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463장은 가사가 참 단순하다.
1절은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가 고작이다.
2절, 3절, 4절도 별 차이가 없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뿐이다.
작사자의 언어 감각이 평균 이상이거나 평균 이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답은 뻔하다.
찬송가 463장은 흑인 노예들이 불렀던 찬송이다.
그러면 문득 궁금해진다.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더 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오히려 신자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그걸 더 원했다면, 대체 어느 만큼 원했다는 얘기일까?
'윌버 리스'가 쓴 『3달러어치의 하나님』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주님의 작은 일부 만을 사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만
수면을 방해 받지 않을 만큼만
내 인생이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따뜻한 우유 한 잔 만큼이면 됩니다.
내 죄책감을 조금 누그러뜨릴 만큼이면...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호주머니에 넣을 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흑인을 사랑하도록 만들 정도라면,
혹은 이민자들과 사탕무우를 주우러 다니게 할 정도라면 곤란합니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아도 될 만큼만
시간이 날 때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만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길 수 있을 만큼이면 됩니다.
나는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경을 원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태에 머물러 온기를 즐기며 지내기를 원합니다.
나는 영원의 500g만 사서 종이 봉지에 담아두고 싶습니다.
그 이상을 사야 한다면
무르고 돈을 되돌려 받겠습니다.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제발..
그중 일부는 궂은 날을 위해 숨겨 두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내 안에 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길 만큼만..
이처럼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살 수는 없을까요?
Please.
주님이 잠깐 머무르다 가는 분이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
어차피 주님께 인생 전부를 맡길 마음은 없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위안만 얻으면 된다.
신앙 생활이 부담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3달러어치 정도라면 딱 좋다.
부담될 것도 없다.
누군가 종교를 물으면 기독교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그처럼 주님을 기업으로 삼기에 게으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 역시 주님께 기업이 아닐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처럼 신자라고 하기에는 불신자로 처신하고,
불신자라고 하기에는 신자 흉내를 내는 사람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 『거룩한 에로스 아가』 p82-85 / 강학종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