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23일 월요일 ∼ 1월 25일 수요일 2박 3일 여행지 : 나고야, 교토, 오사카, 나라, 이세
2006년 1월 23일 월요일 나고야, 교토 인천공항 출발, 나고야 공항 도착, 점심 뷔페, 고층에서 본 나고야 오아시스 21, 센트럴 파크, 교토로 이동, 눈 풍경, 교토 도착, 청수사, 빠징고, 갈비구이 석식, 교토의 밤 풍경, 도큐 호텔
* 인천공항 출발
대한항공 KE757 오전 8시 2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 넷이 함께 떠난다. 가족사적으로 의미 깊은 여행이다. 우선 큰 아들이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서 발령을 받아놓고 1학기 근무 후, 군복무를 마치고 지난해 10월에 다시 복직했다. 작은 아들은 금년에 약대 졸업반으로 바로 며칠 전 1월 19일에 약사고시를 치렀다. 즉 큰아들 교사 발령과 작은 아들 약사가 되는 것에 대한 부모로서의 축하선물인 셈이다. 아울러 큰 아들이 역사 전공 교사이므로 일본 역사 탐방을 요청하여 추진한 여행이다. 새벽 5시에 콜택시를 불러 수원에서 인천공항까지 8만원에 갔다. 아침 최저 영하 8도, 추위와 촉박한 시간, 또 네명이라는 조건들이 리무진(1인당 12000원)보다는 콜택시를 선택하게 했다. 6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병무출국담당부에 가서 작은 아들의 출국 신고서를 제출했다. 군 미필자이기 때문이다. 오전 8시 25분 비행기는 정상으로 정시에 이륙했다. 날씨가 쾌청하여 평화로운 창공이다. 강릉을 지날 때 창밖의 태백산맥 준령이 장관이다. 눈 쌓인 산맥은 록키 산맥을 연상케 한다. 나는 자랑스러웠다. 내가 외국 여행 중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던 장엄한 설산이 지금 내 눈앞에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내 조국, 내 나라 국토의 한 자락이 저리 고우면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감동이 아니겠는가. 설봉, 운무에 젖은 높고 낮은 산이 끝나자, 오전 9시 10분경 한국과 나고야 사이 동해 바다로 비행기가 진입하자 운해 설경이 또한 장관이다. 인천에서 나고야 공항까지는 1시간 45분 소요, 나고야에 오전 10시 15분 도착 예정이다. 우리 가족의 좌석은 48C, D, E, F로 48F가 창가 좌석이다. 두 아들이 좋아하니 참으로 흐뭇하다. 창공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보아도, 보아도 비경이다. 일본 영해에 이르러서는 기류가 심하여 기체가 좀 흔들렸지만 하늘은 평온했다. 일본과는 시차가 없어 우리와 똑같은 시간이다. 기내조식으로 나온 햄버거와 쥬스를 먹고, 그리 멀지 않은 비행거리이기에 아쉬움을 남긴 채 나고야 공항에 도착했다.
사진:인천공항에서 나고야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게이트로 가며.우리 가족
* 나고야 공항 도착
나고야 공항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 지은 지 2년쯤 되었다는데 하얀 색 건물로 아담하다. 승무원 말로는 바깥에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하다는데 공항 내부는 따뜻하다. 입국 절차는 쉬웠다. 그것은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서 그렇단다. 30대, 40대 여자에 대해서만 불법체류 때문에 엄격할 뿐 그 외는 까다롭지 않다. 최근에 다녀온 호주나 뉴질랜드보다 훨씬 입국이 수월했고 시간도 단축되어 좋았다. 그런데 우리 일행을 담당한 버스가 뒤늦게 왔다. 바람부는 공항에서 기다리며 물어보니, 이 나라는 손님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어야 버스가 온단다. 그것도 한국에서 따라간 가이드가 전화를 해야지만 온다고 한다. 처음에는 황당하여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몇몇 사람들이 따졌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이 나라의 고유한 문화였다. 미리 와서 버스를 들이대고 있으면 공항 입구가 어떻게 되며, 주차료가 비싼 나라에서 기약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는 말에 대하여 조금은 불친절한 마중 같지만 성숙한 문화라고 해석되었다. 버스는 곧바로 왔다. 50인승 버스에 가이드 김정훈님까지 총 40명이 탔다. 버스에 꽉 찼다. 대형버스인데 앞뒤 좌석 거리가 좁다. 유럽이나 호주 쪽의 버스와는 다르다. 일본인의 체격이 작아서일거라고 이해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인 남자 기사다. 11시경 공항을 떠나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사진:나고야 공항에 도착하여 본인 김윤자
* 점심 뷔페
나고야 시내로 이동하여 점심 뷔페 식당으로 갔다. 나고야는 일본에서 세 번째 큰 도시인데도 첫 이미지가 검소하고 소박하다. 모든 풍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화려함이 드러나지 않는 도시다. 우리가 간 곳은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 보이는 11층 건물의 뷔페 식당이다. 11시 30분에 도착하여 12시 30분까지 높은 곳에서 나고야 시가지를 바라보며 일본 음식을 먹었다.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복합 상가 건물이라서 깨끗하다. 식당 상호가 당도옥, 우리가 먹은 뷔페 식사는 1인당 4800엔, 꽤 비싼 값이다. 화폐가치가 1000엔을 8700원에 샀으니 8.7을 곱하면 4만원이 넘는 식사다. 물가가 비싸다는 것은 알고 왔지만 최초로 느끼는 비싼 물가다. 음식은 대체로 짜고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았다. 계란 요리가 많고, 느끼하지 않아 좋았다. 그러나 음식값에 비하여는 소홀한 식단이다. 건물이 호화로워서 그러리라. 아무튼 전망이 참 좋다. 바로 아래로는 푸른 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설산이, 또한 나고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나고야 점심 뷔페 식당 앞에서 본인 김윤자
* 고층에서 본 나고야
나고야는 한국의 대전과 맞먹는 도시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에서 세 번째 도시라 하니, 그런데 높은 건물은 어쩌다 하나 보이고 모두 저층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와 색상이 모두 검정에 가까운 회색이다. 낮게 지은 것은 지진 때문이며 색상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이 나라의 검소한 국민성 때문이다. 일본의 장점은 골고루 개발된 것이라는데, 어느 곳을 달려도, 도시든, 농촌이든 1시간을 달려도, 두 시간을 달려도 지금과 동일한 풍경이라 한다. 높고 낮은 구릉도 없고 다림질한 땅처럼 평평한 땅에 똑같은 높이로 지은 집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은 상당히 높고 아름답다. 고층에서 본 한낮의 나고야는 평온하고, 화려하지 않은 안정감을 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걸어서 바로 앞의 오아시스 21공원에 갔다.
사진:나고야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한 11층 건물에서 본 나고야 시가지
* 오아시스 21
최근에 지은 특수공법 조형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파란 나무 물결 가득한 센트럴 파크 바로 곁에 하얀색 입체조형물이 고층 원형 라인으로 얼기설기 세워져 있다.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물의 우주선' 과 지상 공원인 '녹의 대지', 다목적공간인 '은하의 광장'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현대적 관광지다. 처음에는 별로라고 보였는데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돌고 도는 계단이며 천장의 투명 유리에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눈부신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지하 공간에는 공룡 동상을 쇠줄로 엮어 만들어 두 개 세워 놓은 것이 전부지만 위로 환히 뚫린 유리창이며, 자작자작 내려들어오는 햇살이 예쁘다. 주변으로는 물건을 파는 상가가 즐비하여 편리함까지 갖추어져 있다. 미술관도 있는데 시간 관계로 관람하진 못했다. 이색적인 공간이다.
사진:나고야 오아시스 21... 독특한 공법으로 지은 첨단 조형물...남편과 큰 아들과 함께
* 센트럴 파크
나고야 번화가 도심에 있는 공원이다. 미국식 이름 그대로 Central Park 라고 지하 계단 입구에 표기되어 있다. 대로변 한 블록을 다 점유하는 긴 공원이다. 직사각형의 대형땅을 할애하여 초록 상록 나무를 심어 도심의 환경을 지키고 있다. 나무 종류가 독특하다. 한국에서 보는 느티나무 잎사귀인데 파랗다. 지금은 1월 하순, 깊은 겨울인데, 이곳도 같은 계절인데 나고야의 센트럴 파크는 한 여름처럼 나무들이 무성하다. 동백꽃도 피고, 물 분수도 꾸며놓고, 잘 가꾸어진 공원이다. 그런데 어느 나라든 노숙자는 있다. 잘 산다는 일본 땅에도 노숙자가 있어 오아시스 21 건물 옆, 빈 녹지 공간에 길게 누워있다. 정오의 따슨 햇살에 뒹굴며 자고 있다. 한켠에서는 트럭을 몰며, 또는 사무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데 어두운 구석에서는 벌레처럼 살고 있다. 상큼한 공원의 향기가 짙푸르다. 코와 눈과 발이 즐거운 공원이다. 한국의 여의도 공원보다 폭은 좁은데 길이는 더 길다. 참 아름답고 싱그럽다.
사진:나고야에서 점심식사 후 오아시스 21 앞에 있는 센트럴 파크 분수 연못.본인 김윤자
* 교토로 이동
나고야에서 교토까지는 2시간 거리다. 오후 1시 30분에 나고야를 출발했다. 나고야는 50년 이상된 건물이 없다. 2차 대전 전쟁 중에 폭격 맞아서 모두 다시 지은 건물로 길어야 60년된 건물이다. 그러나 교토는 그 반대다. 한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아 수백년된 건물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기대되는 도시다. 나고야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사진:나고야에서 교토로 이동하며 본 나고야 외곽의 시가지 풍경.화려하지도 않고 높지도 않은 검소한 주택들
* 눈 풍경
2시경부터 눈이 온다. 2시 30분에는 눈이 펑펑 온다. 나고야에서는 화사하고 바람부는 상쾌한 날씨였는데, 그리고 나고야 도심 건물에는 영상 4도, 공항 근처는 영상 3도라고 전광판에 씌여 있었는데, 믿기지 않는 설경이다. 같은 나라에서 기후가 이렇게 다를까. 나고야와 교토 사이가 그리 멀지도 않는데 그 사이 공간에서 이렇게 다른 차이가 날까. 신비롭다. 상록수로 짙푸른 산에 눈꽃이 곱다. 동물보호철조망도 쳐 있다. 아마 깊은 산중 도로인 것 같다. 고속도로변에 눈을 치워서 쌓아둔 눈덩이가 집채만하게 늘어서있다. 터널도 여러 개 만났으니 산악지대다. 오후 3시, 민가와 논이 보인다. 잘 정리된 논에는 벼농사를 지은 흔적이 보인다. 눈 속에 덮인 농토와 농촌 주택이 간간이 보이고 눈발은 쉼없이 흩날린다. 휴게소에 들러 3시 20부터 30분까지 10분 휴식했다. 날씨는 포근하다. 사실은 이보다 더 따뜻한데, 금년이 20년만에 닥친 한파란다. 니가타 지방에는 지붕 위에 4m 50cm의 눈이 쌓여 사람이 지붕에 올라와 치워도, 치워도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80세 할아버지가 평생에 처음 본 눈이었다 하니, 지금 내리는 눈 풍경은 일본 기후로는 당연하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햇빛쨍쨍 내려 눈 한 방울 없는 땅에서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눈 내리는 땅으로 이어짐이 신기하지만 아직도 1시간을 더 가야 교토다. 바깥 풍경이 더 아름다운 관광이다.
사진:나고야에서 교토로 가는 중 눈이 내리고...눈 덮인 농촌의 논과 산
* 교토 도착
15년전만 해도 북해도와 오키나와는 일본 땅이 아니었는데 강제로 점령하여 일본 땅이다. 북해도 하나만도 한국의 4/5 크기, 남한에서 경상도를 뺀 크기다. 메이지 유신 때 흡수해버렸다. 처음엔 오키나와 민족, 북해도 민족이 나뉘었는데 현재는 본토와 똑같이 산다. 지금 지나가는 곳은 중간 지대로 안성 같은 도시다. 이제 곧 교토에 도착하는데 작은 도시 근교에는 농작물을 짓고 있다. 토마토 2개에 사철 150엔, 대파 1단에 사철 500엔이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농산물 가는 동일하다. 그래서 농촌도 잘 산다. 잘 발달된 농촌에서 고소득으로 살 수 있어 도시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교토 시내나 외곽 농촌이나 차이가 없다. 교토시까지 진입 직전 브리지스톤이라는 일류타이어 공장을 보았다. 교토 시내에는 나고야와는 반대로 새 건물이 없다. 전쟁을 한 번도 치르지 않아 몇 백년된 건물이 많다. 천년고도, 한국의 경주와 같은 도시다.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 수도로 천년을 지켜온 도시다. 할아버지도 우동집, 아버지도, 아들도… 대로 물려 내려오는 우동집도 있다. 100년된 오뎅국물, 매일 조금씩 남겨 다시 물을 붓고 끓임으로 100년된 국물이라는데 1인분이 3만원이란다. 이 나라는 전통을 그대로 가업을 이어나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는 어느새 청수사 앞에 다달았다.
사진:교토에 도착하여 청수사에 올라가는 골목길에서.기쁘고 행복하여 두손을 흔들며... 본인 김윤자
* 청수사
국보로 지정된 사찰이다. 다리가 172개로 받쳐든 본당, 반은 땅에 반은 허공에 나무 기둥으로 받쳐 있다. 오후 4시에 도착하여, 5시 30분까지 해질녘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관람했다. 본당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이 있고 첨탑 건물과 주황색 건물이 입구에서 외객을 맞는다. 역사 깊음이 드러나는 풍광이다. 교토시내 풍경이 아름답다. 큰 타워가 보이고 지붕들이 노을에 젖는다. 화려한 연꽃등과 지붕에서 떨어지는 약수물이 장관이다. 절벽 난간에 나무기둥을 얼기설기 쌓아올린 모습이 기이하다. 오르내리는 절 입구의 골목길 풍경도 화려하다. 절 뒷산에 심은 동일한 수종의 나무가 똑같은 다리 모양으로 올곧게 서서 이방인을 배웅한다. 한국보다 따뜻한 나라이기에 동백꽃도 피어있고, 고사리도 푸르다. 역사적으로 교토가 오랫동안 수도였기에 그 향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본당의 까만 지붕도 오랜 연륜을 드러내고, 주변의 집들도 고풍스럽다. 내려올 때는 오리가 있는 작은 연못을 지나왔다. 해는 한국보다 빨리 떨어져 5시경에는 어둠이 서리고, 우리가 버스에 탔을 때는 완전한 저녁으로 도시의 불빛이 길안내하고 있었다.
사진1:교토 청수사 입구에서.석양에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첨탑.큰 아들과 함께
사진2:교토 청수사 본당 건물 전경.지붕과 나무기둥이 독특함.화사하게 웃는 큰 아들
* 빠징고
일본은 모두 예약 문화다. 저녁 식사할 식당에 도착했을 때 20분 정도 빨리 도착하여 기다리는 동안 식당 곁에 있는 빠징고 장에 들어가 구경했다. 난생 처음 본 도박장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담배를 태워 문 남녀 성인들이 게임기 앞에 앉아 현란한 빠징고를 한다. 우리는 숨이 턱턱 막히는데 그들은 어찌 견딜까. 공간이 좁아 걸어다니기도 힘든다. 잠시 구경하고 나왔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1000엔짜리 한 장을 넣고 했는데 잃었다고. 가이드는 말한다. 백발 백중 잃는 곳이라고. 그러니 도박이 아니겠는가. 발달한 문명국가의 소슬한 그늘을 본 느낌이다.
사진:저녁식사를 기다리며... 한 건물의 옆에 있는 교토 도심 빠징고장을 구경하며.남편
* 갈비구이 석식
우리가 들어갔을 때 정갈하게 식단이 차려 있었다. 조금 일찍 왔다하여 기다리며, 이상한 나라라고 투덜거렸는데 앉자마자 먹을 수 있도록 차려 놓은 식탁을 보며 성숙한 음식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중에 날라다주는 것이 없다. 갈비도 이미 접시에 담겨있어 불판에 우리가 구워먹기만 하면 되고, 나머지 밑반찬은 추가로 더 달라하면 무조건 돈을 내야 된다는 말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 조용히 먹기만 하면 된다. 갈비가 참 맛있다. 구워서 소스를 얹어 상추에 싸서 먹는데 고기도, 상추도, 된장도 참 향기롭다. 일본 식당은 수저가 없다. 젓가락을 사용하며, 천황집에만 숟가락이 있단다. 천황은 백제에서 와서 숟가락이 우리처럼 있다는 말에 오랜 옛날 우리가 전수해 준 문화를 느꼈다. 모두 젓가락 문화인데 유일하에 굴에서만 한국 전통을 따름이 신기하다. 밥을 들고 먹어야 한다. 한국과는 반대다. 들고 먹으면 혼나는데 이곳은 놓고 먹으면 혼난다. 그랬다. 갈비구이 석식에 나온 된장국도 우리는 들고 후르륵 마셔야 했다. 아늑한 식당, 맛좋은 식사였다. 대장군이라는 한문 글자가 건물 상호로 붉게 눈에 띈다.
사진:교토에서 저녁식사로 먹은 갈비구이.큰 아들과 작은 아들
* 교토의 밤 풍경
다른 해는 겨울에 와도 포근했는데 금년은 춥고, 특히 오늘은 상당히 추운 날씨라고 한다. 그러나 추운 곳에 살던 우리는 별로 춥지 않았다. 다만 밤거리가 어둡다는 것, 가로등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놀랐다. 거기에다 좌회전과 우회전이 우리와 반대인 사거리에서, 버스가 회전할 때는 마치 맞은편 차와 충돌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회전시에는, 이곳에는 좌회전시, 반드시 파란불이 켜져야 돌아간다. 좌회전시에는, 이곳에선 우회전시, 도로 중앙에 이만큼 나와 있다. 자전거가 많은 나라다. 그에 따라 자전거 등록 번호를 받는데만 500엔이 들고, 한 대 값이 9500엔, 한화로 85000원인데 바퀴가 빵구나면 2천엔, 튜브 하나에 5천엔, 쉽게 계산하면 곱하기 10을 하면 한화로 대충 맞으니 자전거 값에 거의 맞먹는 수리비다. 번호판을 떼어가면 벌금을 문다. 중앙선이 황색이다. 절약하는 나라임을 알게 하는 어둔 거리 풍경이 다시 한번 우리도 절약해야겠다는 다짐을 준다. 이런 깨우침은 교토에서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외국 여행 중 밤거리를 보면 한국처럼 휘황찬란한 조명은 없다. 가로등이 없고 자동차 불빛으로 가거나, 있어도 간격이 멀다. 어두워서 아름다운 거리, 우리도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사진:저녁 식사 후 호텔로 이동하며 본 교토의 밤거리 풍경.불빛 조명이 한국보다 어두운 것은 사실...
* 도큐 호텔
저녁 7시경 호텔에 갔다. 상당히 크고 높다. 좋은 호텔이라고 한다. 직사각형으로 둘러싸인 건물 중앙에, 연못과 작은 폭포가 특이한 풍경이다. 대나무 숲까지 참으로 아름답다. 객실 서비스도 좋다. 기모노 가운과 실내화가 있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서비스 품목이다. 화장실에 비데가 있어 좋다. 동양권이라서 그럴까. 서비스 요금, 팁을 놓아 두는 것도 아닌데 대단히 시설과 서비스가 좋아 아름다운 밤이다. TV 방송 채널은 모두 일본 방송이다. 저녁에는 미국, 한국 방송이 전혀 없더니 아침에 4번 채널에서 CNN 방송으로 부시 미국 대통령이 어느 대학에 가서 강연하는 것을 Live로 중계했다. 그래도 좀 낯익인 언어라서 알아들을 뿐 일본어 방송은 이해하기 힘들다. 자막에 한문이 섞인 문구로 띄워주면 쉽지만, 일본어말은 알아들을 수 없다. 한국인이 많이 올텐데 채널 하나쯤 한국 방송을 보내줄 수는 없는지 묻고 싶다. 수돗물을 그대로 받아서 먹는다. 지하수가 다 무공해로 일본 전 지역에서 그대로 먹는다는 말에 놀랐다. 나도 그대로 받아 먹었는데 아무 이상 없었다. 전기는 100V라서 220V 전용인 디카 충전기는 사용하지 못했다. 방은 온도가 높아 포근하여 좋다. 일본은 모두 온돌이 아니고 벽면의 에어콘으로 실내온도를 조절한다. 가이드는 5분 거리인 도심에 콜택시를 불러 나가 놀아도 된다 했지만, 호텔 명함만 받아 가지고 나가면 택시가 데려다 준다고, 그러나 나는 나이 탓일까. 나가는 것보다 쉬고 싶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3시 20분에 눈이 떠지고, 남편과 나는 정담을 나누었다. 두 아들은 옆방에서 자고 있다. 우리 부부는 455호실, 두 아들은 456호실이다. 남편은 나보다 더 아들 방에 드나들며 챙겨주었다. 가족이 모두 참석한 여행이라서 잠자리도 참 편안했다.
사진:도큐호텔 사각 건물 안의 작은 연못과 폭포, 대나무.남편
2006년 1월 24일 화요일 교토, 오사카, 나라 도큐호텔 출발, 일본의 아파트, 금각사, 도심에서 본 신사, 자전거 주차장, 오사카로 이동, 면세점 쇼핑, 오사카성, 도시락 우동 중식, 나라로 이동, 동대사, 천국의 사슴, 동네 안의 공동 묘지, 이세로 가는 길, 휴게소의 아이스크림, 일본의 산, 대나무 숲, 어둠의 도로, 이세 네무노사토 호텔, 노천 온천욕, 전통의상 유가타
* 도큐호텔 출발
뷔페 조식 후 내경과 외경을 둘러보았다. 종업원 중에는 머리가 허연 남자가 많다. 한 분에게 디카를 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더니 아주 친절하고 책임감있게 찍어주었다. 호텔 밖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교토,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인 교토의 호리카와 고죠 근처 니시 혼간지를 배경으로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한 호텔이다. 또한 도심과도 가까이 있어 거리풍경도 활발하다. 8시 30분에 출발인데 버스에서 기다리며 호텔 입구의 택시를 보았다. 콜택시인데 운전기사는 모두 60대의 남자다. 나와서 손님을 깍듯이 모셔 태우고 떠난다. 참으로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신뢰가 가는 문화다. 이제 우리는 금각사로 출발하며, 도큐 호텔과 이별을 고했다.
사진:교토 도심에 있는 도큐호텔 아름다운 정원에서.겨울인데도 푸르른 나무들.본인 김윤자
* 일본의 아파트
도심 도로변에 아파트가 있어 자세히 보았다. 정말 베란다에는 샷시 유리창이 없고, 모두 이웃 간에 합판 나무 문짝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베란다가 죽 연결된 것도, 방음벽이 아닌 것도, 꼭꼭 동여매고 사는 우리의 현실과는 먼 이야기다. 외모보다, 자신보다, 안전을 중시하는 나라임을 똑똑히 보는 현장이다. 지진이나 화재가 나면 망치로 나무판을 부수고 끝쪽 비상계단으로 탈출한다. 지리적 여건이 삶의 환경과 자세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사진:교토 도심에서 본 일본의 아파트.베란다에는 유리창이 없고 옆집과 경계선은 나무 합판 문짝뿐
* 금각사
도큐 호텔에서 조금 가니 번화가가 나오고, 지나가면 니죠성을 보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머물렀다는 우리의 궁과 같은 건물이다. 청기와와 하얀 벽, 우거진 숲이 인상적이다. 조금 더 달려간 곳에 금각사가 있었다. 금을 붙여놓아 그렇게 부른단다. 은각사도 있는데 한국인들은 발음이 서툴러 택시를 타고 금각사에 가자 하면 은각사에 데려다 준다고 한다. 역시 은을 붙여 놓은 건물이리라. 일본은 백제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다. 교과서에도 나온다고 한다. 금각사 꼭대기에 봉황도 청와대 지붕에 있던 봉황 모양이라고. 글쎄 나는 그저 봉황을 본 적이 없어, 가이드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가이드도 웃으며 청화대의 봉황이 안 보인다고, 지금 어디 가 있는거냐고 우리에게 되물어 모두 웃었다. 금각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찰이다. 연못 위에 세워진 3층짜리 건물 누각의 2층, 3층에 금박을 입혀 금빛 우람한 건물이 장관이다. 연못가에 세워져, 물과 연못 속의 작은 섬과 잘 조화되어 환상적인 비경이다. 건물을 돌아가며 보니 진짜 금을 녹여 둘렀기에 그 빛은 더욱 찬연하다. 꼭대기 봉황새 한 마리가 천연하게 서 있다. 백사 무덤에는 돈을 던져놓았고, 뒤 연못에는 작은 석탑이 예쁘다. 나오면서 만난 정원에는 붉은 파라솔과 붉은 천의 차 테이블이 초록 식물과 함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운세를 보는 자동함에는 한국어로 써 놓은 통도 하나 있고, 곳곳에서 한국 글씨를 만나지만 반가웠다. 교토는 전쟁을 한 번도 치르지 않아 그대로 고스란히 옛 건물을 간직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금각사 뒤켠에 옛날 평민이 살던 집을 꾸며 놓았다. 우리의 한옥이다. 손님을 맞는다는 입구의 작은 지붕 집이 온화하다. 긴 계단을 내려와 버스를 탔다. 이곳에 견학 온 듯한 일본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한국으로 치면 유명한 절이기 때문이다. 범어사, 양산 통도사, 화엄사와 같은 대표적 사찰이어서 어제 본 청수사에도, 오늘 본 금각사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교토에 있는 금각사.아름다운 본 건물과 연못을 배경으로 본인 김윤자
* 도심에서 본 신사
교토는 한국의 대구처럼 분지 도시다. 현재 기온이 영상 6도로 포근하다. 아침의 쌀쌀함이 없다. 온돌 없이 에어콘 하나로 여름엔 냉방, 겨울엔 난방으로 가동하여 추위와 더위를 다스리며 산다. 이것은 일본의 생활 문화다. 보기 드문 교회 하나, 하얀 건물을 보았을 뿐 십자가를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인이 한국의 십자가 교회를 이상하게 바라보듯이, 도심 곳곳에서 만나는 신사(神社)가 참으로 신기하다. 일본 전체적으로 2만여개가 있다는데 시가지 중심 도로변에 평야 신사가 있었다. 한국의 절처럼 연등을 매달고 그윽한 불심의 향기가 나지만, 저 안에서 모시는 신은 불교와는 다르다. 훌륭한 인물, 혹은 유명한 돌, 동물 등 신사마다 독특한 신을 모시고 있다. 한국에 교회가 많듯이 일본에는 신사가 많다.
사진:일본의 신사.교토에서도 보았고...이 사진은 오사카성 바로 앞에서 본 신사
* 자전거 주차장
건물 앞에 주차해 놓은 자전거 행렬은 도심 곳곳에서 만난다. 물론 한국에도 있지만, 훨씬 많이 보인다. 꼭 자동차 주차장인양 나란히 놓여있다. 그만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는 해석이다. 도로 곳곳에서도 차도, 혹은 인도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이 있다. 횡단보도신호에 자전거 통행불도 있다. 중국에서 이런 풍경을 만났을 때는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이어서 그렇다고 이해했는데, 이곳 일본에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명 일본은 우리보다 강대국이고 세계 속에서 우뚝 솟은 나라다. 그 작은 섬나라에서 그렇게 되기까지는 국민 하나 하나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댓가이리라. 저 작은 자전거가 언뜻 보면 하찮은 물건 같지만 석유를 아끼는 검소한 생활의 표본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일본과 같은 현실에서 기름을 아껴야 한다. 자전거 문화는 배워가야 할 대목이다.
사진:오사카 시내에서 본 건물 앞의 자전거 주차장.일본은 자전거를 선호하는 나라
* 오사카로 이동
오전 9시 30분에 금각사에서 오사카로 출발했다. 나고야에서부터 본 것인데 지명과 상호에 소나무 송(松)자가 많다. 나의 필명이 송화(松花), 소나무를 좋아하는 나는 송(松)자가 들어간 송원, 송전, 송본, 송강, 송하 등등을 보며 흐뭇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가이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일본은 미용외과에서 얼굴, 이빨 등 외모 모두를 고친단다. 비용이 한국의 2∼3배 비싸다. 배우를 놓고 5천만원, 3천만원짜리 비용이 든다고 선전광고를 낸다. 그래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중국은 1년에 1천명이 사형당하는데 대개 마약, 살인범으로 시민운동장에 앉혀놓고, 죄명을 달고 뒤에서 사살한다. 한국인도 5명 끼어 있더라고. 그때 총알 1발이 3천원인데, 가족 혹은 본인이 사야 된다. 돈을 내고 시체를 찾아 가야 된다. 돈이 없어 안 찾아가면 시체 매매상에게 넘겨지고 보관했다가 수출한다. 한국 성형외과에서는 시체가 없어 몸은 빼고 얼굴만 산다고. 한국의 성형 외과 의사가 중국에 와서 얼굴만 가지고 실습해 본다고. 한국 의사를 데리고 가서 중국인들이 수술 받는다고.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라서 적어 보았다. 일본인 남자도 여자처럼 해보길 원하면 여장하고 방송에도 나온다. 여장쇼, 남장쇼(오까마 쇼 ; お-かま show) 이런 것들은 100∼200년전부터 해온 일본 문화다. 어느새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높은 방음벽이 쳐져 있다. 자주 보는 풍물이다. 교토에서 오사카(대판)는 1시간 정도 거리다. 10시 30분경 오사카에 들어왔다. 고가도로 곁을 지나며 1995년 고베지진을 상기하며 좀 무서웠다. 일본은 그들만의 연호를 사용하는데 헤이세이(平成) 21년(금년 2006년)이라고 육교 프랑카드에 씌여 있다. 먼저 면세점에 들른다고 했다. 내린 곳이 사거리 번화가인데 화려하다. 일본교를 공사하고 있었고, 일본 음식을 견본으로 진열해 놓은 식당도 보았다. 한동안을 서서 기다렸는데 알고보니 잘못 들어선 길이라 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한 블록 더 돌아 면세점을 찾았다. 오사카는 일본의 제2의 도시다. 도쿄 다음으로 큰 도시다. 그만큼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라서 확실히 고층 빌딩이 많고, 옛 정취는 만나기 어렵다. 서구풍의 세련된 도시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더욱 친숙함으로 다가오는 도시다.
사진: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도심의 횡단보도 앞에서.보기 드문 고층건물들.우리 부부와 뒤에 서 있는 작은 아들
* 면세점 쇼핑
첫 이미지가 신사적이다. 사라고 권하는 이도 없고, 상품을 광고하는 이도 없고, 다른 외국에서 본 상도와는 좀 차원 높은 문화다. 그래서 좋았다. 사람들은 눈으로, 손으로 보며 필요한 것을 샀다. 키토산, 약, 진주, 인형, 찻잔, 연고 등이 특산물이고 특히 소니 반도체에서 공급하는 쇠와 도자기 사이의 세라믹 칼이 유명하단다. 쇠붙이나 뾰족한 물건은 반드시 비행기 탑승시 기내반입이 금지되어 부쳐야 한다. 나는 별로 필요한 것이 없어 안 사고, 두 아들은 기념품을 샀다. 수증기가 닿으면 옷을 벗는다는 여인 그림의 수건 2장과, 일본 그림 벽보, 기타 소품을 샀다. 일본은 대체로 물가가 비싸다고 인식되어 대부분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는다. Eisan Duty Free 면세점, 산뜻한 가게다.
사진:오사카 시내에서 들른 면세점 앞에서.쇼핑을 마치고 나오며.큰 아들
* 오사카성
알려진 그대로 대단하다. 주차장에서 500m 정도 걸어 올라갔는데 외벽의 석벽과 그 아래 적군이 오르지 못하도록 흐르는 물줄기가 외객의 눈길을 먼저 사로잡는다. 푸르고 깊은 물 속에 큰 자락으로 솟아오른 성이다. 성문에 들어섰을 때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사카성은 금빛과 청빛으로 아름다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실)가 일본을 통일한 뒤 3만명의 인력을 투입하여 15년에 걸쳐 대공사 끝에 완공된 거대한 성이다. 몇 번 불로 소실되었지만, 400년 가까이 부서진 그대로 복원해오다가 1997년에 보수공사로 잘 꾸며놓았다.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1592년)을 구상했고, 일으켰고, 정유재란까지 일으켰다고 생각하니 소슬하다. 그는 자기 병사는 조선에 보내지 않았단다. 돌아와서 보복할까 두려워서였다고. 그렇게 엄청난 전쟁을 지시한 자도 두려움을 아는가. 모두 저 연못에 묻고 가자. 또한 그는 도자기 굽는 기술자를 데리고 들어와 도자기에 밥을 먹었다고. 전에는 나무그릇을 썼다고. 우리의 시각으로는 다시 없는 원수지만 일본에서는 뛰어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오사카성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아름다움에 놀랐다. 아기자기한 지붕이 참 예쁘다고 표현하면 나의 동심이 지나친 걸까. 흰색벽과 청기와, 금빛 테가 아주 깔끔하다. 눈부시게 오롯하여 카메라에 다 잡으려니 거리 조정이 쉽지 않다. 성 안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진열된 역사물을 보았다. 엘리베이터로 5층에 올라, 다시 3층 정도 걸어서 올라, 옥상에 나가 성의 꼭대기 층을 돌며 오사카 시내를 보았다. 철조망으로 안전선을 쳐놓아 두려움 없이 볼 수 있다. 금빛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동상이 가까이 보인다. 다시 1층까지 걸어 내려오며 전시된 유물을 보았다. 큰 아들은 고등학교 역사 교사라서 유심히 살펴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썼다는 투구, 가부토를 3천원 주고(300엔) 빌려 쓰고, 장군복을 입고 사진도 찍었다. 일본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의미깊은 성이다.
사진1:오사카 도심에 있는 오사카성 본 건물 앞에서. 우리 가족
사진2:오사카성 안에 있는 일본 전통의상 모델에 얼굴을 대고.(좌)본인 김윤자,작은 아들,큰 아들
* 도시락 우동 중식
오사카성 정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일본식 도시락 우동으로 점심을 먹었다. 말끔히 차려 놓은 도시락이 2단으로 쌓여있고 우동 국물이 별미다. 성 안에서 먹는 음식이어서일까, 그 맛은 한층 그윽하다. 어느 음식점에서나 우리가 도착하기 전 가지런히 차려놓은 식탁이 아름답다. 오사카성까지 오르느라 많이 걸어서 배가 고파 맛있게 아주 잘 먹었다. 식당 밖에 나오니 지붕 위에서 나이 든 인부들이 공사한다. 그 바로 아래에는 일본 복장의 모델이 서 있고, 얼굴 부분만 대면 바로 내가 된다. 부부와 아이, 셋이 서 있다. 우리 가족도 번갈아 가며 얼굴을 대고 일본 사람 복장을 담아 왔다. 은행잎 문양 벤치도, 타임 캡슐도 아름다운 볼거리다.
사진:오사카성 안에 있는 식당에서.일본식 도시락 우동 정식을 먹으며.큰 아들과 남편
* 나라로 이동
오사카성에서 이웃 도시인 나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 변에는 대나무 숲이 여전히 많이 보인다. 시내에 들어섰을 때 경찰서와 시청 건물이 보였다. 일본 경찰은 친절하단다. 무엇을 물으면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약도를 가지고 나와 자세히 안내해 준단다. 그러나 행사때 경찰은 안 간다. 국비를 그런 곳에 안 쓴다는 것이다. 경비 회사가 성행하여 행사 때는 경비회사가 책임진다. 4층의 경찰서 건물이 겉으로 보아서는 일반 사무실 빌딩과 동일하다. 일본 경찰서 건물은 절대로 위압적이 아니란다. 지금 시각 오후 3시, 나라 시청이 나의 왼쪽에 나라 경찰서가 오른쪽에 햇살과 함께 아름답다. 오사카에서 나라까지는 40분∼1시간 소요되어 금새 들어왔다. 이곳의 유치원과 국민학교는 모두 시립으로 시에서 관리한다. 일본 말로는 우리의 시립이 전립(田立)이다. 그러니까 전립 유치원, 전립 국민학교다. 중, 고는 현에서 관리하여 현립이다. 즉 우리의 도가 현이니까, 한국말로는 도립이다. 전문학교는 고졸 후 가는 곳이다. 나라는 백제와 사촌으로 지낸 곳이다. 791년 교토가 수도 되기전 70년쯤 수도였던 도시라서 길이 반듯하다.
사진:오사카에서 나라로 이동하며 본 일본의 마을 풍경.잘 정리된 주택과 풍요로운 시골 정경
* 동대사
교토와 더불어 일본 문화의 진수를 보는 곳이 나라인데, 그 중에서도 동대사는 나라의 하이라이트다. 주차장에 내렸을 때 사슴 몇 마리가 나와 이방인을 맞는다. 사슴을 보며, 만지며 함께 깊숙이 들어가니 우람한 동대사 본당이 거기 우람하게 서 있다. 목조건물인데 참으로 크고 웅장하다. 놀라운 것은 청동불상이다. 무게가 452톤, 높이가 15m, 세계 최대의 불상이다. 향불을 피우고 들어가서 인자한 미소를 보았다. 뒤켠에 해탈 나무 기둥이 있는데 기이하다. 바닥 가까운 부분에 구멍을 사각형으로 뚫어 놓았는데 그 구멍을 통과하면 해탈했다는 것이다. 구멍이 작아 몸집이 작은 여아 몇 명만 해탈했다. 나는 손만 디밀어 보고, 두 아들은 어깨까지 밀어 넣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역시 해탈은 고행 중 고행이라는 체험의 장이다. 그런데 해탈 구멍도 신기하지만, 구멍난 기둥이 부러지지 않고 버티어 선 것도 진풍경이다. 경내의 약수물과 큰 연못도 아릅답다. 사슴을 풀어 기르는 절, 동대사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사진:나라에 있는 동대사 본당 건물 앞에서.우리 가족
* 천국의 사슴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사슴 1천여마리가 동대사 뜨락에 방목되어 살고 있다. 뿔은 아예 잘라버려 머리가 민둥하다. 뿔이 나오면 사람을 다치게 하므로 나올 때 싹 잘라 버렸다. 모두 여성스런 사슴들이다. 사람을 따라오며 옷깃을, 내 마후라를 물어 당기고 먹이를 주면 계속 따라온다. 큰 아들이 손에 쥔 과자를 받아 먹으려 따르는 모습이 참 귀엽다. 그리고는 큰 아들의 외투 주머니를 주둥이로 열어제치며 과자를 찾는다. 나의 손에는 과자가 없으니 내 목에 두른 갈색 마후라를 물고 당기며 장난을 건다. 문다고 해도 아프거나 옷이 절대로 상하진 않는다. 침만 묻을 뿐 귀여운 입술이다. 동대사 본당 관람 후 나올 때도 여전히 따라나온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슴이라 하여 신성시하는 천국의 사슴이다. 연못가에 숲 속에 많이 흩어져 놀고 있다. 보통 때는 가두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처럼 외객이 올 때는 풀어놓아 방문객에게 진풍경을 선사한다. 버스 앞까지 따라오던 사슴들, 아가야 들어가라고 이별을 고했다.
사진:나라 동대사에서 방목하는 사슴과 즐거운 시간.큰 아들과 작은 아들
* 동네 안의 공동 묘지
화장 문화로 장례를 치르는 일본은 도심에서도 공동묘지를 만난다. 동네 안에 공동묘지가 들어오면 행운이 온다고 환영한다니, 우리의 시각으로는 어리둥절하다. 실제로 묘비가 즐비한 공동묘지를 도시 곳곳에서 보았다. 화려하지도, 꽃다발도 없는 회색 크고 작은 돌비만 서 있다. 좁은 공간을 차지하는 돌비가 아주 촘촘히 들어서 있다. 지난 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본 동네 안의 공동 묘지와 동일하다. 그런데 색상은 다르다. 호주나 뉴질랜드는 검은 돌비와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여 있어 화려했는데, 이곳은 회색이고 꽃도 없다. 공동묘지라 하니, 그런가 할뿐 돌기둥이 서 있는 듯, 무슨 공장 같다. 아무튼 본받아야 할 묘지다. 자연과 국토를 보존하는 차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좁은 영토에서 죽은 후의 넓은 무덤은 결코 애국이 아니리라.
사진:나라 동대사를 관람하고 이세로 갈 때 버스 안에서 본, 동네 안에 들어앉아 있는 공동 묘지
* 이세로 가는 길
3시 40분에 동대사를 출발하여 이세로 향했다. 동대사에서 이세까지는 3시간 소요된다. 꽤 먼 거리다. 하교 중인 초등학생을 보았다. 등에 진 가방이 난도셀인데 여아는 빨강색, 남아는 검정색으로 보통 15만원에서 50만원의 비싼 가방이란다. 동경 이하 지역의 남아는 겨울에도 반 바지를 입혀 등교시킨다. 하체와 감기는 무관하다며, 모두 불쌍할 정도로 떨며 학교에 간다. 강한 남자로 키우려는 일본 어머니의 교육 방법이다. 조금은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는 한의사라는 개념이 없다. 일반 의사가 부황, 침 등 별도로 자격증을 따서 담당하여 치료한다. 이것도 우리와는 다른 문화다. 또한 500년 가업을 잇는 나라다. 절 보수공사, 기모노(일본 전통복) 등이 그렇다. 고속도로에서 젊은이가 트럭을 운전하고 가는 것을 보았다. 일본에서 트럭 운전사는 월급이 400만원으로 고소득이다. 20대인데 대학에 안 가고 고교 졸업 후 직업을 가지며 산다. 그들의 집에 가면 1억원짜리 외제 승용차가 있단다. 벤조, BMW 등. 부자여서가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람인데도 자동차세는 모두 똑같으니까 몬다는 것이다. 20대 청년 트럭 운전사는 담배를 피는 여유로 운전하고 있었다. 오후 4시 30분 고산지대로 진입하여 녹차밭과 대나무 숲이 자주 보인다. 시골 집은 대지와 건평이 좀 크다. 여전히 도시와 동일한 풍경이다. 농촌인데도 2층 기와집도 보이고 부자 냄새가 난다. 눈발이 날린다. 들에, 산에. 나라에서는 쾌청했는데 한 나라에서 기후의 변화를 본다.
사진:나라에서 이세로 가며 본 일본의 시골 풍경.도시와 동일한 집이지만 도시보다는 그래도 조금 큰 편 집들
* 휴게소의 아이스크림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한번 정도 휴게소에 선다. 오후 5시 20분부터 30분까지 10분간의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좀 남아 가게에 들러 몇 가지 샀다. 먹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값과 맛을 한국 물품과 비교하고 싶어서다. 아이스크림, 빵 껍질 속에 크림을 담은 좀 좋은 것이 1개에 105엔, 한화로는 곱하기 9하면 945원 정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다. 건강 사탕 한 봉지에 230엔, 곱하기 9하면 2070원, 역시 비싸지 않다. 자일롯껌 한 통이 125엔, 곱하기 9하면 1125원, 괜찮은 값이다. 맛과 질도 좋다. 결론적으로 일본이라 해서 물가가 다 높은 것이 아니고, 더러는 우리의 물가와 비슷함을 알았다. 잘 골라 쇼핑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이스크림이 롯데 제품이었다. 어쩐지 한국에서 먹어본 맛이라 했더니 롯데 신격호 회장이 일본에 살면서 일본에도 동일하게 롯데 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드높은 위상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어서 그 아이스크림을 먹는 순간 참 행복했다.
사진:일본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큰 아들의 멋진 포즈
* 일본의 산
나고야에서 교토로 갈 때도, 지금 나라에서 이세로 갈 때도 일본의 산은 우리나라의 산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국처럼 우람하게 치솟아 오른 산이 없다. 들판은 다림질한 것처럼 아주 판판하고, 저 멀리 들판이 끝나는 아득한 곳에 보이는 산은 대부분 두루뭉실하다. 높이도 일직선에 가깝도록 비슷한 높이로 이어져 있다. 진흙덩이를 길게 빚어 땅바닥에 늘여놓은 모양새다. 가이드 말로는 일본의 산은 모두 저렇게 민둥하고, 뭉툭하단다. 뾰족하지 않고 넙죽하게 앉아 있다. 그래서 쉬이 끝나지 않고 뉴질랜드 남섬에서 본 풍경처럼 긴 산줄기에 흰 구름이 아름답다. 기후 변화가 심하여 맑다가, 눈이 오다가, 안개에 싸이다가, 여러 가지 풍경을 자아낸다. 언제나 새로운 땅의 자연은 신비롭다.
사진:나라에서 이세로 갈 때 본 일본의 산.뾰족하지 않고 민둥하고 뭉툭하며 길게 뻗어나간 모습
* 대나무 숲
정말 많이 본 것이 대나무다. 고속도로변에도, 시골의 들녘에도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도시의 호텔이나 상가, 큰 장소에는 어김없이 대나무 조경이 있다. 실내와 실외에 몇 그루씩은 서 있다. 나고야 공항 내부에도 심어져 있어 꼿꼿하게 자란다. 가정집 주변에도 빙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아련한 추억을 부르는 대목이다. 나의 유년시절 우리집 앞 개울가에 수북하던 대나무, 번식력도 강하고 뿌리가 얼키고 설켜 단단하여 잘 뽑히지도 않던 나무, 왜 한국에서는 없어진 나무가 일본에는 이리도 많을까. 겨우 담양에야 가야 대나무를 만나고, 죽세품 공예를 보는데, 일본은 명소의 약수물 막대기에서부터 죽세품이 많이 보인다. 혹자는 말한다. 일본에 지진이 많아 그 대비책으로 대나무를 많이 심고 기르는 것이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대나무 뿌리가 흙을 튼튼히 붙들고 있으니 진동이 일 때 조금은 막아주리라. 대나무의 흔들림으로 사전에 예방도 되리라. 이렇게 좋은 대나무가 왜 한국의 산녘, 들녘, 집 주위에서는 사라지는 걸까. 아무리 번식력이 강하여 땅을 침범한다 해도, 우리나라 역시 지진에 대하여 안전한 나라가 아닌 이상 일본처럼 대나무를 곳곳에 심어 길러야 되지 않을까. 작은 실보다 큰 득을 얻어, 좀더 넓은 시야로 국토를 가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사진:나고야 공항 내부에 심어 놓은 대나무 숲 앞에서. 본인 김윤자
* 어둠의 도로
오후 5시 30분이 지나고 점점 짙은 어둠이 드리우는 들녘이다. 하나 둘 일어서는 불빛이 아름답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가로등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만 가고 있다. 멀리서 간간히, 그것도 드물게 일어서는 먼가의 불빛이 전부다. 이런 현상은 비단 지금 이곳에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외국여행 중에서도 느끼는 현상이다.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도, 못 사는 나라도 도심이든 시골이든 가로등 숫자도 적고, 불빛도 희미하다. 분명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다. 부자 나라에서 우리보다 더 어둠의 도로를 달린다. 산중 도로일지라도 버스의 고독한 불빛만 조명될 뿐이다. 정말 본받아가야할 대목이다. 부자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며, 작은 것, 작은 개인의 노력에서부터 실현되는 것이다. 좀 불편하더라도 한국의 가로등 숫자를 줄이고, 국가적 차원에서 전력을 아껴 더 큰 발전을 위해 써야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사진:나라에서 이세로 갈 때 어둠의 도로를 달리며.버스 자체의 불로만 달린다.멀리 불빛은 민가
* 이세 네무노사토 호텔
이세지마 국립공원 안에 있는 넓이 300만 제곱미터의 종합 리조트형 호텔이다. 산 중 휴양지 지어 하루를 머물다 가기는 아까운 호텔이다. 벌써 공기가 차가우면서도 산 향기로 그윽하다. 에쿠시도네무노사토, 뷔리네무노, 호텔 네무도, 네무노스위트 4개의 관으로 나뉘어져 있어 숙박과 함께 노천 온천욕까지 하는 곳이다. 7시경 도착하여 짐을 풀고 호텔 뷔페식으로 저녁을 먹고 8시 30분 셔틀버스로 조금 떨어진 건물로 옮겨 온천욕을 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9시 40분 셔틀버스로 다시 호텔에 돌아왔다. 우리 부부는 366호실, 두 아들은 367호실에 투숙했다. 객실이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안을 보아도, 창 밖을 보아도 원시에 가까운 향기가 흐른다. 먼저 내부에는 침대 두 개와 사랑방 느낌이 드는 아늑한 공간이 따로이 있다. 작은 테이블에는 주방의 개수대가 있고, 욕실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고 낮은 좌식 방에는 조그만 탁자 위에 찻잔이 6개, 접시와 함께 가즈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실내화와 유가타 일본 전통실내복이 있다. 바깥에는 물이 흐르는 아담한 연못과 모닥불 형상의 돌무덤이 있어 꼭 불을 지핀 착각이 들며 낭만을 선사한다. 두 아들은 이미 낭만에 끌려 카메라를 들고 유가타 복장으로 밖에 나갔다. 아름다운 호텔에서 아름다운 밤을 맞는 기분, 큰 행복이다.
사진:이세 네무노사토 호텔에서 아침 뷔페식사 후 식당 입구에서.작은 아들
* 노천 온천욕
기이한 물이다. 탕 속에 들어가 맛을 보니 간기가 느껴진다. 옅은 바닷물 맛이다. 일본 땅은 전역이 활화산 지대로, 가정에서든, 호텔이든, 온천장이든 모두 약이 되는 좋은 물이라 한다. 참 부럽다. 겨울이라서 노천 온천욕은 못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탕과 남탕이 분리되어, 여탕에 알몸으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잘 몰라서 닫힌 실내 온천탕에서만 몸을 옮기며 담갔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찾아낸 계단을 따라 3층 정도 걸어 올라가니, 옥상에 노천 온천탕이 있었다. 뉴질랜드 폴리네시안 폴 온천장만큼 크고 열린 공간은 아니지만 아담한 탕 세 개가 있어 바위 틈에 기대어 따스한 천연물에 몸을 담갔다. 옥상벽은 보이지 않는 막으로 난간을 쳐 두었고,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이다. 추울 것 같은데도 몸이 따뜻하니 오히려 몸에 스치는 밤 기운이 시원하다. 곁에는 찜질방도 있어 90도의 가마솥방에 들어가 찜질했다. 한번에 10∼15분이 몸에 가장 큰 약효를 준다하여, 잠시 휴게실에 나가 몸을 식힌 후 두 번 온천욕을 했다. 참 좋다. 9시 40분에 셔틀 버스가 와서 우리를 호텔로 이동시켜 주었다. 참으로 축복받은 나라다. 온천물도 좋고, 어느 곳에서든 수돗물은 그냥 손으로 받아먹을만큼 무공해다. 다시 찾고 싶은 나라 1위가 일본이라는 통계는 허울이 아니다. 나 역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찾아와 이곳, 이세의 짙은 산 향기와 바다 내음 그윽한 온천욕에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다독이고 싶다. 잠시 머물다 가지만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명소다.
사진:이세 네무노사토 호텔에 유숙하며 지난 밤 노천 온천욕을 하던 곳.아침에 버스로 지나며 찍음
* 전통의상 유가타
우리가 흔히 TV에서 보는 일본 전통 실내복이다. 무늬가 있는 긴 드레스에 검은색 반코트를 걸치고 끈을 매는 옷이다. 호텔 잠옷으로 제공되었는데 입어보니 참 우아하다. 일본인들은 집에 들어가면 모두 유가타를 입는다. 발가벗고, 또는 얇은 속옷 위에 입고 편하게 지낸다. 가정에서도 온천 문화가 있어 그런 복장을 입는다는 것이다. 유가타는 호텔 식당에 입고 가서 식사를 해도 되는 옷이다. 드레스가 앞터짐으로 단추도 없어 외출 시는 속옷을 입어야 한다. 일본인 가정 욕실은 좁아 온천물은 좋아도 대부분 온천장에 가서 한다. 그때 이 유가타를 입고 방과 온천장을 왔다갔다하며 서너번의 천연욕을 한다. 욕탕에서 나오면 유가타를 입고 누워 쉬다가 벗고 탕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벗고 입을 수 있도록 단추가 하나도 없는 편안한 옷이다. 잘 때는 그 옷만 입고 자도 두터워서 보온이 가능하다. 세계 그 어떤 호텔에서도 제공받지 않은 독특한 일본 의상, 팁을 놓지도 않는 문화이면서 서비스는 완벽하다. 유가타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인상을 돋보이게 한다.
사진:이세 네무노사토 호텔에서 제공하는 전통의상 유가타를 입고.호텔객실에서 남편과 함께 차를 마시며
2006년 1월 25일 수요일 이세, 나고야 이세 네무노사토 호텔 출발, 일본의 민가, 귤나무와 동백꽃, 미키모토 진주섬, 이세신궁, 우측통행, 나고야로 이동, 자동차 수출 항구, 나고야 공항 출발, 인천공항 도착
* 이세 네무노사토 호텔 출발
어제는 어둠 속에서 들어와 못 보았던 바깥 경치가 장관이다. 아침 뷔페식당 전면 유창에 골프장 같은 잔디와 나무가 들어온다. 우리가 잠을 잔 건물은 하얀 집으로 꽤 높은 편이고 객실이 많아 보인다. 아침 8시에 출발했다. 야자수와 돌무덤 정원에서 버스를 타고 호텔을 출발했다. 산길을 따라 조금 내려간 곳에 어젯밤 온천욕을 했던 온천장이 있었다. 가는 길이 계속 산중이다. 깊고 깊은 산 속에서 동화 속의 주인공을 실은 차가 달릴 때, 우리는 참 행복했다. 이세는 산림지역이다. 큰 도로에 나갔을 때도 모두 보이는 것은 산이다. 하루만 자고 떠나가는 아쉬운 숙소, 고운 추억을 안고 떠난다.
*사진:이세 네무노사토 호텔을 떠나는 날 아침에 찍은 우리 가족 삼부자
* 일본의 민가
한국의 산간 지대 협곡을 지나는 기분이다. 이세는 그렇게 들이 넓지 않고 산자락에 집이 있다. 그래서 도로변에서, 가까운 눈 앞에서 민가가 잘 보인다. 나무로 지은 집이 많다. 벽면 외벽도 나무 판자를 길게 조각조각 세워 지었다. 기와는 한국보다 얇은 검은 색 기와가 대부분이다 담장이 낮아 울 안이 다 보이고, 아예 담장이 없는 집이 많다. 현관 입구에서부터 유리문으로 이어져 한국처럼 대문이라는 개념의 문이 없다. 농촌인데도 집들이 아름답다. 땅을 아끼려는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우리나라처럼 작은 텃밭에도 무언가를 심은 자취가 남아 있다. 산간 계곡 자투리 땅도 그냥 놀리는 곳이 없다. 벼를 벤 자국도 있고, 겨울 채소를 기르기도 한다. 집의 색상은 상당히 검소하다. 빨갛거나 파랑 등의 원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민가와 비슷한 색상인데, 그보다는 세련되어 있고 단단한 느낌이다. 외형보다 내실의 충실함이 돋보이는 집들이다.
사진:이세에서 미키모토 진주섬으로 가며 본 일본의 민가.동백꽃도 아름답고 나무조각으로 벽을 꾸민 고운 집
* 귤나무와 동백꽃
해외여행을 하며 꼭 정해진 관광명소에서만 보는 것은 본인에게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그 시간에 그 나라의 투명한 경치나 풍물을 보며 배우는 게 더 많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우리와 다른 환경을 보며 그 나라를 배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또렷한 눈으로 바깥 풍광을 담아온다. 이세의 들녘에는 귤나무와 동백꽃이 많다. 한국의 제주도와 같은 인상이다. 파란 잎 사이로 노란 귤이 많이 달려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온화한 날씨임을 보여주고 있다. 호텔에서 나오는 귤이나 자몽의 향기가 진하고 맛이 있음도 이해시켜 준다. 동백꽃은 일본 전역에서 가끔씩 눈에 띄는데 이곳에서는 더욱 화사하다. 나고야 공항에서부터 동백꽃을 보며 우리나라보다 아랫녘 나라임을 상기했다. 이세의 풍경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산도 산다운 면모로 앉아 있고 푸르름 가득한 곳에 노란 귤과 붉은 동백꽃이 아름다운 땅이다.
*사진:이세의 농가 풍경.간판 아래로 잘 보면 귤나무가 있고 노란 귤이 대롱대롱...
* 미키모토 진주섬
일본에서 진주왕으로 알려진 미키모토씨가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섬이다. 1920년에 에디슨과 미키모토가 만났는데 그때 에디슨이 말하길 '내가 발명 못한 것을 했다' 고 극찬했단다. 보통 5∼6 밀리미터 직경의 진주를 생산하며 9.2 밀리미터 이상의 진주는 만들지 않는다. 진주는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육지와 연결된 긴 다리를 걸어서 섬으로 갔다. 살내 유리창 가의 의자에 앉아 바다에서 쪽배를 타고 등장하여 보여주는 하얀 옷의 해녀 세명, 비록 쇼이지만 아름다웠다. 진주 쇼핑가에는 800만원짜리 목걸이, 50만원짜리 귀걸이, 수억원짜리 진주가 있다. 둘러보고 나와 미키모토 동상을 만났다. 아주 큰 입상으로 바닷가에 야자나무 숲, 향기로운 터를 밟고 오롯하게 서 있다. 항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내 고향 대천 어항 항구에 온 느낌이다. 출렁이는 물과 짙푸른 산, 잘 지어놓은 조형물이 한껏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섬이다. 다이아몬드가 12월의 보석, 진주는 6월의 보석이라는 사실도 이곳에 와서 알았다. 겨울인데도 진주는 참 곱다.
*사진:미키모토 진주섬에서 최초로 진주를 발명한 미키모토 동상 앞에서.우리 가족
* 이세 신궁
1500년된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다. 수상이 정초에 와서 참배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1월 초에는 일본인 대부분이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비는데 그 중 이세신궁은 최다 인원이 모이는 곳이다. 정말 많은 인원이 모여들고 있었다. 외국인보다 자국민이 더 많다. 줄지어 관광 버스가 들어오고 줄지어 들어간다. 가이드가 웬만하면 깃발을 들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빨간 깃발을 들고 앞서 가며 잘 따라오란다. 신궁까지 꽤 오래도록 걸었다. 역사를 드러내듯이 참나무가 상당히 크다. 한국에서는 짚을 엮어 기생충 알을 잡는데, 이곳 나무들은 대나무 조각을 엮어 밑둥에 둘러쳐 주었다. 나무가 모두 아름드리 커서 감탄을 자아낸다. 일본 최초의 신궁으로 일본 건국신화의 여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모신 곳이다. 다른 신사와는 달리 아름다움과 함께 깨끗함, 간결함이 독특하게 융화되어 있다. 흰옷입은 직원과 흰 말도 진풍경이다. 신궁의 문은 닫혀 있지만 입구의 문 앞에 흰 천을 깔아놓고 그곳에 돈을 던지며 사람들은 기원한다. 천엔짜리 지폐와 동전이 많이도 깔려있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를 보는 명소다. 한국의 양산 통도사, 화엄사처럼 일본인들에게는 의미깊은 곳이다.
*사진:이세 신궁 앞에서 남편과 큰 아들.촬영 금지구역이라 하여 조금 비껴서 찍음
* 우측통행
사람도 자동차처럼 우측통행이다. 신궁으로 가는 다리 중앙에 우측통행이라는 한문 글씨 기둥이 높게 서 있다. 반으로 나누어 다리의 절반은 들어가는 무리, 반의 절반은 나오는 무리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다리의 양쪽 끝에 두 개의 기둥으로 표시해두어 어느 누구도 어기는 사람이 없다. 한국에서 아무리 운전을 잘 해도 일본에 오면 사고를 낸다는 말은 사실이리라. 나도 잠시 우측과 좌측을 혼돈하여, 걷다가 빨리 우측으로 넘어왔으니 말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작은 규칙이지만 두터운 벽으로 느껴진다.
*사진:이세 신궁을 관람하고 나오며.우측통행이라는 간판 곁에서 큰아들과 작은 아들
* 나고야로 이동
이세신궁 앞 식당에서 일본 전통 우동 정식으로 식사를 하고 낮 12시 30분경 이세를 떠나 나고야로 향했다. 이곳에서 나고야 공항까지는 약 2시간 소요된다. 오후 4시 25분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산중 도로가 끝나고 얕으막한 마을에 녹차를 재배하는 풍경을 보았다. 보성 녹차밭, 중국 용정 녹차밭과 유사하다. 파란 녹차잎이 싱그럽다. 또한 비닐 하우스도 보인다. 어떤 하우스는 지붕이 삼각으로 작은 집의 형상이다. 한국의 들녘 풍경과 닮은 점이 많다. 쌀밥도 기름지고 맛있었다. 나고야 가까이 다가왔을 때 바닷물이 들어와 고인 만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놀이동산인 듯한 높은 기기의 놀이기구가 곱다. 간척지인지 드넓은 평야에 갯벌 빨간 풀만 흐드러진 풍경도 보인다.
*사진:이세에서 나고야로 돌아오며 본 일본의 들녘풍경.녹차와 비닐 하우스.멀리 설산의 아름다움
* 자동차 수출 항구
항구에 대형선박이 정박해 있고 색색의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서 있는 풍경, 자동차 생산국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공장 지대로 크고 작은 생산 라인이 얼기설기 놓인 철골 구조의 건물이 모여 있다. 그 너머로는 나고야 시가지가 서서히 다가온다. 나고야에 들어가긴 전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형을 이용하여 깊숙한 만에 자동차 수출 항구를 조성한 것이다. 굴뚝에는 하얀 연기가 솟고 생명력이 느껴지는 일본의 한 영토를 지나고 있다.
*사진:이세에서 나고야 공항에 갈 때, 나고야에 들어서며 본 자동차 수출 항구
* 나고야 공항 출발
나고야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30분, 순조로운 진행이다. 대한항공 KE758 16:25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수속을 밟았다. 가이드가 비행기 표를 사는 동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공항 1층 유리창가 실내공간에 대나무를 심어놓은 풍경이 신기하다. 키가 훤칠하게 커서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따라오른다. 대나무를 실내 화단에 심은 것은 공항만은 아니다. 호텔이나 식당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이다. 대나무가 일본인에게는 소중한 존재임은 분명하다. 공항 2층에는 대한항공 선전 모델로 배용준 사진이 두장 세워져 있다. 저 웃음에 일본 여인들이 매료되고, 수많은 일본 여인들의 가슴에 사랑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대한 항공을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선전하는 느낌이다. 연예인으로서 애국을 톡톡히 하는 모습에 흐뭇했다. 출국수속은 쉽게 끝나고 면세점에 들러 마지막으로 쇼핑을 했다. 큰 아들은 1500엔짜리 일본 사찰과 투구, 칼이 든 투명사각기념품을 사고, 작은 아들은 500엔짜리 크리스탈 유리속에 탑이 든 기념품을 샀다. 생각보다 비싼 값은 아니다. 비행기는 4시 30분, 정확한 시간에 출발했다. 겨울 여행이지만 끝까지 포근해준 날씨가 고맙고, 가족의 사랑을 다지는 여행이었기에 더욱 고맙다. 이제 창공을 힘차게 솟아오른 비행기는 햇살과 구름, 석양 노을의 진풍경을 선사한다.
*사진:나고야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며.작은 아들과 함께 출국검색 후
* 인천공항 도착
일본에 갈 때는 1시간 40분 소요되더니, 올 때는 2시간이 소요된다. 저녁 6시 30분에 도착했다. 해넘이, 그 황홀한 순간을 바다와 하늘이 만난 경계선에서 보았다.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더니, 고요히 넘어가고 창공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해외여행 중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비행기 규모가 호주나 캐나다, 동유럽 갈 때와는 다르게 작다. 옆으로 창가에 세 자리씩 총 6개 의자다. 일본은 7개의 공항이 있어 그만큼 분산되어 비행기가 오가기 때문이다. 자리는 거의 다 차서 왔다. 대한항공 마일리지, 1인당 왕복 960마일씩 적립하고 밤 9시에 집에 들어왔다. 일본, 이웃나라였지만 보기 전의 인식과는 많이 다름을 본 소중한 여행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소박하고 검소한 국민성은 배워야 할 덕목이다.
*사진: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나오며.작은 아들
* 일본에 대하여
1. 복지정책 인구가 1억 3천만명 세계 6위다. 땅은 남한의 4배, 한반도의 1.9배다. 서울과 부산은 450km인데 일본의 땅길이는 4000km다. 세계 강대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구감소를 막아야 한다는 정책으로 유아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다. 출생신고를 하면 3일후에 300만원이 통장에 들어온다. 금년부터는 350만원이다. 자국민, 타국민 모두 준다. 만 6세까지 병원비가 무료다. 부친 소득 명세서를 떼오라 하여 규정에 따라 주는데 거의 다 해당된다. 그 후는 무조건 무료다. 가이드 김정훈님이 후쿠오카에 살 때 1270g의 미숙아를 낳아 신생아실 입원료가 한화 3천만원인데 10만원만 냈단다. 출산율이 1.8명, 한국은 1.2명으로 사실은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심각하다. 500g 미숙아까지 살려낸다. 경제적으로 해결되니까 산모들이 웃으며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소득이 20만엔인데 30%는 세금내고, 실제로는 15만엔이다. 일본인들은 그걸 당연시한다. 모두 무료니까 그렇다. '알면 알수록 무서운 나라' 라고 일축한다. 첫번째 아이 생산하면 월 5만원씩, 두번째도 월 5만원씩, 세 번째 아이는 월 15만원씩 아이 셋이면 월 20만원씩 통장에 입금된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아이를 5천만원 투자하면 후일에 고교 졸업 후부터 80세까지 살며 5천만원보다 더 기여한다는 것이다. 인구가 떨어지면 세계경쟁력에서 떨어진다고 철저히 관리한다. 아이 셋인 집이 많다. 아이가 태어나도 걱정이 없다. 탁아소로부터 모든 시스템이, 맞벌이에게는 유치원비까지 주니 말이다.
2. 문화 일본은 8월 15일이 한국의 구정과 같고, 1월 2일까지 연초가 한국의 추석과 같은 명절이다. 일본 전국민이 움직여 신사에 가서 기도하는 기간이다. 지구상에 호적을 가진 나라는 한국과 일본 단 두나라다. 한국 호직처럼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는 것도 똑같다. 모든 것이 예약문화다. 택시도 거리에서 잡지 않고 전화하면 5분 안에 온다. 식당도 예약이다. 그 시간에 안 가면 전화해야 하고, 당겨서 가도 전화해야 되고, 안 가도 식비 50%를 부담한다. 치안은 상당히 좋다. 뒷골목만 아니면 위험치 않다. 속임수가 없다. 정찰제라서 속임을 당하지도 않고, 자국이든 외국인이든 택시기사도 동일한 요금으로 한다. 길거리에서 행상하는 것도 없고, 상도에 대해서는 깔끔한 나라다. 섬나라, 사방으로 바다가 가로막은 영토에서 세계 열강국 대열에 진입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리라. 모든 정책과 경제가 우선이었겠지만 선진문화의 몫도 컸으리라. 안정감이 흐르는 빛 고운 문화다.
3. 교통 및 자동차 운전석도, 도로도 우리나라와 정반대다. 영국계 나라, 세계 7개국이 그러한데 일본은 동양계이면서 유일하게 반대다.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고 차도, 사람도 모두 우측통행이다. 교통요금이 상당히 비싸다. 오사카에서 도쿄가 서울에서 부산 거리인데 버스 요금이 20만원이다. 한국의 4배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 여행을 많이 온다. 북해도에 가려면 항공료만 100만원이다. 국내 비행기값이 한국, 중국 가는 것보다 더 비싸다. 나라 모양이 상, 하로 길게 늘어져 있어 국내 거리가 멀어서이기도 하다. 일본은 교통사고가 안 날 것 같은데도 많이 난다. 한국이 교통사고가 많다 해도, 오히려 한국은 날 것 같은데 안나는 편이다. 그래서 버스 앞자리 좌석은 두 줄 정도 비워두고 다녔다. 고속도로 통행료도 30분에 3만원, 주차료도 최하 1만원, 그래서 시간이 남아 한 코스 더 구경하고 싶어도 운전기사에게 무리한 요구다. km 수가 기록되어 정해진 코스 외엔 못 간다. 우리가 내린 나고야는 한국의 울산이다. 즉 자동차 회사인 도요다가 있어 1년에 900만대 생산한다. 한국은 1년에 총 200만대 생산량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자동차 생산국이다. 자동차 번호판도 세 가지 색이다. 노란색은 마티즈와 같은 경차, 흰색은 일반 차로 배기량이 1000cc인 차, 초록색은 영업용 차다. 경차가 많다. 나고야만 해도 20%는 경차를 몬다. 바로 이웃나라인데 교통체계와 경차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신비롭다.
4. 경제 개념과 직업관 일본 맨션은 20평내로 짓는다. 아무리 부자도 20평대 아파트에서 살고 돈을 저축한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허황된 집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한국처럼 40평, 60평은 재벌사장 외에는 상상도 못한다. 80평짜리는 유지비만도 1년에 2천만원이다. 불황이 없는 나라다. 전년도에 비해 못하다는 것이지 절대로 불황, 마이너스 성장은 아니다. 나고야 인구가 220만명인데 불황을 모른다. 울산처럼 차 사업이 많고, 자동차만 수출해도 한국 전체 수출과 동일하다. 경제가 우리보다 10배 좋다. 그래도 이 나라 사람들은 상당히 검소하고 소박하다. 외형적인 집에서, 시가지 풍경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점심도 아주 간단히 김밥, 단무지 정도 사들고 회사 사무실에 가서 먹는다. 항상 검소한 식사를 한다. 밑반찬도 추가로 시키면 돈을 더 내야 한다. 해외여행도 2회 정도 한다. 석유비축량은 한국은 3개월인테 일본은 6개월 분이다. 항상 안정적인 경제 생활이다. 이곳 주부들은 모두 일한다. 1일 5시간 노동에 매월 100만원 정도 번다. 맞벌이를 할 수 있는 것은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다. 한국은 중산층이 없어지지만 일본은 평준화다. + 성장만 아닐 뿐 경제는 계속 성장한다. 퇴직 후 경비나, 주차 요원으로 일하는 노인 남자가 그 직업을 영광으로 여기는 나라다.
5. 교육과 진로 고속도로에서 젊은 이십 대의 청년이 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것을 보았다. 가이드는 말했다. 트럭 운전수의 월급이 400만원이라고. 저들의 집에 가면 억대의 자가용이 있다고. 담배까지 피우는 여유를 보인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물건을 수송하는 트럭 운전수를 한다는 것도, 월급이 400백만원이라는 것도. 한국의 현실로는 대학을 가기 위해 목매다는 연령이고, 어디 트럭 운전수의 월급이 그렇게 많던가. 일류대학은 나와야, 꼭 대학을 나와야 잘 살 수 있다고 인식되어 있지 않은가. 이곳 사람들은 꼭 대학을 가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적성에 맞지 않으면 고교 졸업 후 맞는 진로를 찾아 취업하여 돈을 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배움을 접고 돈을 번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더 높은 의식으로 살고 싶을 텐데, 고보다 현실을 더 직시하고, 자신을 깨닫고, 일찍이 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 대단한 용기로 보였다.
6. 안전 제일 주의 한 명이 공사하면 두 명이 안전요원으로 서 있는 나라다. 그만큼 안전제일주의다. 길가에 불법주차는 볼 수가 없다. 5분만 세워두면 끌어간다. 20분에 주차료가 100엔, 그래도 안전을 우선하여 반드시 주차장에 세워둔다. 택시를 잡는 것도 길가에서 손들어 잡지 않고 전화를 하면 5분 내로 온다고 한다.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도 비상시 탈출구로 사용하기 위해 달지 않는다. 옆집과의 벽도 나무 합판 한 조각 세워두고 있다. 화재나 지진이 발생하면 연장으로 툭툭 부수고 건물 끝의 계단으로 탈출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눈을, 귀를 놀라게 한다. 아무리 보아도 아파트 베란다에는 유리창이 없다. 자신의 편안함보다 전체의 안전을 우선하는 국민의식이 자연환경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을진대, 참으로 아름다운 정책, 아름다운 삶이다.
7. 지진과 화재 대비 지진이 많은 나라, 그래서 여행 중에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10초는 견디지만 40초였을때는 무섭더라고. 가이드는 경험담을 말한다. 그래서 이 나라는 모든 건물을 지을 때 지진, 또는 그로 인한 화재에 대비하여 짓는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고층건물이 없다. 대부분 소형주택에 거주하고, 빌딩은 아주 높은 것 극소수 외에 거의 다 저층이다. 아파트에 베란다 유리창이 없는 것이 또한 큰 대비책이다. 구조시 유리창이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놀라운 것은 이웃집과의 사이에 우리나라처럼 두터운 벽이 아니라, 얇은 나무 합판으로 칸막이한 것이 경계선이다. 화재가 났을 때 끝쪽의 비상계단으로 이동할 때 툭툭 밀어 부수고 탈출하기 위해서다. 한국에 오면 베란다 샷시 유리창문을 보며 의심스런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안전이 첫째다. 2∼3년 내에 지진이 온다 해서 집은 작게, 규격에 맞춰서 짓고 건물은 낮거나, 아주 10층 이상 고층으로 짓는다. 4∼5층 건물은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나고야나 오사카는 일본의 제2, 제3의 도시인데 믿기지 않을만큼 높은 건물이 없다. 주택이 평야를 이루고 어쩌다 나무 한 그루 솟듯, 고층빌딩 하나 보일뿐이다. 일본이 집값이 비싼 이유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지진이나 화재에 대비하여,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8. 기후 한국보다 아래에 있는 나라이니 당연히 포근하리라고 예상은 했다. 부산과 동일한 위도상에 걸쳐 있는 오사카 주변의 날씨는 상당히 온후했다. 섬나라여서 바람이 좀 불 때를 빼고는 1월의 날씨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바다로 둘러싸여 기후가 큰 추위를 막아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고야에서 햇볕이 쨍쨍나고, 눈이라도는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교토로 가는 산간지대에서 큰 눈더미와 앞이 보이지 않는 눈발을 보았다는 것이다. 두 도시가 그리 먼 곳도 아니고, 지대가 그리 높은 곳도 아닌데 같은 나라에서 기후 차이가 그리 심할까. 들녘에도 벼를 벤 둥치만 보였는데 온통 하얀 눈으로 소복하다. 설경이 아름답다는 것보다 기후 변화에 신비롭다. 하얀 설산이 점점 푸르러지더니 교토에 진입할 때는 다시 눈이 없는 햇살의 풍경이다. 사실 일본의 지형은 위에서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어 저 위쪽 지방에는 폭설이 내려 난리다. 일본이라 하여도 지방에 따라 기후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9. 물 수돗물을 그냥 받아 먹어도 될만큼 물이 좋은 나라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어찌 물이 그리 좋을까. 실제로 어느 곳에서든 수돗물을 손으로 받아 먹었다. 물론 기분이 내키지 않는 사람은 생수를 사 먹는다. 그러나 호텔에서도, 공공 기관 화장실에서도 그냥 받으 먹은 물이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이 활화산 지대로 땅에서 솟는 물은 모두 몸에 좋은 온천수란다. 각 가정의 욕식물도 다 몸에 좋은 온천수인데 다만 일본은 화장실이 좁아서 동네의 온천장에 가서 목욕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간 이세의 네무노사토 호텔 온천장의 물은 입에 넣어보니 간기가 조금 느껴졌다. 뉴잴랜드 폴리네시안 노천 온천욕에서는 유황냄새가 났는데 그와는 다른 물이다. 아무튼 일본은 전역의 물이 온천수라는 사실에 놀랐다. 물의 축복을 많이도 받은 나라다. 바라보기에는 연약한 섬나라인데 신은 또다른 축복으로 삶을 행복하게 이끌고 있다.
10. 농지정리 도시 외곽에서 완전 시골의 평야까지 다 둘러보았다. 도시와 도시간의 이동이 3∼4시간 걸리는 곳도 있어 일본의 들녘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모두 한결같이 농지 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넓은 논은 말할 것도 없고, 산 계곡, 집 주위 작은 텃밭까지 자로 재어 만든 땅처럼 반듯반듯하다. 그리고는 어떤 곳은 경계선을 시멘트로 죽이어, 둑처럼 늘여놓은 곳도 있다. 어찌보면 일본인의 무서운 힘이 서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일본인들의 깔끔한 성격, 정확하고 철저한 국민성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겨울 채소가 자라는 곳도 정형화되어 있다. 비닐 하우스도 둥근 것도 있지만 삼각지붕으로 집처럼 아주 단단해 보이는 것도 있다. 어디를 보아도 다부진 나라다. 외형의 반듯한 농지 정리는 그 일부이겠지만 탄탄한 나라다.
11. 도시와 농촌의 생활 도시나 농촌이나 똑같이 개발되어, 동경이나 시골이나 풍경도 동일하고 생활 수준도 비슷하다. 자동차도 동일한 비율(%)로 소유하고 있다. 차종까지도 비슷하다. 그만큼 농촌의 소득이 높다는 뜻이다. 가이드는 '굉장한 나라' 라고 일축한다. 농촌의 삶이 행복해야 선진국임을 강조하는 나라다. GNP가 3만불로 한국의 1만 5천불에 두배다. 한국보다 2배 부자다. 도시와 농촌 구별 없이 그렇게 잘 산다. 가옥 형태도 도시나 농촌이 다 똑같다. 나고야 도심에서 본 주택이 여행을 마치는 순간까지 똑같은 모습이다. 오히려 농토가 넓은 시골의 주택이 더 크고 여유로와 보인다. 농산물 값이 1년 내내 동일한 나라다. 토마토가 겨울인 지금도 2개에 천원 정도, 여름에도 그 값이란다. 그만큼 농가의 농산물에 대하여 충분한 보상을 해 준다는 해석이다. 그러니 굳이 농촌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쌀 수매 파동과 같은 분란은 상상도 못 하는 나라다. 농촌이 잘 살아야 함께 행복하고, 선진국이라고 여기는 일본의 경제정책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는 없을까. 짧은 단상으로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12. 언어 영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다.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세계적으로는 영어가 최고라는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호텔 종업원도 개인적인 용무로 불렀을 때 영어를 쓰지 않고 일본어만 썼다. 곳곳 간판에도 영어는 그리 많지 않다. 거의가 한문을 병행한 일본어다. 우리로서는 한문교육을 받았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여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문도 중국은 그들만의 간자체로 변용시켜 읽기가 어려운데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한자 그대로여서 읽기도, 해석하기도 아주 쉽다. 일본말 두 가지를 배웠다. '잘 부탁합니다' 는 '요로시구오네가시와', '고맙습니다'는 '아리갓또' 이 두 단어만 사용했다. 상가에서도 호텔에서도 모두 그들의 언어만 사용한다. 면세점에서 한국직원이 우리 말을 쓰는 것 외에는 일본어 밖에 듣지 못했다. 영어로 간단한 것을 물어도 답변은 일본어다. 어떻게 이해할까. 미국과 그리 친근한 사이이면서도 영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음은 그만큼 외교에서도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좀 불편하지만 대단해 보인다.
13. 종교 그들만의 독특한 종교가 있다. 기독교는 전 국민의 5%, 몇 백만 명이고 대부분 신교를 믿는다. 즉 신사에 가서 기원하는 종교다. 일본 전역에 2만여개의 신사가 있고, 신사는 도심 곳곳에서 자주 만난다. 자기 집에서 가까운 신사에 가서, 수시로 소원을 빈다. 기독교인일지라도 신사에 가서 빈다. 특히 아이가 탄생하면 무병장수하길 빈다. 신사참배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신사참배는 과거를 뉘우치지 말고, 옛날처럼 힘을 쓸 때를 기다려보자는 다짐이다. 고이즈미는 절대적 우익이다. 할아버지가 장군인 사무라이 집안으로 조상이 모두 정치적인 우익이어서, 우리에게는 안 좋은 편이다. 중국, 한국 수상에게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자고 하지 않아 중국 수상이 그냥 가 버렸다고 한다. 한 나라에서도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국가끼리에서야 상대국의 종교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과학 문명이 발달한 투명한 시대에 아직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종교에 집착해 있다는 이미지다. 신사에 모신 신도 돌, 인물 등 각기 다르다니, 하나님 하나를 섬기는 기독교가 더 바람직한 종교가 아닐까 싶다. 교회는 교토에서 단 하나만 보았다.
14. 화장실 해외 여행을 하다보면 화장실에 대해서도 참 호기심이 크다. 특히 여자 화장실은 물 내리는 버튼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운다. 일본 역시 그랬다. 물 내리는 버튼이 변기와는 전혀 상관 없는 곳, 먼곳, 옆면 벽에 장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손잡이로 내리거나 다른 나라와 같이 변기 위에 큰 누름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작은 버튼 위에 물 내리는 곳이라는 한문 글씨를 섞은 일본어 설명이 붙어 있다. 세정(洗淨), 세유(洗流) 등 한문을 학습한 우리로서는 충분히 판독하는 구절이다. 차츰 익숙해졌을 때 그 편리함을 깨달았다. 앉아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용무를 쉽게 마칠 수 있다. 화장실 문화가 그 나라의 문화라 했던가. 깨끗하고, 모든 기기들이 잘 설치되어 있어 선진문화를 느끼게 한다.
15. 한국에 대한 사고 한국 여권은 국제적으로 500만원에 팔린다. 180개국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비자까지 받은 여권은 1000만원에 거래된다. 미국 비자가 까다롭기 때문에 비싸게 거래된다. 중국 여권은 각 대사관에 직접 가서 비자를 내야 하므로 관심없다. 그만큼 한국의 국력이 강하고 위상이 높아졌다는 해석이다. 그에 기여한 사람이 배용준이다. 어느 외교관도 못하는 외교를 완성했다. 전에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하면 어느 먼 나라로 여겼는데, 지금은 한국이라 해도 당당하다는 것이다. 배용준 닮은 가발을 남편 머리에 씌워보며 사고, 그에 대한 물품을 소지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 그 외 보아, 조용필, 김연자, 계은숙 등의 연예인들도 눈부신 활약을 한다. 20대는 보아, 40∼50대는 배용준을 좋아한다. 계은숙의 '참새의 눈물' 가요도 인기다. 배용준 사진첩은 25만원 2천부 한정판매인데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부시가 와도 생중계는 안하는데 배용준이 오면 헬기가 떠서 배용준 차를 생중계하며 따라간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국에 대해 관심없다. 이웃이면서 먼 나라로 알고 산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은 정상회담을 안 한다. 한국은 독도 문제 이후, 중국도 마찬가지로 영토문제와 과거사 문제로 소원한 관계다. 그래서 잘해보려고 한국인 무비자 입국 허가가 작년엔 금년 2월까지인데, 금년 3월부터는 영구무비자다. 고이즈미가 올해 재선 가능 확실한데, 그러면 개혁은 계속 추진되고 한, 중과는 불협화음이 계속될 것이다. 반대 정치인은 같은 아시아에서 어찌 한, 중을 빼고 정치하냐고 공격하여 그가 당선될지는 불투명하지만 기대된다. 어떤 국가와든 과거사로 다투지 말고 현명한 외교로 서로에게 발전되는 방향으로 사귐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더욱 큰 노력이 필요하리라.
16. 장례문화 천황 한 사람만 빼고 이 나라 사람은 사후에 모두 화장한다. 땅값이 비싸서 묘지를 쓰지 못하고, 요즈음은 자연 훼손 공해라 하여 뼈도 뿌리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가족 납골당식으로 장례를 치른다. 비석돌을 들어내면 고조부 때부터 묻어놓은 뼈가루 항아리가 있다. 좋은 나라에서 행하는 장례문화라지만 동일한 현실의 좁은 우리나라는 안일한 장례문화가 아닌가 싶다. 화장이 의무도 아니고, 유골은 아무데나 뿌리고, 선산이 있는 사람들은 둥그런 묘소를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공동 묘지도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민가 단지에 있다. 무슨 비석 공장인가 싶어 물어보면 공동묘지란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비석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화장을 한다는 것, 납골당은 동네 안에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행운을 불러온다는 것. 이런 장례문화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 내가 본 일본
1. 국가는 부자, 개인은 가난한 나라 공항을 벗어나 나고야 시가지로 접어 들었을 때, 내가 상상해 오던 일본의 외형과는 다름을 이미 깨달았다. 누구나 일본을 한번쯤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느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은 각 도시로 이동할 때도 또 다른 도시의 외형에서도 느끼게 되니 말이다. 한 가정이나 개인도 외형이나 외모에서 삶의 형태와 수준을 알게 되듯이 결코 외적으로 흐르는 이미지가 내적인 삶과 무관하진 않다. 일본은 그랬다. 세계강대국이라는 이미지는, 그 번지르르한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고, 과연 이 나라가 일본인가 의심이 갈 만큼 소박하고 검소했다. 국가는 부자, 개인은 가난한 나라라는 한 마디로 일축하지만 역으로 국가가 부자이니 개인도 부자가 아니겠는가. 내적인 충실이 돋보이는 나라다. 2. 일하는 나라 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사람이 그 학교 경비로 취직하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국에서 들어왔지만, 일본의 노인들이 일하는 모습은 그 이상이다. 호텔 종업원도, 택시 기사도, 곳곳에서 만나는 남자들이 은발의 노인들이다. 남자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톨게이트 창구에 나이든 여자가 앉아 있다.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일터에서 노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우선 나부터도 먹고 살만큼 벌었으면 일하지 않고 그 번 돈으로 편하게 살고 싶은데, 또한 한국은 나이 든 사람들의 일터가 없는데, 이런 문제점들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안일함보다 거시적인 시안으로 국가에 속한 한 개인임을 깨닫고 국민 각자가 노력할 때 힘든 위기를 극복하고 살기좋은 나라가 이룩될 것이다.
3. 주택에 대한 검소함 분명 일본은 자본주의 국가이고 민주국가라고 알고 있다. 일찍이 개방된 선전문화로 살고 있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더러는 60평, 80평 아파트나 주택을 소유하고 싶지 않을까. 20평대 아파트가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대형아파트이고, 그런 돈이 있어도 주택에 돈을 묶어두지 않음은 이웃나라인 우리가 주택에 대한 사고를 재정립해야겠다고 느껴졌다. 색상부터가 모두 회색, 검정에 가까운 지붕이다. 한결같이 한국의 달동네를 연상케 하기도 하고, 과연 이 나라가 선진국 일본일까 눈을 의심할만큼 외적으로 소박하다. 저택이라 해도 작은 2층집이 전부다. 물론 지진이 잦은 나라이기에 아파트를 선호하지도 않고, 거의 없으니 주택에 대부분 살고 있다. 우스운 고층 아파트가 고급 맨션이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우리도 조금은 주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되고, 정책이 올바르게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4. 물의 축복을 받은 나라 60년대, 70년대 소풍을 가면 아무 곳의 물이나 받아 먹었던가. 내 기억 어디쯤에 수도꼭지의 물을 그대로 받아 먹었던가. 아련하다. 그런데 일본은 전역에서 물을 그대로 받아 먹을 수 있단다. 장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호텔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받아 먹으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지구상의 마지막 파라다이스라고 자처하는 뉴질랜드에서는, 호주에서는 그 말이 이해갔고, 실제로 그리했다. 그런데 일본이 어디 그런 나라던가. 실제로 수돗물을 받아 먹어도 여행 중 아무 탈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전역이 활화산 지대여서 물이 나오는 곳은 모두 온천이란다. 일부러 온천욕 여행객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세의 네무토사토 호텔에서 온천욕을 했다. 각 가정집 물도 다 온천수라는 것이다. 분명 물의 축복을 받은 나라다. 90년대에 다녀온 대만이나 중국은 물을 그대로 먹으면 즉시 설사가 나온다고 했다. 바라보기에는 가련한 섬나라인데 물의 축복만큼은 듬뿍 받은 나라다.
5. 한 사람이 일하면 두 사람이 안전요원 한 사람이 땅 속에 들어가서 일하면 두 사람이 그 주변에 서서 위험 상황을 알리고 있단다. 이 한마디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국의 어느 보수공사현장에서 한명이 숨어 일할 때 두명이 안전요원으로 지켜주었던가. 단순히 듣고 넘어갈 대목이 아니다.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벌보다 가장 좋은 것은 예방이라고 했거늘, 언제나 사후약방문격으로 대처하는 우리의 현실이 부끄러웠다. 천재지변이라면야 어찌하겠냐마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는 안전사고라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런 의식을 배워가야 할 것 같다. 고속도로에서 노란 옷을 입은 안전요원이 하얗게 내리는 눈 속에서 무언가 정리하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인명과 직결되는 안전, 한 사람이 일하고 세 사람이 지켜서라도 꼭 지켜야 할 것이다.
6. 친절하고 책임감이 강함 호텔에서 머리가 허연 남자 직원에게 나의 독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가족이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짐을 챙기러 갔을 때다. 나는 놀랐다. 분명 필름상에 사진이 찍혀 있는데 아니라고, 다시 한번 찍어준다는 것이다. 결국 미리보기로 돌려 찍힌 사진을 보여주니, 그때서야 웃으며 간다. 그 분은 나보다 웃어른이었다. 또 하나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이세 신궁을 돌아보고 일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에 탔는데 한 가족이 오지 않는다. 가이드가 데려왔는데, 그 가족의 아버지가 하는 말, 물건을 식당에서 샀는데 분명 돈을 받지 않았는데 그 주인은 물건값을 받았다고 그냥 가라하여 한참을 설득시켜 돈을 주고 왔다는 것이다. 주려고 한 한국인도 위대하지만 받았으니 그냥 가라고 한 상인은 더욱 위대하지 않은가. 외국인에 대한 사기가 없다는 말, 세계 여행국 중 다시 가고 싶은 나라 1위가 일본이라는 통계는 결코 허울이 아니다. 친절하고 책임감 강한 아름다운 나라다.
7. 동일한 나라 안에서의 기후 변화 일본 전역을 돌아보았다면 위도상으로 곳곳에서 더 많은 변화를 느꼈겠지만, 나고야, 교토, 오사카, 나라, 이세 등 일본의 중남부 내륙지방을 돌아보면서도 상당히 큰 기상 변화를 느꼈다. 한 방울의 눈에 대한 흔적이 없던 나고야 들녘을 지나, 교토로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만난 폭설의 현장과 실제로 앞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흩날리는 눈풍경은 아름답다라는 생각에 앞서 의아했다. 고속도로변에 둔덕으로 쌓아놓은 눈, 논에 쌓인 눈이 경계선을 지우고 하얀 평원이 된 설야, 산과 나무 위에 소복이 쌓여 설산을 이룬 풍경, 등 조금전 만났던 마른 햇살과는 너무 변화가 심하여 놀라게 한다. 섬나라여서 그런 걸까. 기후 변화가 심하니 우산을 챙겨오라는 여행 안내문이 체감되는 순간이다. 햇살과 바람, 눈, 안개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한 기후를 체험했다.
8. 언어에 대한 벽 호텔 종업원 정도는 영어가 통하리라 믿었다. 디카 충전기가 220V 전용이어서 110V인 일본 코드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에 사용하던 납작한 콘셋을 가져가면 된다하여 준비해갔는데 여전히 불이 들어오지 않아 호텔 종업원을 불렀다. 그런데 나는 영어로 묻고, 영어의 답을 기다리는데 젊은 종업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국어로 대답한다. 눈치로 알아들었지만 좀 황당했다. 미국과 친근한 나라가 아닌가. 영어가 세계공통어가 아닌가. 영어 하나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의사소통이 된다고 배웠지 않는가. 어떻게 이해할까. 도로 표지판에서도 마침 우리의 눈에 낯익은 한자가 섞여있어 이해가 가능할 뿐, 우리나라처럼 영문 안내가 그리 많지 않다.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어찌 알아 듣겠는가. 자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섬나라 특유의 갇혀서 사는 삶에 대한 표출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 배울 점
1, 검소한 생활 자세 한 국가는 각각의 개인 구성원이 이루는 단위다. 국가가 힘들다 함은 국가에게 그 책임을 돌리기 이전에 국민 한 사람마다 생활 자세를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결코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가 아닌데 외적, 내적으로 검소한 생활 자세를 보며 우리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2. 안정적인 사회 분위기 어느 곳에 불안요소가 도사리고 있다하면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안정적인 분위기로 신뢰가 간다면 다시 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다시 찾고 싶을만큼 모든 체계에서 안정된 사회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나라다. 같은 동양이고, 이웃 바다 건너 나라인데 참으로 신사적인 사회 풍조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정직한 매너로 한 차원 성숙된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겠다.
3. 친절한 예의 외국인에게 친절한 것은 큰 애국이다. 몰라서 묻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 친절한 한 가지의 사례가 그 나라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곳곳에서 느낀 친절한 예의는 참 아름다웠다. 개인적인 소견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분명하다. 한국을 찾아온 외객에게 친절하여 국가적 위상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4. 안전에 대한 배려 문화 택시를 길에서 손들어 잡지 않고 부르면 5분 내에 오는 문화, 한 사람이 일하면 두 사람이 안전요원인 문화, 재난시 탈출을 위해 베란다에 샷시 문이 없고 나무 합판 하나 간막이 해놓은 문화, 잠시 본 것들이지만 그렇게 정착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이 요구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안정적이고, 온화한 평온이 드리운 나라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나 하나쯤이야 하는 저속한 문화는 우리에게서 떠났지만 사회를 안정되게 이끄는 안전에 대한 사고는 깊은 통찰로 본받아 배워야 할 것이다.
* 우리의 다짐
미국은 한·미 동맹도 맺었고, 일·미 동맹도 맺었다. 상호방위조약을 양다리 걸쳐놓고 이웃나라에서 맺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미국은 한·일 전쟁이 난다면 누구를 도와줄까. 소름이 돋지만 그건 분명 힘이 센 나라를 편들어 도와줄 것이다. 미국은 항상 양다리 걸치는 나라, 유리한 편으로 기우는 근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조선족은 스스로 힘을 기른다. 조선족끼리 결혼하고 언어를 대대로 전수하며 중국에서도 탄탄하다. 국적은 중국이지만 속심은 한국 편이다. 조부, 조모의 조선땅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아하게 산다. 그것도 한국 국력이 강해서 대우받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다짐을 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국력을 길러야 한다. 국력이 강하면 외침도 당하지 않고, 당해도 강대국의 도움으로 승리하고, 또한 해외동포가 당당하게 살며 국가 위상을 높여준다. 일본은 법적으로 외국인이 땅을 못 사도록 막아 놓았다. 한국이 동남 아시아를 무시하듯, 일본은 한국을 무시한다. 그러나 프랑스에 사는 이민자들이 얼마전 화재로 시위했듯이, 10년, 20년 뒤에는 분명 무시당한 국가로부터 화를 부른다. 혹시 아는가. 후일에 우리의 국력이 떨어지면 필리핀인들이 한국에서 반란을 일으킬지도.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무시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야 강대국, 주변국으로부터 지배당하고 침범을 받았지만 우리의 조국은 결코 그런 수준은 이미 탈피했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한 국가가 퇴보하거나 약해질 때 큰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오픈된 지구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국가의 위상은 결코 속여지지 않는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다짐으로 국가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상승할지언정 하락하지 않는 국가 신뢰도를 구축해야 한다. 개인 하나 하나의 구성원이 힘을 모으면 지금보다 더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다. 한민족의 끈기와 저력이라면 가능하리라. 결론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다짐이다.
첫댓글 일본역사탐방 잘읽고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