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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충성당 김철웅 신도회장(좌측), 부회장(우측)과 함께 한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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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성당 복사 소년이 목사 되어 장충성당에 서다
나의 큰아버지 최종우는 경기도 양평읍내 큰 성당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고향 마을에 아담한 천주교 성당(공소)을 세우고 평생을 인근 지역 여러 마을 신자들까지 돌보시는 공소회장을 지내셨다. 독실한 가톨릭신자로서 경기도 양평 지역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큰아버지는 수원교구 소속 양평본당과 시골 공소를 부지런히 왕래하며 중계역할을 했고 노년까지 공소예절(사제가 없는 상태에서 평신도가 주일의식을 집전하는 것)을 이끌던 중 나병으로 선종했다. 과거 나환자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나병이 옮았던 큰아버지는 마지막 투병 과정 중엔 손가락, 발가락이 썩어 절단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나는 이를 가까이서 목격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뛰어놀던 유일한 놀이터는 새벽종을 치는 작은 성당과 마당이었으며, 열 살 무렵에는 주일 미사나 공소예절 때 복사 역할도 했다. 당시는 미국에서 원조한 밀가루, 신발 등의 각종 구호품들을 성당 마당에서 주민들에게 자주 나눠 줬으며, 이로 인해 성당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한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큰아버지는 강론 때마다 항상 남북통일을 강력하게 소원했고 북녘 땅에도 천주교 성당이 세워져야 한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이처럼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영향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고, 복사 소년을 경험했던 나는 장로교 목회자가 된 지금도 천주교라는 종교가 그리 생소하지 않으며 아련한 동심의 추억 속에 매우 익숙하게 받아들여진다.
비록 내 신분은 장로교 목사지만 가톨릭신자였던 큰아버지의 당부를 항상 잊은 적이 없으며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며 대북사역을 하던 중 현존하는 이북 기독교 교회를 탐방하는 프로젝트를 세우는 과정에서 가톨릭교회도 포함하게 됐다. 이북의 가톨릭교회를 참관하거나 연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평양 ‘장충성당’과 더불어 지금은 중단됐지만 함경도 신포지역에 케도(KEDO) 경수로 공사현장이 한창이던 때 생활관 부지 안에 적벽돌로 건축한 ‘금호성당’의 존재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측 근로자들이 매주일 드리는 ‘개성공단 공소예절’공동체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양평의 시골 성당 마당에서 뛰어놀다 세살터울 형님(최성영)과 함께 했던 유년시절의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과오와 모순
1784년 조선 땅에 최초로 가톨릭복음이 전파되면서 조선 가톨릭교회는 어느덧 230년의 역사를 맞았다. 그러나 구한말의 상황과 일제 강점기, 해방의 격동기, 남북분단과 전쟁 시기 그리고 전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현장에는 있었으나 민족의 교회로서 이를 극복할 사명과 책임에는 소극적이었다.
더구나 가톨릭의 특성상 원래 자생적 자주적 종교가 아닌 로마 바티칸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종교이다 보니 우리나라 가톨릭은 민족의 가치보다 종교적 사대주의에 함몰되어 민족이 당면한 문제는 등한시했던 반면 개인구원과 외형적 발전에는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조국과 민족보다 교회와 교황이 더 중요했고, 민족의 존망이나 민족해방보다 바티칸의 입장과 호교론에만 치중해 왔으며 고위성직자들과 사제들은 미국적 반공주의를 최상의 가치로 여겨 제국주의국가들이 원하는 반공투사가 되었고 제단은 반공강연장이 되어왔다.
사제들은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해방보다는 교회의 안전을 위해 복무했고, 해방과 분단 이후에도 진정한 민족통일보다는 무조건적인 반공에만 급급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복음적 가치마저 상실하는 듯 했다. 특히 소련의 볼셰비키혁명 이후 종교박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며 미국과 서방세계 위주로 반공의 열기가 높아지자 우리나라 가톨릭계도 반공사상에 매몰되어 일제시대의 공산주의 운동과 해방공간에서의 이념적 혼재 현상마저도 맹목적으로 경계하는 강퍅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분단 상황에서 드러나는 이념적 양상에 대해서도 극히 편협한 태도를 보이며 ‘친일-친미-반공’의 혼합된 이념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그 결과 좌우이념으로부터 중립성을 견지해야 할 한국 천주교회는 성서적 정의와 평화를 전파하는 공교회로서의 복음적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또한 근대화가 될수록 한국 가톨릭은 극우적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친미적 지배이데올로기에 기울어지며 친미반공 성향이 고착화되었다. 이런 편향적 태도는 남북 양측이 팽팽히 대립하며 적대적 행위를 할 때 이를 질타하거나 중재적 역할을 못했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이를 극복할 민족화해와 협력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도덕성마저 상실했다.
물론 남측 가톨릭교회가 1970년 중반부터 국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거나 동참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친미반공의 이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런 연유들로 인해 서울의 남측 가톨릭을 둘러보고 북의 장충성당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과 발걸음은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몹시 무거웠다.
▲ 1937년 당시 미국인이 촬영한 평양의 성당 전경, ‘천주당’ 간판과 함께 마당 왼편에 인력거가 보인다. [사진출처: frchriszugger.com에서 제공] |
평양 장충성당(將忠聖堂)을 찾아가다
장충성당을 찾아가려면 내가 자주 머무는 평양호텔을 빠져나와 대동교 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선교 강안거리’라는 교차로가 나오며 이 교차로 좌측에는 주체탑이 있고, 우측에는 평양고무공장이 나온다. 이 선교강안 교차로부터 ‘새살림거리’가 시작되는데 첫 번째 나오는 ‘청년거리’를 지나 또 다시 작은 두 블록을 지나 우회전하면 작은 공원이 나오는데 그 공원 옆에 바로 장충성당이 위치해 있다.
나는 평소 장충성당이 위치한 동네의 유래가 궁금해 2013년 여름에 방문할 때는 일부러 성당 옆 공원에 노니는 몇몇 노인 분들께 다가가 인사를 드린 후 ‘장충동(將忠洞)’의 유래에 대해 알아봤으며, 북측 가톨릭 관계자들과 장충성당 신자들에게도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했다. 그 결과 현재의 ‘장충동’은 과거 1955년에 ‘동구역’의 ‘율 1동’일부와 ‘율 2동’일부를 병합해 새로 만든 동이었으며, 59년에는 ‘선교구역’의 ‘장충동’으로 개편되었고, 연이어 1965년에는 1동과 2동으로 분리 개편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충동’의 유래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장풍마을’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와전되어 ‘장충동’이라 하였다”는 설과 “나라에 충성을 다한 어떤 장군이 이 고장에 살았는데 그의 공적을 같이 전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풀 이름을 ‘장충’이라 불러 그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있으며, 현재 장충성당이 위치한 ‘선교구역’은 총 21개동으로 구성됐으며 행정구역상 ‘장충 1동’에 속해 있었다.
▲ 인공위성 구글 맵으로 내려다 본 장충성당. [사진출처: 구글 맵 제공] |
▲ 장충성당 평일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도들의 모습.[사진제공 - 최재영] |
▲ 휴일을 맞아 장충성당 울타리옆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네 주민들. [사진출처: 정찬열 제공] |
‘장충성당이 옛날 수녀원 자리라고요?’
나는 평소에도 이북의 교회를 연구하면서 현재 ‘장충성당’터가 과거에는 어떤 자리가 있었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현재의 평양 ‘칠골교회’나 ‘평양제1교회’등이 무작정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역사적 유래가 깊거나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큰 터전에 건축됐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북을 왕래하는 재미교포 사제와 가톨릭신자들이 장충성당 옛터에 관해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접하게 됐다. 소문을 두 가지로 요약해보면 첫째, 현재의 장충성당이 있던 자리는 수녀회가 있던 장소라는 것이고 둘째, 현재 장충성당을 출석하는 신자들 중에는 6.25전쟁 전까지 활동했던 수녀들이 아직도 몇 명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선 두 차례의 장충성당 방문을 통해 다양한 루트를 동원해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서실확인 작업을 집중적으로 시도하기로 했다.
제보자들이 언급한 수녀회는 1932년 6월 27일, 조선 땅에 가톨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모리스(Morris, John Edward) 몬시뇰 신부가 ‘평양 영유읍 상수구리 257번지’에 자국인 수녀회로 설립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이하, 성모수녀회)’라는 수녀원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구두로만 전해진 풍문일 뿐이며 수녀회가 있던 곳이 현 장충성당 자리라는 구체적 근거 자료를 제시하는 사람은 남측과 북측은 물론 미국에서도 아무도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장충성당 자리에 수녀원이 있었다는 근거자료를 확보하는 일이었기에 서울과 미국에서 백방으로 알아 본 결과 당시 평양지역에 있던 성모수녀회의 존재는 사실이었으나 그 수녀원 자리가 현재 장충성당 자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많은 수고와 연구가 필요했다.
▲ 1935.6.27에 첫 청원을 마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도자들과 수녀들이 영문잡지를 보며 웃는 모습. [사진출처: 가톨릭신문사 제공] |
▲ 1948년 부활절에 기림리본당에서 첫 영성체 후 어린이 11명과 기념촬영한 모습(뒷줄 왼쪽 장정온 수녀, 조문국 신부, 강루갈다 수녀). [사진출처: 가톨릭신문사 제공] |
장충성당 발원지를 찾기 위한 몸부림
나는 우선 그 동안 장충성당 설립 이래 가장 많이 방문 미사를 집전한 재미교포 박창득 신부(어거스틴 몬시뇰)께 도움을 구했다. 미국 뉴저지주 한인 가톨릭교회의 원로이자 미국 동북부 한인 가톨릭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박 신부는 일생동안 악화된 간 때문에 평생 세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없는 평양 장충성당을 수시로 오가며 미사를 집전하던 중 2015년 9월에 안타깝게도 선종했다.
장충성당 신자들을 많이 접촉해 본 박 신부에게 이런 사실들을 문의한 결과 6.25 전쟁 전에 활동하던 수녀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인해 주었으나 장충성당 자리가 과거 수녀원 자리였다는 말은 자신도 모르는 사실이라고 답변을 했다. 한편 수녀원 자리에 대해 최초로 언급을 했던 미주교포는 이미 몇 년 전에 서울에 있는 성모수녀회 본부 측에 그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했으나 확인 결과 수녀회 측에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이런 내용을 기반으로 65년 전의 장충성당 자리와 그 부근에 대한 자료들을 찾기 위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920~50년대 평양에서 활동했던 자료들을 찾았으며 온라인상에 제공된 평양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을 다룬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했고 이 자료들을 토대로 방북 후 장충성당 관계자들에게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금시초문인 듯한 표정으로 “장충성당 자리가 옛날 수녀원이 있던 자리라고요?”라며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으며 장충성당 신도회 김철웅 회장 역시 그 동안 이 지역 행정구역이 빈번하게 바뀌었고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인이 어렵고,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평양에서도 내가 직접 발 벗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다양한 종류의 평양지도가 필요하다고 느낀 나는 안내원에게 요청해 양각도호텔 서점에 들려 평양시 행정구역 개편과정이 수록된 지도책자를 구입했다. 이어서 인민대학습당 도서관을 방문해 해방 전 동평양지역의 행정구역 개편 역사가 수록된 서적들을 신청해 독서실에 앉아 파악했으며 인민대학습당 도서관 PC의 인트라넷을 활용해 관련 자료를 검색하기도 했다.
▲ 장충성당을 수시로 방문해 주일미사를 집전했던 박창득 신부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 평양인민대학습당 도서관에서 신청한 책을 기다리는 필자. 신청서적은 컨베어벨트를 통해 자동으로 전달된다. [사진제공 - 최재영] |
▲ 우리나라 전체가 나온 북측 정부의 공인지도. [사진제공 - 최재영] |
▲ 인민대학습당 도서관에서 평양시 행정구역 개편을 확인하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
장충성당은 장정온 수녀가 흘린 땀과 피 위에 세워졌나?
만일 현 장충성당이 성모수녀회가 있던 자리였다면 이는 분명 당시 수녀원장이던 장정온(張貞溫) 앙네따 수녀가 흘린 땀과 피 위에 세워진 것이다. 1932년 6월, 평양 상수구리(上水口里)에서 창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이하 성모수녀회, 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Help)’는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평양교구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추방되면서 장 수녀가 조선인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수녀회는 평양지역 여러 곳에 분원들을 세우며 발전을 거듭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장 수녀는 남측에서 조선 천주교의 선각자로 칭송받는 레오 장기빈과 그의 부인 루시아 황 사이의 3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난 인텔리 여성이었으며 7남매 자녀들 중에 가장 신심이 돈독했다. 자녀들 중에는 간혹 친일논란이 있는 사람도 있었으나 7남매 모두가 남측의 명망 있는 가톨릭 지도자나 학자, 정치인 등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장남은 정치인 장면(張勉) 박사, 차남은 화가 장발(張勃) 교수, 삼남은 항공 공학자 장극(張勀) 박사이며, 장녀는 장정혜(張貞慧), 3녀는 장정량(張貞良), 4녀가 장정순(張貞順), 차녀가 바로 장정온 앙네따 수녀였다.
장 수녀는 미국 메리놀 수녀원으로 유학을 가 공부를 마친 후 1924년 10월, 메리놀 소속 3명의 신부와 6명의 신부들과 합류해 평양으로 입국한 후 평양교구 수녀원 총무로서 조선 수녀 양성업무와 미국 수녀들의 조선어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다 1935년, 조선인 최초로 수녀회 원장을 맡은 후 평양지역 여러 곳에 분원을 세우며 발전을 이끌던 1950년 5월 15일 수녀원은 해산됐고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해 전세가 뒤바뀌던 10월 4일, 평양에서 90리 떨어진 송림리에 체류하던 중 북측 인민군 3명에게 연행된 후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장 수녀는 종합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오래있을 수 없어 이집 저집 숨어 다니다가 숙박계 없이는 하룻밤도 잘 수 없게 되자 소나무가 우거진 송림리 교우집으로 숙박계를 하고 그 집에 묵다가 평양 내무성에서 왔다는 인민군 3인에 의해 연행됐는데 그들은 “너의 오빠 장면이 지금 미국에서 남조선 대사(大使)로 있으니 조사를 해야겠다”면서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아무래도 장충성당 인근에 거주하는 고령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공원에 노닐던 노인들 서너 명에게 집중적으로 알아본 결과, 과거 6.25 전쟁 전에 이곳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는 증언을 여러 명에게 듣게 됐다. 집요한 설문 끝에 의외로 큰 수확을 거둔 것이다. 이어서 평양의 각 지역 천주교 본당에 수녀회 분원을 세웠다는 자료를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이 장충성당 자리에 세워진 옛날 본당을 찾은 후 그곳에 수녀회 분원이 있었다는 자료를 찾아야만 했다.
▲ 좌측 위부터 장발, 장면 박사. 앞줄 좌측이 장정온(앙네따) 수녀, 우측이 처조카 김교임 수녀. [사진출처: 월간 경제풍월 제공] |
▲ 1936년 평양 상수구리에서 수녀회 설립자인 모리스 몬시뇰과 함께한 수녀들과 청원자들 모습. [사진출처: 가톨릭신문사 제공] |
‘상수구리’는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장충성당 자리에 수녀회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남북의 가톨릭사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는 역사적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긴장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각도로 확인한 결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있던 ‘상수구리(上水口里)’는 원래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던 동네로서 본래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의 지역이었고 ‘빗물이 흘러가는 구멍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수구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에 일부 지역을 분리해 ‘평안남도 평양부 하수구동’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나머지 지역은 ‘평안남도 대흥면 개천동’일부와 병합하여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가 되었다. 46년에 평양특별시 중구에 소속되면서는 ‘영문리’로 개칭되었으며 상수구리를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는 하수구리(下水口里), 장별리(將別里), 계리(鷄里), 관후리(舘後里), 상수구리(上水口里), 신양리(新陽里), 경창리(景昌里), 죽전리(竹典里), 감점리(監店里), 이문리(里門里), 채관리(釵貫里) 등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수녀원이 세워졌을 당시의 ‘상수구리’지역이 지금의 ‘선교구역 장충 1동’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거나 찾아야만 모든 것이 풀리기 때문에 수녀회 연혁들을 한 가지씩 확인하며 풀어가야 했다. 먼저 수녀회 첫 분원이 세워진 평양 관후리성당을 알아봤다. 관후리성당이 있던 위치를 살펴보니 당시 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개신교 장로교파였던 ‘평양장대현(章臺峴)교회’가 있었고 그곳에 바로 관후리성당이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으로서 현재 평양 학생소년궁전 부근이다.
당시 수녀원에 살았던 강오숙 루갈다 수녀는 “당시 기와집이었던 수녀회 건물과 관후리성당까지는 걸어서 7분 거리에 있는 매우 가까운 거리였고, 기림리본당 수녀로서 상수구리 모원에 거주할 때는 4~5㎞ 가량 떨어진 기림리를 1시간씩 걸어 다녔다”고 증언했다. 이로서 수녀회 첫 발원지였던 ‘상수구리’와 가장 먼저 분원이 세워진 ‘관후리성당’은 평양의 가장 핵심부인 김일성광장 부근인 것으로 확인됐다. 아울러 김일성광장 건너편, 대동강을 건너 주체탑 부근에 있는 선교구역의 장충성당에 수녀회가 있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해졌으나 나는 당시 동평양지역에 있던 여러 성당과 천주교 기관들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 관후리성당은 1934년 4월, ‘평양교회’에서 ‘평양 관후리교회’로 개칭했다.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 서포성당의 모습. 1931년에는 성당 옆 부지에 교구청 건물을 준공했고 훗날 교구청건물은 수녀회 본부가 됐다.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수녀회가 세운 모든 분원들을 물색하다
우선 장충성당이 위치한 현재의 ‘선교구역’에 대한 행정구역개편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째, 평양은 1912년에 평안남도 소재지 ‘평안부’로 되어 그 산하에 대동강면, 율리면 등 26개 면을 두었으며 둘째, 1928년 3월에는 대동강면(大同江面)의 선교리, 동대원면(東大院面)의 신리 등이 평양부에 편입되면서 59개 리(里)와 정(町)이 되었으며 43년에는 81개 리와 정이 되었다.
셋째, 광복직후인 1946년 9월, 평양시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확대위원회 결정에 의해 평양은 평안남도에서 분리되어 특별시로 개편하여 중구, 동구, 서구, 북구를 설치했으며 이때 ‘동구(東區)’는 선교리, 신1리~3리, 율1리~3리, 대신1리~3리, 등 21개리로 구성됐다. 넷째, 세월이 흘러 1955년 2월에는 일부 리와 동을 개편해서 ‘동구역(東區域)’에서는 선교동, 장충동, 신리동, 율동, 대신동 등 19개동이 신설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6.25전쟁 후에는 ‘동구역’을 ‘선교구역(船橋區域)’으로 개칭한 것을 확인됐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당시 동평양지역에 세워진 성당과 학교, 수녀원을 비롯한 천주교 기관들에 대해 자세한 확인 작업을 하던 중 성모수녀회 수녀들의 증언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서울교구에서 운영하는 평양교구에 대한 자료와 성모수녀회의 연혁 자료에는 “당시 수녀회는 성장을 거듭해 1940년에는 평양의 관후리(館後里)성당뿐 아니라 대신리(大新里), 서포(西浦), 평안북도의 비현(枇峴), 신의주의 마전동(麻田洞) 본당 등 다섯 곳에 분원을 낼 만큼 발전했다”는 내용을 확인했고 이와 더불어 강 루갈다 수녀를 비롯해 강성숙 수녀, 윤 골룸바 수녀 등 당시 수녀회에서 근무하다 전쟁 중에 월남한 수녀들의 증언도 동일했다.
나는 다섯 곳의 성모수녀회 분원 중에 마전동, 비현, 관후리를 제외한 나머지 서포와 대신리를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 서포는 1941년에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미국 사제들이 추방되면서 본채와 성당, 사제관 등 3동으로 된 서포 메리놀센터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로 운영권이 넘어가며 수녀회의 본부 건물이 된 것을 확인됐다.
그리고 해방 뒤에도 수녀원 건물로 사용되다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열흘 전인 1950년 5월 14일 북측 인민정부에 의해 수녀회가 해산되었으며 폐쇄되었다. 당시 서포성당의 주소는 ‘평남 대동군 임원면 동포리(현 평양시 형제산구역 서포1동)’였으며 지금의 평양역에서 서북쪽으로 약 30리(11.1㎞) 떨어진 서포역 앞에 있었기 때문에 현 장충성당 자리는 전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대신리(大新里)성당’이 바로 현재 선교구역 장중성당 자리였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됐다. 이 ‘대신리성당’에 수녀회 분원까지 차려졌으니 이제 모든 확인 절차만 남은 것이다.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1942년 6월 2일, 서포성당 옆 교구청을 인수해 수녀회 본부 건물로 사용했다.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 서포센터 수녀회 본부 앞에 선 지청원자들.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장충성당자리에 성당과 수녀원이 있던 증거를 찾다
궁금증들을 모두 확인한 결과 장충성당 자리에 수녀원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음이 확인되었다. 결정적인 단서들은 미국에서 시작돼 북측과 남측의 증인들에 의해서 얻어졌으며 서울의 성모수녀회와 평양교구의 자료에서도 큰 도움을 얻었다. 그렇다면 ‘대신리성당’자리가 지금의 장충성당 자리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된다.
1930년대 평양 대동강 유역 동남 측 평야지역에 세워진 ‘선교리(船僑里)성당’은 설립 이후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변경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역사회에 섬김과 봉사, 교육과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선교리성당’은 당시 멋스러운 단층 기와집으로 지어졌으며 본당은 성당 부설 동평학교 건물과 서로 잇닿아 있었다. 설립 당시의 성당 명칭은 ‘선교리(船僑里)성당’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신리(新里)성당’, 1944년 7월에는 다시 ‘대신리(大新里)성당’으로 개칭되었으며 1949년에 폐쇄될 때까지 통상 ‘대신리성당’으로 불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교리본당’혹은 ‘신리본당’으로 부르다가 194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해 강제적으로 ‘리(里)’를 ‘마치(町)’로 바꾸면서 ‘대신마치(大新町)본당’으로 불렀던 아픈 시절도 있었으나 해방 뒤에는 다시 행정구역을 ‘정’에서 ‘리’로 바꿔 재차 ‘대신리본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선교리성당’은 1934년 2월 15일 ‘평양본당(훗날 관후리주교좌본당)’에 이어 평양시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돼 당시 평양시 대동강 동쪽 선교리 일대와 평남 대동군과 강동군 일부 7개 공소를 관할하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한다.
1934년 2월 15일, 평양교구는 선교리성당 설립을 공포하고, 7개월간의 공사 끝에 한옥식 팔각 기와지붕 구조로 완공해 그해 9월 낙성식 축성미사를 올렸으며 이에 앞서 평양교구 사상 첫 조선인 사제였던 양기섭 신부(경향신문 초대사장)가 첫 주임사제로 부임했다. 강 건너 관후리 주교좌본당 보좌를 거쳐 새로 부임한 양 신부는 젊고 의욕에 넘쳐 7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고 헌당 축성식을 거행한 것이다.
또한 2년 후인 1936년 4월 25일에는 일제 조선총독부 학무국 인가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인 동평학교(東平學校) 설립인가를 받아 5월 14일에 개교를 했는데. 6년제 초등교육기관인 동평학교는 이듬해 4월엔 무려 13개 학급에 1000여 명의 학생이 수학할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동평양지역은 평양시 중심부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이기 때문에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고 저소득층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어 이들을 구제하고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본부에서는 관후리본당에 이어 이곳 선교리본당(대신리본당)에 두 번째 분원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선교리본당은 양로원과 보육원도 함께 개설해 지역사회 자선사업에 수녀원 회원들이 힘을 쏟도록 했다.
이처럼 ‘선교리성당(대신리성당)’은 가톨릭복음의 불모지였던 동평양 일대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2대 주임 패트릭 더피 신부에 이어 3대 김필현, 4대 조인원 신부가 연이어 부임하며 성장시켰으나 해방 뒤 북측 인민정부에 의해 동평학교는 물론 관후리본당에서 관할하던 수녀원, 양로원, 보육원 등 모든 시설들이 폐지되며 국유화되었다. 안타깝게도 1949년 12월 7일, 마지막 5대 주임 박용옥 신부가 북측 인민정부에 의해 연행되면서 성당과 수녀회와 학교등은 폐쇄되고 그날 이후 ‘침묵의 교회’가 된 것이다.
▲ 선교리성당(대신리성당) 모습.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 선교리성당 초대 담임사제로 부임한 양기섭 신부. [사진출처: 가톨릭신문사 제공] |
▲ 선교리성당 입구를 걸어 나오는 도 신부, 모리스 목 몬시뇰, 권 신부.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 선교리성당 부설 동평초등학교 조회시간. [사진출처: 평양교구 사이트 제공] |
고모의 손길이 깃든 자리에서 첫 봉헌미사를 올린 장익 신부
1950년 6월 27일 사리원본당 김동철 신부의 체포를 마지막으로 이북지역의 성당에는 사제들이 모두 사라졌다. 장충성당이 세워지기까지 이북지역에 있는 제도상의 가톨릭교회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 목자 잃은 양떼가 된 이북 지역의 성당을 일컬어 남측의 가톨릭 측에서는 그동안 ‘침묵의 교회’라 불렀다.
그러나 40년의 침묵을 깨고 1988년 6월 30일, 평양 땅에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었고 마침내 88년 9월 장충성당이 세워졌다. “네 아우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기록된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은 죽은 후에도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형에게 억울하게 죽은 동생이 흘린 붉은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를 했던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장충성당이 완공된 직후인 10월 30일과 11월 1일, 양일간 열린 장충성당 봉헌 미사를 집전한 인물은 다름 아닌 장정온 수녀의 조카인 장익 신부였다. 당시 로마에 있던 장익 신부는 정의철 신부와 함께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장충성당을 방문해 전후 최초의 미사와 예식을 공식적으로 집전한 것이다.
장 신부의 고모인 장정온 수녀가 원장으로 재직하며 운영하던 수녀회 분원이 있던 선교리성당은 폐허가 되고 바로 그 자리에 지금의 장충성당이 들어 선 것이다. 수녀원 원장이던 장정온 수녀와 선교리성당 담당 사제였던 박용옥 신부가 죽은 지 40년 만에 그들의 혈육과 후배가 찾아와 첫 미사를 올린 사건은 하나님 앞에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계속)
▲ 1950년 11월, 평양수복 직후 ‘선교리성당(대신리성당)에 모여든 학생들과 신자들 모습. [사진출처: 가톨릭신문사 제공] |
▲ 1983년. 장익 신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환담하는 모습. 장 신부는 5년 후 교황특사로 장충성당 봉헌미사를 올렸다. [사진출처:가톨릭신문사 제공] |
▲ 장정온 앙네따 수녀의 모습. [사진출처: 가톨릭신문사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