대승 선생님을
" 통유( 채우는 단계를 지나 비움으로써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지이다
부분적으로 옳아도 전체적으로 틀릴 수 있다 ) " 라 부른 율곡 선생님과 이황 선생님 말씀처럼
인간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꿈 꾼 고봉 선생님의 정신을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것이 마음의 바램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