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신타원 박진신 정사 약력
신타원 정사께서는 1917년 4월 19일에 황해도 개성에서 부친 박금서님과 모친 이정화님사이에
차녀로 출생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시고 예의범절에 대해 남다른 규범이 있으tu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시며 성장하셨습니다.
당시 지방에서는 꿈꾸기 어려웠던 경기여중에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하려 하셨으나 아버님의 간곡하신 만류가 있으시어 꿈을 접으시고 당시 암울했던 민족에게 희망을 일깨우는 길이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에 있음을 자각하시고 경성사범 대학에 입학하시어 교육자로서의 준비기간을 충실히 보내셨습니다.
원기 30년인 1945년 어머님의 인도로 항타원 종사께서 주재하시는 개성 교당에서 입교,
개성에서 서울로 월남하시어 개성 교도들에 의해 설립되어진 종로교당을 다니시며
법타원 김이현 종사님의 지도로 올바른 공부심과 신앙심을 뿌리내리셨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으셨던 신타원 박진신 정사께서는
원기 56년도인 1971년 3월 구로구 영일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다음해에 1학년 담임을 하던
원기57년 1학기 초에 학부형들과 대화하고 학생들 지도하는 중에 원불교 교리에 바탕한 말씀을
듣고, 매주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자 하여 학부형 집을 서로 돌아가며
법회 아닌 법회를 보기 시작하다가 동년 11월부터 구로동에서 제일 인접한
서울교당에서 출장법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교당 정타원 이정은 법사님의 관심 속에 구로교당이 설립되고 원기 58년 4월 2일에
초대교무로 충타원 류현정 교무님을 모시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이 부딪쳐 왔으나 결코 현실의 경계에 뜻이 꺾지 않고, 교당 초기에 고생하시는 교무님들을 모시며 당신의 생활에 더욱 근검하시고 더욱 절약하시면서 교당 유지 발전에 헌신의 정성을 다하시는 주인된 삶을 살으시다, 원기 74년 4월 12일 신타원 박진신 정사께서는 가족 일동의 명의로 교당 부지 매입 및 신축기금으로 1억원을 희사하시었습니다. 또한 육영사업회 회원으로 법은 사업회 회원으로 교단 사업에도 정성을 다하시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을타원 강숙원, 정타원 전도숙 교무를 비롯하여 여러분의 교역자를 길러내시는
자비훈풍을 불러일으키신 은모로써 사명을 다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 삶의 한 축인 독자이신 은산 이정권(면우) 아드님을 최연소 나이로 서울 대학교 공과대학교수로 취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어머님의 특별하신 교육 정신을 이어받아 w이론 등 한국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비젼을 제시하시고 신바람 나는 변화를 일으키자는 바람을 불리며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국가 대계인 산업공학 부문에 우뚝 솟은 거목으로 자리하시며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공인으로 성장하실 수 있었던 근원에는
어머님이신 신타원 박진신 정사님의 깊고 깊은 사랑과 노력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아들 이정권 교수와 자부 공혜륜 사이에 2남 1녀의 손을 두었습니다.
정사께서는 원기60년 11.1에 새로운 신자인 신新타원이란 법호를 수증하시고
원기64년에 정식법강항마위에 승급하셨습니다.
공부성적 정식법강항마위
사업성적 정특등2호
원성적 정1등으로
거진출진 1좌위에 오르셨습니다. 구로교당 교도일동은 구로교당의 창립유공인이신
고 신타원 박진신 정사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매년 열반기념제를 올립니다.







상원불도 의젓하게 합니다.

자부 은타원님도 오시고
지타원님도 함께 헌배 올리십니다.


재가교역자 함께 주례하시고



모두 함께 신타원님의 창립의 공을 기렸습니다.

이 주례가 전통으로 잘 뿌리내리게 되길~






사대강령, 원불교 진리관에 대해서 공부하고
오늘 사회는 이원웅님께서
마음 다해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예타원님도 오시고

양민수 부부불도 오셨습니다.

7월의 아름다운 둘째 법회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