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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아카데미(대구수필문예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우종율
누름돌 / 정성려... 전북도민일보
그런대로 아담하고 반질반질한 항아리 속에서 노란빛이 어린 오이지를 꺼냈다. 펄펄 뛰는 오이들을 사뿐히 눌러 진정시켜주던 누름돌을 들어내니, 쪼글쪼글해진 오이들이 제 몸에서 빠져나간 물에 동동 뜬다. 항아리 속의 오이는 볕이 들지 않은 음지에만 있어야 하기에 조금은 서먹하지만, 누름돌 무게로 숨을 죽이며 제 몸속 물을 토해내고, 간기가 스며들면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숙성되어 짜릿하고도 오독거리는 맛을 냈다. 이렇게 숙성된 오이를 맛깔스럽게 썰어 참기름을 치고,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치면 그야말로 침이 절로 돌며 식욕을 돋운다. 그래서 오이지는 여름철 내내 우리 집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밑반찬으로 각광을 받는다.
오이지를 유독 우리 집 식구만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입맛이 없거나 시간에 쫓겨 바쁠 때는 찬물에 밥을 말아, 빠르고 간단하게 먹는 반찬으로 오이지가 제격이다.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나는 소리는 옆 사람까지도 입맛을 돋게 해주는 밥도둑이라 해야 맞겠다.
오랫동안 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이 어디 오이지뿐이겠는가. 깻잎이며 풋고추 등으로 장아찌를 담그자면 누름돌의 역할이 중요하다. 누름돌이 아니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물에 담아놓은 재료들이 동동 떠오른다. 그러면 숙성시키지 못해 제 맛을 낼 수가 없다. 이토록 깊은 맛을 나게 해주는 누름돌이야말로 단연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지혜다.
음식솜씨가 좋은 집에서는 대물림한 누름돌 한 두 개쯤은 볼 수 있다. 우리 집에도 둥글 넓죽하고 반질반질한 모양의 크고 작은 누름돌이 여러 개 있다. 냇가에 갈 기회가 있을 때면 오이지나 장아찌 담을 때 좋겠다는 생각에 주워온 것들이다. 많은 비가 내려 큰물이 질 때면 물살에 떠밀려 이리저리 나뒹굴며 매끄럽게 갈아지고 널브러져 있던 돌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에게 선택되어 우리 집에 온 뒤, 그 쓰임새가 생기며 꼭 필요한 존재의 누름돌이 되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다슬기 탕을 유난히 좋아했다. 물이 깨끗하고 넓은 냇가가 집 앞에 있어서 그랬을까?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할머니께서는 집 앞 냇가에 다슬기를 잡으러 자주 가셨다. 다슬기를 잡아 돌아오실 때는 둥글 넓죽한 예쁜 돌을 하나씩 안고 오셨다. 나와 동생은 다슬기를 잡으러 가는 할머니를 따라 냇가에 가기라도 하면 모래로 집을 짓고 자갈과 돌로 담을 쌓는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예쁜 돌을 많이 주워 모아놓기도 했다. 할머니는 우리가 모아놓은 많은 돌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것 하나만 골라 집으로 들고 오셨다. 그런데 그 돌이 누름돌이었던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어디에 사용하려는 것인지조차도 몰랐다. 우리는 할머니 주위를 깡충깡충 토끼마냥 뛰어다니며 일상적인 놀이로 즐기며 놀았다.
재료를 지그시 눌러 음식의 맛을 나게 하듯, 사람에게도 묵직한 누름돌이 필요하다. 딸을 출가시킨 지금 돌이켜 보니, 친정어머니는 묵직한 누름돌을 늘 가슴에 품고,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누르고 살았던 것 같다. 아니, 나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옛날 어머니들은 모두 그랬으리라.
그 옛날 여자이기에 학교를 모르고 살았으니 교과서에서 배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오롯이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당신 자신을 꾹꾹 누르고 희생하며, 어렵고 힘든 시대를 견디어 내셨다. 누름돌을 가슴에 안고 그 무게로 누르고 삭히며 살았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내 삶의 지침이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환한 미소를 띤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묵묵히 참으며 지혜를 짜내어 기어코 극복하시던 진정한 승리의 모습으로 동그랗게 내 가슴에 떠오르며 누름돌 하나를 안겨주신다.
아버지께서는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 6남매, 그리고 많은 농사일까지 어머니의 몫으로 맡기고, 너무도 서운한 나이 60세에 무정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후 3년 뒤, 할머니도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기가 힘드셨던지, 기력을 잃고 시름시름 하시더니 유명을 달리하셨다. 결국 홀 며느리가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자식 6남매를 가르치며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도 90세가 되면서 서서히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힘든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치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그러는 거라며 나이 탓으로 돌렸다.
세월이 갈수록 자식과 손자들도 몰라보셨다.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수발하느라 얼마나 힘이 부치셨을까? 그래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당신의 멍에로 생각하고 자식들의 등불이 되어 주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셨다.
내가 역경에 처할 때마다 친정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힘들게 느껴지던 고통의 무게가 조금씩 가볍게 줄어든다. 게다가 이겨내야겠다는 용기까지 얻는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면서 장롱 속에 묻혀있던 효행상장을 발견했다. 각각 다른 단체에서 수상한 것으로 4개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며 가문의 얼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께서 시장에 서너 번 다녀온 것쯤으로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렸고, 의미도 크게 몰랐다. 자식이라면 부모님께 당연히 해야 한다는 도리로 생각했었다. 무심이 바로 무식이란 걸 이제야 알게 해주었다.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농사일로 옆집에 잠시 들려야 하는 틈조차 주지 않았다. 하물며 마을단합대회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며, 시집 온 후 50년을 넘게 시부모를 모시고 사셨던 친정어머니다. 할아버지께서 97세에 돌아가셨는데도, 두고두고 잘못했던 일만 생각난다며 슬퍼하시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이기에 해냈으리라. 사람이 부대끼면서 미운 정과 고운 정이 든다던데, 우리 친정어머니는 할아버지와 고운 정만 들었을까?
그런데 난 그토록 지고하신 친정어머니를 닮지 않았나 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어 했던가? 건강하실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일들이 중풍과 치매를 앓으면서 본의 아니게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시어머님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를 수도 없이 했었다. 막내인 우리 부부가 책임을 떠맡은 것 같아 가슴앓이를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것이 덕이 되었고, 딸자식들에게는 산교육이 되었으련만, 그때의 처지를 한탄하며 힘들어 했던 일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하다. 어찌 내게는 가슴을 누르고 삭혀주는 누름돌이 없었던가.
우리의 전통적 토속음식은 대체로 장시간 삭혀서 맛을 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곰삭아 깊은 맛이 들고 발효되어 양약보다 더 좋은 효능을 인정받지 않던가.
요즘 내게도 묵직한 누름돌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감정을 꾹꾹 눌러 줄 수 있는 누름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겠다. 항아리 속의 시퍼런 오이를 지그시 눌러 삭혀서, 깊은 맛을 내어 오이지로 탄생시키는 것처럼, 진정한 좋은 사람의 향기를 숙성시켜주는 누름돌 하나쯤 가슴에 꼭꼭 품고 살고 싶다.
마키코언니/김영주... 전북일보
마른 잎 하나가 김이 피어오르는 허공에서 팔랑거리다 노천탕 수면에 내려앉는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쓴 마키코 언니가 물살을 밀어내며 엄마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영락없는 모녀 사이다. 언니의 낯빛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옛날에 저하고 목욕탕에 갔던 거 혹시 기억하세요?” 언니가 엄마의 어깨에 물을 한웅큼 정겹게 끼얹는다. “그런 일이 다 있었어?” 엄마의 희미한 기억이 잔잔한 미소로 번진다.
마키코 언니가 초청한 4박 5일 삿포로 여행이었다. 언니는 친정아버지까지 꼭 모시고 와야 한다고 내게 몇 번이나 당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외국여행을 감당하기에는 아버지의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다. 언니는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
마키코 언니는 가는 곳마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친모녀 같아서 가끔 샘이 날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도 함께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싶었다. 언니는 또 그 불편한 걸음으로 엄마와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바빴다. 옛정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하는 언니의 올곧은 심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사촌올케 마키코 언니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 때였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작고 깡마른 소녀, 내 눈에 비친 언니의 첫 모습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겸손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는데, 눈망울이 유난히 똘망똘망했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는 심한 소아마비 장애가 있었다. 큰댁 어른들은 중증 장애인인 데다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며느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사람이었다. 그 옛날, 할아버지가 일본여자를 보는 바람에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면서 큰아버지는 일본인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이다.
당시 큰아버지는 미국에 건너가 살고 있었다. 사촌오빠는 어릴 적부터 공부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어른들의 기대가 컸다. 그래서 일본 유학까지 보냈던 건데, 그 아들이 한마디 상의도 않고 덜컥 결혼식까지 올린 뒤 며느리라고 데려왔으니 오죽했을까. 큰댁 어른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가며 며느리를 냉대하기 일쑤였단다.
아버지는 조카며느리를 큰딸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사코 마다해도 볕이 제일 잘 드는 방을 언니에게 내주었다. 식사 때 언니의 젓가락이 자주 가는 반찬은 따로 기억해 두었다가 엄마에게 특별 주문을 할 정도로 살뜰히 챙겼다.
언니의 한국어학당 입학수속을 거들어준 건 바로 나였다. 당시 대학 1학년인 나는 공강 시간에 언니하고 캠퍼스에서 단둘이 자주 만났다. 도서관에서 언니의 한국어 공부도 거들어주었다. 우리는 마치 친자매 같았다.
언니의 한국어 습득 속도는 신기할 정도였다. 하루라도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 시댁 어른들하고 소통하고 싶은 바람이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내가 몇 달 겪어보니 우리 조카며느리는 참 좋은 사람이야.”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석별을 아쉬워하는 정이 그득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언니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마키코, 시댁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말아. 내 말, 알겠지?” 언니의 볼에 굵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언니가 떠나자 우리는 가족 하나를 잃은 듯 꽤 오랫동안 허전해했다. 간간 전해오는 큰댁 식구들 소식에 섞인 것 말고는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지났는데, 지난달에 사촌오빠 내외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삿포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이었다. 마키코 언니는 엄마와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이라도 꼭 함께 지내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고단하셨는지 일찍 잠들었다. 우리 둘은 맥주 한 캔씩을 탁자에 두고 마주앉았다.
“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건 한국의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냈을 때야.” 언니는 엄마하고 재래시장 좌판에서 맛있게 먹었던 잔치국수, 나와 함께 자주 갔던 학교 앞 떡볶이 집, 동네 생선가게 곰보 아줌마의 친절, 추석 때 엄마가 선물해준 분홍색 운동화, 우리 집 마당의 평상에서 함께 수박을 먹었던 일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진짜 한 가족이었잖아.” 마키코 언니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시집살이는 별로였나 보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 빙긋 웃어보였다. 며느리를 그토록 홀대했던 큰아버지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았다. 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비치지 않고 그 수발을 다 들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몇 년 전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시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은 없었어?” 내가 물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러셨을 테니까 나는 그냥 받아들였어.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시댁 어른들이 못살게 굴 때마다 작은댁 식구들의 정성을 떠올렸단다. 한국을 떠나던 날 작은아버지가 들려주셨던 말씀을 새기며 시댁 어른들하고의 거리를 좁혀나갔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언니는 시댁 가족에게서 얻은 마음의 상처를 꿰매고 싶어서 우리를 삿포로에 초대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삿포로를 떠나던 날이었다. “욘주!” 특유의 발음을 내며 마키코 언니가 내 팔을 잡았다. “욘주는 좋은 사람이야. 작은아버님도 어머님도.” 엄마와 내 손을 꼭 쥔 언니의 눈동자는 가을 호수처럼 맑고 깊었다. 이제는 왠지 나와 엄마가 언니의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키코 언니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영주, 삿포로에는 눈이 많이 내렸어. 오늘 아침에 우리가 함께 걸었던 공원에도 가보았어. 참, 작은아버지 건강은 좀 어때? 그분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 삿포로에 다시 와줄 거지? 영주의 가족은 모두 내게 하얀 눈처럼 축복이야.’
오래 전에 보았던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눈 덮인 먼 산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그리운 이의 안부를 애타게 묻던 여주인공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나는 마키코 언니의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답장을 썼다.
‘엄마는 여행 다녀와서 한 이틀 몸살을 앓았어요. 물론 아버지는 편안하게 잘 지내고 계시지요. 언니가 보내준 삿포로 공원 풍경은 숨이 막힐 것처럼 아름답네요. 마키코 언니. 보고 싶어요, 아주 많이요. 이담에는 우리, 한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요.’
‘어느 삼거리에서’/이한얼... 매일신문
문득 그럴 때가 있다. 무심결에 어딘가를 봤을 때 그 장면이 화인처럼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 또는 길을 걷다 어떤 소리를 들었는데 의미 없는 그 음이 아주 오래 머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살다 보면 그런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대부분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없던 듯 잊고 살다 보면 훗날 불현듯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런 현상은 보통 가족이나 연인, 가까운 친구처럼 나의 소중한 사람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길을 걷다 혼자 밥을 먹는 누군가의 등이 유난히 신경 쓰일 때. 말할 때 습관적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왠지 친근함이 들 때. 나중에 알고 보면 집에서 자주 보던 어머니의 뒷모습이었거나, 예전 사귀던 사람의 버릇이었음을 기억해낸다.
점차 쌀쌀해지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단골 카페에 세 시간째 머무르고 있었다. 카페는 2층이었고 건물 외벽이 온통 통유리여서 창가 자리에서는 바로 아래 길가뿐만 아니라 저 멀리 삼거리와 버스정류장까지 내려다보였다. 그 자리에서 글을 쓰던 중에 문득 집중이 풀어졌다. 자연스럽지 않은 끊김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옮겨가는 시선을 무작정 따라가 보니 저 멀리 삼거리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황색 코트와 검은색 머플러, 왼손에 노트북 가방을 든 아침에 배웅했던 그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는데 여기 다녔던 십이 년 동안 이런 식의 마주침은 처음이었다. 대뜸 소리쳐 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벌어지던 입이 문득 도로 닫혔다. 그리고 물끄러미, 한동안 그분의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에 닿기 전까지 흐르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사진처럼 눈이 아닌 가슴에 박혔다.(왜 이 장면이 눈이 박혔는지는 훗날 이 글을 쓰다가 알게 된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선 우리가 주차를 하고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그리고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늘 집 앞 넓은 마당 삼거리에 지켜보고 계셨다.)
서른과 예순을 막 넘긴 아버지와 아들. 이제 서로에게 남은 시간보다 지나간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했던 것보다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았다. 함께 먹을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아졌고, 같이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장소가 점점 늘어났다. 언젠가는 더 이상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함께 산을 올랐다가 뜨거운 증기에 사우나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휴가 중 일출봉 앞에서 무릎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족구장에서 1세트가 끝나자마자 가슴을 두드리며 벤치에 앉는 모습을 점점 많이 봐야 할 것이다. 하려면 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나는 그간 하지 못했음이 아니라 하지 않았음에 서러워 눈물짓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하는 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분은 어떠셨을까. 자식이 태어나면, 아들이 자라면 함께 무엇을 하고 싶으셨을까. 내가 처음 어머니의 배 속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무사히 태어났다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셨을 때, 잠든 어머니와 나를 두고 대문 밖에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태우셨을 때, 무슨 생각과 결심을 하셨을까. 그 아이였던 내게 바라는 점이 있으셨을 것이다. 분명 언젠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바도 있으셨을 터. 과연 얼마만큼 이루셨을까. 그분께서 들어 올린 손바닥을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마주 손바닥을 내밀었나. 나 역시 자라기 바빴고 자리 잡고 사는 일에 쫓겼다지만 효도할 궁리는 하면서 어찌 사랑받을 준비는 안 했나. 드려야 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자의적 효라면, 반대로 자식을 원활히 사랑할 수 있게 돕는 것은 타의적 효가 될 텐데. 나는 결국 효도도 사랑받음도 반푼이인 채로 서른이 넘어버렸다. 스스로 큰 효는 못했어도 불효도 없는 자식이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역할은 자식으로서의 효,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나는 저분에게 자식을 떠나 한 사람의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같은 지붕을 이고 살만한 괜찮은 가족이었는지. 또는 인생의 삼분의 이를 함께 할 괜찮은 동반자였는지. 당신께서 원하신 바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과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늘 누군가의 불효자일 수밖에 없어서, 이런 하릴없는 상념들이 계속 입안을 적셨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말없이 바라만 보던 나는 끝내 휴대전화를 들었다. 비어 있는 까만 네모 안을 무슨 말로 채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 저녁 맛있게 드세요. 파이팅입니다!’라는 말밖에 쓰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는 적지 못하고 전송을 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손에 든 휴대전화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셨고, 나 역시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훔쳐보았다.
잠시 후, 꺾어진 코너에서 차가 튀어나왔다. 잠시 비상등을 켜고 아버지를 태운 차는 이내 차선 흐름에 따라 시야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짧은 10초의 장면이 내게는 마치 향후 30년을 압축시켜 놓은 동영상 같았다. 늘 가까워지고 싶었으나 일정 이상 다가가지 못했던 한 사람을, 나와 참 많이 닮았지만 그래서 숱한 평행선을 그렸던 당신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하며 보내야 하는 마음으로.
모두 그리 왔다가, 그리 살다가, 그리 가겠지. 지금 내 뒷모습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당신의 뒷모습과 닮아있듯이, 나 역시도 언젠가 그렇게.
어느 저녁 날 삼거리의 풍경이었다.
엄대 / 김옥한 - 제주영주일보
잠든 남편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마른논바닥 같은 그곳엔 구석구석 크고 작은 주름이 떼를 이루고 있다. 이마를 가로 지르는 주름과 눈 가의 잔주름들이 다투어 피어 있다. 마주볼 땐 몰랐는데 잠든 얼굴에서 더욱 선명하다. 어떤 주름은 분절음처럼 뚝뚝 끊기기도 했고 어떤 주름은 이랑처럼 골이 깊다. 언젠가 보았던 엄대 같다.
엄대는 옛날의 외상장부다. 반찬 가게나 푸줏간에서 외상 거래할 때 물건 값을 표시하는 길고 짧은 금을 새긴 막대기를 말한다. 엄대에다 들여놓은 물건의 분량만큼 금을 그어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을 했다고 한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장부역할을 대신했다.
몇 해 전 여행길에 삼강주막에서 엄대를 보았다. 부엌은 물론 바깥벽까지 금을 그어 놓았다. 흙벽에 부지깽이로 그은 흔적이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일반 손님과 뱃사공들의 외상장부를 서로 다른 곳에 표기한 것이 특이했다. 나룻배가 유일한 수단이었을 적 이곳은 많은 길손들의 휴식처였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여 아침에 배달된 막걸리가 저녁이 되기 전에 동이 나기도 했다. 선술집 단골손님들은 외상이 다반사였다. 주모들은 대개 까막눈이라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 벽이나 종이에 마신 술잔 수만큼 길게, 짧게 작대기를 그었다. 엄대가 외상으로 술을 마시거나 물건을 사는 것을 ‘긋는다’고 하게 된 시초라고 한다.
남편의 주름은 무수한 세월이 그어 놓은 인생의 외상장부다. 그 금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평생의 직장이었던 학교에서, 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속상한 일들로 인하여 생긴 주름일 것이다. 나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제자나 친구, 친척들 때문에 그어진 주름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연년생 남매를 데리고 하루에 버스가 두 번밖에 다니지 않는 벽지에 근무한 적이 있다. 병원도, 약국도 없기에 밤중에 아이가 열이라도 나면 밤을 꼬박 새기 일쑤였다. 퇴근 후면 급하게 약이며, 필요한 물품 사느라 곰비임비 먼지를 뒤집어쓰며 오토바이로 비포장도로를 오갔다. 자식사랑이 유별한 남편에게 아이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분신이었고, 특히 몸이 약한 막내는 아버지의 정성으로 길렀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 계란 한판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결혼을 않고 있으니 빨리 대를 잇고 싶은 남편의 주름살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 재직할 때였다. 어느 해 제자가 가출 후 차량을 털어 생활하다가 절도범으로 파출소에 잡힌 적이 있었다. 못으로 만든 만능 열쇠로 택시 문을 마음대로 열고 도벽을 일삼았다. 학교에 오지 않으려는 학생을 매일 데리고 다니며 중학교 진학까지 시켰다. 퇴직 몇 해 전엔 초등학생 제자들이 중학교 일진과 어울려 비행소년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밤낮을 뛰어다녔다. 그때마다 남편 얼굴엔 하나 둘씩 주름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퇴직 후엔 땅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다. 전원주택을 지으려 곳곳에 발품을 팔다가 원하던 대지를 찾았다. 앞에는 낙동강이 보이고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그야말로 배산임수 명당이었다. 계약과 동시에 땅값을 완불했다. 그날부터 남편은 매일 설계도를 그렸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연못까지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땅 주인은 돌연 계약을 취소하였고 노후를 전원생활로 보내려던 남편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때도 굵은 주름 하나가 생겼으리라.
남편은 단순하고 외향적이다. 얽매이기도 싫어하지만 간섭받기는 더욱 싫어한다. 그런데 나는 작은 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아이들 대하듯 매일 했던 말을 또 하며 잔소리를 했다. 신중해라, 술 적게 마셔라, 외식 많이 하지마라는 등 듣기 싫은 말들을 녹음기 틀 듯 반복했다. 처음에는 다툼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체념한 듯 반응이 없다.
남편이 퇴직한 후부터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남편 몫이 되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나는 언제부턴가 군데군데 고장이 났다. 목 디스크로 고개를 숙여서 일을 못하고 무리하면 팔까지 저릿저릿하다. 허리도 시원치 않아 구부려서 하는 일 또한 힘들다. 내조보다 외조가 당연한 듯 살고 있다. 텃밭일이나 운전은 물론이고, 무거운 것을 못 드니 장보기도 남편 몫이다. 마당 빌어 봉당 빌어 안방차지 한다는 말처럼 집안일 대부분을 맡기고 있다.
남편은 불만이 많겠지만 내색을 않는다. 아내가 해야 할 사소한 일까지 도맡아 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고맙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그 말이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어쩌다 조금 거드는 날은 목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남편이 안마까지 감당해야 하니 아예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솜에 물 스미듯 이제는 남편에게 가사를 맡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요즈음의 나는 남편에게 떼 주름을 긋고 있는 것 같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곤히 잠든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감사와 안쓰러움의 소리로 들린다. 주름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라지만 동갑내기인 나보다 주름이 훨씬 많다. 저 주름들 하나하나마다 그의 역사가 음각되어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어진 금은 실은 가족과 타인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제자들이 속을 썩일 때마다 하나, 아내가 잔소리할 때마다 하나, 자식들이 애 먹일 때마다 하나. 우리가 그어놓은 주름들이 주막집 빚처럼 선명히 새겨져 있다.
엄대 같은 얼굴을 보며 남은 세월은 그동안 남편에게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잔소리도 줄이고, 내 위주가 아니라 그를 위한 삶을 살리라. 가로금 위에 세로금을 그어 빚을 지웠던 주모처럼 얼굴 주름을 하나 둘씩 지워주고 싶다. 주름이 지워질 때마다 활짝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잠든 남편의 얼굴이 어느새 햇살 고요한 수면처럼 환해진다.
등을 돌려보면/김현숙... 경남신문
돌아섰을 때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몸을 돌리든, 마음을 돌이키든 한 번쯤은 앞을 향하고 있는 내 구둣발을 뒤쪽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일부러라도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길을 가다 몸을 돌리면 내가 지나온 길에 저런 것들이 있었나 싶게 풍경이 생경해진다. 다르게 보인다.
스치고 지나온 가로수가, 옆구리만 보였던 지하도 입구가, 팔을 벌리고 입을 벌린 채 정면으로 펼쳐진다. 뒤따라오는 사람을 대면해야 하는 일이 서로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기적어기적 뒷걸음치는 내 모습을 보며 웃어주는 상대가 있어 그리 무안하지만은 않다.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우리는 뒷걸음을 두려워한다. 몸을 뒤로 돌리면, 순간 균형 감각이 깨지고 리듬마저 흐트러져 겁부터 먹는 것이다. 줄곧 지탱해온 자신만의 방향을 잃으면서까지 왜 굳이 뒷걸음을 쳐야 해. 의문부터 들 것이다. 이유가 분명하지 않는 일에 선뜻 자기를 맡기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는 오늘도 앞만 보고 길을 간다. 자신이 타인의 시야를 가리는 줄도 모른 채 가고 있다.
앞서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등을 보이며 걷고 있다. 그 많은 등이 내게 물었다.
“너는 왜 나를 따라오니.”
둘러멘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 상상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짐작하면서 나는 앞에 선 젊은 남자를 보고 있다. 앞만 보고 걷는 남자의 두 눈과 코, 입술을 떠올려보는 일은 속마음을 헤아려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뒤에 오고 있는 아주머니도 내 어깨에 걸린 핸드백 속이 궁금할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내 왼손을 쳐다보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뒤따라오는 사람을 의식하게 된다. 그럴 때면 차라리 몸을 돌려 내 앞면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너나없이 이렇게 길을 가고 있다.
앞만 보며 가는 일이 외로운 까닭은 늘 누군가의 등을 보며 가기 때문이다. 하늘을 날아가는 제비도 꽁무니를 보이고, 도로 위의 자동차들도 뒤 범퍼를 보인다. 나는 앞모습을 보여주며 가는 선두(先頭)를 본 적이 없다. 내 아버지가 그랬고, 스승이 될 만한 분도, 선배라는 사람들도, 모두가 그들 등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무늬’를 좇게 했다. 표정 없는 뒷모습에서 메시지를 찾는 일은 고독했다. 한 번쯤 얼굴이라도 돌려 웃어줬다면 뒤따라가는 내가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앞서간다는 것은 자신의 전면을 드러내면 안 되는 일인가 보다.
한 아이가 은행잎을 밟으며 내 앞을 가고 있다. 아까부터 아빠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있었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빠가, 위험해 넘어진단 말이다 하면서 말리고 있었다. 결국에 손을 빼낸 아이가 두 팔을 흔들며 춤을 추듯 까불었다. 자유롭다는 표시로 느껴졌다. 그 아이 발걸음이 이쪽저쪽 제 마음대로 스케이트를 탔다.
똑바로 앞만 응시하고 걷던 엄마가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엄마의 따듯한 시선에 마음이 놓였는지, 고 작은 몸통을 뒤로 획 돌리더니 갑자기 뒷걸음질을 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나 따라 해봐요.’하는 눈빛으로 뽐을 내며 웃었다. 예뻤다. 바닥에 깔린 은행잎을 발바닥으로 비벼가며 미끄러지듯이 가고 있다. 불안한 기색도, 두려운 마음도 하나 없는 편안한 뒷걸음으로 가고 있다. 그때 아이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빠 손을 다시 꼭 잡고 있었다.
같은 길을 가면서 오늘 유일하게 앞모습을 보여준 아이, 겁이 나서 어기적대며 뒷걸음치던 내게 선명한 메시지를 선물해줬다. 아이의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였다. 힘을 빼고 미끄러지듯 가라고 했으며, 무서우면 옆 사람 손을 잡으라고 했다. 자기처럼 말이다. 뒤돌아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지만, 나는 그 아이처럼 하지 못했다.
앞모습과 뒷모습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한 몸이나 다름없는 그 차이를 반으로 나눌 분간이 있긴 한 걸까. 그래서 우리는 애매해하나 보다. 과연 내가 가는 이 길이 앞쪽이 맞단 말인가. 그런데 왜 죄다 뒷모습만 보이며 간단 말인가. 어쩌다 역방향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은, 그럼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역행하고 있다는 말일까. 모호했다. 어찌 보면 돌아보는 그 자체가 앞일지도 모르겠다.
지난겨울, 죽음이 만들어준 조우(遭遇)가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아이들이 웃고, 문상객들의 술잔이 오고갔다. 그날 아버지는 영정사진 속에서 우리와 마주하고 계셨다. 살아생전 등만 보이며 사셨던 아버지가 오늘에서야 몸을 돌려 나를 보셨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너무 늦게 돌아봐서 미안타 하는 것 같았다. 당신 가시는 그 길이 한 번 가면 돌이킬 수 없는 길임을 아셨을까. 가는 마당까지 뒷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으리라. 뜻이 아니게 영정(影幀)으로 뒤돌아 앉으셨지만, 이 세상이 그저 슬픔 일색만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
“아버지 보세요. 엄마는 친지들 품에 안겨 위로받고 계셔요, 현관에 신발들은 어질러질 틈 없이 정리되어 있고요. 또 천장에 형광등도 환하게 제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늦게 돌이켜 미안하다는 말도 이제 그만 넣어두세요.” 죽음이 돌이킨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나는 회한의 덧없음을 읽었다.
비단 아버지뿐일까. 영정사진 안에 고인은 누구 할 것 없이 나, 너, 우리와 마주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떠나고 없는 세상이 궁금해서 돌아섰을 수도 있고 이승에 미련이 남아 몸을 돌이켰을 수도 있다. 허나 다른 것 다 제쳐놓고 그동안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한 스스로에게 미안해서 본연의 모습 하나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영정이지만 당신과 내가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해마다 영정사진을 찍어서 ‘자신이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본다는 배우가 있다. 매일매일 조금씩 ‘죽음’으로 가고 있는 스스로를 돌려세워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 그녀가 전하고 싶은 말 또한 같은 선상이 아닐까 싶다.
돌아섰을 때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갑작스레 혜안(慧眼)이 생겨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 본능적으로 보폭을 줄이고 걸음 속도도 늦춘다. 그 걸음 값에 맞춰 마음 또한 같은 값으로 따라오므로, 우리는 그전보다 세상을 좀 더 찬찬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한 번쯤 등을 돌려 뒤따라오는 바람을 맞자. 옆에 있는 사람 그 누구라도 좋으니, 겁나면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달라고 해보자. 등을 돌려 뒤를 보면 보이지 않았던 앞이 보인다.
덤/이재은... 동양일보
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 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 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
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저, 맛없으면 공짜 소리가 시장 입구부터 질펀하게 깔려 나왔다. 장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녹아있는 우렁찬 목소리를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말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흥정하는 소리가 가락을 타는 시장에서 나는 생강을 사러 온 목적도 잊은 채 자유로운 이방인으로 느릿느릿 시장통을 활보하고 다녔다.
김장철은 김장철인가 보다. 여기저기 배추, 갓, 쪽파며 무가 여름의 푸성귀인 양 시퍼런 혀를 빼고 늘어졌다. 간판도 없는 채소 좌판 상인은 얼굴도 목소리도 젊은 청년이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손님은 엄마로, 중년의 아주머니에게는 누님이라고 부른다. 배추를 사는 엄마에게는 갓을, 알타리를 고르는 누님에게는 쪽파를 곁들여 내놓는 넉살도 보통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주 같기도 아들 같기도 한 청년의 패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절을 역행한 호칭에 들뜬 손님들이 흥정도 않고 값을 치르는 모습은 당연해 보였다.
철커덕 철커덕 소리가 맞은편에서부터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흥이 붙은 얼굴의 엿장수였다. 큰 가위를 휘두르며 목판에 담긴 엿을 대패 쇠 날로 툭툭 치면 엿가락은 먹기 좋게 잘려 나갔다. 둔탁한 소리만큼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은 가위를 자유자재로 쓰며 노랫가락에 사람들의 시선까지 엮는 엿장수는 곡예사이자 입담꾼이었다. 호기심에 한 봉지 사고 싶어졌다. 한 봉지에 담기는 정량이 있기나 했을까. 돈만큼 적당히 엿을 떼어줄 마음은 애초부터 장삿속에 없었던 것 같다. 엿판을 들썩이게 하는 엿장수의 흥에 맞춰 손님은 고갯방아만 잘 찧어 주면 된다. 즐거워하는 만큼 봉지에 엿이 담기니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실한 대추가 흔한 계절이다. 가을 햇살의 애정이 담긴 붉은 껍질 위로 갈바람이 드나든 주름이 쪼글쪼글하다. 톡 쏘면서 쏴하는 맛의 생강과 부드럽고 달큼한 맛의 대추는 궁합이 그만이다. 이집 저집 대추의 모양새가 어차피 비슷비슷하니 좌판 상인의 인상을 살피는 것이 좋다. 후덕한 얼굴에 풍채가 좋은 상인 앞으로 갔다. 두 손으로 됫박을 바쳐가며 수북이 담아 올렸다. 봉지에 넣을 때도 떨어질 세라 신중하게 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도 한 줌도 모자라 한 줌을 더 넣어 주는 것이 아닌가. 됫박의 중량을 계산하던 나의 머릿속 깜빡임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시장통을 빠져나오자 인도의 가장자리에는 노점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빨강 노랑 하양이 연속으로 돌아가는 파라솔 아래가 그들 각자의 영역인 듯싶었다. 줄지어 늘어선 노점의 끝에는 하늘에 펴 받칠 것도 없이 장사를 하는 노인도 있었다. 볕조차 비껴가는 구석자리에 바람이 어찌나 왔다갔는지 노인이 기댄 나무는 벌써 졸가리만 앙상하였다. 축 늘어진 전봇대 전선 같은 그림자는 노인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맨바닥에 찬기를 깔고 앉은 탓인지 세운 두 무릎 사이에 묻은 얼굴은 눈만 살짝 보일 뿐이었다. 휘주근한 노인의 모습과는 달리 머리채를 단단히 묶어 똬리를 틀어 놓은 마늘은 들어찬 알맹이로 미어질 듯 보였고, 방파제의 둑처럼 아귀를 맞춰 쌓아 올린 생강에서는 코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향이 휘발되고 있었다.
생강을 살피는 척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냐는 물음에 노인은 뭐 하려는지 되레 묻는 것이다. 끓여 마실 요량이라고 하니 연륜의 레시피를 요긴하게 일러주었다. 생강 담을 봉지를 펼쳐 든 노인의 손이 그을린 솥단지처럼 검고 오래된 부뚜막처럼 갈라져 있었다. 씨알 굵은 생강을 골라 담아 주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가늘고 질긴 손은 무척 컸다. 손님의 눈대중으로도 중량은 초과였다. 건네받은 봉지를 염치 있게 바라보고 있으니 ‘가져가, 나는 더 주려고 파는 거야’라며 봉지를 밀어내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다 식은 무릎 사이로 파고드는 노인의 얼굴에서 겸연쩍어 하는 미소를 보았다. 속 깊은 덤의 고갱이인 양 하얀 미소였다. 끓기 시작한 주전자는 도르륵 도르륵 밝은 소음을 낸다. 열기가 띄워 올리는 생강이 서로 부딪치며 맛과 향을 내는 소리일 것이다. 주둥이로 빠져나온 희뿌연 김이 생각의 도화지로 펼쳐진다. 줄기와 가지만으로 우뚝 서 있는 나무 곁에 시간의 흠결처럼 거칠고, 떨어지는 세월처럼 앙상한 노인의 모습이 정물처럼 그려진다. 정적이고 많은 여백을 담은 그림은 한층 깊고 너그러운 느낌이다. 자신의 그릇에서 기꺼이 더 내어주고 마음까지 얹어주면서 흥정을 하지도 생색을 내지도 않는 도타운 덤의 색깔로 채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서 향이 배어 나온다. 마음 구석구석까지 온기를 전하는 진한 덤의 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