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극단 흥」, 『아! 나혜석 길 위의 여자 불꽃이 되다』무대에 올린다
‘제12회 서울시민연극제’ 참가작…23일(목) 오후 7시 노원문화예술회관
총예술 감독 온성균, 연출 여운미, 작가 김명호 ‘의기투합’한 창작품
(서울=김정태 기자)-「문화사랑극단 흥(단장 여운미)」이 『제12회 서울시민연극제』에서 「아! 나혜석 길 위의 여자 불꽃이 되다(이하 아! 나혜석으로 표기)」를 무대에 올린다.
서울연극협회·서울연극지부협의체·노원연극협회가 공동 주최·주관으로 23일(목) 오후 7시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막을 올리는 작품 「아! 나혜석」은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인 나혜석의 삶을 시민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창작극이다.
주최 측에 따르면, (나혜석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예술의 자유, 여성의 자아실현이라는 오늘의 가치로 확장해 관객과 만난다.
「문화사랑극단 흥」은 지역 주민과 시민 배우가 함께 만드는 공연 예술단체로 세대 간 소통과 공동창작 지향을 목표로 하는데, 이번 공연 역시 전문 예술인과 시민배우가 함께 호흡하며 완성도를 높이게 된다.
총예술 감독 온성균, 연출 여운미, 작가 김명호가 합을 이룬 「아! 나혜석, 길 위의 여자 불꽃이 되다!」출연진 김은지, 김자숙, 임인재, 안중현, 임현재, 정은희, 박준일, 효도사나에, 토피가 열연을 펼친다.
「문화사랑극단 흥」의 여운미 단장은 “나혜석을 과거의 인물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했다. 시민들이 함께 만든 무대의 진정성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공연명 : 「아! 나혜석 길 위의 여자 불꽃이 되다」(전석 무료)
일시 : 7월23일(목) 오후 7시30분
장소 : 노원문화예술회관
주최 : 서울연극협회
주관 : 서울연근지부협의체 노원연극협회
후원 : 서울특별시 노원구청 노원문화재단 동대문연극협회
“다다미 우에서 차게 군 까닭인지 자궁(子宮)에 염증이 생(生)하야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동시에 매일 병원에 다니기에 이럭저럭 겨울이 다 지나고 봄이 돌아오도록 두어장 밖에 그리지를 못하였다.”(나혜석 : 조선일보 1926년 5월 20일 자 3면)
한국 근대사의 전환기, 여성에게 교육과 사회 활동의 기회조차 넉넉하지 않았던 시대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한 여성이 있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이다. 그는 한국 근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화가이자 작가, 그리고 여성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을 외쳤던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영광보다 편견이, 찬사보다 비난이 더 컸던 비극의 연속이었다.
나혜석은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귀국해 유화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여성 화가 자체가 드물었던 시절, 그는 전문 예술가로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이나 인물 묘사를 넘어 새로운 미술 세계를 향한 도전이었고, 한국 근대 서양화의 출발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1928년 작으로 추정되는 나혜석의 자화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그의 도전은 화폭에만 머물지 않았다. 소설과 수필을 통해 여성도 교육받고, 직업을 가지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는 보편적인 가치처럼 받아들여지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유럽 여행 이후 불거진 연애설과 이혼은 그의 모든 업적을 덮어버렸다. 사회는 그의 그림보다 사생활을 먼저 이야기했고, 여성에게만 엄격했던 도덕적 잣대는 그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남성에게는 쉽게 용인되던 일이 여성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혜석의 폭로가 담긴 ‘우애결혼, 시험결혼’ ‘이혼 고백서’가 실린 '삼천리'. |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인(誘引)하는 이상 그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愛好)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1934년 ‘삼천리’ 8, 9월호에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이혼고백서」일부)
▲무용수들, 1927-2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통해 결혼 제도의 불평등과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희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당시에는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한국 여성 인권 의식의 선구적 선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대는 그를 외면했지만, 역사는 그의 문제 제기가 결코 개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말년은 더욱 안타까웠다. 작품 활동의 기회는 줄어들었고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그는 1948년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는 예술가로서도, 사상가로서도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 ▲수원화성문, 연도미상, 개인 소장.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다. 오늘날 그는 단순히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아니라 한국 근대미술의 개척자이자 여성의 사회적 권리와 인간의 존엄을 누구보다 먼저 외친 선각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고, 그의 삶은 시대의 편견이 한 인간의 재능과 가능성을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나혜석의 삶은 찬란한 성공과 처절한 좌절이 공존한 한 편의 역사였다. 그는 시대보다 한 걸음 앞서 걸었기에 당대에는 이해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예술과 사상은 더욱 깊은 의미를 얻고 있다.
결국 그의 삶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나혜석이라는 이름은 오늘도 그 질문에 답을 찾게 하는 한국 근대사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김정태 munhwaus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