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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주교인터넷선교단 원문보기 글쓴이: 어부/니콜라오
소공동체(기초공동체)란?
* 이 강의 내용은 최영화(요셉, 서울교구)씨가 강의한 내용을 이용호신부가 정리한 것임을 밝혀 둔다.
1장 하느님의 공동체 계획
1. 공동체의 개념
1) 사전적인 측면
(1) 우리 말
공동체란 혈연이나 지역 나아가 정신적 연대로 이루는 것으로 혈연은 가족관계를 통하 여 이루어지는 가족 공동체이며 지역은 일정한 지역 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지역 공동체이다. 본당은 일정한 본당의 지역 안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집단을 본당 공동 체라고 한다. 같은 신앙을 통하여 모인 공동체를 신앙공동체라 한다.
(2) 한자 말
공(共)은 한 가지 공이라는 의미 외에 법 될 공, 무리 공이라는 의미도 있다. 하느님을 법으로 공경하는 무리의 하나가 된 모습이라는 뜻이다.
동(同)은 같다는 의미 이외에도 한 가지 공, 무리 동이라는 의미도 있다. 모여서 화합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체(體)는 몸이라는 의미와 함께 지체라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공동체(共同體)라는 의미는 우리가 하느님을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지체로서 한 무리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3) 서양 말
영어에 공동체는 Community이며 Community는 Communion(친교, 사귐, 영성체)과 Unity(일치)의 합성어이다. 친교와 사귐을 통하여 일치를 이루는 모습을 공동체라고 하 며 우리가 미사 중에 영성체를 할 때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영성체를 바로 Commn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느님과 사귐의 극치인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2) 심리학적인 측면
공동체라는 의미는 심리적으로 다음의 4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화, 사귐, 목 표, 활동이다. 공연장이나 야구장, 극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공동체라고 하지 않는다. 공연이나 스포츠 관람을 온 사람들은 대화를 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공연이나 영 화를 보고 나면 제 각기 흩어진다. 여기에 사귐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대화가 깊어져 야 사귐이 된다. 결국 사귐이란 어떤 목표를 공유하고 있을 때 가능하고 목표를 향하여 참여하여 구체적으로 활동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공동체가 된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함께 공유해야만 활동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활동이 이루어지 는 것을 우리는 심리적으로 공동체를 느낀다고 말한다. 요사이 우리 본당의 규모들이 커 지면서 본당의 제 모습인 공동체성을 잃어 가고 있다. 예를 들면 본당에서 이웃들과 대 화를 하는가? 본당의 사목목표를 아는가? 우리가 여기에 답을 할 수 없다면 본당에서 소외되어 있거나 공동체에 속해 있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공동체는 함께 알아야 하고 함께 나아갈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속감이 없다면 집단에 불과하 지 공동체가 아니다.
3)신학적인 측면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고린 12, 12-13)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되어 있고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한 공동체도 여러 사람 들을 그 구성원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본당 공동체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분의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모두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를 통하여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며, 우 리 각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2. 하느님의 공동체 계획
1) 공동체 이신 하느님
“하느님은 세상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인간이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공동체 계획을 완성하신다.” “하느님은 구원시초부터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시지 않고 공동체의 지체로 뽑으셨다.”(사목헌장 32항)
“우리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만들자.”(창세 1, 26)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인간의 모습을 당신과 닮게 만드셨다고 표 현하신다. 당신의 모습을 복수로 표현하시는 것은 바로 삼위일체를 염두에 두신 것이다.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구나.”(창세 3, 22)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 동산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동산을 거닐다 숨어 있는 아담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역시 당신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 이미 완전한 삼 위일체를 드러내신다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창조와 구원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을 삼위일체의 온전한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랑의 공동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본성으로부터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창조는 플라스 틱 사출기(밀어내는 기구)를 통하여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것처럼 하느님의 뜨거운 사 랑이 분출하여 나오는 것을 연상하여 보라. 하느님은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고 강조하신다.
부부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면 어딘지 모르게 닮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부자지간에도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씀씀이가 닮는다. 그것은 같이 생활하고 함께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서로 닮아가는 것처럼 하느님의 공동체적 삼위일체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도 공동체적으로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통하여 부부가 되게 하시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다. 새 가정은 세상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게 하셨다. 아담에게 필요한 짝 하와를 창조하실 때 잠자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뽑아 만드셨다는 표현은 바로 서로에게 긴 밀한 관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이시기에 때문에 아담과 하와도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 는 것이 당연하도록 하셨다. 하와의 창조에 아담이 얼마나 기뻤는지를 보여주는 “드디어 나타났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다.” 표현이 있다.
이렇게 애타게 고대하던 바를 얻은 모습의 표현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 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사랑의 공동체를 축복하셨다.
3) 공동체의 분열
사람이 낙원에 머물 때는 하느님과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하느님과 더불어 낙원에 머물며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고 나서는 알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의 눈을 피해 몸을 숨겼다.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창세 4, 8)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었다. 죄가 들어와 두 형제를 갈라놓았다. 죄는 부끄러운 것이며 자연히 숨기고 감추게 된다. 이렇게 죄책감이 드러나는 결점을 감추게 하며 숨기게 한다. 이것은 분열과 단절의 시발점이 되었고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낙원에서 추방당하여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죄로 인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죄로 인한 이기심으로 싸우게 되고 다투게 된다. 결국 죄는 모든 단절의 원인이며 또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요인이다.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역사의 시초부터 자유를 남용하였고 하느님께 대립하고 하 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지만 하느님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지 않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흐려져 창조주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섬겼다.”(사목헌장 13항)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고맙 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 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로마 7, 24-25)
4) 예수님은 화해의 중재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제시하신 분이시다.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고 이기심으로 인 하여 화해를 하지 못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 희생제물이 란 바로 회해를 위해 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파견하셨다.
이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죄로 분열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오신 화해자임을 드러내셨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해 주시려고 오 셨다.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화해의 삶을 가 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1고린 3, 16)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고린 6, 19)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가 성전이 되고 교회를 전파하게 하신다. 또한 교회 가 믿는 이들의 공동체임을 드러내게 하시며 이끌어 주신다. 공동체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공동체이시고, 우리가 각자 개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공동체를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을 성서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잘 인식하고 우리가 세상 안에서 먼저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소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죄로 인하여 분열된 공동체를 재건하 여야겠다.
2장. 기초공동체는 왜 필요한가?
기초공동체라는 용어는 유사한 이름으로 ‘교회의 기초공동체’, ‘그리스도인의 기초공동체’, ‘소공동체’, ‘반신회’, ‘반모임’이라는 용어와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어 왔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소공동체라는 개념을 단순히 규모 면에서 작은 모든 집단을 다 소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으나 본당의 기본 조직으로 기초공동체라는 말을 여기에서는 ‘소공동체’라고 부른다.
기초공동체(Basic Christian Community))는 본당의 기본조직이라는 뜻으로 규모가 비교적 작은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소공동체라 부른다.
1. 기초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 근거
1) 바오로 6세 교황의 사도적 권고 58항
바오로 6세 교황은 현대 복음선포의 사도적 권고 58항에서 교회의 기초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1974년 이 권고문에서 복음화하면서 복음화 되는 것을 역설하셨다. ‘복음화하면서’라는 의미는 복음의 정신대로 제대로 사는 것 즉 교회공동체가 사귐과 나눔과 봉사를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초공동체는 바로 교회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 생기게 되었고 본당의 규모가 커지면서 인격적인 교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교황님은 기초공동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거나 특정 신심이나 재물에 연류 되어서도 안 되며 전체주의나 의무감으로 퇴색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이 말씀의 요지는 기초공동체는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면서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화는 복음의 선포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2)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선교사명 51항
교회의 기초공동체는 복음화의 힘이다. 기초공동체는 본당공동체의 분권적(일부분)이며 항상 본당에 소속되어 각자의 소속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기초공동체는 이웃과 함께 누룩이 되어야 한다. 즉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봄으로써 이웃 안에서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대화하기 편한 살찐 양(친근한 사람) 1%만 돌보고 아흔 아홉 마리의 소외된 양들을 돌보지 않고 있다. 바로 이 소외된 이들을 찾으려는 구조가 바로 기초공동체이다. 예수님도 소외된 이들을 우선적으로 찾지 않으셨던가? 기초공동체는 밖으로는 소외된 사람을 찾는 것이며 안으로는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즉 위로받고 위로하는 것을 통하여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흔히 소공동체가 안된다고 푸념하는데 그것은 공동체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5대 독자 외아들에게 손자를 안겨준 며느리를 자랑하지 않겠는가? 시키지 않아도 며느리 자랑을 하게 되듯이 공동체를 체험하게 되면 능동적으로 소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기초공동체는 역할 수행함에 있어서도 능동적이어야 한다. 역할이 분담되어야 하는데 예를 들면 소공동체 대표(반장, 봉사자), 회계, 총무, 말씀봉사자 등등으로 역할을 나누고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3) 아시아 주교 회의 권고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에서는 교회의 기초(소)공동체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말씀이 현존하셔서 기초공동체를 만드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 주교회의에서는 지역의 복음화를 위하여 본당마다 소공동체위원회를 만들어 기초공동체로서 본당이 활성화되도록 소공동체를 강조하였다. 1975년 이후 교황님과 주교님들의 기초공동체에 관한 배려와 가르침은 계속 강화되어 왔다.
4) 마태복음 10장과 사도행전 2, 4장의 가르침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복음 선포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4장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초기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을 통하여 복음화를 통한 섬김과 나눔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과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배울 수 있다.
2. 기초공동체의 구성
1) 지역 우선
일정한 지역으로 나눈다. 우선 모임이 가능한 10가구 정도가 적당한데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공동체를 운영하기가 어렵다.
2) 가족단위의 다양한 구성원
구성원은 노인, 외짝 교우, 소년소녀 가장, 다양한 계층의 신자로 구성하며 예비자나 관심이 있는 자도 초대한다. 직업이나 학력에 대한 제한이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3) 자율성
기초공동체의 운영은 평신도가 자율적으로 이끌어 가는데 자율적이라는 의미는 교회법이나 관례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본당의 주임사제로부터 지도를 받지만 수동적인 자세로 지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뜻이다.
4) 복음나누기
공동체가 모임을 통해서 하는 일은 바로 말씀을 중심에 두고 나누는 일이다.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꼭 복음 나누기 7단계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나누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우리 삶을 성경의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하고 느낌을 나누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매 주가 좋지만 월 1회 또는 2회 정도로 공동체의 능력과 여건을 충분히 배려해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5) 모임장소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 여러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로마 16, 5)라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각 가정에서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기초 공동체도 그 구성원들이 서로의 가정에서 모임을 갖도록 한다.
3. 소공동체의 성격
1) 신앙공동체
기초공동체로서 소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중심이다. 물론 모임에서 우리가 읽었던 성경말씀을 때로는 잘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서로 의문점을 나누기도 하고 공부하기도 하며 가두선교 문제를 놓고 더 실천적인 방안을 간구하기도 한다. 예비자들을 인도하고 그들도 공동체 모임에 함께 나오도록 한다. 이렇게 신앙생활 안에서 실천하고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체험을 서로 나누는 것이 소공동체의 모임이다.
2) 예배와 기도의 공동체
가족적인 소규모 구성원들이 모여서 본당의 전례를 담당하기로 한 것에 대하여 의논하거나 본당의 지향에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기도를 함께 봉헌한다. 예를 들면 소공동체 구성원 중에 어떤 자녀가 놀이터에서 머리를 다쳤다고 하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병원을 찾아가 위문하거나 치료를 받도록 주선하고 아이의 치유를 위하여 함께 9일 기도를 봉헌했다. 얼마 후에 아이가 쾌유하였다면 파티를 열어 축하를 했을 때 고독한 아이의 가족들이 나눔의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면 바로 이것이 예배와 기도의 공동체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1996년 ‘대우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대인 7,493(약 3,190세대)명 중 대도시 인구의 4%가 하루에 한 번도 이웃에 사는 사람과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현대는 그런 사람이 늘어 가는 추세이다. 서로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기초공동체의 활동은 어느 시대보다 급박하게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성사 준비
혼인할 자녀들이 어디에서 신앙생활을 배우겠는가? 풍부한 결혼 생활의 체험들을 가진 기초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알려주고 생활 속에서 지켜봄으로써 알게 된다. 성품성사를 받는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가 신학교에 들어가고 성직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그 지역 공동체의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성소를 배우고 익히게 된다. 신학생 양성의 첫 단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외에 세례나 견진성사도 기초공동체 안에서 준비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성사준비를 하게 된다.
4) 사랑과 봉사의 실천
이웃의 형제, 자매를 위하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 봉사의 모습을 통하여 복음화의 계기를 마련한다. 이웃을 방문했을 때 어린아이가 혼자 집을 보고 있다면 집안을 청소하고 아이 간식을 챙겨주고 돌아왔다고 가정하자. 일을 나간 자매가 돌아와서 인사 차 찾아와 “저 모임에 나갈게요.”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웃의 소중함을 알면 소공동체는 더욱 활성화된다. 이웃을 방문했는데 감기로 며칠을 앓고 있다면 콩나물을 사다가 국을 끓여 먹게 하여주었을 때 국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작은 구원을 체험한 그 자매가 공동체 모임에 곡 참석하였다고 한다. 서로 돕고 서로 체험을 나누면서 이웃이 남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자세로 변할 때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이다.
왜, 소공동체가 필요한가?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공동체이다. 우리 모두는 공동체가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을 지니고 살고 있다. 구약에서 이 갈망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안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었던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고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 자유와 해방을 알리는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공동체가 되도록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제 3 장. 기초공동체와 하느님의 백성(교회 헌장 2장)
1. 하느님의 백성의 소명과 사명
소명과 사명의 의미를 구별해 보자. 소명이란 군대에 소집 영장을 받는 것과 같다. 소집을 입대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응소’(應召)라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한 표현이겠다. 군에 입대하여 군인이 되면 군인은 국토방위에 대한 사명을 가진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는 데는 참으로 다양한 일들이 있다. 분대 소총수로 일하는 이가 있고 대포를 조작하는 일을 하는 이도 있으며, 밥을 하고 운전을 하는 이들도 있다. 주특기라고 분류하여 600은 운전, 700공병 그 중에서도 보급에는 페인트, 시멘트, 목재 등등으로 세분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소집 영장을 주셨다. 초청장을 주시는데 이것을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아 응답할 때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복음 선포이다. 군인의 사명이 국토방위이듯 하느님백성의 사명은 복음 선포인 것이다.
복음 선포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주특기에 따라서 군복무를 하듯이 복음 선포에도 그 사람의 재능에 따라 다양하다. 글 쓰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고 성가대에 노래를 통하여 봉사하는 여러 형태의 봉사가 있다.
마태 25, 14-30 의 달란트의 비유에 달란트라는 말의 의미는 재능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저는 밥을 짓는 것 밖에 못합니다.”라고 하지만 그 밥 짓는 것도 달란트이다. 반장직분을 사양하는 이에게 “발은 튼튼합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튼튼한 발로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달란트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두었다. 주인이 돌아와서 금화 하나마저 빼앗아버렸다. 재능이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 있는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 대형 저울은 추수한 후에 쌀가마니를 다는데 필요하지만 작은 저울은 금이나 은을 다는데 필요하다. 일 년에 한 번 쓰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주 쓰이는 것도 있듯이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반장이나 구역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고 필요에 적절한 자리를 찾게 된다. 처음부터 겁먹지 말아야 한다.
2. 하느님과의 사귐
베드로 1서의 말씀에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백성이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존 포엘(John Poel)은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에게는 신학도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친구들 중에 유명한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 나랑 잘 아는 사이야.”라고 자랑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겠다고 하셨다. 요한 15, 14-15에서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의 벗이 된다.”고 하시며 종이라고 부리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다. 하느님과 사귐이 모든 이와의 사귐에 바탕이 된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주위의 형제와 자매와 나아가 전 피조물과 친구가 된다.
3. 하느님의 순례하는 백성
우리가 늘 같은 성당에 같은 장소에 나가고 있지만 우리는 변함없이 순례하고 있다. 시간이라는 기차를 타고 순례하고 있는 것이다. 10년전 컴퓨터를 생각해 보면 무게도 모양도 크고 투박했는데 요즈음은 모양도 작아지고 성능도 몇 배나 더 나아졌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하여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 주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각 시대에 알맞은 방법을 통하여 공동체를 만드시고 주관하신다. 우주 만물을 하느님 안에 일치시키고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시나이 반도를 거쳐 선택된 백성을 순례의 길로 부르셨다.
순례의 길 즉 떠나는 삶은 짐이 가벼워야 한다. 6, 25나 1, 4 후퇴의 경우에 처음에는 가재도구를 많이 가져 나왔으나 얼마 안 가서 하나씩 버리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아이를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순례의 길은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바로 가난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물질적 가난
이 가난은 하느님께서도 배격하시는 가난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 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원이나 제원, 재물을 독점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이것 은 정말 나눔으로써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2) 복음적 가난
이 가난은 물질을 귀하게 여기지만 결코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물질이냐 가난이냐 이 둘이 갈등을 빚으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볼쇼이 아이스 발레의 표를 받았고 곧이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표도 받았 는데 공교롭게도 두 공연이 같은 날이었다. 그러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아마도 더 좋 아하는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추운 날 9일 기도에 참석하기 싫은 게으름이 생겨 어떻 게 할까 망설이겠지만 잘 극복하고 참여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 등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눈앞에 득이 생기는 물질이나 재화 가 아니라 가난함을 택하는 것이 복음적 가난이다.
3) 헌신적 가난
자신의 삶 전체를 내어 놓는 가난함을 택하는 것이다. 수도자들이 청빈을 택하여 자신의 소유물을 갖지 않고 서원한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헌신적 가난이다. 순례의 길을 사는 우리에게 헌신적인 가난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복음적 가난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창세기 12,1-4에서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대로 길을 떠났다.”라는 표현은 짐을 가볍게 한 순례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4) 하느님의 백성은 공동체인 백성
하느님의 백성은 한 인격과 같은 백성이다. 어떤 이는 눈의 역할, 어떤 이는 발의 역할, 어떤 이는 손의 역할을 통해서 여러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의 모습으로, 한 인격으로 나타 난다.
1984년 여의도에서 한국선교 200주년을 행사와 그 후에 열리 103위 시성식에서도 공동체 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이렇게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사업을 성공리에 치루기 위해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1980년 가정공동체의 해, 1981년 이웃 전교의 해, 1982년 본당 공동체의 해, 1983년 교구 공동체의 해, 1984년 전국 일치의 해로 진행되었다. 본당과 가정 사이에 이웃을 넣은 것은 참으로 깊은 배려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백성인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하느님의 백성은 처음부터 공동체로 불림을 받았다.
4장.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
어린왕자를 쓴 생떽쥐베리는 비행기 조종사로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아프리카 사막을 가로질러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사막 한 가운데서 비행기 고장으로 불시착을 하게 되었다.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없는 상황에서 며칠을 생존해 있었다. 드디어 구조대가 도착해 그를 구했다. 구조대는 그를 구조한 다음에 어떻게 그렇게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견딜 수 있는 힘은 물도 빵도 아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 공동체는 모든 공동체의 기본이요, 기초이다. 우리가 말하는 가정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예배의 공동체이며,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이다.
1. 가정, 말씀이 중심인 공동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가정은 기도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과 대화할 소명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가정기도는 그 특성이 함께 바친다는 데 있다.
부부, 엄마와 딸과 아버지와 아들 등 가족 구성원 전체가 다 함께 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늘 가족들이 함께 하려고 노력하고 신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힘을 얻게 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정공동체이다. 교황님은 부모가 자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셨다. 식사 전후와 아침, 저녁 기도 그리고 삼종기도 때에 기도하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헌장 11항에 가정을 일컬어 “말과 모범으로 신앙을 가르치는 첫 교육장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교(敎)는 본받을 효(孝)와 칠 복(攵) 사이에 아들 자(子)가 있는 복합의미를 지니고 있다. 효는 교육 내용이고 아들은 교육 대상이며 칠 복자는 교육 방법이다. 칠 攵자는 자극을 주어서라도 본받게 하라는, 매를 사용하더라도 바르게 키우라는 의미가 있다.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모가 행함 없이 입으로만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일보 창사 특집으로 갤럽과 조사한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설문에서 어머니 63%가 자녀의 손을 잡고 새치기를 한 경험이 있다고 조사되었다고 밝혔다. 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무엇을 본받겠는가?
육(育)이라는 한자 의미는 해산 할 때 돌아 나올 돌과 고기 육 이라는 말로 구성되어 있다. 돌자는 교육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이가 말과 글을 익히기 전에 이미 부모의 것을 배우고 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뼈와 어머니의 살을 빌려 태어난 모습은 기가 막히게 닮아 있다. 육은 바로 배속에서 기른다는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교육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태교는 예전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교류분석이론에서도 이 태교가 입증되고 있다고 한다. 부모가 콩이면 자녀도 콩이고 부모가 팥이면 자녀도 팥이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미 공의회 문헌에서 말과 모범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첫 교육장이라고 강조하였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1976년 일반 알현 시간에 “어머니들이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와 기도를 가르치십니까? 어릴 적부터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알도록 하십니까? 병이 났을 때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모님과 성인들의 도움을 청합니까? 아버지들이여! 자녀들과 가정에서 기도하십니까? 아버지, 어머니 당신들의 생각과 행동의 정직한 모범이 기도와 합쳐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훈과 예배가 됩니다.”
말과 모범 그리고 공동기도가 합쳐지면 그것이 곧 예배요, 가치 있는 교훈이라고 강조하셨다. 신앙이 가정을 이끌어 가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신앙공동체인 가정은 복음적 식별을 통해서 그 진로를 명확히 한다. 그것은 가정이 참된 가정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현대 복음 선교에서 “교회는 회심하는 만큼이 교회의 모습이다.”라고 하시며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모든 가정은 기초공동체를 이루는 근본이며 바탕이다. 따라서 모든 가정은 기초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신앙을 쇄신하여야 한다. 혼자서 쇄신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교회공동체 안에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2. 가정, 예배의 공동체
예배의 공동체인 가정은 항상 내일의 삶을 봉헌하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화해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부부의 계약에도 침투하여 신뢰를 파괴시킨다.
부부사이의 화해는 빨리 할수록 좋다.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미루다 보면 서먹하고 가정은 급속도로 냉각된다. 이런 가정 분위기 안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봉헌을 드릴 수 없다. 또한 가족들이 함께 전례에 참여할 수 없다.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의 표현을 신앙적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생일날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것보다는 성가를 부르고 생일과 관련된 성경말씀을 낭독하여 그 기쁨을 크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 일상의 모든 일이 전례와 신앙으로 연결되어 있다.
3. 가정,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언제나 그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흘러 넘쳐서 주위에 있는 이들과 친교를 이루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도 드러내게 된다. 우리 가정의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가정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방문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은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바로 가정은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인 것이다.
수도자의 청빈서원은 공동체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다. 우리 가정에서도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있을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아끼고 나눔으로서 복음을 실천하는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4. 가정의 역할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의 인격을 서로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사목헌장 52항에는 “부부 자신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인간의 참된 존엄성을 향유하면서 같은 애정과 같은 생각이 서로 성화시키는 노력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기쁨과 희생이 수반되는 자기들의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충실한 사랑으로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상에 계시된 그 사랑의 신비를 증거 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장의 권위는 가정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할 때 가장의 권위가 있어야 하듯, 가족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권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느 회사에 젊은 과장급 간부들의 대다수가 집에 가면 권한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녀교육이나 살림살이에 관한 권한 전부를 아내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요사이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할 때에 서로 엄마를 하려고 한다. 우선 가장의 권위가 바로 서야 하겠고, 가족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결정에도 권위가 있어야 하겠다.
가정이 쇄신되고 제 역할을 해야 본당공동체에도 공헌할 수 있다 기초공동체의 기본인 가정공동체가 파괴되거나 해체되는 여러 경우에 연쇄적으로 기초공동체에도 영향을 준다. 가정공동체가 바로 본당공동체의 근본이기 때문에 가정공동체의 성장 없이는 기초공동체가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여야 하는 소명을 받고 있다. 가정성화의 소명은 하느님과의 일치에로의 소명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 48)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데살 4, 3)
마더 데레사 수녀를 일컬어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부르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일치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느님은 우리 가정이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 사도적의 권고 21항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일치의 특수한 표출이고 실현이다.”는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우리가 일치하고, 부부가 가정 안에서 일치하며, 그리스도가 교회와 일치해야 한다.
이제 가정공동체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내어놓고 공동체를 이룬 것처럼 우리 가정도 그리스도의 삶으로 쇄신 되어야 한다. 기초공동체의 구성단위인 가정공동체가 제 역할을 함으로서 본당의 기초공동체에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
제5장. 기초공동체들의 공동체인 본당
1. 본당이란
본당이라는 말은 성서에 어느 부분에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모른다’ 라는 말이 정답이다. 왜냐하면 성서에 본당이라는 말이 나오자 않기 때문이다. 본당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다. 이때 처음으로 본당이라는 제도를 만들게 됨으로서 사용하게 되었다.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을 다시 세분화하여 본당이라고 하며 본당은 교구내의 일정한 지역을 담당하는데, 이 본당의 사목 권한은 역시 관할 주교에게 있으며 주교는 관할 지역이 넓고 크면 주교는 자신을 대신할 사제를 파견하여 사목하도록 하였다.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타 교구 사제가 미사를 봉헌할 때에 반드시 그 관할 주교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또한 미사 중에 나오는 경문에 “우리 주교 ( 아무 )와 ...하는 부분에서는 반드시 관할 주교의 이름이 들어가도록 하고 있다.
교회법에서는 사목관할 주교의 권한을 교구 사제에게 위임하여 사목권을 수행케 한다. 따라서 교구 안에서도 일정한 지역을 본당 관할로 정하여 본당 주임사제에게 사목을 위임함으로써 일정한 지역은 그 주임 사제의 책임 아래 사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정한 교계제도에 따른 본당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당은 지역 중심이다.
둘째 본당은 사제 중심이다.
셋째 본당은 성사 중심이다.
본당이라는 말에서 흔히 우리가 집 당(堂)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본당을 생각할 때에 집이라는 개념을 먼저 떠 올리는 게 된다. 여기서의 본당은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본당을 이루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의미한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린 시기는 우리 역사로 환산해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임꺽정이 활약했던 시대이다. 그 당시 본당의 모습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어 모든 일이 사제에게로 집중되었던 때이다. 사회제도의 측면에서도 많이 변했다.
2. 본당의 유형
본당의 유형은 여러 형태로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조금씩 변해 갈 것이다.
주입식 본당, 사목회 중심 본당, 단체 중심의 본당, 단체들의 중심 본당과 기초공동체 중 심의 본당으로 나누어진다.
1) 주입식 본당
주입식 본당의 모습은 모든 것을 먹여주는 모든 필요한 것을 본당이 다 해결해 주는 본당이다. 본당 사제의 의사결정에서부터 그 일에 대한 책임까지도 혼자서 져야 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는 있어도 모든 일의 처리를 혼자서 하다 보니 독단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분주하고 피곤하며 외로워진다. 의견을 교환할 것도 없고 상의할 일도 없다. 이런 본당에서는 신자 역시 수동적이 되고 불평이 쌓이게 된다.
1917년 교회법에는 평신도는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청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영적이고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받는 수혜자로 평신도를 서술 하고 있다. 1983년 교회법의 개정된 부분에 평신도에 대한 규정을 새롭게 바꾸었다.
2) 사목회 중심의 본당
사목회 혹은 사목평의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어떤 교구에서는 사도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본당에서는 본당 사제와 함께 사목회가 본당의 일을 논의하고 소수이긴 하지만 사목에 참여하는 형태이다. 그러나 사목회는 자문기관이고 의결기관이 아니라고 교회법은 규정하고 있다. 사목회 회원은 본당신부가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본당신부에 따라서 운영의 묘를 살리기도 한다.
일의 주요성이나 복음적 식별에서 볼 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자문기관으로 되어 있는 사목회에게 제한적이긴 하지만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하는 것이다.
1983년 이후에 사목평의회가 출범했고 교회법 536조 2항에 따라서 사목평의회는 건의와 투표권만을 인정하고 있지만 한국 주교들은 교회법에 따라서 교구별로 이 제도에서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 건의 투표권을 인정하고 있다. 주입식 본당 보다는 원활한 참여가 있지만 사목회 중심본당 역시 대다수의 신자들은 쇄신에 참여할 수 없는 형태이다.
3) 단체 중심의 본당
본당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본당의 성장을 촉진하게 되었다. 단체들 중에는 신심단체(포클라레, 울뜨레아, 레지오, 성모회, 자모회 등등)그리고 각종 활동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단체 중심의 본당에서는 주로 모든 것이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본당 사제는 특별히 몇몇 단체에 편중한 사목을 하게 되고, 때로는 단체장의 역할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활성화가 저하되기도 한다. 또한 특정 단체에 일의 편중현상은 과부하가 걸려 갈등이 생기게 된다. 생업과 본당 일을 동시에 하는 단체장에게 본당 일이 과중해지면 어려울 수밖에 없고, 본당 사제의 기호에 따라 단체가 육성되기도 하고 사장되기도 하는 부작용이 있다.
어떤 본당 실태조사에 의하면 한 사람이 친교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은 150여명을 넘어설 수가 없다고 한다. 보통 시내 본당에서 한 본당 평균 3000명이라고 가정한다면 3년 내지 5년의 임기 동안 본당사제는 5%정도의 신자만을 상대로 사목을 하게 된다. 살찐 양 한 마리를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리는 것은 이상적인 본당상이 아니다.
본당이란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구 안에서 사제의 지도 아래 기초공동체들이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사귐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사제의 지도 아래 유기적인 공동체라는 의미는 마치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서 입에 넣는 순간 침이 고이듯, 자율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지는 상태를 말한다.
4) 기초공동체 중심의 본당
제5차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아시아의 바람직한 본당의 모습은 공동체들의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결의한 바가 있다. 본당은 예배와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이다. 기초공동체에서 힘이 모자라 할 수 없는 일은 본당 공동체 차원에서 해야 한다. 즉 대축일에 공동체 전체가 지낼 전례를 준비하고 참여하기 위해서 일을 분담하는 일은 소속감을 가지게 한다.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필요한 것과 어려움을 나누는 것을 배려하는 일이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서로에게 봉사하는 삶으로써 복음을 증거 하게 된다. 본당 구조는 원칙적으로 본당의 구성원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가 열려져 있어야 한다. 제단체 활동이 활성화되어 서로 돕고, 단체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초공동체가 참여의 기회를 열어주고 보완한다면 권한 분배와 책임의 원칙이 생기게 마련이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분권적 기초공동체가 모여 본당을 이루어야 하고, 분권적 기초공동체라면 스스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본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공동체가 활성화되려면 기초공동체에 일정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삼위일체를 닮은 인간은 일정한 책임감과 동시에 창조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욕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여러 형태의 본당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를 고찰해야만 한다. 최근에 대리구, 지역장 중심의 사목이 강조되지만, 대리구나 지역에 힘이 실리지 않는 까닭은 권한이 없기 때문에 이기도 하다. 결정은 당신이, 책임은 내가 진다면 누가 일을 하겠는가? 마치 전장에서 영광은 상관이 책임은 졸병이 진다면 그 부대는 틀림없이 사기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기초공동체에서 공동체의 대표(반장)나 구역장을 처음에는 임명하지만 나중에는 기초공동체에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일정한 권한과 책임이 병행되는 기초공동체의 운영은 활성화의 길을 열 것이다.
아직도 기초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며 자신의 편리를 너무 내세우는 경향 때문이다. 기초공동체가 우리 본당의 기본조직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본당에 소속감을 가진 구성원이 되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