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년호(大年號) 또는 원호(元號)라고도 한다.
중국의 제도에서 비롯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사용되었다.
중국의 경우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BC 140).
그 이전에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원년(元年)을 고쳐 '중원년'(中元年)·'후원년'(後元年) 등으로 사용했다.
연호가 정식으로 사용되면서
길상(吉祥)의 출현,
정치적 이상,
종교적 바람 등
여러 이유로 새 연호를 제정해 사용했다.
이렇게 연호를 고치는 것을
개원(改元)이라 한다.
따라서 한 군주대에 여러 연호가 사용되기도 했는데,
명(明) 이후에는 1대 1연호를 사용하는 것(一世一元)이 관례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연호는 황제만이 제정하여 사용할 수 있었고,
제후왕은 연호를 독자적으로 제정하여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왕릉비문 廣開土王陵碑文〉·
〈덕흥리고분묵서명 德興里古墳墨書銘〉을 통해
고구려의 광개토왕(391~412 재위)대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연가7년명금동불상(延嘉七年銘金銅佛像)·
영강7년명금동불상(永康七年銘金銅佛像)·
건흥5년명금동불상(建興五年銘金銅佛像),
경주 서봉총(瑞鳳塚)에서 출토된 연수원년명은합(延壽元年銘銀盒) 등의
'연가'·'영강'·'건흥'·'연수' 등이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중 건흥은
백제 연호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영락을 제외하면
어느 왕대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백제의 경우
일본 이소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에 나오는
태화(泰和)를 그 독자적인 연호로 보기도 한다.
신라의 경우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문헌을 통해
연호의 제정과 사용 사실이 확인된다.
즉 536년(법흥왕 23)에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처음 제정하여 사용했다.
이후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으로 고쳤고,
이어 대창(大昌)·홍제(鴻濟)·건복(建福) 등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647년(진덕여왕 1)에 제정한 태화(太和)를 끝으로,
당(唐)과의 외교관계가 밀접해지고
그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다.
통일 이후 신라는
줄곧 당의 연호를 사용했으나,
822년(헌덕왕 14)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뒤를 이어
그 옛 땅에 고왕 대조영(大祚榮)이
진국(震國:발해)을 세우고
699년 천통(天統)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했다.
이후 발해는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새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했는데,
모두 10여 개가 확인된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에서
견훤(甄萱)이 연호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궁예(弓裔)는
무태(武泰)·성책(聖冊)·수덕만세(水德萬歲)·정개(政開) 등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우면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제정했고,
제4대 광종은
광덕(光德)·준풍(峻豊)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준풍을 끝으로
이후 고려시대에는 송(宋)이나 요(遼)의 연호를 사용했다.
다만 1135년(인종 13)에
묘청 (妙淸)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한 적이 있었다.
친명정책을 내세운 이성계 일파에 의해
조선이 성립된 후 줄곧 명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만주에서 발흥한 청(淸)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명나라를 문화적 종주국으로 여기는 반청의식(反淸意識)을 가진 성리학자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숭정(崇禎)이라는 명의 연호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후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건국연도를 기준으로 하여
개국(開國)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뒤 을미사변 이후 1896년에
개화파가 집권하자
1세1원의 원칙에 따라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제정했다.
그러나 1897년 8월에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가 취해지면서
국왕을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새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게 되었다.
그후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바뀌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8·15해방 전까지
공식적으로는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쇼와[昭和] 등 일본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시행되면서
서력기원을 사용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단군기원(檀君紀元)을 공용연호로 제정(법률 제4호)해 사용했다.
1948년은
단기(檀紀) 4281년이었는데,
이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을 BC 2333년으로 보고
여기에 서력기원을 더한 것이었다.
그뒤 5·16군사정변 후
1961년에 연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775호)이 공포되면서
다시 서력기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어 지금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