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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법사님 법문>
V. 화두 이야기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래 한국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함께 융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초기에는 ‘오교구산五敎九山’이,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존재하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의 숭상과 불교탄압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조선 초 만해도 민중에는 아직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그렇게 크게 배척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종은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한문으로 된『석가보釋迦譜』를 기초로 『석보상절釋譜詳節』1을 짓게 하는데,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주註와 함께 훈민정음으로 서술해 놓은 이 책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세종은 1447년 7월 『석보상절』이 완성되자 이를 시의 형식으로 엮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2을 짓는다. 그러나 이때는 오교양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는 시기로 불교는 이미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3 선교의 종파들은 선과 교, 두 종으로 통합 정리되었고 숭유억불정책 등으로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후 연산군과 중종 대에 이르면 억불 정치가 극에 달하게 된다. 중종 사후 명종 대는 훈구파에 의한 척신정치4가 마지막으로 기세를 올리던 시기였고 16세기 후반 선조 대에 들어가면 마침내 사림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에 이르면 이미 숭유억불 정책이 확고하게 정착되었고 성리학이 왕성하여,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와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5 이들과 때를 같이하여 활동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6대사는 이러한 불교계의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고 활발한 불교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연산군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던 강력한 폐불정치로 인해 조선의 불교계는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우는 선교양종을 복구했고, 5번의 승과를 통해 150여명의 승려들을 선발했으며, 약 5,000명의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는 일을 관장하였다. 이러한 제도 정비와 인재 선발로 인해 지리멸렬했던 불교계는 소생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고, 승과에서 급제한 서산西山, 사명四溟 등과 같은 우수한 승려들이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략) 유가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불교부흥을 위해 매진했던 보우의 삶과 행적은 승려 한 개인이 전체 유림을 대상으로 싸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 보우는 이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선교양종과 승과를 복구하고, 도승제度僧制를 부활하는 등의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7
보우 대사는 명종이 즉위하자 불심이 깊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도움을 받아 도첩제度牒制8를 다시 실시하게 하고 오래전 폐지되었던 승과僧科를 부활한다. 이때 선발된 인물이 훗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구국성사들인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 1544~1610)이다. 청허는 1회 (명종 7年, 1552)에 유정은 4회에 승과에 합격(명종 16년, 1561)하였다. 조선시대 유명한 선사로 휴정과 유정을 드는데, 이들이 나온 시기와 승과의 부활이 맞물린다.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승과가 폐지되므로 서 휴정과 유정 같은 인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보우 이후 선종의 핵심인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심법을 전한 이야기는 시나 송의 형식으로 문집을 통해 간간이 회자膾炙되었을 뿐,9 조선시대는 불교사적으로는 암흑기로 변방에 머물며 그 명맥마저 미미해진다.
한국불교의 종지종풍宗指宗風 출가 수행자에게 일본의 조선 침략은 오랜 동안 이어진 사회적 억압과 천시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몰락과 더불어 유교가 몰락하고 긴 터널을 지나 불교가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1895년 시행된 ‘도성출입 금지의 해금’은 한국 불교의 부활을 의미하였고, 불교 중흥의 신호탄이자 불교 혁신의 발판이 되었다. 이로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지원이 활발히 이루어져 수행자는 점차 증가하였고, 오랜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활발하게 근대불교의 토대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외적 성장과 더불어 내적 발전도 이루어져, 한국 불교 의례의 결집서인 『석문의범釋門儀範』10이 등장하여 근대 불교의 대중화와 전통 불교 의식의 회복과 계승에 기여 하였고,11 경허鏡虛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등 격변의 혼란 속에 불교계는 종지宗指나 종풍宗風조차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종단 구성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로서 조선시대 종단이 모두 해체된 상황에서 외형적으로만 통합된 종단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대 종파인 조계종曹溪宗13도 마찬가지였다.
조선불교조계종과 대한불교조계종의 출현과정에서는 선이 주체가 되면서 교종을 모두 회통시킬 수 있고 또한 근·현대 불교를 지향할 수 있는 종지종풍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단적인 예가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 제1조’에 그대로 드러난다.
제 1조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 우선 조계종의 기원을 도의에 두면서 그를 구산선문의 대표가 아닌 가지산문의 개창자로 설명하고 있는데, 보조는 사굴산문이며 태고는 가지산문이어서 면면부절이란 말에 모순이 따른다. 또한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발달하였던 교종에 대한 기원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선교양종의 포용을 태고의 ‘제종포섭’으로 명명하고 있긴 하나 태고가 실시하였던 ‘원융부’는 공민왕 당시 1년 6개월간 시행하였던 것에 불과하다. 원융부란 불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한 정치적 통합기구였고, 태고에게 회통의 이념은 부재하였다. 태고야말로 간화선만을 강조하였던 선사禪師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를 통한 제종포섭이란 말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선교일치의 이념을 표방하였던 보조의 회통정신을 제종포섭의 원리로 제시했다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14
태고종太古宗15에서는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모든 불제자는 태고보우국사의 법손法孫이었다고 하면서,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만이 광복이후 한 번도 전통을 바꾸지 않고 정통법통正統法統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1954년 ‘불교법란佛敎法亂’으로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새로 종조로 세우는 등 종조를 바꾸는 일을 자행하였다고 하면서 현 조계종 측에서 힘의 논리로 정당화하였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해방 전까지 한국불교의 모든 불제자는 고려 말 조계종으로 제종을 포섭한 태고문손太古門孫으로, 모두가 조선불교에서 대한불교로 그 법맥을 이어받은 조계단일종단입니다. 그러나 1954년 일부승려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시작된 불교법난佛敎法難은 환부역조換父易祖(종조를 바꿈)를 정당화시키고 전통 홍가사紅袈裟의 색상까지 바꿔 유구한 불교의 전통을 변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종명에서「태고종」이라 함은 분규당시 정부당국과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이 뜻을 같이하여 정통교단인 우리로 하여금「조계종」의 종명을 사용할 수 없도록 탄압한 정치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하는 수 없이「조계종」으로 종명을 통일한 종조宗祖의 사상과 법맥을 계속 이어 받들고 그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종조이신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의 명호名號에 근거하여 1970년 지금의 종명인「한국불교태고종」으로 다시 등록한 사실에 입각한 종명이라 하겠습니다.「한국불교태고종」은 그렇듯 산중불교山中佛敎에서 대중불교大衆佛敎로 재건발족再建發足해 그 법맥法脈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불교 정통종단正統宗團의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16
한국불교계는 해방 후 전국승려대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朝鮮佛敎曹溪宗總本山太古寺法’과 ‘조계종명’을 폐지하고 “조선불교朝鮮佛敎”라는 단일 종단으로 출범하였으나, 3대 교정(종정)인 만공滿空17 선사에 의해 “조계종”으로 종명이 환원된다. 그러던 중 1954년 5월 대통령 이승만이 가정家庭을 가지고 사는 중들은 다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특별담화 이후, 조계종은 독신을 주장하는 세력과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가, 5.16 혁명 이후 불교재건위원회에 의해 다시 1962년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종회 구성상의 이견 대립으로 인하여 분규가 일어나, 1970년 1월 박대륜朴大輪을 종정宗正으로 분리 지금의 ‘한국불교태고종’이 발족 등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명의 변천사가 바로 해방 후 한국불교의 변천사이다.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은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도의국사道義國師로부터 연원淵源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고려 공민왕 때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의 제종포섭諸宗包攝에 의한 선교불이 이사무애禪敎不二 理事無碍의 원융종풍圓隆宗風을 종통宗統으로 삼아 그 법맥法脈은 청허淸虛와 부휴浮休를 거쳐 이후 면면綿綿히 계계승승繼繼承承하고 있습니다. (태고종 종헌 제7조)
도올 김용옥 교수가 지적한대로 현금의 불교 종파들은 원래의 불교 선종과 교종 종파와 관계없는 편의상 이름만 계승한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해방이후 혼란기 때 등록된 단체라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18
한국 임제종 법맥 중국 임제종은 임제 선사이후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의 양기파와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의 황룡파로 나뉘어 졌고, 양기파는 다시 대혜종고 (大慧宗杲, 1089∼1163)의 대혜파와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의 호구파로 갈라진다. 우리나라 임제종은 그 중 호구파 급암종신及庵宗信의 제자들인 석옥청공石屋淸珙과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의 법을 이은 태고보우太古普愚, 나옹혜근懶翁慧勤 그리고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등 여말삼사麗末三師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겠다.19
백운경한은 1351년 54세의 나이에 원나라로 가서 지공指空과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의 가르침을 받았고, 나옹혜근은 승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1347년 원나라에 가서 지공과 여러 간화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다. 태고보우는 1352년 원나라에 유학하여 石屋淸珙의 인가를 받고 원 황실의 귀의를 받는 등 간화선사로 명성이 높았다.20
보조지눌이 선풍을 일으켜 조계종의 기초를 세웠지만, 태고보우, 백운경한, 나옹혜근 등 중국유학승이 임제종을 실제로 전한 것이다. 그중 태고보우 선사의 법은 환암幻庵, 구곡龜谷, 벽계碧溪, 벽송碧松, 부용芙蓉으로 이어져 내려와, 현재 한국의 승려들은 부용의 두 제자인 청허휴정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법손이다.21 부연하면, 근대 선승들은 보조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법맥은 17세기 전반 부휴선수의 문도와 청허휴정의 제자인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 문파들에 의하여 정비된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22
이에 대하여 직접 언급한 분은 한암 중원漢巖重遠과 퇴옹 성철退翁性徹이다. 즉 1897년(21세)에 보조국사의『수심결修心訣』을 통하여 1차 깨달음을 얻은 한암은 ‘도의-보조 종조설’을 주창하였고, 성철은『한국불교의 법맥』을 통하여 ‘태고법통설’을 주창하였다.23
임제종 전통의 태고 법맥은 조선시대 공백기를 지나면서 희미해지는데, 20세기 들어 경허 선사의 등장으로 다시 부활되었다고 하겠다. 이후 임제종 간화선법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조계종 간화선의 부활 한국 불교는 지난 50년 동안 조선 500년 동안 단절되었던 한국불교의 역사를 계승하고 전통을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외적인 팽창을 이루었다. 경허 선사 이후 다시 부활한 한국 불교는, 미숙하지만 생동감이 넘치고 산뜻한 측면도 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니 새로운 전통을 세우고, 교학을 정리하고, 장좌불와 등 지독한 수행으로 새롭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석전영호石顚映湖24 선사 등 선각자들이 나와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선원과 강원 등 수많은 교육기관이 생기고 짧은 기간 불교의 위상을 회복, 오늘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석전영호 선사의 노력이나, 기왓장을 팔아서라도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퇴옹성철退翁性 徹25 스님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임제종 간화선법의 부활은 단시간 내에 이룰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경전공부는 선원이나 대학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임제종의 종지인 간화선법의 지도는 쉽게 정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을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니 제자들을 가르칠 적절한 지도방법이나 교육과정, 즉 커리큘럼이 부재하였던 것이다. 사자전승의 축적 없이 산발적으로 내려오는 몇 개의 화두로는 임제종 전통인 ‘입실점검’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사 어록이나 선종서, 불교 서적을 참고 한다 해도 몇 사람의 선적 체험으로 단시간에 완성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종달 노사님이나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서옹西翁26 스님 등 유학생들에 의한 일본 간화선 점검체계의 이식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004년에 귀적하신 白羊寺의 西翁스님도 젊은 날, 교토 하나조노대학의 전신인 임제학원 전문학교에서 일본의 임제선을 연구하고, 이어 임제종 妙心寺파의 전문 도장에 掛搭하고, 白隱의 공안선에 참선했던 적이 있다.27
최근에 이르러 숭산崇山 노사님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조계종 화두들을 취합하고 일본에 계신 동안 일본 선지식들과 교류한 화두들을 모아 공안집 『한 송이 꽃』으로 정리하고, 지금까지 후학을 지도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10개의 공안을 선정 이를 통하여 점검하고 인가하신다는 교육과정을 확립하셨다.28 신비한 얘기처럼만 들리던 인가과정을 체계화하신 것은 큰 진보라고 하겠다. 숭산 선사 법어집이나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저서들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대화된 생동감 넘치는 화두들과 화두 참구 방법, 화두경계 및 예시例示 등이 정리되어 우리 선종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하겠다.29
그 외 화두들은 성철 스님의 『본지풍광本地風光』 등 저서와 숭산 선사, 혜암 선사 그리고 진제 선사의 법어집이나 스님 일대기에 대부분 정리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30 최근 나온 혜암 선사 법어집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는 이전 혜암 선사의 저서들31에 수록된 화두들을 현대에 맞게 정리하였다. 특히 이 책에는 지금까지 결집된 화두들을 총 망라하고 있는데, 조계종 특유의 수행체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 최소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종래의 주장은 힘을 잃는 듯하다.32
숭산 행원崇山行願 스님도 그러시더라. “한국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이가 몇입니까? 우리는 손을 잡고 한국 불법을 바르게 지도를 해야 됩니다.” 이건 진심에서 나온 소리여! 그분이. 맹꽁이같이 파벌만 내세워 “우리 노스님, 우리 스님!” 하며 맹목적으로 앞에 천길 만길 벼랑이 있는 것도 모르고 눈먼 봉사를 줄줄이 따라가다가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33
이런 모습들은 선종초기 당․송대 간화선 수행체계의 활발발한 성립과정을 보는 듯한데, 한 일본 학자는 한국의 선종을 관찰함으로써 당나라 시대의 선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고 까지 언급하였다.34
조계종 간화선의 내용 태고종 종조이자 조계종 중흥조인 태고보우 선사는 처음 9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종풍에 따라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였다고 전한다. 26세 때에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으나 교학의 한계를 깨닫고 궁극적인 깨침에 이르고자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화두에 전념한다.
죽음을 넘나드는 치열함으로 정진하던 33세 때 용맹정진 7일 만에 1차 깨달음을 경험하고, 이어 37세 때에는『원각경』을 읽다가 ‘일체가 다 사라지면 부동不動이라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2차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스님은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들고 다시 정진한 끝에 38세 때 활연히 깨치고, 다시 1,700공안을 일일이 참구하던 중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오래 막혀 있다가 홀연히 그 뜻을 깨닫고 마침내 중생의 안목에서 벗어나 활활자재한 ‘태고가’를 부를 수 있게 됐다.35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란 『무문관無門關』 「제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36에서 유래한 것으로 암두가 덕산 선사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데, 그 “은밀히 말한 것”을 참구하는 것이다.37
스님은 일찍이 1천 7백 공안을 참구하다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막혀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참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깨닫고는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하였다. “암두 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다.” 신사년 봄에 한양 삼각산 중흥사에 머무시면서, 그 동쪽 봉우리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태고암’이라 하였다. 그리고 영가永嘉스님이 지은 시의 문체를 본 따서 노래 한 편을 지었다. 지정 병술년, 스님의 나이 46세였다. 스님은 연도燕都에 갔다가 축원성竺愿盛선사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스님은 다시 호주 하무산霞霧山으로 가서 석옥 청공 화상을 만나보고, 깨달은 바를 자세히 말한 뒤에 ‘태고암가’를 바쳤다. 석옥 화상은 스님이 큰 그릇임을 굳게 믿고 일상사를 물었다. 스님은 다 대답하고 나서 다시 천천히 물었다. “이 밖에 또 어떤 일이 있습니까?” 석옥 화상은 “노승도 그러했고 삼세의 불조도 그러했소.” 하고, 가사를 주어 신信을 표하고는 “노승은 이제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소.” 하였다. 석옥 화상은 임제臨濟의 18대 손이다. 스님을 반달 동안 머무르게 한 뒤에 떠나보낼 때에는 주장자를 주면서 “부디 잘 가시오” 하였다.38
위 비문에는 국사가 하무산霞霧山 석옥청공石屋淸珙39 화상에게 가서 보름 간 머물렀다고 나오는데, 이 기간 동안 공부하신 내용을 점검 받으셨을 것으로 보인다. 점검은 당시 유행하던 『무문관』에 수록된 화두들이 주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사의 심법은 조선 시대를 지나면서 전승傳承의 자취가 희미해져 경허 선사의 등장까지 그 명맥이 흐릿하다.
근대 선종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 선사는 호열자虎列刺(콜레라 cholera)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삶과 죽음의 근본문제에 부딪혀, 그 의문을 풀기위해 영운지근(靈雲志勤, ?~820) 선사가 제창한 <여사미거驢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라는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괴면서 화두에 집중 하던 중 ‘무비공無鼻孔’40이란 소리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는데, 그때가 1879년 선사의 나이 31세 때였다.
상황적으로도 그렇지만 경허 선사가 깨닫고 나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셨으니41, 엄밀하게 따지면 사자전승의 임제종은 아니다. 박해당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입실면수入室面授의 사자상승법에 의한 법통설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42 스스로 깨달았지 스승으로부터 인가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철 스님이『한국불교의 법맥法脈』에서 밝힌 한국 조계종의 법맥은 역사적으로 정황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 심법이 전해진 것은 아니다. 중국 임제종 법맥을 이은 태고보우를 종조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경허 선사도 성철 스님도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경허는 오도悟道 후 20여 년간 전국을 돌며 선원을 개설하고 수많은 납자들을 제접하여 간화선을 크게 중흥시켰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서구세력과 일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은 일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기존의 유학적 가치는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타협과 저항과 탈속이라는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중 타협하지 못하는 유능한 젊은 인재들은 유학적 가치를 버리고 불교에 뛰어들었으며, 전국의 선원에는 눈 푸른 납자들이 몰려들어 간화선을 통해 깨닫게 됨으로써 많은 선지식이 이 땅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선원 납자들이 중추가 되어 해방 이후 정화 불사淨化佛事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 간화선은 경허 이후 출현한 선지식들의 선수행과 깨달음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43
경허 선사는 스승 없이 하나의 화두로 홀로 깨달으셨고, 그 선적 체험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셨다고 볼 수 있는데, 후학들을 지도할 간화선 수행체계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허 선사의 제자였던 만공 스님은 23세 때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라는 화두를 3년 참구하신 후, 경허 선사의 점검을 받고 다음 화두인 <무>자 화두를 받으시는데, 이 화두를 가지고 깨치신 것으로 되어있다.44 지금의 조계종 선 수행이나 화두 참구 방법은 이때의 전통을 따라 그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심법이 전해진 것도 아니고 화두경계에 대한 보편성 확보를 위한 시간도 짧아, <무>자든 <이뭣고> 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 해결하면 모든 공안이 일시에 타파된다는 주장이, 어떠한 증명이나 논의 없이 유행하여 한때 조계종 간화선법으로 받아 들여 지기도 하였다.45 깨치는 방법이 간화선법만 있는 것도 아니고, 화두 참구가 경계를 나투는 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떻게 <평상심시도>를 실천하느냐에 있다고 한다면 그 방법에 있어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하물며 차별을 멀리하는 선의 입장에서는 그런 논의조차 무의미하여 이론으로 성립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학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방법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숙제로 남게 된다.
법전法戰, 그리고 수행체계의 필요성 전강田岡46 선사는 16세에 출가, 선가의 대표적인 화두인 <무>자 화두를 참구하여 23세 때 한 경계를 얻고 혜봉慧峯47 스님을 찾아가 “조주무자의지趙州無字意旨는 천하 선지식이 반半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스님께서 무자의지無字意旨를 반만 일러 주십시오”라고 묻는다. 그렇게 법거량을 하여 <무>자 경계는 일치하였으나, “‘거년去年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거년엔 송곳 세울 땅이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도 없다.’라는 법문이 있는데, 고인이 점검하기를 여래선如來禪밖에 안 된다 하였으니 어떤 것이 조사선祖師禪인고?”라고 혜봉 스님이 다시 묻자, “마름 뿔이 뾰족해서 저와 같지 않습니다.(릉각첨첨부사타菱角尖尖不似他)”라고 답하여 인가를 받지 못한 일화가 전한다. 24세 되던 해에는 혜월慧月, 용성龍城, 한암漢巖, 혜월慧月, 보월寶月 등 당시 선지식들을 찾아가 인가를 받고 만공 선사를 찾아간다.
1923년 전강은 만공滿空을 찾아가 예를 올리니, 만공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라고 물었다. 이에 전강이 다시 예를 올렸다. 만공이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라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그러자 만공이 “네 견성見性은 견성이 아니다”고 말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거기서 전강은 다시 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판대기 이빨에 털이 돋았다)’를 화두로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 철 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를 분명히 깨쳤다. 그 길로 만공을 찾아가 오도처를 이르자, 만공이 그의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점검해 주었다. 그 뒤 전강이 만공의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이 묻기를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깨달았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가운데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라 했다. 그러자 전강이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48 만공이 ‘부처와 조사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여(佛祖未曾傳), 나 또한 얻은 바 없다네(我亦無所得). 오늘 가을빛도 저물었는데(此日秋色暮),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猿嘯在後峯)!’라는 전법게와 함께 법호를 내리고, 선종 제 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49
한편, 혜암慧菴50 선사의 『선관법요禪關法要』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以前 소식消息」장에는 『금강경金剛經』의 한 구절인 <삼세심三世心 불가득不可得> 화두에 대한 법전法戰이 수록되어 있다. 만공 선사가 이 화두에 대해 답을 냈다가 제자인 보월 스님이 아니라고 하자, 일주일 동안 정진하시고 바른 경계를 체득하셨다는 일화이다.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으셨지만 다른 화두에 대해서는 바른 경계를 나투지 못하신 것이다. 이 화두는 선도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의 하나이기도 하다.51
혜월慧月 스님 회상會上시 사師께서 ‘삼세심三世心 불가득不可得인데 점마하심點麽何心인고?’라는「주금강註金剛」의 법문을 제방에 돌리신 일이 있었다. 그 후 혜월 스님을 시봉하였던 부산 선암사 정운암鄭雲岩 스님이 위 공안公案에 대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수덕사 능인선원能仁禪院에 주석하시던 만공滿空 선사에게 물어 오기를 “‘삼세심三世心 불가득不可得인데 점마하심點麽何心인고?’라는 법문을 아무리 참구參究하였어도 그 향상向上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만공 스님께서는 소승을 위하여 친절히 그 선지禪旨를 일러 주십시오.”라고 서신을 보내 왔었다. 만공 선사는 이에 대하여 답하시기를 “위음왕불 이전威音王佛以前에 이미 다하여 마쳤느니라.”라고 하셨다. 그 때에 보월 선사가 만공 선사의 답하신 그 서신을 보시고 그 자리에서 “큰 스님 죄송합니다.”라고 말씀을 하고, 그 서신을 태우고(燒) 나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하시려고 이런 답을 하십니까?”라고 말씀을 드리니, 만공 선사는 그 자리에서 금선대金仙臺로 가시어 칠일을 면벽面壁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시게 되었다. 그 동안에 보월 스님은 만공 선사를 대신하여 정 운암 스님에게 “배호서背湖西하고 향영남向嶺南은 심중心中에 부절여의不絶餘疑이더니 여금如今에도 부절여의로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갱절여의更絶餘疑하라.”라고 쓴 답서를 송부하시었다. 칠일 정진을 마친 만공 선사는 보월 스님을 부르시고 말씀하시기를 “보월이, 내가 자네한테 십년 양식을 받았네.”라 하시며, 두 스님 사이에 밀계密契가 있었다. 이윽고 보월 스님이 대신한 답서에 대하여 만공 선사는 “참으로 밝은 답이로구나.”라 하시고, 위 문답은 그 후로 끝이 났었다.
그리고 이어 이 일화에 대해 혜암 선사의 친절하고 날카로운 평을 조목조목 붙이셨으니 다음과 같다. 정직하신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위 법문에 대하여 한 마디 하겠는데, 보월 스님이 “누구의 눈을 멀게 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을 때에, 어찌하여 만공 스님으로서 “그것은 내 허물이거니와 그렇다면 자네는 무어라 하겠는가?”라고 반드시 한 말씀 물어 보시어야 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큰 선지식禪知識이신 스님이 그것을 묻지 아니하시었는지 지금 만공 스님이 생존해 계시면 한번 여쭈어 보고 싶은 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보월 스님이 “누구의 눈을 멀게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한 법담法談이 참으로 올바로 한 말씀이라면, 당시 혜월 스님의 위 점마하심點麽何心의 물으신 법문에 대하여 “나는 어느 마음에다 점을 치겠습니다.”라고 한 말씀하시고 난 후에, 만공 스님의 서신을 태웠어야 하는데 그런 말씀 없이 무조건 “누구의 눈을 멀게 하시려고 하십니까?”라고만 하시었으니, 보월 스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바로 하신 말씀인지 후일 눈 밝은 사람이 있어 그 허물을 말할까 염려가 되는 것이다. 만일 혜월 선사께서 나에게 그것을 물으신다면 나는 “안산案山에서 이미 점을 쳐 마쳤노라.”라고 답을 하였을 것이다.52
참고로 이 화두에 대해 숭산 노사님은 “배가 고플 뿐이다.”라고 하셨고, 거사居士 대원 선사는 “잘 보게. (밥을 먹다.)”라고 나투고 있다. 선도회에서는 ‘즉여’의 경계로 점검하고 있다. 물론 답은 다르다.
현 조계종 종정인 진제(眞際, 1934~ ) 스님도 향곡香谷53 선사로부터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화두를 받아 2년 만에 해결하고, 다시 『벽암록碧巖錄』 「제3칙 마대사부안馬大師不安」 화두를 받는다.
그곳에서 향곡 선사로부터 새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받았다. 그 화두를 한 2년 들었을 게야. 그 2년 동안은 모든 반연과 가고 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해제도 상관하지 않고 화두와 씨름했지. 그러다가 그 화두가 해결되니, 종전에는 문답하면 허튼 소리만 나오던 것이 그때야 비로소 바른 소리가 나오더라. 그러나 비로소 바른 답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마조馬祖 선사의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공안에는 막혔다. 그래서 그 화두를 들고 다시 5년 동안 신고辛苦하다 해결해 냈지. 그리하여 마침내 고인들께서 베풀어 놓으신 중중重重의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리는 바 없이 상통相通하게 되었다.54
위 사례들을 보면 화두 하나를 투과하였다고 다른 모든 화두들이 일시에 타파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계를 나툰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경계일 뿐이지,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경계는 아니다. 진제 스님도 ‘역대 조사들도 두 번 세 번 깨달은 이들이 부지기수’라고 말씀하셨는데,55 조그만 내(川)가 강이 되고, 강들이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 합쳐지기 때문에, 단지 수행과정일 뿐 경계를 가지고 맞다 틀리다 혹은 좋다 나쁘다를 논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제자를 지도하는 방법적인 측면에서 일단 오랜 세월 축적된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경계’로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그것을 토대로 보다 나은 경계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향상구에 이르러야 돈오돈수인데,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선사들은 향상구를 모르고 법신法身의 경계나 여래선如來禪만 알았다. 태고 보우나 환암 혼수56 등 몇 분은 중국에서 직접 전해져서 안목이 있었지만, 그 후로 제대로 전수하지 못해 고준한 안목이 단절되었고, 돈오점수 사상에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향곡 ․ 성철性徹 두 분 큰 스님께서 향상구를 깨달으신 이후에 다시 돈오돈수 사상으로 전환되고 부처님의 근본 살림이 재현된 것이다.57
요즈음도 얼마나 선방을 오래 다녔다느니, 용맹정진을 얼마나 오랫동안 하였다느니, 무슨 도를 익혔다느니, 심지어 도를 닦아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 다느니 등으로 도력을 과시하는 도사나 스님들을 만난다. 숭산 노사님의 깨달음에 대한 얘기는 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는데, 솔잎과 콩만을 먹고 100일 동안 정진하셨고, 도량석道場釋을 돌때 동자 둘이 나타나 같이 돌다가 사라진 얘기, 백일기도 후 깨우치고 오도송을 지으신 얘기 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벽곡辟穀을 하며 기도드리고, 수행 중 환幻을 보고 하는 것은 도道의 세계에서는 그리 대단한 것도 신기한 것도 아니다. 숭산 노사님에게는 옆에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이 계셨고, ‘재일 홍법원’에 6, 7년 간 머무시면서 일본 선사들과의 법거량이 이루어져 화두경계에 대한 순숙醇熟의 과정이 있었다. 몸을 학대하는 고행 수행은 부처님도 조사도 말리셨다.58
한편 원택 스님의『성철스님 시봉이야기』를 보면, 성철 스님이 매일 새벽 냉수마찰과 함께 체조 같은 것을 하신 다음 참선을 하셨다고 소개하면서, 원택 스님이 그 선 체조하는 법을 배워 두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 선 체조라는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국선도 준비동작이나 선무도의 선 체조, 요가 자세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그 체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철 스님이 매일 여일하게 하신 그 수행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즉 스님은 스님대로 재가자는 재가자대로 매일 일정 시간 앉아서 참선하고 공부하고 맡은 일에 충실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수행과정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며 깨달음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모르는 사람들의 환상일 뿐으로, 예외는 항상 존재하지만 깨달음이란 수행과정 없이 그렇게 ‘몰록’ 단숨에 이루어지는 그런 신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선도회에는 선도회 간화선 수행체계로 입실점검을 받고 선도회 법사로 위촉된 조계종 스님이 한 분 계신다. 오늘날 봉암사를 치열한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게 한, 종정을 지내셨던 서암홍근(西庵鴻根, 1917~2003) 선사의 인가를 받고 정곡사 주지로 계시는 정곡 스님이다. 대개 삶속에서 치열하게 수행하는 재가자들이 투과하는데 1~3년 걸리는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을 3일 만에 마치고, 『무문관』 48칙을 1년여 점검 받았다. 이미 그동안 나름대로 깊은 통찰 체험을 하셔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는데, 줄탁동시啐啄同時, 터지지만 못하고 계셨던 것이다. 선문답 자체가 선공부에는 필수적이고 후학들 제접시에는 필히 활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선문답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없어 후학양성에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없다. 조계종 스님들에게 일본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나 선도회 간화선 수행체계의 접목은 ‘날개를 다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한국 불교에서는 고려시대 보조지눌과 진각혜심 등 수선사의 정혜결사 이후로 간화선의 수행체계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선수행이 중심이 되고 있고, 주지나 조실이 어록이나 『벽암록』, 『무문관』 등을 제창하여 정법안목을 갖추는 간경看經과 간화看話로써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공부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본질적인 간화선의 공안공부는 등한시되고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정법에 안목 없는 선사들이 경전이나 어록, 선문답을 제대로 후학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학인들이 경전이나 어록 등을 읽고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모르는 불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59
선문답의 모범답안
어떤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걸어가는데 그 뒤에 그를 잡아 삼키려고 사나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었다. 생사가 박두한 그는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언덕 밑에 우물(井)이 있고 등藤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등나무 넝쿨 하나를 붙들고 우물 속을 내려가 보았다. 거기는 독룡毒龍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었고, 또 우물 중간 사면에는 네 마리 뱀이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그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가운데 매달려 있었는데, 그 위에서는 흰 쥐,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나 그 등나무 넝쿨을 새기고 있었다. 만일 쥐가 새겨 그 등나무 넝쿨이 끊어지면 그는 그 밑의 독룡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는 머리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뚝뚝 떨어져 그 입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그 꿀을 빨아 먹으면서, 그가 처해 있는 절박한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단맛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용성龍城 선사가 도봉산道峰山 망월사望月寺의 조실로 계실 때에 전국 선지식 스님들에게 물었다. “그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받아먹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겠느냐?”60
유명한 <안수정등岸樹井藤>61 화두이다. 한때 용성龍城62 선사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이 화두의 경계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숭산 선사 법어집,『천강에 비친 달』에는 이 화두에 대한 답들을 모아 소개하고 있다.
이 화두에 대해 답하기를, 혜암惠庵 스님은 “문자問者 상신실명喪身失命이라, 묻는 자가 죽는다.”고 했고, 춘성春城 스님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향곡香谷 스님은 아이고! 아이고! 라고 했고, 월산月山 스님은 “나는 지금 불국사에 잘 있네! 我 現在 佛國寺安住”라고 했고, 탄허呑虛 스님은 “흐르는 물소리는 밤에도 쉬지 않는다 流水聲聲夜不休!”라고 했고, 벽초碧超 스님은 “안수정등岸樹井藤을 방하착放下着하라.”고 했고, 전강田岡 스님은 “달다!”고 하였다.
용성 선사는 그 자리에서 “전강을 따를 자가 없구나!”라고 전강 스님의 답을 칭찬하셨는데, 뒤에 숭산 노사님은 그의 책에서 ‘네 가지 분류법’63에 따라 다음과 같이 스님들의 답을 평가하셨다. 혜암, 춘성, 벽초 스님은 <무여>의 경계이고, 탄허, 월산스님은 <여여>의 경계이고, 향곡스님은 90% <즉여>이나 옳지 못하고, 전강스님은 잘된 답이나 99%로 1%가 부족하다고 하셨다.64 숭산 노사님은 같은 문중이라서 그런지 평가는 하지 않으셨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공滿空 선사는 “어젯밤 꿈속의 일이니라, 작야몽중사昨夜夢中事” 라고 했고, 혜봉慧峰 선사는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 佛不能更作佛” 고 하였고, 혜월慧月 선사는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하니라, 拈得分明”이라 하였고, 보월寶月 선사는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 何時入井” 고봉古峰 선사는 “아야! 아야!”
용성 선사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웠느니라, 표화천리출瓢花穿籬出 와재마전상臥在麻田上”이라고 하셨다는데, 이와 같이 <안수정등>에 대한 경계가 수행을 많이 하셨다는 선지식들 간에도 다양하다. 이렇게 각기 다른 이유는 각자 수행에 따라, 형성된 가풍에 따라 다르다고 원론적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어떤 기준이나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답들이 취합되어 평가가 이루어지고, 어느 견해가 가장 좋다고 선정이 되는 과정 속에서 화두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된다고 하겠다. 즉, 모범답안이 되는 것이다.
화두경계에 대한 보편성, 말하자면 기준이 되는 ‘전형적인 경계’는 이런 선문답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는데, 즉 선문답을 통하여 화두의 경계가 도출이 되면 그 경계들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 그러므로 보다 나은 경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선의 황금시대를 거치면서 이와 같은 과정을 겪었을 것이고, 견해들이 사자전승으로 축적되면서 송대에 이르러서는 공안집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화두에 대한 ‘전형적인 경계’인 모범답안 또한 축적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경계들은 선종서인 공안집을 매개로 사자전승하면서 논의가 이루어져 보다 다양하고 진화된 경계들로 끊임없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앞서 보았지만 송대 임제종은 문자선을 적극적으로 도입, 공안수행이라는 수행방법을 개발하고 교육에 적극적으로 활용, 성공을 거둔다. 선을 체계화 시킨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는 1,700개 공안을 분류, 18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대별65을 활성화 시켰으며, 송고 형식을 최초로 만든다. 송고란 스승과 제자가 고칙古則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주석과 함께 총괄 정리하는 것인데, 송고 속에는 공안의 답안 또한 은유적으로 포함되었다. 이를 비판하여『벽암록』이 불 태워지고,66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새로 개발한 것이 ‘간화선’이다.67 그러나 간화선법도 염고와 송고의 방식을 계승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문자를 떠날 수는 없었고,68 보다 상징적 주석과 은유적인 방법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자 화두를 필두로 정리된 것이 선종 최후의 공안집,『무문관無門關』이다.
간단히 간화선이라고 말하는 임제선은 본질적으로 구절이나 이야기를 세심하게 살피는 선이다. 임제선은 고칙古則과 분양선소,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등에 의해 수집되기 시작한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선사의 어록이나 말에 초점을 맞춘 선의 형태이다. 공안은 선수행의 교육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공안 수행의 기본적인 기법은 어떤 이야기나 구절 혹은 단어를 명상의 자료로 사용하여 그것을 체험 안에서 활성화시켜 본래의 깨달음의 상태로 대전환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기법은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시대에 가장 두드러졌다. 대혜는 언어나 문자를 믿지 않는 선사로『벽암록』을 보고 그 책을 바로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도 나중에는 활구를 기폭제로 사용하여 돈오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자신이 공안집을 편집하여 후학들에게 수행에 사용하도록 독려하였다.69
선도회에서는『무문관』에 있는 화두들을 한 칙 한 칙 투과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 ‘전형적인 경계’들을 체득케 되는데, 화두에 대한 상응하는 경계가 설 때까지 입실 점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무문관』한 칙에 대해 두 번 이상의 점검이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전형적인 경계’를 기준으로 화두의 기본을 익히게 하고, 다음 재독 시에는 일독을 바탕으로 현대 생활에 맞게 진화된 경계가 다루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필자의 견해로는 재독의 경계는 숭산 노사님이 말씀하신 실용의 경계, 즉 시대에 따라 응용한 현실생활에 적용되는 <평상심시도>의 자유로운 경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문관』이 끝나면『벽암록碧巖錄』으로 공부가 이어진다.『벽암록』은 보다 실전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기본적인 깨달음은『무문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달라진 상황이나 돌발적인 질문에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대응할 수 있는 폭넓은 지혜를 기르는 데 밑거름이 된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선문답의 모범답안은 시대에 따라 진화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 그것이 퇴보를 모르는 간화선 수행체계가 갖는 최대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전實戰 그리고 그 한계 고은사, 부석사 주지를 지내셨던 근일 스님이 조계사 ‘수선회’ 용맹정진 법회에서 한 <남전참묘南泉斬猫>에 대한 법문을 인용한다.
그때 어떤 수좌가 성철 노사께서 해제 법문에 동별당, 서별당 고양이 갖고 싸운 것에 대하여 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철 노사님을 찾아갔어요. “스님 이번 해제 법문에 고양이 법문하셨다면서요?” “그래” “짚신을 머리에 이고 간 도리를 물으셨다는데, 나는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저는 물구나무서서 가겠습니다.” “그래 그 첫 대답이 그럴듯하다. 옛 선지식도 그 첫 대답에 많이 속았느니라. 그 물구나무선 도리하고 남전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예, 저가 묻는 사람에 따라서 대답을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선지식이 그렇게 물으면 내가 물구나무서서 가겠지만, 아직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물을 때는 너 모가지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70 라고 하겠습니다.”71
근일 스님도 처음에는 <무>자를 참구하다가, 경봉 스님한테 가서는 <이뭣고>를 참구하였고, 성철 스님한테 가서는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이냐>를 3년 넘게 참구하였다. 위 선문답은 그 수행의 결과이다. 두 분의 선문답에 대해 뜻이 묘연해 오랜 동안 의문으로 남아 있었는데, 『무문관』 과정 중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를 투과하고 나니, 근일 스님의 경계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72
『선의 황금시대』를 쓴 John C. H. Wu (오경웅)는 짚신을 머리에 인 의도에 대해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걸어 나간 행동은 얼핏 아주 어정쩡한 짓으로 보이지만, 조주는 틀림없이 동료 구도자들에게 진리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가치가 뒤바뀌어 있으며, 세속인들이 아귀다툼을 하며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애초에 존재치도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주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했음직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정성본 스님은『무문관』에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이고 있다.
짚신草鞋을 벗어 머리위에 올려놓는 것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본말전도本末顚倒와 그 밖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언어나 형식, 틀에 박힌 격식과 고정관념을 초월함. 즉 전도몽상과 착각錯覺을 초월하도록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선원의 동당 서당의 양당에 모인 출가 수행자가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올바른 수행을 하지 않고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은 수행자로서 너무나 전도된 행위이다. 또한 남전이 불살생의 계율을 지켜야 할 출가인이 고양이를 칼로 죽여 살생한 것도 전도된 행위이다. 조주스님이 신발을 벗어 머리위에 올려놓은 것은 낮에 일어난 이러한 선언의 사건은 수행자들의 전도된 행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도몽상과 착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조주의 행위는 言詮 不及, 전도를 떨쳐 버리도록 하는 직접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73
근일 스님의 ‘물구나무서서 가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는데, 선종사를 빛낸 조주 선사가 이런 복잡한 논리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을 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선은 즉심이다.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아니다. 짚신을 머리에 인 이유는 따로 있다.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성철 스님은 근일 스님의 대답에 대해 수긍하시고 “그럼 내 다른 것 하나 묻지. 네가 이것만 답하면 확철대오로 인정해준다.”고 하시며 다시 물은 화두가 <파자소암婆子燒庵>이다.
옛날에 보살이 도인이라. 큰 스님 될 것 같은 한 스님을 토굴을 지어서 한 10년간 시봉했는데, 10년이 되는 어느 날 딸을 시켜서 시험을 했어. 딸에게 가서 스님을 보듬고 교태를 부리면서 스님에게 ‘이럴 때 경계가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라 했다. 딸이 시키는 대로 하니 스님이 ‘고목에 한암하니 한기가 돈다.’ 즉, ‘마른 나무에 찬 바위가 의지하니 한기가 돈다.’74라고 답했다. 이를 어머님에게 그대로 전하니 보살이 토굴에 가서 스님의 멱살을 잡고 ‘이 흉악한 속인俗人 놈을 내가 10년 동안 밥을 먹였구나. 에이 도적놈 나가거라.’하며 끄집어내고 불을 탁 질러버렸다.
“그런데 왜 쫓았느냐?” “지극히 그 스님을 위해서 쫓았습니다.” “그래 어찌하면 안 쫓겨나겠느냐, 너 같으면 어찌하겠느냐?”75 “부지런한 해가 동쪽에 뜨니 벌 나비가 춤을 춥니다.”76 “그래 그 말하고 고목에 한암하니 한기가 돈다는 말하고 같느냐, 다르냐?” “천리현격입니다.”77 “틀리단 말이제?” “예!” “너 아직 덜 되었구나. 너 서울 가려면 아직 멀었어. 아직 수원 밖에 못 갔다. 네가 더 열심히 하면 네가 내 은혜를 못 갚을 것이다.”78
이 화두는 고려의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 국사가 엮은 『선문염송禪門拈頌』 마지막을 장식하는 「1463. 고목枯木」이라는 제목의 공안이다. 『선문염송』은 1,400개가 넘는 공안을 수록해놓은 선종사 최대의 공안집으로 내용이 불분명하거나 진각 선사 열반이후 등장한 공안을 빼고는 모든 것을 망라해놓은 역저라고 하겠다. 이 이야기는 조계종 스님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는데, 혜암 선사의 『선관법요』에도 「고목한암枯木寒巖」이라 제목으로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선사의 견해를 붙이고 있다.
납자들아, 어째서 그 노파는 그 암주 스님을 속한俗漢이라 했는가? 그렇게 청렴하고 결백하게 지내온 그 암주가 어째서 속한이를 면치 못하고 쫓겨났는가? 그 처녀가 스님을 안고 물었을 때, 어떻게 답을 했으면 쫓겨나지도 않고 토굴에 불을 지르지도 않았겠는가?
전강 스님이 항상 이 법문을 잘 말씀한다 하기에 나는 법거량을 해 보려고 찾아가 위 공안公案에 대하여, “스님께 한 마디를 들으려고 내가 찾아왔소. 한 마디 일러 보시오. 그러면 나도 그냥 듣지 않고 한 마디 이르겠소.” 하였다. 전강 스님은, “스님은 귀가 먹어 내가 소리를 질러야 말을 하니, 숨이 차서 나는 못하겠소.” 하였다. 나는 “그렇다면 그 말은 어떻게 하였소? 이래서야 탁마를 어찌할 수 있겠소?” 하고 대들었더니, 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만일 이것을 내게 묻는다면 나는 “미란도침옥부도迷瀾倒侵玉浮屠라. 즉 흐린 물결이 거꾸로 옥玉 부도를 침노한다.”하리라. 그 노파가 화현化現이라 하더라도 암자까지 태워 버리지 아니하고 얼마든지 말로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한 것은 좀 지나치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인들이 무어라 말씀했는지 궁금하여, 동래東萊 선암사仙岩寺에 가서 석암錫菴 스님에게서 염송拈頌을 얻어 보았더니, 거기도 그 노파의 허물이 적혀 있었다.
성철 스님도 여기에 “천길 얼음 위에 붉은 해가 밝고 밝으며, 일곱자 지팡이 밑에 푸른 구슬이 구르고 구른다.”고 송頌하시면서 『선문염송』 밀암걸密庵傑79 선사의 염拈에도 평을 붙이셨다.80
밀암 걸 선사가 拈하였다. “이 노파는 안방이 깊고 멀어서 물샐 틈 없으나, 문득 마른 나무에 꽃을 피게 하고 찬 바위 속에서 불꽃이 일게 한다. 이 스님은 외로운 몸이 멀고멀어서 익히 큰 물결 속에 들어가되, 하늘에 치솟는 조수潮水를 한가히 앉아서 끊고 바닥에 이르러도 한 방울 물도 몸에 묻지 않는다. 자세히 검토해 보니 목에 쓴 칼을 두드려 부수고 발을 묶는 쇠사슬을 깨뜨림은 두 사람에게 다 없지 않지마는 佛法을 말할진대 꿈에도 보지 못하였다. 내가 이렇게 평론함은 그 뜻이 어디로 돌아가는가?” 한참 묵묵한 후에 말하였다. “한 묶음의 버들가지를 거두지 못하니(一把柳條收不得), 봄바람이 옥난간 위에 걸쳐 놓는다(和風塔在玉欄干).”
[성철 云] 교묘함을 희롱하여 졸렬함이 됨이여, 귀하고 또 천하다.81
이어 이어지는 근일 스님의 법문에는 진제 스님하고 선문답 하는 내용도 있는데, 진제 스님께서 여러 화두를 가지고 근일 스님에게 경계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소위 법전法戰을 벌이는데, 법전이란 현대로 비유하자면 개인의 연구논문 발표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선방이나 선원에서는 이런 법전을 통하여 서로의 화두 경계를 논하고, 그런 선문답을 통해 축적된 화두 답안으로 후학들의 제접提接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활안 스님께서 종달 노사님에 대해 쓰신 ‘선방에 가서 한 철만 나도 도인을 자처하고 선사들 근처에 갔다가 한 말씀만 들어도 한 소식 얻은 것처럼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선사를 만나면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귀를 기울인다.’82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끝나지 않는 경계들의 향연이자 선문답의 한계이기도 하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니 어느 한 경계에 머물지 말고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 없는 경계에 머물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간화선 수행의 진면목이다.
다음은 <어묵동정語默動靜>에 대한 법전 한 토막이다.
밤이 깊으면 새벽은 가깝고 마음이 깊으면 말이 적은 법이다. 공행이 깊으면 깨달음이 크다. 이때 즈음해서 마침 오대산의 용성선사께서 만공선사에게 공안을 물어 오셨다. 용성 : 語默動靜[말하는 것,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일, 가만히 있는 일]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 보시오. 만공 : ………. 용성 : 良久란 말이요? 만공 : 아니오!
이 법담은 여기서 끝나고 뒤에 전강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평해 말씀드리게 되었다. 전강 : 두 선지식께서 서로 부등켜 안고 진흙탕 속으로 빠진 격입니다. 만공 : 그럼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전강 : 어묵동정을 여의고 도대체 무엇을 이르란 말씀입니까? 만공 : 옳다, 옳다.
혜암 師께서는 이 법담이 크게 마음에 걸려 참구하여 오시다가 드디어 기회가 오자 다시 물으시게 되었다. 혜암 : ‘어묵동정을 여의고 도대체 무엇을 이르란 말씀입니까’라고 노 선지식께 아뢴 그것이 옳단 말이오? 어째서 여읠(離) 것이 있는데 이를(吐) 것이 없다는 말이오? 전강 : ………. 혜암 : 그럼 내게 노스님께 여쭌 것처럼 물어 보시오. 전강 : 어묵동정을 여의고 한마디 일러 보시오.
“이것은 胎中에 들어가기 전의 소식을 알아야 한다. 태중에 들어가기 이전의 소식은 무엇이냐? 나보고 이 도리를 이르라 할 것 같으면 破器不相從이라, 즉 깨진 그릇은 맞추지 못한다 하겠다”하시고, 곧이어 게송을 지으시니
語默動靜句 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箇中誰敢着 낱 가운데 뉘 감히 마주칠 것인가? 問我動靜離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라면 破器不相從 바로,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83
<어묵동정>에 대한 숭산 노사님과 거사 대원 문재현 선사의 문답이다.
대원 선사 ․ 어묵동정을 여이고 한마디 일러 보시지요. 숭산 선사 ․ 악! 대원 선사는 어묵동정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어떻게 하겠소? 대원 선사 ․ 실로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란 말이오. 숭산 선사 ․ 아니오. 다시 이르시오. 대원 선사 ․ 어! 묵! 동! 정!
지금까지 화두들에 대한 선사들의 법전과 또 평가를 보았다. 선사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흡하여 불자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에는 요연한 것 같다는 개인적인 느낌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수행자의 글을 인용한다.
1. 인가받은 분들의 안목이 다른데 어느 분의 견처를 따라야 하는가? 같은 공안에 대해 선지식들께서도 서로 바르지 않은 답이라고들 한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각자의 마음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깨달음에는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제일이고 보림에는 깨달으신 선지식들이 설해 놓은 각종 선문답들을 가지고 자기가 깨달은 견처로 살펴보는 게 제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공안에 대해 선지식들께서 답한 내용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깨달은 안목에서 무엇에 대해 이른 말이라는 점을 짚어 바라본 바가 다르니 어느 선지식의 답이 바른 답인지를 구분 짓기가 어렵습니다.
2. 생존해 계시는 선지식들의 문턱이 너무 높다. 지금 생존해 계시는 자칭 깨달아 인가를 받았다는 분들도 몇 안 되시고 그분들께서는 정보를 활용하는데 문외한들입니다. 따라서 공안을 묻기도 여의치 않습니다. 지금 조계종 종정이 되신 진제선사님께서는 그분이 주석하시는 혜운정사의 홈페이지에 게시판도 만들어 놓지 못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메일로 법을 여쭤 봐도 서신으로 보내 봐도 답장을 해주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와서 물으라는 것입니다. 조계종 홈페이지에 공안 탁마장을 만들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해 놓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그마한 방법으로 이글을 시도합니다.
필자도 공감하는 바이다. 화두 공부를 하러 헤맨 기억이 새롭다. 뭐가 있다고는 하는데 뭐가 있는지 재가자는 접근조차 어려우니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기대해 볼일이다. 최근 들어 세계 석학들을 초대해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 세상을 비추다>는 우리 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더불어 폐쇄적인 우리 불교의 도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은 우선 답답한 현대인들의 갈증을 직접적인 문답으로 풀어주는 산뜻함이 돋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래 병病에 따라 약藥을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이었는데, 즉문즉설은 그 원형을 그대로 현대에 가져와 실천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의 즉문즉설의 대기설법을 기록한 책이 아함경인데, 선종서의 묻고 답하는 선문답 또한 대기설법의 한 유형이라는 스님의 설명이다. 다만 선문답은 중간의 설명을 생략하고 바로 결론으로 가니까 이해가 어렵다는 것이다.84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직접 묻고 답해서 답답한 것을 푸는 것이 어려운 화두를 푸는 간화선 수행보다는 쉬울지 모르겠다. 실재로 스님의 ‘즉문즉설’을 한 마디로 하면 “그대로 보고 그대로 받아들여라!”는 것인데, 그 핵심이 간화선 수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모든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정도의 조언이고,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각자에 맞는 기도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깨우쳐 주고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사실 말로는 쉬워도 실천은 어렵기 때문이다. 급한 불을 잠시 끌 수는 있겠지만 체득을 위해서는 수행의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불을 꺼주는 설법이 중요하지만 그 불은 쉽게 꺼지는 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말들을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하고는 계시는데,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하고 가렵지 않는 것하고는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불교 역사가 말해주듯 그 발전 과정이 그대로 시작과 끝을 말해주고 있다. 즉, 묻고 답하기의 대기설법에서 철학적인 대승불교를 거쳐 심화되고 그로써 발전한 것이 선문답이고,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이 바로 간화선법이기 때문이다. 다양화하고 깊어진 우리나라 현 불교의 모습이다.
참고한 책과 글
1) 조선 1447(세종 29)년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명을 받아 훈민정음으로 지은 책. 세종의 비妃이자 수양 대군의 어머니인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一代記를 주註와 함께 달아서 설명해 놓은 책이다. 24권으로 되어 있고 보물 제523호로 지정되었다. (백과사전) 2) 조선의 4대 왕 세종이 1449(세종 31)년에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장편의 노래. 상, 중, 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으나, 현재 상권의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석보月印釋譜』에 전한다. (백과사전) 3) 조선의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신흥사대부와 불교를 기반으로 한 문벌귀족사이의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인 입장차이 때문이다. 4) 척신정치戚臣政治란 왕의 외척관계에 있는 신하들이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16세기에 행해졌던 척신정치는 선조의 즉위로 일단 외형적인 종식이 이루어졌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집권함으로써 명종의 외척인 심의겸沈義謙 계열은 기대승奇大升, 윤두수尹斗壽 등 신진세력과 결합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세자책봉도 없이 갑자기 사망하여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 초에는 강력한 공신집단이나 외척집단이 형성되지 못하고 붕당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사림은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척신정치 아래에서 성장한 구신료 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이 이루어졌다. (백과사전) 5) 조광조(趙光祖, 1482(성종 13)~1519(중종 14))는 조선 전기의 학자·정치가로 중종 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이황(李滉, 1501(연산군 7) 경북 안동~1570(선조 3))은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로 ‘이동설理動說’,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등 주리론적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으며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이(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6) 보우(普雨, 1515~1565)는 조선 명종 때의 승려이다. 호는 허응당虛應堂, 나암懶庵이다. 보우는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1548년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의 본산本山으로 삼았으며,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산으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승과를 부활시키고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후에 도대선사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 부흥은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하고, 문정왕후 사후, 보우도 유림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수정) 7) 강석근, 동국대학교 강의전담 교수, 「유불. 종파 뛰어넘어 포용의 ‘不二思想’ 구현」 불교신문 2377호, (2007.11.17). 8) 도첩제度牒制는 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해 주는 제도이다. 허가증인 도첩은 입적 또는 환속하면 국가에 반납했으며, 예조에서 발급했다. 원래 이 제도는 국가에 대해 신역身役의 의무를 저버리고, 양민이 함부로 산문山門에 들어가는 폐단을 막기 위한 데서 비롯되었다. 도첩이라는 명칭은 이미 중국 남북조시대의 『고승전』에도 보이지만 제도로 확립된 것은 당나라 때인 747년(天寶 6)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숙왕 때부터 도첩제가 시행되었다. 1371년(공민왕 20)에는 정전丁錢으로 포 50필을 바치는 자에 한하여 도첩을 발행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2년(태조 1) 사찰과 승려의 정리와 함께 국가의 재정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승려가 되려는 자가 양반 자제인 경우는 포 100필, 서인庶人이면 포 150필, 천인賤人이면 포 200필을 관에 납부하여 도첩을 받도록 했다. 이는 세조의 호불책으로 정포 20필로 줄어들기도 했지만 다시 성종연간 군액의 증가를 위해 도첩 발행을 일시 중단함으로써 승려가 되는 길은 거의 단절되었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불교진흥책으로 도첩제가 다시 부활되었지만 왕후가 죽은 후 폐지되고 도첩의 발행도 명목상에 그치게 되었다. 조선 후기 피역을 위해 양민들이 도첩을 받지도 않고 불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사례가 증가하자, 도첩 발행을 강화하여 이를 통제하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11년부터 시행된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과 ‘사찰령시행규칙寺刹令施行規則’에 의하면, 31본산의 주지가 도첩을 발부하도록 했다. 9) 이종찬李鍾燦 저著, 『한국불가 시문학사론』, 불광, (1993). 10) 18세기 이후 한국불교는 의례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의례요집儀禮要集의 새로운 정비가 몇 차례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의식집으로『범음집梵音集』,『작법구감作法龜鑑』,『동음집同音集』,『일판집一判集』등이 있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1931년『석문의범釋門儀範』을 편찬하였는데, 이『석문의범』이 곧 현행 한국불교의 ‘의식儀式’이다. 석문의범은 상하 2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편은 예경禮敬 · 축원祝願 · 송주誦呪 · 재공齋供 · 각소各疏 5장이고, 하편은 각청各請 · 시식施食 · 배송拜送 · 점안點眼 · 이운移運 · 수계受戒 · 다비茶毘 · 제반諸般 · 방생放生 · 지송持誦 · 간례簡禮 · 가곡歌曲 · 신비神秘 등 13장으로 편성되어 있다. (마성 지음,「부처님 마을」 제59호, 1990년 9월호)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염불조차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11) 한상길,「한국 근대 불교의 대중화와 석문의범」『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2008). 12)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헌종 15)~1912) 선사는 한말의 승려로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 근대 선의 물결이 다시 일어나는 한 계기로 만들었다. 본관은 여산, 속성은 송씨宋氏, 속명은 동욱東旭, 경허는 법명이다. 성우惺牛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두옥斗玉이다.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에서 출가하여 계허桂虛 밑에 있다가, 동학사東鶴寺의 원오圓悟에게서 경학을 배웠다. 1871년 동학사의 강사가 되었으며, 1879년 돌림병이 유행하는 마을을 지나다가 죽음의 위협을 겪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학인을 모두 돌려보낸 뒤 문을 닫고 좌선하여 묘지妙旨를 크게 깨달았다. 32세에 홍주洪州 천장사天藏寺에서 혜언慧彦의 법을 잇고, 그 뒤부터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89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의 조실祖室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인경불사印經佛事, 수선사修禪社 등의 불사를 주관했다. 이후 지리산 천은사天隱寺, 안변 석왕사釋王寺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갑산甲山, 강계江界 등지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박난주朴蘭州로 이름을 바꾸고 살았다. 1912년 4월 25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했다. 저서로는 『경허집』이 있다. (백과사전) 13) 조계종曹溪宗의 종지宗旨는 석가모니의 자각각타自覺覺他·각행원만覺行圓滿한 깨달음을 근본교리로 받들며,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의경전은 『금강경金剛經』·『전등법어傳燈法語』이며 기타 경전을 연구하고 염불과 주문呪文 등도 제한하지 않는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며, 종전부터 석가모니불 이외의 불상을 모신 사찰은 그 관례에 따른다. 공식적인 중흥조는 고려말의 태고보우太古普愚이며, 본거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조계사曹溪寺이다. 1945년 8·15해방과 함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출범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조계종의 직제는 종단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종정宗正을 비롯하여 감찰원(규정원)·총무원·원로회의·중앙종회가 있는데, 실제로는 총무원장 중심체제이다. 총무원 산하에 25개 본산제도가 확립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동국대학교를 비롯해 각 급 학교가 있으며, 관련기관으로 전국교도회가 있다. 1989년 현재 교세는 사찰 1,694개, 승려 1만 3,387명, 신도 912만 5,991명으로 집계되었다. (브리태니커) 14)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08. 15) 태고종太古宗은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으로 태고 보우국사의 통불교通佛敎사상과 원융圓融정신의 실천을 종지로 삼고 있는 종단. 한국 불교 27개 종단의 하나이다. 고려시대 태고보우太古普愚국사를 종조宗祖로 하며 석가세존의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근본교리 를 받들어 실천하고 태고보우국사의 종풍宗風을 선양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다. 태고종은 사찰의 개인소유 인정과 승려의 결혼문제를 자율에 맡기고 있으며,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사찰을 유지 운영할 수 있는 재가교역자제도인 교임제도를 두고 있다.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화엄경』이며, 태고종계의 주요사찰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태고사와 서대문구의 봉원사 및 전라남도 순천시의 선암사가 있다. 또한 사설 사암寺庵 중심의 조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약 3,200여 개의 사찰을 두고 있다. (브리태니커) 16) 태고종 홈페이지 http://www.taego.kr/ 「종명」에서 인용. 17)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 전북 태인~1946. 10. 20 충남 예산) 선사의 속성은 여산礪山 송씨宋氏, 법호는 만공滿空. 아명은 바우였으며, 행자시절에는 도암道巖으로도 불렸다. 14세에 출가를 결심하고 충청도 계룡산 동학사의 진암眞巖 밑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충청도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鏡虛를 계사戒師로 받들어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이때 받은 법명이 월면이다. 이후 10년간 천장사에서 공양주를 보다가 1893년 절에 들른 어떤 소년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에 몰두했다. 1895년 문득 깨우침을 얻었으나 다음해 경허로부터 다시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선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1901년 경상도 양산 통도사에서 다시 개오開悟하고 1904년 경허로부터 만공이라는 호와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충청도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보임保任에 힘쓰다가 찾아오는 수행승들의 지도에 전념했다. 이후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에서 선禪 지도와 1937년 마곡사麻谷寺 주지 기간을 빼고는 덕숭산에 머물며 40년간 선불교禪佛敎의 진흥에 힘썼다. 1937년 본산本山 주지회의에서 총독부에 의한 조선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공박한 사실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1946년 전월사轉月舍에서 입적했다. 저서에는 사후 편찬된 『만공어록滿空語錄』이 있다. (백과사전) 18) 현재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등록된 종단명은 다음과 같다. 1. 대한불교조계종, 2. 한국불교태고종, 3. 대한불교천태종, 4. 대한불교진각종, 5. 대한불교관음종, 6. 대한불교총화종, 8. 대한불교보문종, 9. 대한불교원융종, 10. 불교총지종, 11. 대한불교원효종, 12. 대한불교법화종, 13. 대한불교조동종, 14. 보국불교염불종, 15. 대한불교법상종, 16. 대한불교진언종, 17. 대한불교용화종, 18. 한국불교법륜종, 19. 대한불교본원종, 20. 재)대한불교일붕선교종, 21. 대한불교대승종, 22. 대한불교삼론종, 23. 대한불교열반종, 24. 대한불교미타종, 25. 한국불교여래종, 26. 대한불교대각종, 27. 한국불교미륵종, 이외에 종단협의회에 등록되지 않은 종단도 부지기수이다. <대표적인 종단> 1. 대한불교 조계종,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도의국사, 소의경전: 금강경金剛經, 전등법어, 종지/종풍: 直指人心 見性成佛 傳法度生, 총본산: 조계사, 창종 연도: 1962년 3월 22일, 주요사찰: 조계사, 불국사, 통도사, 화엄사, 범어사, 수덕사 등, 연례 주요행사: 4대 명절(각 사찰별 사례식), 연등행렬, 부처님오신 날, 가사: 밤색. 2. 한국불교 태고종,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태고보우국사, 소의경전: 금강경, 화엄경, 종지/종풍: 석가세존의 자각각타하신 각행원만의 근본정신을 봉체하고 태고종조의 종풍을 선양하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함. 총본산: 전남 순천 선암사, 창종 연도: 태고보우국사가 원융부를 설립한 1356년, 주요사찰: 선암사, 봉원사, 백련사, 안정사, 태고사외 2952개 사찰, 가사: 전통 홍가사. 3. 대한불교 천태종,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중국 천태산 지자대사, 소의경전: 묘법연화경, 종지/종풍: 개인완성, 자리자각自利自覺, 불국토 건설, 이타타각利他他覺, 법성체 결합, 총본산: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 창종 연도: 1967년 1월 24일, 주요사찰: 구인사, 관문사, 삼광사 외 206개 사찰, 연례 주요행사: 특별안거(음 12월~2월) 하안거(8월), 동안거(12월~1월) 석존탄신, 출가, 열반, 성도일, 상월대조사 열반제 (음 4월 27일) 구인사 창건기념행사(음 5월 5일), 남대충대종사 열반제(음 9월 3일) 상월대조사 탄신기념행사(음 11월 28일), 가사: 다홍색 25조(승가리), 적색 13조, 15조, 17조, 21조(승가리), 자색 7조(울다라승), 9조(승가리), 금색 5조(안타회). 4. 대한불교 진각종, 주불: 비로자나불, 종조: 회당 손규상 대종사, 소의경전: 대일경, 금강정경, 대승장엄보왕경, 보리심론, 종조법전, 종지 : 시방삼세에 하나로 계시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을 교주로 하고, 부처와 종조의 정전인 육자대명왕진언(옴마니반메훔)을 신행의 본존으로 받들어 법신불의 진리를 체득하고 현세정화함을 종지로 함. 종풍 : 종조님의 무진서원에 귀명하여 육자진언을 신행의 본존으로 받들고 사교이상을 겸비하여 즉신성불의 바른 길을 여는 밀교의 가르침을 전하며 현세정화를 실천하는 승속동행의 종단임, 창종 연도: 1947년 6월 14일, 주요사찰: 울릉도 금강원, 최정심인당, 불승심인당, 밀각심인당 등, 연례 주요행사: 열반절, 부처님오신 날, 종조탄생절, 창교절, 종조열반절 등, 가사: 노란색 납자 : 밤색 법복 : 밤색. 19) 고려 시대(918~1392)의 명종 때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조계산에 수선사修禪寺를 세우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설립했으나, 그 뒤부터 승행僧行이 타락되면서 차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중국 호주 하무산霞霧山의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법을 받아왔고,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강서의 평산 처림平山處林의 법을 받아옴으로써 2파로 갈리었다. 그러나 나옹의 법계法系는 얼마 안 되어 없어지고, 태고의 법계만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위키백과) 20)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p. 146~147. 21) <중국> 28조 보리달마(菩堤達磨) → 29조 이조 혜가(2조 慧可) → 30조 삼조 승찬(3조 僧璨) → 31조 사조 도신(4조 道信) → 32조 오조 홍인(5조 弘忍) → 33조 육조 혜능(6조 慧能) → 34조 남악회양(7조 南嶽懷讓) → 35조 마조도일(8조 馬祖道一) → 36조 백장회해(9조 百丈懷海) → 37조 황벽희운(10조 黃檗希雲) → 38조 임제의현(11조 臨濟義玄) → 39조 흥화존장(12조 興化存奬) → 40조 남원혜옹(13조 南院慧裵) → 41조 풍혈연소(14조 風穴延沼) → 42조 수산성념(15조 首山省念) → 43조 태자원선(16조 太子院善) → 44조 자명초원(17조 慈明楚圓) → 45조 양기방회(18조 楊岐方會) → 46조 백운수단(19조 白雲守端) → 47조 오조법연(20조 五祖法演) → 48조 원오극근(21조 圜悟克勤) → 49조 호구소륭(22조 虎丘紹隆) → 50조 응암담화(23조 應庵曇華) → 51조 밀암함걸(24조 密庵咸傑) → 52조 파암조선(25조 破庵祖先) → 53조 무준사범(26조 無準師範) → 54조 설암조흠(27조 雪巖祖欽) → 55조 급암종신(28조 及庵宗信) → 56조 석옥청공(29조 石屋淸珙) <한국> 57조 태고보우(1조 太古普愚) → 58조 환암혼수(2조 幻庵混脩) → 59조 구곡각운(3조 龜谷覺雲) → 60조 벽계정심(4조 碧溪淨心) → 61조 벽송지엄(5조 碧松智儼) → 62조 부용영관(6조 芙蓉靈觀) → 63조 청허휴정(7조 淸虛休靜) → 64조 편양언기(8조 鞭羊彦機) → 65조 풍담의심(9조 楓潭義諶) → 66조 월담설제(10조 月潭雪霽) → 67조 환성지안(11조 喚醒志安) → 68조 호암체정(12조 虎巖體淨) → 69조 청봉거안(13조 靑峰巨岸) → 70조 율봉청고(14조 栗峰靑皐) → 71조 금허 법첨(15조 錦虛法沾) → 72조 용암혜언(16조 龍巖慧言) → 73조 영월봉율(17조 詠月奉律) → 74조 만화보선(18조 萬化普善) → 75조 경허성우(19조 鏡虛惺牛) → 76조 만공월면(20조 滿空月面) → 77조 혜암현문(21조 慧庵玄門) → 78조 청봉청운(22조 淸峯淸韻) → 79조 퇴옹성철(23조 退翁性徹) → 77조 고봉경욱(21조 古峰景昱) → 78조 숭산행원(22조 崇山行願) → 77조 전강영신(21조 田岡永信) → 78조 송담정은(22조 松潭, 용화사 법보선원장) & → 76조 혜월혜명(20조 慧月慧明) → 77조 운봉성수(21조 雲峰性粹) → 78조 향곡혜림(22조 香谷蕙林) → 79조 진제 (23조 眞際, 제13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22) 퇴옹성철退翁性徹 저著,「태고종통론太古宗統論」『한국불교의 법맥』, 장경각. 23)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09. 24) 석전영호(石顚映湖, 1870(고종 7)~1948) 선사의 속성은 박씨朴氏, 자는 한영漢永, 본명은 정호鼎鎬, 호는 석전石顚이며, 후일 당호堂號를 영호映瑚라 하였다. 1870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전주에서 활동하였다. 1888년 전주 태조암太祖庵의 금산錦山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890년 백양사白羊寺 환응幻應에게 4교四敎를, 순천 선암사仙巖寺 경운敬雲에게 대교大敎를 배우고, 구암사龜巖寺 처명處明의 법을 받았다. 1896년 구암사에서 개강하여 해인사·법주사·대원사·화엄사·범어사 등 여러 곳에서 학인들에게 불경을 강의했다. 1908년부터는 쇠퇴하는 한국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서울에 가서 교단을 유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1년 해인사의 주지 회광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 조약을 체결하자, 한용운韓龍雲, 진응震應, 금봉錦峯과 함께 반대운동을 일으켜 그 조약을 무효로 만들었다. 1913년 『해동불교 海東佛敎』를 창간하고, 1914년에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에서 강의했다. 1926년부터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서 청년 학도들에게 불교를 전문으로 강의했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고, 1931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8·15해방 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었으며, 정읍 내장사에서 만년을 보냈다. 시와 글에 능했다. 저서로는 『석전시초石顚詩鈔』, 『석림수필石林隨筆』, 『석림초石林抄』 등이 있다. (백과사전) 25)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 4. 10 경남 산청~1993. 11. 4 경남 합천)의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다. 25세 때인 1936년 3월 해인사에서 승려 하동산河東山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하동산은 한국 불교의 계단戒壇을 통일시킨 승려로서, 그의 제자들이 소위 범어문중梵魚門中을 형성했는데 성철도 여기에 속했다. 1947년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답게 살자”고 청담·자운·월산, 혜암, 성수, 법전 등과 결사結社를 하는 등 현대의 선풍禪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5년 비구比丘와 대처帶妻의 분규가 일어났을 때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어 그해 동안거冬安居에서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問’을 했으며,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에는 한국 선불교의 주요특징으로 지적되었던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선문정로禪門正路』를 펴내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83년 문공부등록종단 대표, 1986년 아시아 종교평화회의 고문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법맥法脈』(1976), 『본지풍광本地風光』(1982), 『돈오입도요문강설頓悟入道要門講說』(1986) 등이 있다. (백과사전) 26) 서옹(西翁, 1912~2004) 스님은 1912. 10. 10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상순李商純, 법명은 석호石虎, 서옹은 호이다. 1932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중앙불교전문학교시절 전라남도 장성군 백양사白羊寺에서 승려 만암蔓岩에게 계戒를 받고 출가했다. 1935년 일본 교토京都 임제대학臨濟大學으로 유학하여 1941년 졸업하고, 1944년까지 일본 임제총본산 묘심사妙心寺 선원禪院에서 수도했다. 1944년 귀국하여 전국의 선원을 돌아다니며 참선에 몰두하다가 1962년에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후 서울 도봉산 무문관無門關, 대구 동화사棟華寺, 전라남도 봉암사鳳岩寺, 백양사 등지의 조실祖室스님으로 지내면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을 지키며 수행승들을 가르쳤다.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종정 재임기간 동안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대한불교총연합회 회장, 종교인협회 회장, 불교중앙문화원 총재 등을 겸임하면서 한국불교의 근대화에 힘쓰다가, 1978년 퇴임 후 백양사 조실에 있으면서 후학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에는 『임제록연의臨濟錄演義』 『절대참사랑』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27)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看話禪의 전통과 변용」(普照思想 제25집(2006.02), 보조사상연구원). 28) 현각 엮음,「10개의 공안」『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반 2』pp. 188~216. 10개의 공안을 투과하고 마지막 숙제도 풀어야 한다. 29) 숭산행원(崇山行願, 1927년 8월 1일~2004년 11월 30일) 노사님은 승려대학을 만들어 신불교를 전파하는 등 불교 개혁활동과 함께 외국에 불교를 알려 외국인 승려를 배출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당호堂號는 숭산崇山, 법명은 행원行願이며 속명은 이덕인이다. (위키백과). 저서로는 『천강에 비친 달』(숭산행원선사 법어집, 불교통신교육원佛敎通信敎育院 1987),『中國佛敎)聖地巡禮記』(불교통신대학佛敎通信大學 1985),『선禪의 나침반羅針盤』(韓國의 達磨, 崇山大禪師, 보림사保林社 1984, 현각 엮음, 허문명역 열림원 2001),『부처님께 재를 털면』(스티븐미첼, 고려원, 1990, 여시아문 1999),『허공의 뼈를 타고』(이덕인 최윤정 역, 예하, 1991),『세계일화』(숭산행원문도회 2000),『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불교영상회보사 1994), 『세계일화 1,2,3 (가는 곳마다 큰 스님의 웃음, 큰 스님과의 대화,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2001년 불교춘추사), 『世界佛敎巡廻布敎記』(佛敎通信敎育院 1990),『오직 모를 뿐』(현각, 은석준 역 대원정사, 1987 물병자리), 『바람이냐 깃발이냐』(法寶出版社 1993),『온 세상은 한 송이 꽃』 (숭산 선사 공안집 현암사 2001), 『오직 할뿐』 (무량, 무심 물병자리 2001),『22인의 증언 통해 본 근현대 불교사』(선우도량 2002),『도화집』 (홍법원 2005) 등이 있다. 30) 시중에 나와 있는 책과 법문 테이프, 시디를 통해 필자가 보고 듣고 한 내용들은『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홍법원),『현대 고승인물 평전』 (불교영상), 대원 문재현 선문답집,『앞뜰에 국화꽃 곱고 북산에 첫눈 희다』, 김정휴,『백척간두에서 무슨 절망이 있으랴』, 조오현,『선문선답』, 석명정『다茶이야기 선禪이야기』, 이은윤,『큰 바위 짊어지고 어디들 가시는가』, 윤청광『고승열전』과 테이프 및 시디 그리고 성철 스님 법어집 『본지풍광本地風光』 등 저서, 숭산 선사 법어집『천강에 비친 달』 등 저서, 혜암 선사 법어집 『선관법요禪關法要』 그리고 진제 선사 법어집『돌사람 크게 웃네』등이다. 성철 스님의 ‘백련선서간행회’가 펴낸 ‘선림고경총서’는 그 자체로 우리 불교사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31) 최혜암崔慧菴 저著, 『禪關法要』 대한불교달마회 (1976년); 혜암 큰 스님의 『벼랑 끝에 서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 밀알, (1985); 강인봉姜印峰 편역編譯, 혜암선사惠庵禪師 법어집法語集 『늙은 원숭이』 열음사, (1991). 32)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cafe.daum.net/younghasanbang 토론방 ‘화두는 하나만 참구하라는데......’ 참조. 33) 해운정사 엮음. 『진제대선사, 禪 백문백답』 현대불교신문사 (2005) p. 84. 34) 충본극기沖本克己(오키모토 가쓰미)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사토 시게키)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p. 279. 35)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22 태고보우 선사, 내 마음이 곧 정토요 내 성품이 아미타불」 법보신문 886, (2007.01.24) 36) 본칙의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덕산(德山, 782~865) 선사가 발우를 들고 방에서 나오셨다. 설봉이 이를 보고, “노스님, 아직 공양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다시 방으로 돌아 가셨다. 설봉이 이 일을 두고 암두에게 이르니 암두가 말했다. “덕산노사 같은 분도 아직 말후구末後句를 모르시네.” 덕산 선사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 말씀하시길, “자네는 이 노승을 수긍하지 않는가?” 이에 암두는 덕산 선사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덕산 선사는 이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다음날 법상에 오르신 덕산 선사는 과연 평상시와 달랐다. 그러자 암두는 승당 앞에서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기뻐할 일이로다. 우리 노사님이 드디어 ‘말후의 구’를 아셨도다. 이후로는 천하의 어떤 사람도 저 분을 어쩌지 못하리라!” 37) 혜암 선사의 『선관법요』에는 「탁발화托鉢話」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개하고 있다.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에서 하루는 혜공惠公 스님이 탁발화托鉢話 공안公案을 내게 물었다. 나는 말하되 “나는 그런 것을 말할 생각도 아예 못 낸다.”고 하였더니, 혜공 스님은 “그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암두巖頭 스님의 연극으로만 보십시오.”하였다. 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행이 없는 부처가 없고, 소림문하小林門下에 거짓말을 한 조사祖師가 없다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니, 그 뜻(意)을 따라 나도 한번 해 보리라.”하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삼동三冬 결제 동안에 남모르게 정진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탁발화의 골자骨子가 부러져 나왔다. 그 뒤에 선학원禪學院에서 향곡香谷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향곡 스님이 이 탁발화 법문을 말씀하기에 나는 그 스님에게 “어떤 것이 암두의 말후구末後句인가?”하고 물었다. 향곡 스님은 “덕산德山이 옳은가? 암두巖頭가 옳은가?”하고 되물었다. 내가 “알면 안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누가 덕산 · 암두의 옳고 그른 것을 물었는가?”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 탁발화에 대해서는 그 말후구末後句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말후구에 대하여 묻는다면 “안불견眼不見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이불문耳不聞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대답하리라. (문인門人 묘봉 감수, 견우회 엮음, 덕숭산 혜암 대선사 법어,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 pp. 179~181) 38)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태고보우 국사의 비문, 『태고록』 (선림고경총서 21)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234~235. 39)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 선사는 1272년 강소성 상숙常琡에서 태어났다. 1292년 21세 때 소주蘇州와 흥교興敎 숭복사崇福寺에 출가했다. 고봉원묘高峰原妙의 문하에서 공부한 다음 급암종신及菴宗信의 법을 이었다. 이후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352년 7월 23일 81세에 입적했다. 조계종 스님들은 모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의 법손이며 아울러 석옥청공의 법손이다. 다음 시는 석옥청공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남긴 임종게인 ‘사세송辭世頌’이다. 임종시 고려의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선사에게 법을 부촉하며 지은 게송이라고 알려져 있다. 白雲買了賣淸風 흰 구름을 사려고 맑은 바람을 팔았더니 散盡家私徹骨窮 살림살이가 바닥나서 뼈에 사무치게 궁색하네. 留得數間茅草屋 남은 건 두어 칸 띠로 얽은 집 하나뿐이니 臨別付與丙丁童 세상을 떠나면서 그것마저 불 속에 던지노라. 40) <무비공>이란 경허 선사의 오도송에서 기인한다. 호열자가 창궐하는 마을에서 삶과 죽음의 근본문제에 부딪힌 경허선사는, 발길을 되돌려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시키고 강원을 철폐한다. 그리고 당나라 때 영운지근 선사가 <여하시불법대의如何是佛法大意> 즉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라는 질문에 답하신 <여사미거 마사도래>, 즉 ‘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온다’는 화두를 잡고 선당禪堂 삼조연하三條椽下에 홀로 앉아 용맹정진에 들어가신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학명도일學明道一이라는 절의 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갔다가 이 처사를 만나 잠시 다담茶談을 나누게 되는데, 이 처사의 말이, “스님! 요즘은 어떻게 공부하십니까?” “그저 경이나 읽고 염불하며 가람 수호하는 것이 일과랍니다.” “스님! 그렇게 공부하다 소가 되면 어쩌려고요.” “그럼 어떻게 하면 소가 되지 않을까요?” “소가 되더라도 고삐를 꿸 콧구멍이 없으면 되지요.”라고 대답한다. 학명은 <무비공, 고삐를 꿸 콧구멍이 없는 소>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절에 돌아와서 대중들에게 물어도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 그러다 시자가 경허에게 묻게 되는데, 이때 <무비공>이라는 말에 선사는 활연대오하게 된다. 그리고 오도송을 부른다. 忽聞人語無鼻孔 홀연히 고삐 꿸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 頓覺三千是我家 문득 깨달으니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이네! 六月燕巖山下路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일 없는 농부가 태평가를 부르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무비공>에 대한 해석을 글자 그대로 ‘콧구멍이 없는 소’로 보고, ‘들이 쉰 숨을 내뱉지 못하거나 내 쉰 숨을 다시 들이쉬지 못한 순간 생사는 갈라지고 만다. 숨구멍에 생사의 갈림길이 있다. 그런데 ‘콧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일순간 경허의 숨이 턱 막혀 버렸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해 놓았는데, 콧구멍이 없으면 이미 코鼻가 아니다. 따라서 굳이 바르게 풀이하자면 <무비공>이란 ‘코에 쇠코뚜레를 꿸 구멍이 없는 소’라는 뜻으로, 쇠코뚜레가 없는 소가 되면 ‘대자유소’로 유유자적 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41) 경허 스님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셨지만, 이후 “나로서 용암(龍巖, 1783~1841) 장노의 법을 이어 그 도통을 정리하고, 만화보선(萬化普善, 1850~1919) 강사로써 나의 수업사를 삼음이 옳다”라고 하면서 청허의 12대손이며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의 8세손이라고 법맥을 정리하셨다. (『현대 고승열전 평전』불교영상, p. 15) 42)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10. 43)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03~304. 44)『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홍법원)』과 『현대 고승인물 평전 (불교영상)』에서 경허, 만공선사 편 참조. 45) 한 번은 선도회 지태 거사님이 「화두는 하나만 참구하라고 하는데, 선도회 화두는 너무 많아요」란 질문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송담 스님 참선법문을 듣고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여쭙니다. 송담 스님께서는 “무”자든, “이뭣고” 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 해결하면, 모든 공안(1,700)을 일시에 타파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 선도회에서는 예비화두(16개), 무문관 화두(48칙)를 드는데,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저의 권유로 선도회에 입문해서 예비화두 몇 개 안 남겨 두고 이런 이유로 고민하다가 중도에 그만 둔 도반이 있었습니다. 저 주변에 이런 것을 염려하는 지인들이 있어 만나면 늘 논쟁거리가 됩니다. 법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에 써 놓았던 글을 인용하기는 했지만, 이 질문을 계기로 「선도회 간화선 읽기」를 쓰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선도회 카페,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cafe.daum.net/younghasanbang 토론방 ‘화두는 하나만 참구하라는데......’에 실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 조계종은 임제종보다는 조동종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46) 전강영신(田岡禪師, 1898~1975) 선사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는데,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47) 혜봉(慧峯, 1874~1956) 스님은 만공 선사와 사형사제 간이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후 환속하여 사셨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고, 『만공집滿空集』에 만공 선사와 문답한 대목이 있을 뿐이다. 48) 초기 선적에는 ‘내가 곧 엎드려서 허부적 허부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로 나와 있는데(『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홍법원) p. 389), 이를 뒤에는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나아가서는 ‘엎드려 더듬으며 별을 찾는 시늉’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문인門人 묘봉 감수, 견우회 엮음, 덕숭산 혜암 대선사 법어,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 p. 198), 이는 잘못된 해석으로 보인다. 혜암 스님도 별을 찾는 것은 한로축괴韓獹逐塊라고 지적만을 하셨는데, 이는 잘못 전해졌거나 후학들이 잘못 해석한 것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별을 찾는 이원적 해석보다는 스스로 별이 되는 일원적 해석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49) 김 탁, 철학박사 「‘한국불교의 선지식’ 전강 영신」 종교신문 빛을 남긴 사람들, (2004.01.08). 50) 혜암성관(慧菴性觀, 1920~2001) 선사는 1920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장성읍 성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원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인근의 사찰을 자주 찾아 참배하며 동, 서양의 위인전읽기를 좋아하였던 스님은 특히 불교경전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선사는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구약과 신약, 유교의 사서삼경, 불교의 조사어록 등을 두루 섭렵하며 동양철학을 공부하였다. 51) 박영재 지음, 생활선의 첫걸음『두 문을 동시에 투과한다』불광출판사, pp. 170~171. 52) 최혜암崔慧菴 저著,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以前 소식消息」 『禪關法要』 대한불교달마회 (1976년). 문인門人 묘봉 감수, 견우회 엮음, 덕숭산 혜암 대선사 법어,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 pp.194~197. 53)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1978) 선사는 1912년(壬子) 1월 18일에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부친 김원묵金元黙과 모친 김적정행金寂靜行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927년 16세 때 이미 승려가 된 둘째 형의 옷을 전하기 위해 천성산 내원사로 찾아갔다가 그 길로 출가하였다. 1929년 18세 때 내원사에서 조성월趙性月 스님을 은사로 득도, 법명을 혜림蕙林이라 하였다. (백과사전) 54) 해운정사 엮음. 『진제대선사, 禪 백문백답』 현대불교신문사 (2005) p. 129. 55) 해운정사 엮음. 『진제대선사, 禪 백문백답』 현대불교신문사 (2005) p. 105 . 56)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스님으로 태고보우의 법을 이었다. 시호는 보각국사普覺國師이다. 57) 해운정사 엮음. 『진제대선사, 禪 백문백답』 현대불교신문사 (2005) pp. 109~110. 58) 이에 대한 폐해는 중국 선종 초기에도 있었던 것 같다. 혜능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가 반야사般若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회양 문하에 도일道一이라는 승려가 찾아왔다. 도일은 절에 와서는 아무 말 없이 경도 보지 않고, 법을 묻지도 않고, 홀로 좌선만 하고 있었다. 회양이 그 모습을 보다가 도일에게 물었다. “좌선을 해서 무얼 하려느냐?”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회양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벽돌 하나를 가져다가 도일의 앞에서 묵묵히 갈기 시작하였다. “스님! 무얼 하시려고 벽돌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네.”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될 수 없다면, 좌선을 한다고 부처가 된다고 하던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레가 앞으로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 소를 때려야 하느냐?” 도일은 답을 하지 못했다. 회양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좌선을 배우려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데에 있지 않다. 부처를 배우려 한다면, 부처 또한 결코 불변의 형상을 갖고 있지 않다. 좌상坐相에 집착하면 불교의 이치를 통달할 수 없다. 좌불坐佛은 바로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좌선에 집착하여 취하고 버림이 있으면 결코 깨달을 수가 없다!” 59)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간화선看話禪 수행과 公案工夫」『무문관無門關』p. 387. 60) 최혜암崔慧菴 저著, 『禪關法要』 대한불교달마회 (1976년), 「안수정등岸樹井藤」에는 다음과 같이 혜암 선사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아프고 단 데에 빠져 들어갔다면, 어찌 아프고 달다 하는 생각이 일어날 여지가 있겠는가? 달다고 할 그 때에 벌써 그 독룡의 입 속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만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입으로는 꿀을 빨면서 손가락으로 독룡의 아가리를 가리킨다.”고 하리라. 그리고 “상신실명喪身失命이라. 즉 몸도 잃고 목숨도 잃는다.”고 하겠다.” (문인門人 묘봉 감수, 견우회 엮음, 덕숭산 혜암 대선사 법어,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 pp. 185~187) 61) 안수정등 화두는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爲優陀延王說法經』에서 빈두로돌라사 존자가 우타연왕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설 한데서 유래한다. 내용은 이렇다. “대왕이여,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廣野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크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 쫓기게 되었습니다. 미친 듯이 달렸으나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 언덕 위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고는 곧 나무뿌리를 잡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이빨로 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물의 네 벽에는 네 마리 독사가 있어 그 사람을 물려고 하였습니다. 또 이 우물 밑에는 큰 독룡毒龍이 있었습니다. 그는 옆에 있는 네 마리 독사와 아래 있는 독룡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뿌리는 곧 뽑힐 듯이 흔들리고 그 때 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꿀 세 방울이 그의 입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때 나무가 움직여 벌집을 무너뜨렸습니다. 벌들이 날아와서 그 사람을 쏘았습니다. 게다가 들에 불이 일어나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를 태웠습니다. 대왕이여, 광야는 생사를 비유하며, 떨어질 자는 범부凡夫를 비유하며,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비유하며, 언덕위의 우물은 사람의 몸을, 나무뿌리는 사람의 목숨을 비유합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밤과 낮을 비유하고 (그 쥐들이) 나무뿌리를 갉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순간순간 줄어드는 것을 비유합니다. 네 마리 독사는 사대四大를, 꿀은 오욕五欲을 비유하며, 그를 쏜 뭇 벌들은 나쁜 생각과 견해見解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 들불이 타는 것은 늙음을 비유하고, 아래 있는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62) 백용성(白龍城, 1864(고종 1) 전북 남원~1940) 선사는 한말·일제강점기의 승려·독립 운동가이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며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했다. 본관은 수원.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이다.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밀양 손씨이다. 1879년(고종 16) 16세 되던 해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상허혜조율사相虛慧造律師를 수계사授戒師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1884년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 및 보살계를 받고 칠불암七佛庵 대은율사大隱律師의 맥을 이었다. 그 뒤 지리산 금강대金剛臺와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수도했다. 1925년 대각사에서 글을 보다가 왼쪽 이 사이에서 자흑색의 사리舍利 일립一粒이 나왔는데 그 사리탑이 현재 해인사 용탑전龍塔殿에 있다. 1940년 2월에 대각사에서 77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63) 선문답의 견해 즉 경계를 숭산 노사님은 네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즉 <무여無如>, <일여一如>, <여여如如>, <즉여卽如>가 그것이다. <무여>는 생각이전의 세계, 본체이므로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입을 열면 그르치니 가만히 있는 것이고, <일여>는 주객이 일체요, 본성이 동체이므로 그것을 입을 열지 않고 나타내는 것이며, <여여>는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진리요, 본체 아님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요, <즉여>는 그 진리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 즉 올바른 행동과 생활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연필과 책을 들고 “연필과 책이 같은가 다른가?” 라고 물었을 때, <무여>는 입을 열면 그르치니 가만히 있는 것, 양구良久하는 것이고, <일여>는 일체가 동체이니 할이나 방 혹은 손가락을 드는 것이고, <여여>는 연필은 황색, 책은 푸른색이라 답하는 것이고, <즉여>는 연필로 글을 쓰고 책을 읽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즉여>가 바른 경계이다. 한때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이란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숭산 노사님은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고 하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가 진리이긴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진리로 남을 수밖에 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리의 올바른 ‘기능’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 진리를 통해 나와 중생, 이 세계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그것이 ‘실용’이라는 것이다. (숭산행원선사 법어집,『천강에 비친 달』) 숭산 노사님의 제자는 서양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 매우 분석적이다. 명쾌하고 신선하다. 64) 이에 대해 선도회 지태 거사님이 “숭산 스님은 전강 스님보다 늦게 깨친 걸로 알고 있는데, 먼저 깨친 분들의 경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평할 수 있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필자는 “후학들을 지도 할 때 어떤 예를 드는 것이 좋은데, 그 예로서 지나간 분들의 경우를 드는 것이 생생합니다. 특히 가까운 시대를 살다 가신 분들을 예로 들면 더 생생하겠지요.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소위 깨치기 전 상황과 깨친 후의 상황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즉 그 경계라는 것이 당시 한때의 경계이지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맞다 틀리다 하고 논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공부하는 과정이고 방편일 뿐이지, 당사자 분들의 흠을 찾자는 것은 아닙니다. 전강스님은 당시 다른 분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었고, 후학들이 뒤에 더 진보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하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많은 분들이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에 비한다면, 후배들의 비웃음을 기뻐하며 미소 짓고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보다 못한 제자는 스승도 바라지 않습니다. 임제스님은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답하였다. 65) 대어와 별어의 준말로, 대어란 상대가 대답을 못할 때 질문한 쪽에서 대신 답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대답이 신통치 못할 때 별도의 답을 질문한 쪽에서 하는 것. 66) 대혜종고 선사가『벽암록』을 태워 버린 일은, 송고를 통한 공안선의 이해와 관계가 있지만, 공안집과 그에 따른 모범답안의 존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문자의 병폐를 보여준다거나, 문자가 깨닫는 것과는 무관함을 보여준다거나 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먼저 대혜종고 선사는 최소한 그 책에 대해 달통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굳이 비교하자면,『벽암록』은『무문관』보다 먼저 결집되어서 아직 간화선이 자리 잡기 전이어서 그런지 선문답의 소개에 그치고 있다. 즉 사례나 판례 학습에 도움이 될 뿐 선 수행 교과서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67)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의 제자이며,『벽암록』의 저자인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그가 지은『벽암록』100칙則에 <조주무자> 화두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오조법연 선사에 의해 새롭게 제창된 <조주무자> 공안을 중심으로 한, 간화선 수행 체계는 대를 걸러 원오극근 선사의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에 이르러 확립되었는데, 이 과정은 <무>자 공안을 20회 이상 언급한, 주로 사대부들과 귀양지에서 16년 동안 서신 교류한 내용이 담긴 대혜 선사의『서장書狀』을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중략) 따라서『조주록』에서 앞부분만을 취해 <조주무자> 화두를 새롭게 제창한 법연 선사의 손자 제자인 대혜종고 선사가 주로 재가在家의 사대부士大夫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을 위해 새롭게 공안선의 참구 방법과 수행 체계를 확립했으며, 훗날 무문혜개 선사도 이런 흐름을 따라『무문관』 제1칙의 본칙本則을 통해 이 <조주무자> 공안을 완결하며 간화선 수행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박영재, 「간화선 수행체계의 확립」『두문을 동시에 투과한다』, pp. 320~322) 68) 명법,『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p. 18. 69)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60. 70) ‘너 모가지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의미는 고양이 목을 자르면 인과가 있어서 자기도 당할 텐데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뜻으로 하신 것이라고 근일 스님은 밝히고 있다. 71) 근일 스님이 조계사 수선회 용맹정진 법회에서 한 법문으로 ‘근일 선사 공부담’ 이란 제목으로 선도회 카페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cafe.daum.net / younghasanbang) 토론방에 소개되어 있다. 72) 사실 이 화두의 핵심은 따로 있다. 거사인 대원 문재현 선사와 숭산 선사와의 문답을 보자. “(남전 선사님의 참묘법문을 들고) 대원 거사라면 어떻게 그 고양이를 살리겠소?” “기둥을 안아 보였을 것입니다.” “틀렸어 알기는 무얼 알아.” “숭산 선사님,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다시 한 번 물어 주십시오.” “거사라면 어떻게 고양이를 살리겠소?” “남전 앞에 목을 쭉 빼어 늘어뜨리고 앉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오. 왜 아까는 그렇게 이르지 않았소.” 대원 문재현 선사님은 문답을 나누고 나오시면서 홀로 뇌이셨다. “기둥을 안아 보인 도리와 목을 쭉 빼어 늘어뜨린 도리가 다르지 않거늘......” 73)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p. 145. 74) 枯木依寒巖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대니, 三冬無暖氣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도다. 75) 이때 근일 스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자리를 고쳐 앉으셨다고 한다. 그 뜻은 “사실 여러분들이 안 쫓겨나려면 입 벌리지 말고 공부만 했으면 됩니다. 고목이 한암하니 한기가 돈다는 말도 안하고, 교태를 부리나 말거나 정진만 했으면 됩니다. 공부가 안 깊어졌기 때문에 그런 헛소리를 하지, 공부가 깊어지면 그런 것 말할 필요가 무엇 있습니까? 들리지도 안합니다. 정말로 진실로 열심히 했다면 들리겠습니까? 뜨거운 것이나 차가운 것이나 똑 같습니다.” 라고 근일 스님은 설명하고 있다. 76) 여기서 부지런한 해는 근일 스님의 勤日에서 따온 것인데, 의미를 두기 위해서 그렇게 읊었다고 하신다. ‘여여’의 경계이다. 77) 호리유차毫厘有差면 천리현격千里懸隔, 즉 ‘약간만 틈이 있어도 천리가 멀어진다.’에서 인용하신 것으로 경계가 다르다고 차별심을 내셨다. 78) 이 경계에 대한 논의도 ‘근일 선사 공부담’ 이란 제목으로 선도회 카페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 cafe.daum.net / younghasanbang) 토론방에 공개되어 있다. 79) 밀암걸密庵傑, 천동함걸天童咸傑, 밀암함걸(密庵咸傑, 1118~1186) 선사의 법명은 함걸이며, 응암담화應庵曇華 선사의 법제자로 복주福州 정씨鄭氏 자손이시다. 그 어머니가 여산廬山의 스님 하나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스님을 낳았다. (오가정종찬(상)) 80)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평한 이도 있어 소개한다. ‘어설픈 공부경계 조금 나타났다고 해서 20년 묵은 납자를 들었다 놓았다 해봐야 그것 역시 하찮은 중생경계에 불과하다. 물론 고지식하게 원론만을 죽어라 고수한 그 납자에게 큰 허물은 있다. 젊은 딸에게는 그 답변이 맞다. 하지만 딸에게 한 법문을 그 어머니는 자기에게 한 법문으로 이해했던 것이 잘못이다. 만약 그 어머니가 와서 안겼더라면 천동함걸(1118~1186) 선사처럼 당연히 그 납자도 이렇게 답변했을 것이다.’ “한 줌의 버들가지를 거둘 수 없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달아두노라.”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원철스님,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36> 노파가 암자를 태우다」, (현대불교뉴스, 2005.09.28)). 81) 퇴옹退翁 성철性徹, 성철스님 법어집 『본지풍광本地風光』 pp. 181~186. 82) 활안 스님의 내가 만난 선지식, 법시사 편집장 이희익 대선사 (현대불교신문, 2009.08.19). 83) 최혜암崔慧菴 저著, 「어묵동정語默動靜」 『禪關法要』 대한불교달마회 (1976년); 문인門人 묘봉 감수, 견우회 엮음, 덕숭산 혜암 대선사 법어,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 『바다 밑의 진흙 소 달을 물고 뛰네』 pp. 210~212) 84) 법륜 스님 지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답답하면 물어라』 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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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문 끝나고 해 주신 말씀 "열심히 공부하세요" 라는 말씀이 기억됩니다.
이번 화두이야기는 지금 무문관을 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앎'보다는
재미가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을
한 자로 줄이면->"너"
두 자로 줄이면->"또 너"
세 자로 줄이면->"역시 너"
네 자로 줄이면-> "그래도 너"
다섯 자로 줄이면 ->"다시 봐도 너"
여섯 자로 줄이면 ->"아무리 봐도 너"
일곱 자로 줄이면 ->"뭐니뭐니해도 너"
여덟 자로 줄이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이라고 합니다.
술도 못하고 재미없게 산다고 하는 저에게
손꼽친구가 카톡 문자로 오늘 좋은 글 하나 보내주어 인용해 봅니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
"무상!" ㅋㅋ
영하산방 공부하시는 도반님들 모두입니다.
공부하시는 모든 분들...
전원 법사님! 원고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출퇴근 가방에 넣고 다니며 읽고 다닙니다!
오자마자 석옥 스님, 사세게가 여운이 남아 한 쪽 올렸습죠!^^
건허 법사님이 꽤 지루 하셨을듯...ㅋㅋ
제 속을 알아주시는 분이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냥 딱 앉으면 되는 것을~~ ㅋ
ㅋㅋㅋㅋ
이번 <화두이야기>는 정말 재미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려운데를 긁어 주는것과 아예 가렵지 않은 것과는 天壤之差"라는 말씀 절대 공감 입니다.
수고 해주신 법사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 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