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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레 21' 스페셜 >
악(惡)은 어디에 있는가
장영엽
오사마 빈 라덴 암살작전 그린 캐스린 비글로의 <제로 다크 서티> A부터 Z까지
<허트 로커>에 이은 캐스린 비글로의 전쟁영화 <제로 다크 서티>가 3월7일 개봉한다. 주인공이 누군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던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12월 북미 개봉한 뒤에도 비밀스러운 제작 과정 때문에 여전히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9.11 이후 10여년간 음침한 수용소와 무미건조한 사무실을 오가며, 서류더미에 파묻혀 서방세계 ‘악의 축’ 오사마 빈 라덴에 다가갔던 미국 첩보국의 실체가 어떻게 재구성됐는지 그 제작기를 소개한다. 이름하여 <제로 다크 서티>를 위한 26가지 보고서다.
2011년 5월2일 새벽, 수십발의 총성이 파키스탄의 평화로운 북부도시 아보타바드의 하늘을 갈랐다. 이윽고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쓰러졌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고 부르던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습격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9.11 테러의 주범이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풍요로운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세계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아보타바드의 총격전이 바꿔놓은 건 미국의 운명뿐만이 아니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토라보라 산악지대에서 벌어졌던 미군의 실패한 빈 라덴 암살 작전을 토대로 신작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던 캐스린 비글로 감독과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3년간 구상해왔던 시나리오를 과감히 엎고, 아보타바드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빈 라덴을 암살했다는) 역사적 사건이 구상하던 영화 시나리오의 규모를 넘어서버렸”(마크 볼)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출발점이다.
블랙사이트는 CIA의 해외 비밀 감옥을 일컫는 용어다.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심장부에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비행기가 날아들어 꽂힌 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해외 곳곳에 블랙사이트를 설치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시설의 운영 방식이다. 테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용의자에 가하는 각종 고문과 비인간적인 행위가 블랙사이트 내부에 만연했고, 빈 라덴을 추적하는 CIA 요원들을 조명하는 <제로 다크 서티>는 이러한 장면들을 피해가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서 허가된 사진을 보고 영화를 만들려면 2년 정도는 걸릴 거다. 하지만 요즘 군인들의 개인 웹사이트에 어떤 사진이 올라오는지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블랙사이트 고문 장면을 준비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제레미 힌들의 말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9년 블랙사이트 폐쇄를 명했으나, CIA 해외 비밀 감옥의 실상을 유추할 수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망령처럼 구글에 넘실댄다.
빈 라덴의 머리를 저격한 건 미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이었지만 9.11 이후 10여년 만에 그의 거처를 알아낸 장본인은 미국 정보기관 CIA였다. <제로 다크 서티>는 “현장 요원, 케이스 분석가, 스파이”(캐스린 비글로) 등으로 구성된 CIA 요원들의 임무 수행 과정을 묘사하는 데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그 중심에는 ‘워싱턴의 킬러’라고 불리는 젊은 CIA 여성 요원 마야(제시카 채스테인)가 있다. 그녀는 블랙사이트에 수감된 알 카에다 조직원에게 아부 아흐메드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 들은 뒤, 그가 빈 라덴의 최측근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모든 캐릭터는 실존 인물에 기반했다”며,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던 날, 현장에 파견됐던 CIA 여성 요원”이 마야의 모델이 되었음을 밝혔다. 영화가 지난해 12월 북미 개봉한 뒤, 미국 언론은 마야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을 찾는 데 혈안이 됐지만 CIA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여성 요원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물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죄수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목줄을 채워 개처럼 끌고 다니고, 죄수를 상자에 집어넣는 등 <제로 다크 서티>가 묘사한 CIA 요원들의 고문 장면은 미국 전역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일으켰다. 고문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문 뒤에 수감자로부터 정보를 얻고 빈 라덴에게 보다 가까워지는 과정을 묘사해 영화가 마치 고문을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 문제다. <가디언>은 이 작품이 “더럽고 추한 비즈니스가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관점을 보여준다”고 비판했고, 평론가 프랭크 브루니는 <제로 다크 서티>가 “물고문 없이는 빈 라덴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최악의 평가는 페미니스트 나오미 울프에게서 나왔다. “비글로는 나치의 선동가 레니 리펜슈탈과 다를 바 없다. 리펜슈탈처럼 비글로는 훌륭한 예술가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녀는 고문의 시녀로 영원히 기억될 거다.” 반면 작가 앤드루 설리번처럼 이 영화가 “고문에 대한 폭로”라며, “7년간 전범들이 미국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왔다는 의혹을 제거해준다”고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고문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감독 캐스린 비글로는 “나도 고문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에는 고문이 존재했다”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영화에 반영하고자 했음을 밝혔다.
<제로 다크 서티>를 둘러싼 논쟁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재선에 도전하는 오바마의 임기 중 가장 큰 업적이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했다는 점이다. 빈 라덴의 은신처 습격을 다룬 이 영화가 민주당 후보 오바마에 맞서는 공화당의 집중포격을 받은 건 당연해 보인다. 공화당 의원 피터 킹과 공화당 사법감시단은 오바마 정부가 재선을 위해 캐스린 비글로를 비롯한 영화의 제작진에 빈 라덴 암살과 관련된 기밀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들이 밝혀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캐스린 비글로와 마크 볼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공개된 국방부 자료를 검토했다고 해명했다. <제로 다크 서티>의 미국 개봉을 2012년 10월로 예정해두고 있던 배급사 소니픽처스는 11월 대선을 둘러싼 정치적 공세에 압박을 느낀 듯 12월로 개봉을 변경했다.
모두가 이야기의 결말- 빈 라덴의 죽음- 을 알고 있을 때, 어떻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제로 다크 서티> 제작진의 가장 큰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의 해답은 이 사건의 “메커니즘”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미군이 빈 라덴의 은신처에 당도하는 영화의 마지막 35분 전까지, <제로 다크 서티>를 채우는 건 수많은 허위 정보들이다. 친척의 아는 사람이 파티에서 빈 라덴을 목격했다거나, 마름모 패턴(빈 라덴이 그렇듯)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을 봤다는 농부의 증언 등 얼핏 듣기만 해도 믿지 못할 가설들이 편집증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CIA 부서 내부를 떠돈다. 관객은 이미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알고 있으나, 등장인물들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듯”(캐스린 비글로) 믿을 만한 정보를 가려내야 하는 상황이 <제로 다크 서티>의 서스펜스를 길어올리는 원동력이다.
모든 희생과 노력을 감수한 끝에, 네이비 실 부대가 빈 라덴의 은신처에 잠입하는 마지막 35분의 전투 신은 <제로 다크 서티>의 백미다. 보는 이들에게 “당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캐스린 비글로는 촬영에 있어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실 요원들이 야간 습격 당시 투시경을 끼고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야간 투시 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해 화면 전체를 녹색빛으로 채운 것이다. “야간 투시 렌즈는 조도가 0이었을 때 작동 가능하다. 100여명의 제작진과 실 팀을 연기하는 22명의 배우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돌무더기 세트장에서 터벅터벅 걷는 경험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캐스린 비글로의 말이다. 보통의 감독들은 야간 투시의 느낌을 살리고 싶을 때 일반적인 방식으로 촬영을 진행하고 후반작업에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비글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조명 없이 작업해야 했던 촬영감독 그레이그 프레이저의 떨리는 가슴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냐마는,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여장부 캐스린 비글로의 모험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펜타곤과 CIA가 <허트 로커>의 엄청난 팬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영화에 대한 미국 정보국의 지원을 두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이렇게 평했다. 캐스린 비글로에게 여성으로서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감독상을 안겨준 <허트 로커>는 미국의 대테러전을 소재로 한 비글로의 두 번째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제작 지원에 큰 도움을 줬다. 공화당 의원 피터 킹과 사법감시단이 정보공개법에 따라 요청한 자료에 의하면, CIA는 빈 라덴 암살작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 한 론 하워드와 이매진 엔터테인먼트의 지원 요청에 앞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는 영화적 위상, 제작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마크 볼과 캐스린 비글로의 영화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CIA 대변인 마리 하프)
<트리 오브 라이프> <헬프>를 통해 할리우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여배우로 급부상한 제시카 채스테인이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를 연기한다. 그녀에게 이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영화를 보면 채스테인의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캐스린 비글로는 빈 라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마야의 모습을 담기 위해 요원으로서의 삶 이외의 모든 요소들을 거세했다. 그녀의 가족, 연인, 친구, 생각. 달리 말해 전쟁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이 관습적으로 안고 있는 요소들을 제시카 채스테인은 고민할 새가 없었다. “마야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파악돼야 하는 캐릭터다. 그녀의 외모, 눈빛,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마야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야 했다. 이건 <헬프>에서 셀리아 풋을 연기할 때처럼 목소리와 몸 상태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캐스린 비글로의 여전사가 되는 길은 그렇게 험난했다.
K. 캐스린 비글로 Kathryn Biglow
아보타바드의 야간 습격 장면은 <허트 로커>의 주요 로케이션이기도 했던 요르단 사막에서 촬영됐다. 비글로는 습격 장면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배우들의 동선을 고려한 빈 라덴의 은신처를 실제 규모로 짓길 원했다. “16피트 높이의 장벽과 외부와 차단된 창문들, 그 안을 둘러싼 7피트의 벽”을 완비한 빈 라덴의 요새는 10주간에 걸쳐 재창조됐다. 영화의 첩보 장면은 인도 찬디가르 등의 지역에서 촬영했는데, 모슬렘 복장으로 힌두 지역을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한때 폭도들이 제작진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CIA의 블랙사이트 지역은 폴란드의 단스크에서 촬영했다.
<허트 로커>로 시작된 캐스린 비글로의 재기의 일등공신은 이 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트 로커>에 이어 <제로 다크 서티>의 각본을 맡은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프리랜서 기자다. 마크 볼은 폴 해기스의 이라크 전쟁영화 <엘라의 계곡>의 각본을 쓴 뒤, 역시 전쟁영화 <허트 로커>를 준비하던 비글로와 인연을 맺었다. <엘라의 계곡>의 원안 기사를 잡지 <플레이보이>에 연재하며 그가 발굴한 정보원들은 <허트 로커>와 <제로 다크 서티>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깊은 조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퍼즐 조각이 있었다. 이 영화를 위한 자료조사는 그야말로 진빠지는 일이었고 엄청난 시간이 소비됐다. 마크의 조사 능력과 경험이야말로 빈 라덴 추적의 복잡한 과정을 탐구할 수 있게 했다.”(캐스린 비글로)
세계 최강의 엘리트 부대라 불리는 미 해군의 특수부대. 빈 라덴의 최후를 집행하고 목격한 부대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 마크 오언이란 필명을 쓰는 네이비 실 전직 대원이 빈 라덴 사살 과정을 다룬 <노 이지 데이>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빈 라덴을 초기에 제압한 뒤에도 그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수차례 총격을 가했다”고 책에서 밝혔고 영화 또한 그런 장면을 반영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와 <제로 다크 서티> 제작진의 밀월 관계와 더불어 이 영화의 큰 이슈 중 하나는 과연 오바마 대통령이 영화에 모습을 나타낼지에 대한 것이었다. CIA 첩보 과정을 무미건조하게 다루는 <제로 다크 서티>에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작전이 일사불란하게 실행되는, 애국주의적인 장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바마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단 한 장면, CIA 사무실의 TV 화면에서다. “미 정부는 고문을 자행하지 않는다”는 오바마의 성명이 울려퍼지는 순간을 CIA 요원들은 심드렁하게 쳐다본다. 민주당도, 공화당도 좋아할 만한 장면은 아니다.
미국 대선을 피해서 개봉했음에도, <제로 다크 서티>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공화당쪽은 마크 볼과 캐스린 비글로를 비롯한 영화의 제작진이 공개되지 않은 비밀 문서에 접근할 권한을 실제로 가졌는지에 대해 꾸준히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에서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여러 정보원들의 ‘말’로 구성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비 실의 빈 라덴 암살 작전에 대한 서적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음에도 마크 볼이 굳이 관계자들의 증언을 직접 듣길 고집한 건, 팩트의 중요성을 아는 기자 정신 때문이었다. “나는 국가 안보에 대한 정말 훌륭한 보도가 있다는 점도 알지만, 현실과는 멀리 떨어진 기사가 있다는 점도 안다. 훌륭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마야의 롤모델을 비롯해 <제로 다크 서티>의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이 도움을 받은 정보원들은 철저히 신원을 보호받고 있다. 노출을 꺼리는 그들의 예민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LA타임스>의 기사를 참고할 것. “2008년,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퇴임한 특수부대 요원과 약속을 잡았다. (중략) 볼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약속이 잡히리라는 사실도 몰랐다. 요원은 GPS로 위치를 알려줬다(나중에 그 장소는 주유소로 밝혀졌다). 미팅은 짧았다. 정보 교환에 대한 보증도 없었다.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내가 왜 당신과 얘기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대보시오.’ 마크는 ‘여하간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마크 볼은 할리우드 시나리오작가가 언제나 밥 우드워드(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기자)를 닮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작품상,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에 오른 <제로 다크 서티>는 <007 스카이폴>과 음향편집상을 공동 수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음향편집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은 후반 35분의 습격신이다. 은신처로 접근하는 스텔스 전투기의 프로펠러 소리, 문을 폭파하는 소리, 총성으로 가득한 이 영화의 마지막 35분은 별다른 대사 없이도 긴장감을 끌어낼 줄 아는 음향편집의 승리다.
CIA 요원들은 오사마 빈 라덴을 UBL(Ussamah bin Ladin)로 불렀다. 회고록 <노 이지 데이>에서 마크 오언은 빈 라덴이 최후의 은신처에서 발각되었을 때 무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UBL이 끝까지 저항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진술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도 빈 라덴이 쓰러지는 건 한순간이다. 보이지 않던 그는 서방세계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아보타바드 호화 은신처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빈 라덴은 주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이에 <텔레그래프>는 ‘<제로 다크 서티>: 팩트 vs 픽션’이라는 주제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었고 그중 가장 흥미로운 차이는 네이비 실 요원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빈 라덴의 암살은 영화보다 훨씬 건조하게 진행됐다. 그를 저격한 뒤, 모두가 비명을 지를 뿐 영화에서처럼 오사마의 이름을 소리쳐 외칠 생각조차 못했다고.
폭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을 분출했던 <허트 로커>의 폭탄전문가 윌리엄 하사(제레미 레너)를 기억하는가. <제로 다크 서티>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한 영화이며 <허트 로커>보다는 장르적인 재미가 덜한 작품이지만, 비글로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주는 스릴의 순수한 즐거움을 굳이 외면하지는 않는 영화다. <허트 로커>에 등장했던 사제 폭탄들이 고루한 문서와 사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마야의 선배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저기, 아부 아흐메드(빈 라덴의 접선책)가 네 아기인 건 아는데… 이제 탯줄 끊을 때가 됐어.” <제로 다크 서티>는 테러리스트로 이어지는 탯줄을 끊지 못하는 첩보중독자 여성 요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시나리오작가로 이야기에 접근하되 마치 (전장에 나간) 리포터처럼 과제를 해야 했다”고 마크 볼은 말했다. 그가 <제로 다크 서티>를 통해 선보인 빈 라덴 은신처의 세부적인 모습과 이를 묘사하는 데 기여한 수많은 익명의 정보원들은 미국 언론이 풀어야 할 새로운 X파일이 되었다고 외신 매체들은 보도한다.
Y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 Yet
모든 작전이 끝난 뒤, “어디로 가길 원하세요?”라는 비행사의 질문에 마야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이 마야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주연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은 말한다. 미국과 중동의 테러전은 추적하고 죽이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전쟁기계’들을 낳았고, <제로 다크 서티>는 전쟁의 부속품처럼 소비되는 사람들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