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우
[황국신민의 서사] 입안한 충견
·金大羽, 1900∼?
·1928년 평북 박천군수. 1936년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1940년 경남 참여관 겸 산업부장. 1945년 경북 지사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인사들을 이른바
시국강연에 동원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을
입안·계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일제의 충신 김대우! 그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충성스러운 친일관료였다.
3·1 운동 참여 후 친일관료로 변신
사실 일제의 식민지 관료사회에서 조선인이 인정받기는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에는 중앙이나 지방할 것 없이 기관의 장이나 중요 요직은
일본인이 독점하였으므로, 조선인이 일제의 관료로 승진·출세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시대 관료로
출세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일제 식민지 전기간 동안 조선인 국장이 단 두
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같은 관료라 하더라도 조선인
관료들은 박봉에 시달렸고, 일본인에 비해 보직·승진·보수 면에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김대우는 이처럼 출세하기 어려운 일제의 관료사회 속에서도 남다른
재주와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손꼽히는 친일관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친일관료들은 일제의 식민정치, 총독정치를 실제로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하여
일제의 의도대로 조선 민중을 무마·회유·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친일관료는
일본 국왕의 관료로서 같은 민족을 직접 상대하면서 지배하고 통치하였다.
따라서 친일관료야말로 일제 식민지배의 주구이자 선봉이었다.
친일관료는 시기와 내용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김대우의
경우는 대학 또는 전문학교를 마치고 일제의 하급관료로 출발하여 출세한
친일관료들의 부류에 속한다. 대학을 나와 친일관료로 나아간 김대우는 학력
위주의 일제시대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승진했고 마침내 일제의 눈에 들어
도지사까지 올라갔다.
김대우는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나와
경성공업전문학교(훗날 경성공업고등학교로 바뀜. 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
광산학과에 들어갔다. 전문학교 2학년 때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대우는 같은 학교 학생인 주종의, 유만종, 박창배, 박동진 등과 함께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주최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법에서
7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기도 했겠지만,
스스로 일제와 타협하여 출세를 도모하고자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규슈(九州)제대 공학부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 졸업과 함께 변신하여
친일관료가 된 것이었다.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입안
김대우는 대학 출신이면서도 말단에서부터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즉, 대학
졸업 뒤 바로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서기 겸 총독부속(屬)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관료생활이 얼마 되지 않은 1928년에
평안북도 박천군수, 1930년에 도 이사관(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장) 등으로
승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승승장구는 곧 고시 출신들을 앞지르는
데까지 이르러, 그는 총독부 사무관으로 승진, 1936년 10월에 요직이라 할
수 있는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발탁되어 3년간 재임했다. 이 때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여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총독부 학무국은 이른바 교학쇄신과 국민정신
함양을 명목으로 황국신민화 교육을 집행·시행하는 최고 부서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김대우는 바로 이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으로 있으면서 온갖 수완을 부려 친일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더욱이 1937년 10월경 그는 일제가 온 국민으로 하여금 외우고 부르도록 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는 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의 눈에 든 김대우는 1939년 봄, 경찰관료 출신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이원보(李源甫)와 자리를 바꿔 전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금융조합연합회 전라남도 감리관, 전라남도 방공위원회 위원 등도
겸임하였다. 1940년 9월에는 경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43년 8월 전북지사로 승진하였다. 조선인 가운데 처음으로
1923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출세를 거듭한 이창근(李昌根)이 도지사로
승진한 것이 1942년 10월이었으니, 김대우가 얼마나 일제 당국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어 일제가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이창근의 후임으로 경북지사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당시 학무국장으로 뽑힐 것이라는 애기가
나돌았다고도 한다.
이밖에도 그는 1939년 5월부터 1940년 9월까지 광주사상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을 지냈고 전북도지사로 있던 1944년 9월부터는 조선근로동원원호회
지부장을 맡아 노무동원을 감독·지도하였다. 이와 함께 총독부
중앙정보위원회 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대우가 이처럼 친일관료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히 일제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우는 허우대도 크고 풍채도 당당했으며 언변도
뛰어났다. 또 도지사급의 관료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영어 회화도 꽤나 잘해서
여러모로 주목을 받았다. 총독부의 신임도 워낙 두터워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도지사로서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말기의 총독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모리타(森田芳夫)도 1964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조선 종전의 기록}(朝鮮終戰の記錄)에서 김대우가 해방
당시 조선인 도지사 가운데 가장 실천력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고
지적했다. 김대우의 대학 후배이며 모교인 경성공업고등학교 교수를 지냈던
안동혁(安東赫)씨는 그를 '대단히 의지가 강하면서도 세파(世波)에
연달(練達)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대우가 일제로부터 실천력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이 단순히
행정 추진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선인 관료를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은 일제에 대한 충성도에 달려 있었다. 일제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명령을 철저히 수행하고 일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관료가 가장 능력있는 관료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또한 김대우가 파격적으로 출세한 배경에는 일제가 조선인 관료들에게 서로
경쟁심을 유발시켜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어느 경우에나
식민지 국가 내부의 분열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통치하는 법인데, 조선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친일관료들은 일제에 대한 자신을 충성을 내보이기
위하여 민중들을 탄압하고 다루는 능력을 과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일본의 항복선언에 하염없이 눈물 흘려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서 출세를 계속해온 김대우는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자,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였다. 일제의 지배가 영원할
줄로 믿고 있었던 그는 충성스러운 친일관료답게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하곤 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누군가가 그 장담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그 말은 인간 김대우가 한 말이
아니고 도지사 김대우가 한 소리'라고 얼버무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무튼 해방은 조선인 관리로는 최고 지위에 올라 있던 김대우에게 새로운
고난을 예고해 주고 있었다. 일제하에서 총독부 관료를 지낸 자들 가운데
90%가 해방 직후 직장을 이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9월 8일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맥아더 사령부의
포고문 제1호에 근거하여 일제 총독부의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일본인
관리와 친일 조선인 관리를 그대로 눌러앉혔다. 이에 따라 김대우는 해방된
뒤에도 그대로 경북도지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친일파들이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해방을 맞이한 김대우는 정말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으면서, 일제도
알아주는 친일관료의 의연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김대우는 1945년 8월 14일 한밤중에 내무부장 구라시마(倉島至)로부터 일제의
패망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구라시마는 이 정보를 대구 일일신문 사장
가와이(河井戶四雄)로부터 입수했다. 구라시마의 얘기를 들은 김대우는
짐작하고 있었는지 겉으로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구라시마에게
다음날인 15일 이른 아침 이른바 '월요 연성일'에 도청의 모든 직원들을
집합시키도록 지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대우는 내무부장과 함께 일제의
패망 소식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직원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엄숙히 행했다.
그리고 정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종전 이후의 대책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김대우는 곧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을 정식으로 듣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천황의 항복 소식을 엄숙한 자세로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영원할 줄 알았던 김대우에게 일본의
패망 소식은 가슴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던 것이다. 김대우는 곧이어 모든
도청 직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훈시를 했는데 여전히 '천황'의 관료로서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는 훈시에서 '조선의 참된 독립은 매우 어렵다.
오늘 이후 일본과 조선은 손을 맞잡고 동양은 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친일관료답게 일제의 패망을 알리는 '천황'의
항복방송이 흘러나오는 이날까지도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논리, 곧
대동아공영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때 김대우의 훈시를 들은 어떤 친일
조선인 군수는 '일본의 패전을 억울하게 생각한다. 군수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베 총독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오후 김대우는 총독 아베(阿部信行)로부터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전화로 받았다. 다음날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한
그는 정무총감 엔도(遠藤隆作)로부터 조선인 지도자들에게 행정권을 넘겨주는
막후 교섭을 벌일 것을 명령받았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대우는 여운형, 송진우, 안재홍 세 사람의 합작을 바탕으로
나머지 명망가 몇 사람을 끌어모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는 여운형과는 타협이 되었으나 송진우와는 협상이 뜻대로 되지 않자
김대우를 협상사절로 동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일제 총독부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김대우는 엔도 총감으로부터 앞뒤 사정을 듣고 송진우와의 협상에 나섰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또 김대우가 협상의 성사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이에 일제 당국은 앞서의 태도를 바꾸어 미군 점령 때까지 계속 행정권을
장악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를 알게 된 그는 영주·영덕 군청이 분노한
민중들의 습격을 받는 등 경북 도내의 치안 상황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22일 대구로 내려왔다.
당시 경북도내의 상황은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었다. 미군정의 명령에 따라
10월 13일에는 모든 일본인 관리를 사퇴시키고 조선인으로 그 자리를 메꾸는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주로 경상북도의 부장 및 과장과 군수를
조선인으로 교체시킨 이 인사이동은 그 때까지 여전히 경북지사로 있던
김대우가 주도했다. 그는 이 때 일본인 대신 일제하에서 친일을 했던 조선인
관리를 등용하는 방식으로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신문에서도 양심적이고 때묻지 않은
민간인들의 등용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김대우는 많은 민간인을
임용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발표하지 못해 유감이지만 비어
있는 자리가 아직도 많으니 신망있는 인물이 발견되는 대로 등요하겠다는
변명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이 때까지도 경북지사로 그대로 있던 김대우는 10월 18일 미군정으로부터
경북도지사에서 정식으로 파면한다는 사령장을 받고 해임되었다. 10월 들어
미군이 남한 전역을 장악하고 점령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미군정은
10월 19일자로 크로낼 E. A. 헨 대령을 경북도지사에 임명하였다. 김대우는
도지사에서 물러나고 미국인 도지사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일제시기에 도지사 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들은 공직으로부터 추방하라는 명령이 정식으로 떨어지자,
김대우는 관직에서 물러나 완전히 '보통사람'이 되었다.
'해방이 낳은 문제아'
김대우는 일제시기 관료생활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해방 당시
45세였던 그는 영어회화도 수준급이어서 미군정에서 다시 등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미군 도지사가 취임한 다음날 아침 갑자기
도청에 출근하여, 나는 파면된 것이 아니고 아직 도지사라고 주장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그는 '모든 조선인 관리는 현업에 충실하라'고 한 아놀드
군정장관의 메시지를 증거로 내세웠다. 즉, 지난 10월 18일 서울에서 아놀드
장관과 회견하여 아무쪼록 도정에 적극 노력하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에 갑작스레 핸 대령이 취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그날 아침에 핸 대령과 만나 서로 힘을 도와서 일하자고 말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김대우의 이러한 뻔뻔스러운 행동은 많은 경북도민들의 냉소를 자아냈다.
도민들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온다면 얼마나 반가울까만은 파면된 지사가
옛날 의자로 다시 찾아왔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비아냥거렸다. 갑자기
경북지사가 두 명이 된 상황에서 당시 대구의 {영남일보}는 [누가 진실인가
알지 못할 지사 1명]이라는 제목으로 김대우 소동을 일종의 넌센스 사건으로
다루었다.
김대우는 이제 '해방이 낳은 문제아'로 신문에 이름 석 자를 올려놓게
되었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구 공소원(控訴院) 검사국에서는
김대우를 공금횡령 혐의로 입건하고 호출령을 내렸다. 1946년 1월 31일,
신문에 처음 보도된 사건의 내용은 김대우가 경북도지사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해방 후 거액의 공금을 불법적으로 써 버렸다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그는
공금 20만 원을 국제회관 주인 주경진(朱鏡鎭)에게 준 것을 비롯하여 약 50만
원이라는 거액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대우의
공금횡령사건은 그 규모 때문에 더욱 비화되었다. 1월 25일 서울의
특별검찰청 직원이 대구에 내려와 사건 내용을 조사하고 관계서류를 모두
특별검찰청으로 발송하였다.
사건이 점차 확대되자, 김대우는 서울에 올라가 몰래 숨어지내면서 검찰의
호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마포경찰서장으로 있던 자신의 동생
김호우(金虎羽)를 검찰청에 출두시켰으나 검찰은 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돌려 보냈다. 김호우는 1938년 평양 선교경찰서 위생과장을 거친 친일 경찰
출신으로 훗날 치안국 수사지도과장, 동대문경찰서장을 지냈다.
당시 김대우가 계속 숨어다니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서울 검찰당국에서 수감하였다는 얘기서부터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항간에 떠돌았다. 그러다가 신문에서는 김대우가 사건을
모면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도망갔다는 애기를 보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향인 이북으로 넘어가지 않고 대구에서 숨어살다가 1949년 가을,
반민특위에 친일파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판에서
'공민권 3년 정지'라는 가벼운 구형을 받았고, 그해 9월 15일 결심공판에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판명되어 무죄로 풀려났다.
김대우는 그 뒤에도 출세를 거듭했던 친일관료 시절의 향수를 여전히 잊지
못하여, 환갑의 나이를 맞은 1960년 제5대 총선 때 경남 양산에서 출마하여
다시 재기를 노렸지만 정계 진출을 위한 그의 마지막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김대우는 8명의 후보 가운데 3위(4111표)에 그치고 말았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김대우는 이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묻혀져 갔다.
■ 김무용(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1979.
{영남일보}.출처 : http://www.banmin.or.kr/n_pds/chinilpa99/banmin/jmjeong/kimdw/kimdw.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