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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찜하면 맹활약, ‘슈틸리케 법칙’을 아시나요?
4전 전승에 무실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3회 연속 아시안컵 4강으로 이끈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5개월 만에 달라진 한국 축구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브라질월드컵과 달리 끈끈하게 버티는 힘과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투지 넘치는 플레이는 ‘아시아의 호랑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청용과 구자철이 부상으로 조기에 대회를 마감하는 큰 어려움 속에서도 슈틸리케 감독과 대표팀은 큰 요동 없이 전진 중이다.
특히 호주전과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벡)전에서는 승리의 가치가 더 빛났다. 호주전에서는 슈틸리케 감독이 깜짝 발탁한 신예 공격수 이정협이 결승골을 넣었다. 베테랑 수비수 곽태휘는 수비라인을 지휘하며 호주의 막강 공격력을 봉쇄, ‘늪 축구’라는 찬사를 받았다. 우즈벡전에서는 반년 넘게 A매치 골이 없던 손흥민이 드디어 득점포를 가동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조별리그 2차전인 쿠웨이트전에서 바닥을 쳤지만 그 뒤로는 계속 반등 기세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흥미로운 현상 하나가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 하루 전 기자회견에 대동하고 나오는 선수나, 경기 이틀 전 훈련 때 인터뷰이로 내세우는 선수가 본 경기에서 맹활약하는 것이다. 일종의 ‘슈틸리케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이 현상은 한•두번의 반짝 효과가 아니라 이번 아시안컵 내내 이어지고 있다.
:: 오만전 D-1 기자회견: 기성용->오만전 시작으로 대회 내내 맹활약
슈틸리케 감독은 오만전을 하루 앞둔 9일 기자회견장에 기성용을 데려 나왔다. 첫 경기라는 상징성에 걸맞게 주장이자 핵심 미드필더를 데려 나온 것. 기성용은 이 자리에서 브라질월드컵 이후 대표팀에 대한 국민들의 좋지 않은 시선을 바꾸기 위한 책임감을 강조했고 우승에 대한 목표 의식을 밝혔다. 승점 3점을 거둬 첫 단추를 잘 채우겠다던 다짐은 다음날 훌륭히 달성됐다. 기성용은 구자철, 박주호와 함께 미드필드를 완전히 장악했고 한국은 오만을 상대로 7대3의 압도적인 점유율로 경기를 지배했다. 이번 대회 가장 뛰어난 선수로 꼽히는 기성용의 활약을 알린 서막과 같은 경기였다.
:: 쿠웨이트전 D-2 훈련장 인터뷰: 남태희->쿠웨이트전 결승골
쿠웨이트전을 앞두고 대표팀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청용을 비롯해 3명의 선수가 오만전에서 부상을 당했고 구자철, 손흥민, 김진현은 감기몸살로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미드필드 자원이 대거 빠진 상황에서 경기 이틀 전 슈틸리케 감독은 훈련장 인터뷰에 남태희를 보냈다. 남태희는 이청용, 구자철, 손흥민이 뛸 수 없는 쿠웨이트전의 핵심 선수였다. 쿠웨이트전에 나선 남태희는 전반 36분 헤딩골을 기록하게 되고 이것은 1-0 승리의 결승골이 됐다. 경기 내용은 썩 좋지 않았지만 남태희의 그 골이 없었다면 이번 대회 한국의 좋은 흐름은 불가능했다.
:: 쿠웨이트전 D-1 기자회견: 차두리->쿠웨이트전 결승골 어시스트
쿠웨이트전에서 남태희에게 정확한 택배 크로스를 배달한 것은 차두리였다. 차두리는 슈틸리케 감독이 쿠웨이트전을 하루 앞둔 공식 기자회견에 데리고 나온 선수였다. 여기서부터 조금씩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차두리의 경우 첫 경기인 오만전에서 선발 출전하지 않았지만 김창수의 부상으로 대신 나와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오만전에 나서며 역대 아시안컵에 참가한 한국 선수 중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운 차두리는 “쑥스럽다”고 하면서도 팀 최고참으로서의 책임 의식을 강조했다. 그것이 결국 쿠웨이트전에서 대활약을 끌어냈다.
:: 호주전 D-2 훈련장 인터뷰: 이근호&이정협->호주전 결승골 합작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슈틸리케 법칙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호주전을 이틀 앞두고 브리즈번의 훈련장에 인터뷰이로 등장한 것은 이근호와 이정협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슈틸리케 감독의 속내를 감지할 수 있다. 이 당시만 해도 두 선수의 선발 출전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특히 이정협의 경우는 앞선 두 경기에서 교체로만 나섰고 경기력도 탁월하지 않았기에 선발 출전을 쉽게 점칠 수 없었다. 상무에 몸 담았던 예비역 이근호와 현역 군인 이정협은 함께 등장해 경기당 1골에 그치는 공격력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이고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결국 두 선수는 호주전 결승골을 합작하며 그 약속을 지켰다.
:: 호주전 D-1 기자회견: 곽태휘->수비에서 맹활약, 호주전 무실점
호주전을 하루 앞둔 기자회견에는 곽태휘가 나왔다. 곽태휘는 오만과의 첫 경기를 이틀 앞둔 훈련 중 엉치뼈 부근에 타박상을 입으며 앞선 2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가 빠진 동안 장현수, 김주영, 김영권 세 후배가 번갈아가며 중앙 수비를 책임졌다. 이날 슈틸리케 감독은 “여기 곽태휘가 왔다는 것은 오늘 밤 아프거나 하는 일이 없으면 내일 선발 출전한다는 얘기다”라며 곽태휘의 선발 출전을 못 박았다. 경험 많은 수비수라 해도 부상 회복 후 바로 큰 경기에 나서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낄 법도 했지만 곽태휘는 호주전에서 늪축구의 진수를 보여주며 호주의 공격을 분쇄시켰다.
:: 우즈벡전 D-2 훈련장 인터뷰: 김진현&김영권->우즈벡전 무실점
사실 이 대목은 슈틸리케 법칙에서 가장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우즈벡전을 이틀 앞둔 훈련장 인터뷰에 등장한 두 선수 중 김진현은 이미 오만전과 호주전에서 맹활약을 하며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찜한 선수였다. 김영권 역시 쿠웨이트전과 호주전에 잇달아 선발 출전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쨌든 두 선수는 우즈벡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며 슈틸리케 법칙을 증명했다. 특히 김진현은 킥 미스 2개를 제외하고는 완벽한 선방 능력으로 우즈벡에게 절망의 벽이 됐다.
:: 우즈벡전 D-1 인터뷰: 손흥민->우즈벡전 2골
슈틸리케 법칙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다. 우즈벡전을 하루 앞둔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손흥민은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었다.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들어 골이 없었고, 오만전이 끝난 뒤에는 감기몸살로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다. 호주전에는 교체 투입됐지만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실수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틸리케 감독은 과감히 손흥민을 대동했다. 이 자리에서 손흥민은 자신의 현 상태를 의심하는 미디어 앞에서 자신감을 보였다. 특히 슈틸리케 감독은 손흥민을 향한 여러 곤란한 질문을 농담과 제스쳐로 앞서 진화하며 선수를 다독여줬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내일 손흥민은 선발 출전한다”며 3경기 만의 선발 복귀를 예고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손흥민의 눈은 반짝일 수 밖에 없었다. 우즈벡전에서 골을 넣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흥민은 체력적으로 지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끝까지 손흥민을 믿었고 결국 연장 들어 김진수와 차두리의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골로 마무리해 단숨에 2골을 넣으며 우즈벡전 승리를 이끌었다.
:: ‘슈틸리케 법칙’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대표팀의 A매치나 각종 대회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갖는 공식기자회견에 대동하는 선수는 감독이 지명한다. 축구협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선 감독의 의사를 전적으로 따른다. 경기 이틀 전 훈련장 인터뷰의 경우 협회 홍보팀이 추천을 하고 감독과 상의를 하지만 이 역시 최종 결정은 감독의 몫이다. 조준헌 팀장은 “일반적으로는 감독님이 홍보팀의 의견을 따르지만 가끔씩 이 선수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실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슈틸리케 법칙은 단지 때와 운이 맞아 떨어져 나온 우연의 결과물일까? 슈틸리케 감독은 점성술사도 마법사도 아니다. 대표팀 내에서 이 현상을 지켜보는 이들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말한다. 박건하 코치는 “역시 무수한 경험에서 나오는 감이 크다. 선수 시절 엄청난 경험을 하셨고 지도자로서도 유소년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신 분이라 꿰뚫어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준헌 홍보팀장은 “감독님이 굉장히 섬세하시다. 선수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신다. 그리고는 이 선수가 그런 자리에 나가도 될 상태인지, 부담을 이겨낼 수 있는 지를 확신하면 데리고 나가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인터뷰이 지명에 담긴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정면돌파다. 조준헌 팀장은 “기자회견에 데려나가는 선수들이 어떻게 보면 언론 앞에 나서길 꺼려하는 입장의 선수들이다. 부진하거나 부상이 있었던 선수들인데 그들을 데리고 나가 미디어 앞에 당당하게 세운다. 그런 걸 보면 감독님의 대담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밤 사이에 아픈 일이 없다면 여기 있는 선수는 내일 선발 출전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기자회견에 나서는 선수에게 베스트11 중 가장 먼저 선발 출전한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그만큼 선수들은 더 열심히 준비를 한다. 박건하 코치는 “한국인 지도자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활약을 해줘야 하는데 지금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보통 배려 차원에서 데려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님은 오히려 그런 선수들에게 더 강력한 동기부여와 책임의식을 심어준다”고 얘기했다. 곽태휘와 손흥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정도면 ‘슈틸리케 법칙’은 설레발이나 지레짐작이 아닌 근거가 있는 대표팀의 중요한 현상이고 흐름이다. 자 이제 4강전 기자회견에 슈틸리케 감독은 누구를 대동하게 될까? 그 선수에게도 앞선 경우처럼 좋은 활약의 기운이 옮겨질까? 혹시 슈틸리케 감독이 이 기사를 보더라도 전혀 부담을 갖지 말고 평소처럼 해주길 바랄 뿐이다. 지금 우리 대표팀은 슈틸리케 법칙보다 더 강한 하나의 팀으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