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영원한 잠
한복이 용정에서 김두수를 기다리고 있을 때 김두수는 하얼빈에 있었다.
1917년 봄에, 화창한 봄날에 허벅지에다 권총을 쏘아대고 달아난 금녀를
김두수는 또다시 하얼빈에서 사로잡은 것이다. 햇수로 사 년 동안, 아무튼
김두수는 진드기 같은 사내다. 금녀가 김두수에게 다시 붙들렸다는 것은
김두수의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는 얘기가 되겠고 장인걸 쪽에서는
계산 착오가 난 결과로 볼 수 있다. 김두수는 권총을 쏘고 금녀가 달아난
그 지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육 개월 후 그 지점에
사람을 심어놓고 장장 사 년을 기다린 것이다.
'일이 년, 삼사 년... 반드시 나타난다. 내가 그곳을 잊었으리라
단념했으리라 생각했을 때. 사건이 난 장소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식으로 판단하니까 오히려 그 점을 고려하여 역으로 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 대가리들이 좋은 놈들이니까.'
쉽게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수포였으나 장인걸 쪽에서는 그곳을 잊었거나
단념했을 것을 생각하고, 정확히 삼년후 금녀를 다시 하얼빈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길상이 훈춘행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한복에게
김두수는 지금 용정에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김두수가 봉천으로 떴고
행선지는 아마 상해가 될 것이라는 정보를 받은 때문이다. 그러나
김두수는 봉천에서 하얼빈으로 간 것이다.
중국여자 구마가 사는 벽돌 이층집에서 약 오백 미터쯤 떨어졌을까?
창고처럼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총격 사거닝 났던 장소에선 과히
멀지 않았다. 얼핏 창고같이 보이지만 포염시에서 전당포를 차려놓고
왜헌병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양서방의 동생이 중국인으로 가장하고 사는
집이었다. 집안의 어두컴컴한 방에는 지금 손발이 묶인 채 송장처럼
금녀가 나동그라져 있었고 김두수는 인조견 속바지의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와이셔츠의 두 소매도 걷어올린 몰골을 하고서 술을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금녀씨."
씨를 붙인 것은 물론 조롱인데,
"날고 기는 나한테서 몇 번 도망을 쳤는지, 가만히 있자아, 윤가놈한테
두 번 달아났고오, 훈춘에서 한 번 달아났고오, 다음은 나한테 총알을
안기고서 달아났으니 도합 네 번이구먼. 그러고 보니 금녀씨도 대단한
여자야. 아, 아니지이. 심금녀 씨한테만은 이 김두수가 물렁죽이 되어
번번이 도망길을 열어주었다 하는 편이 옳을 게야. 그러나 이번만은 다를
거다. 그건 나보다 그쪽에서 더 잘 아는 일일 것이며 하하핫 으하핫핫...
다를 것이다! 하하핫! 핫... 초장부터 썩 달랐지. 아암!"
술 한 모금을 꼴깍 삼킨다.
"사내놈이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내가 가지고 논 그
수많은 계집들, 그것들과 동등하게 대접을 해줄 터인즉, 기대해 볼 만한
일이긴 해. 진작부터 그랬어야 하는 건데 턱없이 대단한 여자로
만들어버렸단 말씀이야. 내 하는 식으로만 했던들 이렇게 세월을
끌었을까?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은 나 이 김두수 흥분했다고. 위대한
김두수를 흥분시킨 심금녀는 역시 대단한 여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나동그라진 채 송장처럼 움직이지 않는 금녀의 둔부 쪽으로 김두수의
시선이 간다. 푸른색의 다브잔스를 입은 몸의 곡선은 김두수를 미치게
한다.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에는 썩 기분이 좋았을 게야. 하하핫핫..."
술병을 든 채 일어선 김두수는 둔부에 발길질을 한다.
"천천히, 천천히 삶아먹을까 구워먹을까 지져먹을까? 천천히,
천천히..."
이번에는 머리채를 감아서 여자의 얼굴을 쳐든다. 불길 같은 눈이
김두수를 노려본다. 두려움 없는 눈이 김두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금녀의 납치는 아주 면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구마 여인이 시장가는
틈을 노리다가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중국말이 유창한 양차생이
내객으로 가장하여 문을 열게 하였고 문이 열리는 순간 양차생과 김두수가
난입하여 재빨리 입에 재갈을 물렸고 다음 손발을 묶은 뒤 길모퉁이에
대기시켜놨던 인력거를 끌고 와서 금녀를 담아 실었던 것이다.
"죽는 것도 마음대론 안 될 게야. 점박이놈 그놈을 죽이기 전엔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속바짓가랑이,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린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렇게도 집요하게 쫓던 여자를 사로잡았건만 김두수는 승리에 취할 수가
없었다.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금녀를 소유하는 것, 금녀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거물급을 낚아올리는 일, 그 어느것도 실현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하여 술을 마시었고 계속하여 지껄였고 때때로 금녀를
구타하곤 했으나 이미 죽음을 결의하고 있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이 확실해지는 이외 다른 틈바구니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분노와
초조, 불안한 나머지 여자를 소유하는 일, 거물급을 체포하는 일, 금녀가
그 둘 중의 어느 한 가지에만 해당이 되었더라도 김두수는 기가 넘어서
금녀를 능욕하고 죽여버렸을는지 모른다. 금녀의 침묵은 죽음을 결의하고
있다는 예감을 더욱 굳혀주었다. 해가 질 무렵에는 와이셔츠까지 벗어던진
김두수는 마치 우리 속에 갇힌 맹수처럼 방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금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둔부에 눈이 가도 욕정 같은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이구, 그만!'
김두수는 양차생 내외가 거처하는 방으로 건너간다. 양차생이 힐끔 눈을
들어 쳐다보았고 그의 아내는 애써 김두수의 흐트러진 몰골을 외면하려
든다.
"난공불락입니까?"
유들유들 살이 찐 형과는 달리 균형잡힌 몸집에다 식자깨나 들었을 것
같은 얼굴, 양차생은 야유의 엷은 표정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듣기 싫다."
"온종일 물 한 모금 한 마셨는데 죽는 것 아닙니까?"
"으음... 아이구 가슴이야."
통통하게 살찐 주먹으로 두수는 제 가슴을 친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겠군요."
박닥에 퍼질러앉은 두수는
"담배!"
차생이 담배를 꺼내주고 불까지 붙여주는데 태도는 별로 공손치가
못하다. 그새 차생의 아내는 방에서 나가고 없었다.
"형님."
붕어 물 먹듯 담배를 피워대다가 절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끄고
두수는 차생을 외면해버린다. 이빨을 고친 후 한결 나아진 편이지만 돼지
상 같은 인상만은 여전한 두수의 옆모습에 위협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는
차생이 말을 잇는다.
"헌병대에 넘깁시다."
"뭐라구?"
"생각해보십시오. 그간 고생한 것을 건져내는 것은 그 길밖에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
"거기서 찢어먹든 볶아먹든 우리 알 바 아니지요. 뭣 땜에 손해나는
장살 합니까?"
"..."
"저 여자 저대로 죽을 거요."
"이 새끼가! 불난 집에 부채질이야!"
"형님도 참 이상해요. 막마음 먹고 한번 덤벼보시구려. 내 목적은
하나지만 형님 목적은 둘 아닙니까?"
"이 개새끼야! 어느 놈이 송장하고 잠자리 같이하는 것 보았냐?"
"제발 욕지거리만은 그만두슈. 그것만은 질색이니까요."
"차생이 이놈아!"
두수는 작은 눈을 힘껏 부릅뜨고 노려본다.
"나를 몰라서 하는 수작이냐! 네놈 꼭대기 위에 내가 서 있다. 아무나
다 나같이 될 줄 알어? 가소롭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여차하면 가로가는 게야. 이 김두수가 지금 네 눈에는 갈팡질팡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말씀이야. 피도 눈물도 없다는 걸 자알 알면서, 하핫,
하하핫핫...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더라고."
차생은 잠자코 만다.
"흥, 앞뒤를 열 번은 더 재고 사는 놈이다. 네까짓 피래미가? 만주
바닥에서 십수 년을 굴렀기로."
협박을 쏟아놓는데 누굴 믿고 그러는지 배짱이 있어서 그러는지, 차생은
대항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동요하는 기색은 없다. 나 밀정이오, 하고
얼굴에 그려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차생은 어딘지 세련돼 보이는
용모의 소유자다. 잘생겼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으나 특히 갸름하고 혈관이
솟아오른 손은 귀골로 뵌다.
"그렇지만 저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차라리 달래보는 게
어떻습니까. 풀어주고 대접도 잘해주면은 혹 모르지요."
"흥, 그래서 될 일이면은, 자네도 어리석기가 한량없구먼."
"되든 안 되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요.
방치해둘 순 없지 않습니까."
"풀어줄 수는 없다. 절대로, 송장이 되는 한이 있어도."
"쓸데없는 고집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심한 고문을 하든지요."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자네 안사람 어디 갔나."
"글쎄요."
"자야겠다, 이 방에서."
"주무십시오. 여편네보고 저 방에서 자라지요 뭐."
두수는 침상으로 올라가 이불 자락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돼지 같은 놈! 꼴같지도 않게끔.'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것을 참는 듯 차생은 손수건을 꺼내어 입가를
닦는다.
차생이 이곳에다 주거를 정하였다 하여 금녀를 잡는 일에만 전념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김두수 명령에 의해 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었다. 영사관의 끄나풀로 돈푼이나 받아먹는 형과는 달라서
차생은 정규적인 정보원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하얼빈에 머무는
목적은 애초부터 따로 있었고 말하자면 금녀의 경우는 일을 하는 동안의
낙수를 줍는 정도의 성격이라 할까. 배후의 거물을 낚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생의 명령 계통인 스즈키 대위도
동의했으며 형으로부터 금녀에 대한 사연을 들어서 다소 사정을 아니까
김두수로부터 얻어낼 보수도 계산에 넣고 있었으나 금녀 문제에서
명목상으로는 김두수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비중이야 차생에 비하면
월등하고 일의 범위도 넓고 깊었으며 다사다난한 풍운이 감도는 연해주와
만주 방면을 무대로 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대소사건의
공작에까지 가담하고 있는 김두수고 보면 금녀에 관한 일 같은 것은
내실이야 어쨌거나 표면상으로는 하찮은 낙수다.
이튿날 아침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두수는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세수를 하고 옷도 말쑥하게 갈아입고 신문을 읽고 있던
차생은 신문지에 눈을 둔 채
"어떻게 되긴요. 그대로지요."
"도망가진 않았군."
"무슨 재주로요. 집사람 얘기론 헛소리 한번 안 하고 죽은 것 같아서
심장에 귀를 대보곤 했답니다."
신문에 눈을 둔 채 말을 했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런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김두수였는데 잠자코 담배를 집어들고 붙여문다.
"소위를 생각하면 찢어죽여도 시원찮겠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뭐가 이해하기 곤란해?"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겠고 형님이 한 여자를 두고 그렇게 긴 세월을
단념 못했다는 일 말입니다. 형님에겐 과분한 여자이긴 합디다만."
신문을 돌려서 기사를 찾으며 차갑게 웃는다.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말을 하네. 그런 말 하니까 두손
마주잡고 찬송가 부르는 젊은놈들, 허리가 휘청거리는 젊은놈들 생각이
난다. 나는 날 때부터 겨루기 위해 태어난 놈이야! 억만금의 돈이 있어도
싸움 없는 세상이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사누."
두수는 들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요란스럽게 가래를 뱉어낸다.
"그 계집이 진작부터 날 받아들였음 옛날 옛적에 버려진 신발짝이었지,
흥!"
조반을 함께 끝내고, 양지로 이빨을 쑤시고 있는 차생을 노려보다가,
"두 번 다시 헌병대를 들먹이다간 골통이 부서질 줄 알아."
비대한 몸을 비비적거리듯 벽 쪽으로 물러나 앉으며 두수는 다짐을
둔다.
"이제 나는 손을 떼겠어요. 형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말해 뭣하나. 두 번 하면 잔소리다. 이제부턴 대가리 처박지 말어."
"허 참, 그 점잖은 말씨 좀 써주시오. 대가리니 골통이니,"
"밑천을 다 아는 터에, 작위라도 받을 생각하는 모양인가?"
"말말이 그렇게 나오면은,"
하다가 내버려두고,
"그 대신 말입니다."
말머리를 돌린다.
"그 대신이라니? 무엇 대신이야?"
"저 여자 일에서 손을 떼는 대신 응당 보수에 대한 매듭을 지어야 안
하겠습니까."
"보수에 대한 것?"
"돈으로 해결하는 것은 우리들의 관례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하니
상해서 올 물건값 절반은 주셔야겠습니다."
"스즈키가 돈 받으라 했나?"
"그쪽에선 사람이겠지요만 사람도 안 내놓겠다 그 얘기 아니었소?"
"그랬었나? 하하하, 그랬었구나. 그런데 네가 하나 모르는 일이 있어."
"..."
"상해서 올 물건값 그거 내 돈 아니야. 공작금인 걸 알고 하는 소린가?"
"물론 알고 하는 말이지요. 어두컴컴하고 애매했으면 저 여자 일이
아니라도 갈라 쓰게 돼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여태까지 어두컴컴하고 애매한 돈을 갈라서 써본 적이 없는데?"
차생이 발끈해서 두수를 쳐다본다. 상해서 올 물건값이란 아편값이다.
아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돈을 갈라 가질 이유가 된다는 뜻이다.
"하긴 그렇군. 공작금을 잘라주어서 안 된다는 근거는 없지. 공작금이
필요한 인간이라면 말씀이야. 되놈 행세 하는 데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자네고 보면은 스즈키 그놈아아가 귀여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냐.
주머니칼처럼 생광스럽게 쓰여질 테니, 하여 네놈이 배짱을 두둑이 내미는
모양인데,"
"제발 욕지거리는 그만두십시오."
신경질을 부린다.
"안심하고 나가게. 나가서 볼일이나 보아. 물건값은 아직 안 왔고
계집은 저 방에 있어."
"안심하고 자시고 있습니까? 내가 경우없는 말이라도 했어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도 삼 년이면 새경이 두둑할 겁니다. 형님과 내 사이에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겠고,"
"아, 아니, 왜 이리 잔소리가 많지? 누가 못 주겠다는 말이라도
했었나?"
"당연한 것에 형님이 꼬리를 다니까 한 말이지요. 그럼 나가보겠어요."
일어서 나가면서 차생이는
"자알 해보슈!"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돌아본다.
'별 개떡 같은 놈을 다 보겠군.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보아 저러는 게야.
국으로 있으면 다아 돌아갈 텐데 젊은놈이 보채기는 더럽게 보챈다.
윤이병이놈 그놈 꼴로 만들어버리는 것쯤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인
줄도 모르고, 이럴 때 날 건드리면 재미 적다는 걸 왜 몰라. 그렇잖아도
한바탕 굴리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해오는데, 제에기랄! 그림의 떡도
유분수 아니야?'
방 임자를 쫓아내놓고 마치 제 방처럼 벌렁 나자빠진 두수는 다시 벌떡
일어난다.
"계수! 계수씨! 없소오?"
하며 고함을 지른다. 예에, 하고 대답을 하면서 차생의 아내가 달려왔다.
중국말이 서툴러서 중국여자 행세가 어려웠기 때문에 벙어리로 가장하며
지내온 처지였는데 별로 파탄 없이 지내온 것으로 보아 평범해 보이는
여자치고는 상당히 영리하다 할 수 있겠다. 자그마한 몸집에 중국옷이
어울리는 편이었고 몸짓 탓인지 나이보다 앳되고 어리광스런 표정,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타고난 것인 듯 싶다.
"그 계집 뭣 좀 처먹었소?"
눈을 깜박깜박하며
"아니오."
"억지로라도 좀 먹여보아요!"
"입을 꼭 다물고 물도 한모금 안 넘기려 하니 어쩝니까. 그렇게 독한
여자 처음 봤어요."
"으응, 그만 그걸,"
침상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두 주먹을 쳐들고 흔들어 댄다.
"방문을 잠그고 손발을 풀어주는 게 어떨까요."
"안 돼요. 그건 안 된단 말이오! 송장이 되어도 달아나는 것보담은
낫지."
한나절을 술 가져오라, 여자에게 뭘 좀 먹여보아라,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쉴새없이 명령하던 두수는 저녁때가 가까워왔을 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미음을 쑤어서 주전자에 넣어가지고 아가리를 벌려 부어보아요."
"여자끼리 어떻게,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긴말 할 것 없어요. 죽이는 일이오? 죽이는 일이냐 말이오? 처먹어야
살아날 게 아니겠소. 미련하기는, 내가 이런 말 안 해도 해볼 일을
가지고. 어서, 하란 말이오!"
두수는 악을 쓴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죽음이라도 다가오는 것처럼
안절부절 침상에서 뛰어내려 걷어올린 속바짓가랑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좁은 방안을 서성거리며 계속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쓴다. 여자는 시키는
대로 금녀 방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기척이 났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아주버니!"
"달아났소?"
두수는 방문을 박차고 나간다.
"아니에요. 손, ...을 물었어요."
여자는 울상이 되어 엄지손가락을 싸들고 있었다.
"날 따라와요!"
두수는 여자의 손목을 불끈 쥐고 잡아끈다. 몸집이 작은 여자는 마치
팔랑개비처럼 끌려간다. 금녀가 있는 작은방으로 간 두수는,
"계수씨, 저년 아가리를 숟가락으로 벌려요!"
손가락을 물리는 바람에 겁에 질린 여자는,
"나, 나는 못하겠어요."
뒷걸음질을 친다.
"못하겠으면 내가 하지."
옆에 놓인 주전자를 번쩍 쳐든다. 다음 순간, 모로 누운 금녀 옆얼굴에
주전자를 내리친다. 주전자 속의 하얀 미음이 비말이 되어 사방에
흩어진다. 금녀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구머니나!"
여자가 달아나려 하자 두수는 한 팔을 거머잡는다. 그리고 주전자를
내동댕이치는 소리, 그 소리에 이어 옷 천이 찢어져나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서, 두수는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다. 짐승처럼 눈에 파아란
불을 켜고서. 다브잔스가 찢어져나가고 속옷이 찢어져나가고 맨살이
드러난다. 금녀의 육신이 경련하듯 꿈틀거린다. 여자는 어느새
달아나버리고 거의 나체가 되어버린 금녀는, 그 지경이 되어도
무저항이다. 두수는 무저항에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쫓기어 그는 금녀
살덩이를 밟고 짓뭉갠다. 두수가 그 방에서 나왔을 때 여자는 넋빠진
것같이 멍청하게 두수를 바라보았다. 푸른 불길이 그제도 타고 있는
두수의 눈이 좁혀들면서 먹이를 채려는 순간의 집중, 그리고 다음 여자의
팔목을 소리없이 강인하게 쥔다.
아까처럼 몸집이 작은 여자는 팔랑개비처럼 가볍게 끌려간다. 침상에
냅다 던져버린 몸뚱이가 한 번 퉁겨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살려주어요!"
모기 소리를 내며 여자는 떤다.
"사, 살려주어요!"
"잠자코 있어! 잡아먹지 않을 테니."
"요, 용서,"
달싹이는 입술을 짓이기듯 두수는 머리를 들이댄다.
"하마 네 서방놈이 올 게다."
사나이 밑에 깔리어 여자는 버둥거린다.
"이런 일은 들어서 잘 알 텐데?"
두수는 끼들끼들 웃으며 왜병들이 여자를 어떻게 취급하는가를, 특히
여자를 고문할 때 어떤 식으로 강간을 하며 처리하는가를 지껄이면서
서서히 가랑잎처럼 가벼운 여자 몸에 침입을 기도한다. 죽은 듯 축 늘어진
여자로부터 떨어져나온 두수는 옷을 챙겨입고 담배를 붙여문다.
"네 서방놈 죄야. 돈 좋아하는 그놈에게 준 벌이란 말이야."
끼들끼들 웃는다.
"나한테만은 그래서 안 되지. 자알 타일러주어. 이럴 때 내 비늘을
거슬려놓으면 귀신도 모르게 간다고 말이야."
여자는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좀 나가주실까? 나는 괜찮지만 서방님 오실 때가 되지 않았어?"
순간 여자는 용수철같이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뛰어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양차생이 돌아왔다. 눈물을 흘린 것도 아니었는데 부풀어
오른 아내의 얼굴을 본 차생은 의아해하는 표정이더니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다.
"몸이 좀, 아, 아파요."
하며 얼굴을 돌려버린다. 차생의 시선이 아래로 가며 아내의 손가락에서
멎는다. 피 묻은 손가락? 차생의 얼굴빛이 싹 변한다.
"손에 피가?"
"저기이,"
"왜 그리 됐는가 묻지 않소? 무슨 일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게요?"
"죽 먹이려다가 죽 먹이려다가, 물렸어요."
"물려? 저 방 여자한테 말이오?"
"예."
"기가 막하셔, 그렇담 약이라도 발라야지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해?"
걱정은 하면서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두수가 방문을 열고
나온다. 태연자약한 태도에 여자는 으스스 떨며 얼굴을 숙인다.
"양선생."
조롱을 실은 어조다.
"갑자기 양선생은 또, 왜요?"
차생이 울곧잖게 말하며 돌아본다. 교정은 했으나 그래도 뻐드러진
이빨을 드러내놓고 두수는 소리 없이 웃고 있다. 소름끼치게 기분 나쁜
얼굴이다.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차생은 어금니를 깨물어보다가,
"일은 잘돼갑니까?"
"내가 웃어서?"
"기분 좋을 때 웃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왜 웃는지 자네 안사람보고 물어보게나."
차생은 반사적으로 아내 쪽을 돌아본다.
"임자보고 물어보라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게요?"
험악하게 노려본다.
고양이가 쥐 놀리듯 죽을상이 되어가는 여자 얼굴을 곁눈질하며 두수는
또다시 잔인하게 여자를 몰아붙이는 말을 내뱉었다.
"겁이 나서 얘길 못하는 모양이야."
차생은 사태를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음인지 입을 다문 채 두수를
노려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던가? 저 방에 한번 들어가보라고. 그럴 듯한
구경거리가 기다리고 있을 게야."
사색이 되었던 여자 얼굴에 핏기가 돌아온다.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구경일걸? 외입하는 셈치고 들어가보라니까."
"나는 또 무슨 일인가 했지요."
차새이 얼버무리며 픽 웃는다.
"자네 안사람을 내가 집적였을까 봐서?"
"형님도, 말이면 다 하는 줄 아시오? 이봐요, 저녁 차리지 않고서 뭘
하는 게요!"
분위기가 이상하여 한순간 그런 생각을 했던 만큼 차생은 당황하고
난처한 것을 감추려 애를 쓴다. 여자는 살아난 기분인지 부엌쪽으로
달려가고, 두수와 차생은 방으로 들어간다.
"온종일 술을 한 모양이군요. 방안에 술 냄새가 가득 찼어요."
"술, 술 했지."
"많이 취했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술과 돈과 계집이 있는 한 인생도 살아볼 만하지."
"형님한테 그런 풍류가 있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빠진 것이
하나 있군요."
농담이나 남을 약오르게 하는 말도 기우뚱거리지 않고 네모 반듯하게
하는 것은 차생의 버릇인데 그럴 때마다 두수는 배알이 틀리지만 한편
양서방이나 윤이병을 대했을 때처럼 만만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빠진 게 하나 있다아?"
"권력이 하나 빠지지 않았습니까?"
"고지기 자식놈이 선비 행세 하노라 애쓴다. 그 멀끔한 선비 얼굴에
누가 똥칠이나 말았으면 싶지만,"
하다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바보 같은 놈! 외입질도 못하는 주제에, 세상이란 으레 그런 게야."
두수는 네 계집, 방금 내 수청을 들었다는 말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난다.
"또오, 또오 시작이군요. 그 욕지거리 그만둘 수 없습니까?"
"양반이 하는 욕은 자고로 상놈이 들어야 하는 법이야. 양반의 말씨는
거칠어도 상놈의 말씨는 으레껏 공손해야 하는 법, 안 그런가?"
"너무 그러는 것도 신상에 과히 좋은 것은 아닙니다."
"너 날보고 협박하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보다 저 방 여자는 어찌 됐지요?"
"발가벗겨놨다."
"네?"
"계집년들 발가벗기는 거야 누워 떡 먹기지."
"좀 심했군요."
"풋내기 같은 말 하시네. 고문의 초보를 몰라 하는 소린가?"
"십 년을 두고 짝사랑하던 여자니까 하는 말이지요."
"아, 아, 사양할 것 없네. 가서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구."
"취미없는데요."
"취미없으면 지랄한다고 장가는 가아? 중이나 되지. 한 계집이나 열
계집이나 눈감고 아웅이다."
저녁상이 들어왔다.
"계수씨!"
"예."
겁에 질린 눈이 두수를 주시한다. 이번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나는 술이오. 밥은 치우고,"
"예."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차생이댁네는 시키는 대로 술을 가져왔고 밥그릇은
내갔다.
"오늘 들은 얘긴데요."
밥을 먹으면서 차생이 얘기를 꺼낸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막대한 돈이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풍문이 돌고 있었지."
"풍문이 아니라 확실하다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돈이라나요?"
"어마어마한 돈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나온 것을 사실로 치더라도 상해
임정 쪽으로 흘러들어갈 리는 없어."
두수는 일소에 부친다.
"그럼 형님은 돈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시오."
"돈이 나온 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엉뚱한 곳으로 갔을 게야. 상해
임정의 대통령 이모라는 작자가 일본 대신 미국의 보호를 받겠다 하여
임정 내부가 쑥밭이 된 모양인데 러시아가 미쳤다고 거기에 다 돈을 주어?
저희들의 코도 석 자 오 치나 빠진 판국에,"
"그것은 그렇지가 않지요. 대련서의 일로 양국간의 회의가 아직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잇는 것을 보아도 러시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지요.
니항사건의 주동자 중에 조선인 독립군이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네 영내에는 조선의 독립군이 전혀 없다고
러시아는 시치미를 떼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요구하는 조선의 독립군
해산 문제가 무슨 딴 계획이 없다면은 이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계획? ... 있을 수 있지. 국제군이란 말이 나돌고 있으니까, 일로전쟁
때부터 이쪽으로 도망온 조선놈들이 러시아 편에서 잘 싸워주었거든.
얼마우제(러시아 귀환인)놈들, 그놈들도 세계대전에 많이 나갔었고, 백군
적군 싸움에도 조선놈들이 끼어들었지. 연해주엔 조선놈들이
우글우글하니까."
"바로 그 국제군이라는 것 말입니다. 조선인 부대가 적위군 편에서
백위군과 싸우는 틈새, 그 총구가 니항의 일인들로 향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겁니다."
"미친 소리 마라. 우연은 무슨 놈의, 자네 변설조도 병이야."
"..."
"설령 러시아가 조선 독립군을 모조리 불러들여서 앞으로 일본하고 한판
하는 데 써먹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가리들이 알아서 할 일, 조선놈들
모아봤자 별수없어. 상해 임정꼴 나기 십상이지. 자네 말마따나 대련서도
독립군 부대 해산을 들먹이는 만큼 다 그만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게야.
벌써 독립군 소탕 작전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풋내기 같은 소리
작작 하고, 아무리 군침 삼켜도 어마어마한 돈이 흘러간다는 그 줄기를
자네 손으로 찾아낼 순 없지.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은
뭐 해로울 것도 없지만 말이야. 스즈키 앞에서나 열심히 걱정해봐."
"영에서 매맞고 집에 와서 마누라 친다더니, 아, 형님 뜻대로 안 되는
게 내 죄란 말입니까?"
"시끄러! 우스워서 그런다. 십 년 전부터 흑룡강 물줄기를 밟고 올라간
사람보고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눈감아도 훤하다, 이 새끼야. 식자 좀
들었다고 날 가르치는 거냐?"
"하 참, 그냥 화가 나면 화를 내실 일이지 엉뚱한 데다 꼬리를 달아서
왜 이러십니까?"
"술이나 처먹어라."
하고 두수는 술을 들이마신다. 하루 종일 별의 별 놈의 지랄을 다 했으나
두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생이 저녁을 끝내는 것을
본 두수는,
"양선생, 일어서시오."
"또 왜 이러십니까?"
"허허허, 일어서라면 일어서는 게야. 사람의 탈을 썼다고 해서 너무
가리는 게 많아도 숨이 가빠서 못사는 게야. 밤마다 저 계집을 품고
자면서 도사연할 건 없다. 자아, 가자. 가는 게야. 못 보고 죽으면 한이
될 게다."
억지로 끌어낸다. 실상 두수는 금녀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가도 못 갈 것이 없는데, 뭔가 구실이 있어야 했다.
구실이, 왜 구실이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오랜 세월을
그토록 집요하게 금녀 뒤를 쫓아다녔는지 그것도 이제 와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금녀를
사로잡음으로 하여 두수의 두 가지 목적, 그 어느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는 것 이외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다만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놓아주느냐 죽여버리느냐, 그것을 선택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어느것도 원하지 않는 선택, 두수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차생을 떠밀어넣는다.
"앗!"
차생의 입에서 비명이 울렸다.
"볼 만하지?"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찌 되긴, 눈요기 자알 하게. 살갗이 비단결 같지 않아?"
"주, 죽었군요!"
순간 두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차생을 밀어젖히고 얼굴을
디민다. 금녀는 죽어 있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고, 두수가 차생이댁네를
정신없이 범하고 있을 때 금녀는 벽에 머리를 부딪고, 수없이 부딪고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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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3부/1권/2편) 3장 영원한 잠
黎明 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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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3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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