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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 선교사가 제게 한국적인 기운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적인 기운이 아닙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기운은 천국적인 기운입니다. 주님이 주신 기운입니다.
저도 유약한 사람이고 평소엔 힘없는 사람이며 자신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항상 자신만만하고 담대하게 견고히 세워주십니다’ 라고요
또 어떤 분은 저더러 신비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지에 와서
사람 머리에다 안수를 하는 것 봤습니까? 아니면 내년에는 당신이 큰 복을 받는다고
예언을 했습니까? 동남쪽으로 땅을 사면 10배로 값이 오를 거라고 말했습니까?
그렇게 안했음에도 사람들이 저보고 신비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기독교 자체가 신비입니다. “생명(조에)”이란 말 자체가 신비입니다. 육체의 생명이나
정신적인 생명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발휘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산 떡이라는 이 자체가 바로 신비입니다.
아니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부터가 신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된다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그것이
믿어진다는 사실 또한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고 말합니다. 요즘 제가 천국의 기초수급자도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요한의 메시지는
예수님과 같지만 그는 물세례만 줘서 예수님께 까지 이끌었지만 주님은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세례를 받아 주와 한 몸 한 영이 된 천국인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내주 역사가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아니며 이방인일 뿐입니다.
우리 육체가 귀신의 집이 되어 있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깨끗하게 해 주셔서 성령을 담을 수 있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창1:2절에 수면 위에 운행하셨던
것처럼 내 속에서 운행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과 뜻 속에서
잘못된 생각을 바꾸십니다. 어둡던 생각을 밝게 합니다. 더러운 생각을 청결하게 합니다.
물론 그 속에 그리스도의 피도 역사하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도 역사합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대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지금 신비롭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잠을 잘지라도 그분은 졸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 때에
최소한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자도 주님은 일하실 터인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 이만...’
이 정도는 보고하고 잠을 자야 할 겁니다. 그분은 꿈속에서도 일하십니다.
어느 날 아침에 한국에 있는 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그 분이 ‘오늘 아침 꿈에
김목사가 보이더니 전화할 줄 알았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며칠 전에는 꿈에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세례(침례)에 대해 밤새 꿈을 통해 자세하게
잔소리를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자다가 깨서 혼자 중얼거리기를 아니 그것은 이미 제가
잘 아는 사실인데 밤새 꿈에서 다시 강의를 하십니까? 하고 잠이 들었는데 또 계속됩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의 꿈에 내가 보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를
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의 케이블은 온 우주에
쫙 깔려 있습니다. 성령님은 무소부재 하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통은
언제 어디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비쿼터스의 하나님이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복식호흡을 해서 공기가 우리 속에 들어와 이를 압축하면 기운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입의 기운이 우리의 생명의 에너지가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에 연결되는 것이 왜 신비주의입니까? 그러면 당신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비 신비주의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포도나무라 하시고 눈에 보이는 우리들에게 가지라
하시면서 믿음으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루리라 하는 이 말씀이 왜 신비주의라고 치부하고 맙니까? 기독교가
100년 이상이 되면 문화화 되고 만다는 말을 하는데 어쩜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미국교회도 걱정스러운 것은 일반이지만 지금 미국목사들이 한국교회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생명이 성령에 의해 섞이고 있음은 분명
신비한 일입니다. 만일 신비함을 마다한다면 그러면 왜 기도합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어 진리를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는 길입니다.
내가 나를 못 믿으니 주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니 힘이신 주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내 뜻이 잘 못 됐으니 주님의 뜻에 맞추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해 봤지만 이루지 못했으니 이제 주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나를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그 자체가 신비한 일이죠.
저는 신비주의라는 소리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망에 의해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려면 반드시 그래야 됩니다.
주의 사람들은 이파리가 무성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파리가 무성해야지
누군가 그 비결 그 산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누가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요즘은 그렇게 많은 숫자가 모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뭐 총회장한 사람도 아니고 한국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독야청청
돌아다니기만 하여도 저 친구가 뭐 때문에 이파리가 저렇게 푸른가? 생각하게 해야죠.
그것이 바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려나리라.’
(요7:38)고 하신 분명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성령이 천국의 기초수급이라니까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라 할지라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간증이 전혀 없고 특히 찬송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본문4장에 들어갑시다. 1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합니다. 욥을 공격합니다. 네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분을 보지 못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 누가 와서
당신이 잘못해서 그렇지. 이렇게 나오면 당연히 열을 받죠? 엘리바스 다음에
소발과 빌닷은 욥의 자녀들까지 공격합니다. 저는 그런 소리 왕왕 들었어요.
분명히 원인이 있다. 그건 인과응보다. 이런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소리 제일 많이 했겠어요. “당신이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아니면 우리 집에 문제가 없는데 당신이 문제야” 그 이름은
바로 엘리바스 남편이며 엘리바스 아내입니다. 아마 여러분 곁에도 있겠지요?
2절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네가 남의 말을 많이 들으면 싫증이 나겠지?’ 약이 오르겠지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지 않고 있을 수 있겠어?'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할 얘기를
남의 경우를 들어서 얘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제가 할 말이 많아서 설교를 길게 하잖아요.
어떤 집사님이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이 교회에 간혹 오는데 설교가 너무 길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혹시 집사님 생각이 아닙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안에서 송사와 변명이 있고 자문자답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자기와 똑같은 경우를 보면 상대를 확 찔러 됩니다.
3절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절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절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목사의 설교에 사모가 이렇게 따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는 잘하고 당신 아내 하나 사랑 못해요.
당신 아내가 좀 부족하더라도 좀 못 참아요. 남에게는 그렇게 천사처럼 하고,
남의 문제는 해결해 주는데 당신 문제는 왜 그렇게 안 됩니까?’ 바로 제 얘기였죠.
간혹 가다가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가 복을 받아 돈 많고 잘 살아야 성도들도
복을 받는다’ 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 말이 긴가 민가? 맞는 말인가?
맞지 않는 말인가?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빈부관이 확실하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 나는 가난한 자야
그러나 다윗처럼 주님이 나의 인생의 전 자산이야 주님이 나의 기업이며 영광이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붙잡아 주시면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아 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겁니다.
악을 쓰면서 부르지 않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마음은
저 쪽에 있는데 내게 달라붙지 않으니 ‘좋다 네가 싫으면 나도 할 수 없지’ 돌아서는
억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난 나사로와 같이 살지만 내가 가는 길이 백번 옳다,
나는 집도 없고 아무 재산도 없지만 내가 가는 길이 옳다. 왜냐하면 주님이 인정하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만 이와 같은 가치관이
정립이 되기 위해 말씀이 체화가 되어 주의 영광을 보기까지는 멀고 험합니다.
인내로 길고 긴 광야의 길을 걷고 또 걸어야 합니다.
6절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네가 의뢰하는 것 믿음, 신뢰 그것 하나님께 경외함에 있지 않느냐 네 소망 곧
바램은 네 행위를 완전히 하는데 있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정말 열 받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네가 평소에 하나님께 경외하는 것이 전부 아니었느냐?
네가 늘 바라는 것이 행위를 바르게 하려고 조심하지 않았느냐? 속을 건드립니다.
그럼에도 왜 이지경이 되었냐? 하고 정말 속을 확 뒤집어 놓는 거지요.
7절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네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이 있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사실 원인이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나오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저항입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악과
독기가 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 갖고 있는 원죄로 말미암은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당하고 아픔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뿜어내는 자범죄의 독기는 다 있습니다.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원죄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런
인간을 교육시키고 가르치면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 목사들 많지 않습니까?
그 원죄에 받은 상처와 고통 이런 것이 한데 엉켜서 우리에게 악감정이나 독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한번 참아 보려고 ‘나는 그렇게 안 해 그래선 안 돼’ 하면서
그만 어떤 상황이 닥치면 기어이 내 뱉고 말아요.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하고, 그런 사람에게 충성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익이 있고, 교회 사업에도 유익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는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거듭나서 성령을
받지 않고 열심을 내고 충성하는 듯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그런 분들은 거의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분들입니다. 일종의 오기로 교회가 위기에
있을 때 ‘목사님 제가 다 감당할 테니 그 까짓 백 명 이 백명 나가면 어떻습니까?
새로 시작합시다. 내 보내버립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관망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목사가 갈팡질팡하는데 오기 있는 장로나
집사를 보고 천군만마 얻은 것 같아서 용기백배해 내 질러버리면 큰 일 나는 겁니다.
제가 다닌 어느 교회에서 500만원 정도 되는 일을 가지고 한 달씩 의논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질 급한 제가 ‘목사님 그것 하는데 얼마나 듭니까? 500만원,
그것 제가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오백만원이든
단돈 5만원이든 서로 의논해야 됩니다. 그 일로 다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아는 사람은 틀린 사람을 기다려주고
설득해서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교회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입니다.
저도 제 사역을 통해 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늘 턱도 없는 부족함과
한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그의 이름을 부르짖고 울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소원하는
작품이 되어가려고 힘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에서 생명의 역사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일 20년 전이라면 아마 대서특필하여 선전을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주님,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눈물을 삼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자기 한계를 깨달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꼴값을 잘하는 제게 말씀을 주셔서 진리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지금까지 많은 사건과 많은 분들을 만나는 중에 더욱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고 배우면서 오늘까지 더욱 겸손하게 엎드리도록 하십니다.
여기저기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덤덤하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너무 당연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은혜의 보좌로 부르시고 잔소리 하시던 그 음성을
듣고 드디어 하늘가는 밝은 길이 환하게 보이니 이게 바로 의인의 간구란 사실을
깨닫고 지렁이와 같은 자에게 눈과 귀와 입을 달아 주시고, 조금 안다고 기고만장
또는 자유를 육신의 소욕으로 삼는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하시고 드디어
그 영광의 보좌에 한 걸음 한 걸음씩 끌어당겨 다다르게 하셨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