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헤아림
2023. 7. 23. 주일오후예배
저는 이 시간 ‘성도의 헤아림’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받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의 판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 우리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심판이란 영어로 judgement인데 판단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니라 오직 듣는 대로 판단하니 나의 판단은 그 원하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함을 헤아려서, 아버지의 판단을 헤아려서 하시는 고로 내 판단은 의로우니라! 주님도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신다고 했는데 주님과 함께 길가는 우리로서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제 갔던 길을 똑같이 가더라도 반복되는 일상 같지만 우리 성도의 길은 늘 주님과 함께 새롭고 산 길입니다. 주님이 빛을 주셔야만 우리가 걸어갈 수 있고, 주님이 판단해주셔야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몸 된 교회가 이번 7월의 묵상과 8월의 묵상을 주님 모시고 해보자고 했습니다. 각 가정과 소대마다 7월의 묵상을 거의 다 마친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 일주일 남았습니다. 일주일의 시간 알차게 빈들의 시간 가져주시기를 바라고요, 8월에도 어떻게 하면 주님과 함께 시간들을, 빈들의 훈련을 받을 것인지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자기 소대와 각자에게 맞는 빈들의 시간 속에 훈련에 열심히 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군인이 훈련 받을 때 땀을 적게 흘리면 전쟁 때 피를 많이 흘리고요, 훈련 때 땀을 많이 흘리면 전쟁 때 피를 적게 흘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사무엘하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과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세는 압살롬에게로 기울었고,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때 주님 앞에 헤아려보니까 주님께서 한 사람을 그곳에 심으라고 마음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충신들은 다 따르면서 함께 고난에 동참하겠다고 했는데, 그중에 아렉 사람 후새가 있었습니다. 후새가 왕이 가는 길에 함께 하겠다고 하니까 다윗은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러서 당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겠소”하고 부탁을 합니다. 후새는 다윗의 진정성을 알기 때문에 그 예루살렘 성에서 압살롬을 기다립니다.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다윗이 어련히 알아서 생각해서 했을까 다윗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감지한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의 환호를 따라서 예루살렘을 접수했습니다. 그때 압살롬의 책사, 그를 돕는 모략꾼이 있었는데 아히도벨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당시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견할 정도로 그 계략이 뛰어났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나에게 이 밤에 다윗을 쫓아갈 수 있도록 군사 일만 이천 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뒤쫓아가서 다윗 왕 한 사람만 쳐 죽이고 따르는 백성들은 왕에게로 돌리겠습니다.” 압살롬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 말이 참 지혜롭다고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지요. 압살롬이 생각할 때 자기 아버지의 친구인 후새도 부릅니다. “아히도벨은 여차여차히 말씀하고 있는데 당신은 혹시 하실 말씀 있습니까?” 그때 아렉 사람 후새는 ‘이 때를 위해 내가 남아있었구나’ 생각하면서 마음으로 주님을 더듬고 헤아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다윗은 전쟁의 용사가 아니요. 그의 신하들은 뛰어난 전쟁술과 용병술과 가지고 있으니 전쟁을 치루다보면 많은 피해가 발생하니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백성들을 모으고 왕이 선두에 서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인해전술로 나가십시오. 그러면 다윗은 패할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을 모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어찌 보면 정말로 미련한 방법이지요. 그런데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세의 말이 더 좋다고 그 길을 따르고 맙니다. 그래서 아렉 사람 후새는 지금 요단을 건너지 않고 나룻터에서 머물고 있는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빨리 이 밤에 요단을 건너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다윗에게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것이지요.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 생각하면 다 쉽습니다만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또, 일이 진행될 때에 참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한 오 년 전에 장 목사님이 섬기시던 중국 운남성에 두 조카를 데리고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애초에 계획에는 없었지만 잠깐 가고자 했던 시골 병원을 일주일 뒤에 가게 되어서 그 시간 동안 내가 뭘 할 것인가 헤아려보았더니 리수족에게 복음을 전했던 제임스 오 프레지오 선교사님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싶었어요. 이 생각이 주님께로 출발한 것인가, 나로부터 출발한 것인가 잠깐 헤아려보았지요. 조카들도 좋다고 해서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테나를 높이 올려서 헤아려보아야 한다” 누강 계곡 주변에 리수족 교회들이 삼 백 군데 이상 있는데 그 교회들을 다 검토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딱 네 군데 교회만 가자” 라고 말했고 모두 좋다고 했습니다. 도시에도 시골에도 교회가 많이 보였지만 나흘간 대절해서 같이 동행했던 택시 기사도 “저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선생님, 저기로 갈까요? 저기 교회가 있습니다. 선생님, 저기로 가지요.”하면서 가고자 했지만 “거기가 아닙니다.” 지나가고 지나가면서 세 군데 교회까지 방문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교회는 보이지 않았어요. 세 번째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는 거기서 만난 한 청년과 같이 식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식당에 도착해서도 안가고 저희 옆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산속에 있는 교회를 한 군데 방문하고 싶은데, 혹시 아시는 곳 있습니까?” 물어보자 “자기가 잘 아는 장로님이 지금 지키고 있는 교회인데 제임스 오 프레이저 선교사님이 거기서 성경학교를 열고 베이스 캠프가 있었던 교회라고 해요.” 제가 마음으로 ‘주님께서 이 청년을 예비해두셨구나!’ 하면서 “좋습니다. 거기 한번 가봅시다” 그곳은 해발 2천미터의 산봉우리에 있는 곳이라 택시 기사는 그곳은 못 간다고 아래쪽에 머물며 대기하였고, 마침 그 청년이 자기 형님 차를 왜 빌리는지도 모른 채 무슨 필요가 있겠지 하면서 사륜구동차를 빌려서 교회에 두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를 위한 나귀였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과 함께 갔는데 산을 타고 빙빙 올라가면서 보니 프레이저 선교사님이 살던 집, 제자들을 가르쳤던 성경학교, 그곳을 지키고 있는 장로님... 올라가다보니 비가 내리더라구요. 산비였지요. ‘아... 선교사님이 이런 비를 맞으면서 나귀 타고 걷고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양육하셨구나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선한 길로 인도하셨구나!’ 무엇보다도 주님이 이런 작은 마음을 아시고 내 마음의 헤아림을 축복해주신 것이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을 다 마치고 장 목사님의 사역지를 방문했는데 장 목사님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거기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무척 놀라셨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가 아니고 주님이 마음을 주셔서 다녀온 것인데 감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나옵니다. 사십 일간 밤낮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를 죽이고 있는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소년 다윗이 그 전쟁터에 오게 되지요. 다윗은 골리앗의 하는 말을 듣고 주님께서 단지 형들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저 골리앗을 무찌를 마음을 주신 것을 감지했습니다. 골리앗과 소년 다윗은 요새 말로 physical 체격적으로 상대가 안됩니다. 한 사람은 거인이고, 전투 경험이 많고 갑옷을 입고 있고 그가 가진 칼은 베틀체처럼 크고 대단하지요. 그런데 한 쪽은 소년이고, 갑옷도 입지 않고, 막대기 하나 들고, 시냇가에서 조약돌 다섯 개를 들고 있는 아주 딱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철저히 자신을 의지하고 있고, 한 사람은 철저히 주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소년 다윗은 주님이 이때를 위해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는 다윗의 헤아림도 소중하지만, 이스라엘 군대 안에 있는 요나단의 헤아림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요나단도 이스라엘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이잖아요. 어려울 때 이스라엘을 구했던 하나님이 세운 일군인데, 요나단이 사십일 간 밤낮으로 골리앗과 그들의 무리를 쳐다보았지만 주님한테 물어볼 때마다 주님이 잠잠하신 것이예요. “주님 제가 나가야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요나단 왕자가 나가면 승리할 텐데 왜 요나단 왕자는 가만히 있는가? 그래도 요나단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 믿음이었어요. ‘주님이 이번에는 내가 아니고 다른 이를 세우신다!’ 결국 다윗을 보고서, 다윗이 승리한 모습을 보고서 그 누구보다 기뻐했고 자기의 갑옷과 칼과 방패를 주면서 그렇게 기뻐하잖아요. 다윗의 헤아림도 소중하고 요나단이 그 땅끝에서 했던 헤아림도 소중하다고 느껴집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전서 1:26-31)했습니다.
전에 우리 교회 앞면에 붙어있는 말씀 중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이지요.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문벌이 좋고 지혜와 지식도 뛰어난 분이신데 “나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나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노라” 말씀했습니다. 욥도 아브라함도 부자였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는 그 부요를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철저히 주님만 붙들었던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 잘 아는 대로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주님을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까지 모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큰 자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나 선지자 같은 사도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요, 어린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께 붙어만 있다면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작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의 분량답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냥 성경 지식을 외우고 교회에서 하는 대로 따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께 매달리면 주님은 그의 주님으로 그의 생명으로 다가와 주시고 말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이기는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귀가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들려주시는 말씀, 주님이 들려주시는 판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귀, 주님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헤아림이 소중합니다. 오늘 오전에도 우리 김병수 목사님과 다섯 분의 강사님들이 하신 말씀을 볼 때, 각자 각자에게 생활 속에서 주신 말씀, 저는 목사님과 우리 식구님들이 성경 지식을 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의 영을 따라 주의 생명을 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청년 때부터 알던 한 목사님이 연약하다는 소식을 3주 전에 들었는데 소천했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여쭈어보았지요. “주님, 제 시간은 제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의금만 보내고 말지, 찾아가야 할지, 찾아간다면 언제 찾아갈지 주님 제게 지시해주십시오.” 수요일 아침에 소식을 들었는데 조용히 생각해보니까 목요일 새벽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인근의 아는 목사님과 택시를 대절해서 파주쪽으로 다녀왔습니다. 소천하신 목사님의 사모님과 아드님을 위로하고 왔지요. 그때 동행했던 목사님이 새벽에 움직이는 이유를 물어보시니까 “이 시간에 가야지 그분하고 좀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어요. 조문을 다녀와서 ‘어느 이슬람 여인의 회심’이라는 책을 읽었던 내용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 이슬람 여인은 파키스탄의 고관 부인이었는데 그 여인이 선교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참 아끼던 조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자기는 크리스찬인데 이슬람 문화권의 친척들이 자기가 장례식에 오는 것을 꺼려할텐데 하면서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헤아립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이제 장례식이 마쳐가는데 이제 조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조카가 죽은 상가집을 방문하지요. 사람들의 보는 눈이 따갑습니다. 우리 가문의 명예을 더럽힌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가라는 말없는 화살이지요.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조카의 어머니께 가서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가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얼마나 힘드시냐고 그런 의미로 짧은 말을 전해주고 옵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며칠 후에 그 조카의 어머니께 전화가 옵니다. “이번 내 아들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종교인들이 찾아왔지만 제 마음을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사님이 방문해서 제 손을 잡았을 때 저는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평강을 느껴보았습니다. 어려운 발걸음인데 진정한 위로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답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찾아간 길이었기에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이 나의 목자, 나의 머리 되신 것을 실제적으로 주님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허락 속에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주님이 가자 할 때 가고, 주님이 일어서지 않을 때는 일어서지 않는 철저히 주님과 동행 속에서 삶을 꾸려갔으면 좋겠습니다. 성도의 판단, 오늘 성도의 헤아림은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생활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