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성령
“말 좀 들어, 오빠!” 제수씨는 동생을 ‘오빠’라 부른다.
“그래 말 좀 들어봐라!” 나까지 나서서 제수씨 말을 거든다.
“맨날 오빠는 내 말 안듣고 혼자만 이야기해!”
뚱하게 있던 동생은 이렇게 말을 받는다.
“아니다, 듣고 있다. 맨날 나만 갖고 그래.”
동생 부부와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화 패턴이다. 주로 동생을 핀잔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동생 말이 맞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제수씨 말에 힘을 실어주는 편이다. 아무리 가족이라 다짐해도 ‘시’자가 붙은 남의 집안에 들어 왔으니 그 자체로 힘들겠다 싶어 무작정 편들기로 했다. 시아주버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어렵겠나. ‘시’자만 붙어도 마음이 콩닥콩닥거리고 쥐어짜듯 아플 수 있는데, 그런 ‘시’집에 편들 사람 하나 없으면 얼마나 서럽겠나.
살아가려면 한 가지 붙들고 지내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념이든 명예든 물건이든 ‘이것 때문에, 이 맛에 산다.’라는 것 하나는 지녀야 한다. 그 삶의 맛이 제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건강하게 한다. 사는 건, 얼마나 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본질적 가치가 있다. 폐 속에 공기가 들락거리는 것을 삶이라 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사는 건, 또 살아가려면 사는 맛이 있어야 한다.
신앙인에게 사는 맛은 무엇일까? 작금의 신앙인이 제 삶에서 붙들고자 하는 건, 2000년 전 이 세상을 사셨던 예수님의 몸뚱아리도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엘로힘 하느님의 가늠할 수 없는 전지전능함도 아니다. 다만 곁에서 함께 웃어주고 울어주고 다독일 수 있는 가족과 이웃과 지인들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더듬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하루 하루 버티며 시시비비를 따져 묻는 각박한 세상 속에 숨 한번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찾으며 생명에 대해, 참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하는 그 맛이 아닐까 한다.
내일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데 힘이 되는 건 아무래도 성령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한 신비를 묵상한다.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숨’을 불어넣으셨다. 창조의 순간, 존재의 시작은 하느님의 ‘숨’과 인연을 맺는다. ‘숨’은 히브리말로 ‘루아흐( )’인데 생명의 힘을 가리킨다.(창세 6,17;7,15; 에제 37,10-14; 시편 104,29) 사람이 어떻게 생겨났냐는 물리적, 생물학적 질문이 아니라 존재함 그 자체에 대한 사유가 ‘루아흐’라는 단어에 숨겨져있다. 우리는 여기에 왜 있는가, 왜 사는가, 사는 게 뭔가 라는 존재함에 대한 사유는 육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 바삐 움직이는 일상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등장한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반성은 굳이 인문학적 소양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모든 이들이 얼마간 유지하는 삶에 대한 묵상이다. ‘사는 게 거기서 거기지.’라고 말하다가도 ‘사는 게 이래선 안되는데…’라는 상투적 푸념은 존재에 대한 철학자의 깊은 고민과 맞닿아 있다. 사는 것과 삶에 대한 사유 사이에 ‘루아흐’, 하느님의 숨은 여전히 불어온다.
존재함, 그 자체를 기쁨으로 간직하는 복음서가 있다. 루카 복음이다. 루카 복음을 두고 대개의 주석서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으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하고 그 기쁨을 강조한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고 예루살렘으로 끝을 맺는 루카 복음은 성령의 역할을 유독 강조한다. 예수님의 잉태부터(루카 1,35) 예수님의 세례와(루카 3,22) 광야에서의 유혹을(루카 4,1) 성령께서 이끌어 주셨고,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하시는 예수님 곁을 성령이 함께하셨다.(루카 4,14) 이런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은 사도들 역시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증인으로 제 사명을 다했다.(사도 1,8) 루카의 작품에서 성령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역사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 자체가 천상의 하느님과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인식은 때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여 삶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뚫고 포탄처럼 이 세상에 박혀버린 한 청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삶은 성령께서 이끌어주신 삶이고, 성령이라는 얼마간의 추상성과 모호성을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구체화하시고 명확히 하셨다.
삶에 대한 사유와 실천은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한가한 사변적 이야기가 아니다. 멈출 수도 없는 사람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매일, 매순간 찬거리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인 게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논리다. 다시 루카 복음으로 돌아가보자. 성령께서 이끄시는 예수님의 족적마다 과부와 고아 그리고 죄인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의 삶은 도드라진다. 다른 복음과 달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열 개의 장에 걸쳐 묘사하는 루카 복음은, 그 여정의 길목에 사회적 약자와 먹고 마시는 장면들을 주로 배치한다. 성령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여정은 사회적 약자 역시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존재함의 고귀한 가치를 더듬도록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를테면 돈이 있건 없건, 능력이 출중하건 아니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기쁠 수 있는 건 제 삶에 대한 개인적 수련이나 사회적 준거들에 대한 이해나 승복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공동체적 연대 안에 가능하다는 것을 성령으로 인도된 예수님의 삶은 증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분명히 한다. 일정한 삶의 모델이나 준거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사는 삶의 구체적 다양성 안에서 성령은 우리 모두를 일치로 엮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11) ‘따로따로’라는 말마디에 주목하자. 사도의 정연한 가르침은 율법을 통한 획일화나 형식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대개 사람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의 주류적 정신을 거슬러 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다. 주류에 편승하며 현실을 핑계 삼는 건 대다수 민중들의 삶의 방식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주류와 현실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율법으로 하나 되자는 구호가 난무하는 곳에서 율법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 인내와 노고로 함께하는 공동체를 설파하셨다. ‘따로따로’는 사도 바오로께서 가르치신 공동체적 정신의 백미라고 말하고 싶다. 백이면 백이 다 모였다고 공동체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되고 주류에 편승하는 건 편향적이고 편파적이며 획일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스개같지만 60대가 넘어가는 우리 어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을 보라. 도처에 미용실이 널려 있고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디자이너들이 넘쳐나지만 어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은 ‘뽀글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각기 제 멋을 낼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따로따로’의 세상이고, 그곳에서 성령은 일치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제 색깔이 사라진 곳에 성령께서 굳이 계실 이유가 없다. 사도께서는 각자가 사는 그 멋과 맛에서 성령의 가치를 발견하셨다.
사도 바오로는 ‘따로따로’의 세상이 아닌 율법으로 하나를 지향하는, 그래서 제 색깔이 사라진 ‘무리’를 향해 아주 강한 질책을 퍼붓는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갈라 3,1-3)
성령으로 시작한 삶은 자유로워야 한다. 내가 굳이 나서서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외치지 않더라도 이웃과 사회를 지긋한 미소로 바라보는 연민 안에 성령께서 나서시어 일치를 만들어내신다. 육적인 것은 대개 자기 중심적이 될 위험을 내포한다. 이건 육에 대한 비난이나 폄훼가 아니라 본디 육적인 것이 그러하며 육을 가진 인간의 한계, 그 자체다. 사도 바오로는 육에서 나오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 5,19-21)
육은 잠시만 놔둬도 자기 중심적이 되고 그 끝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노예의 삶이 된다. 성령을 통한 참된 자유의 삶은 자신의 껍질을 깨고 해방되는 순간 주어진다. 요한 복음은 성령을 ‘빠라클레토스’라고 칭한다.(요한 14,26) 빠라클레토스는 ‘~을 향해 불리워졌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로 불리워진 걸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늘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요한 14,17-20) 그렇다! 성령이 계신 곳은 서로가 서로를 향한 ‘함께함’을 깨닫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리를 떠나 인간 세상 속에서 인간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셨듯이 성령을 통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정직하게 응답해야 한다. 힘들고 아프고 슬프더라도 가족 안에서, 세상 안에서 더불어 함께하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게 성령을 대하는 참된 자세다.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성령께서는 살아 움직이신다.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게 없다. 모든 게 고귀하다. 어떤 모습으로 살든 모든 삶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고 말하는 난 오늘도 여전히 제수씨를 편드는 것으로 성령을 묵상한다.
[월간 빛, 2017년 8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