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을 결정했다.”
문득 내던져진 발언에 준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뒤를 올려보았다.
자신이 등을 기댄 침상, 그 위에서 교주가 비스듬히 누운 채 준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눈을 가만히 내리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네 허락만 남은것 같군. 더 시간이 필요하냐.”
준수는 교주를 바라본 채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준수의 반응에 교주는 살짝 눈을 치켜 떴는데 이마에 드리워진 검은 앞머리 아래 까만 두 눈동자가 준수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준수는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시간 주겠다고 한지 하루도 안지났잖아요.”
“별로 생각할 시간이 없을껄?”
말하며 교주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는데 그 웃음이 아름다워 보여 준수는 아무말 없이 잠자코 교주의 흰 얼굴을 응시했다.
교주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니면 그렇게 바라보는 준수의 생각을 알고있는지도 몰랐다. 교주는 한손을 뻗어 준수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내가 먼저 결혼하겠다고 말해버렸거든.”
“예?”
준수는 경악스런 얼굴로 교주를 바라보았다. 교주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였다.
고요한 천방 안, 창가에서 휘날리는 하얀천 틈새로 주홍빛 노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준수는 난해한 얼굴로 교주를 바라볼 뿐이였다.
교주는 준수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턱을 끌어당겼다. 준수는 생각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릴정도로 입술이 가까워졌을때, 준수는 늦게 터진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럼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이 결혼이 알려지면 전 무슨 낯으로 형을 보라구요.”
“지금 내 첩으로 있는것도 그리 자랑스런 일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건 간단한게 아니잖아요.”
“결혼을 취소하고 전쟁을 재개 할 수도 있지.”
그 말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준수는 재중을 바라보았다. 재중은 살짝 고개를 뒤로 빼고 준수를 마주보더니 손가락으로 살며시 준수의 볼을 쓸었다. 그리고 살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화접아. 그러면 네가 나에게 어떤 구실로 복수할 것이냐? 넌 네 형을 죽이면 내게 복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이후 네 형이 내 칼에 죽게 되면 그건 전쟁을 멈추지 않은 네 책임이야. 네가 싸움을 붙인 것이다.”
순간 뜨악한 준수는 입만 달싹거리고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교주는 다정하게 준수의 볼에 입맞췄다. 그리고 귀에 대고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정전을 하는 대신 나와 결혼을 할거냐. 아니면 결혼 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 할까.”
준수는 죽상이 되어 교주를 바라 보았지만 교주는 그저 생글 웃으며 준수를 마주볼 뿐이였다. 준수는 사정조로 말을 꺼냈다.
“교주님. 둘 다 안하면 안돼요? 결혼하면 저는 진짜 마교인이 되는데...”
“그럼 전쟁을 계속 해도 되는거냐?”
“아니 정전 하는건 좋은데, 제가 결혼하면 진짜...가문을 버려야 한다고요...”
사뭇 진지하게 준수는 교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빙긋이 웃고 있는 교주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네가 설산인이 되고 싶다면 나와 네 형이 전쟁을 치루는걸 지켜봐야 할거다. 나와 네 형, 둘 중 한명은 패할것이고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건 내게 당연한 것이지. 네가 이 전쟁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결혼이나 정전은 나오지 않았을거다.”
준수는 가만히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교주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천방의 방바닥에 깔린 섬세한 백호 털가죽을 응시하며 준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를 위해서 마교를 버릴 수 있어요?”
문득 재중은 이상한 느낌에 준수를 쳐다보았다. 그 말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았다. 동그랗게 뜨여진 재중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준수는 말을 이었다.
“제가 설산을 버리길 원하셨잖아요. 교주님은, 마교를 버릴 수 있어요? 설산은 내 고향인데...”
묵묵히 듣고 있던 교주는 재빨리 준수의 말을 가로챘다.
“너와 난 틀리다. 나는 지금 마교인 모두를 책임지고 있지만 너는 아니잖느냐. 너의 설산은 과거이지만, 내 마교는 미래다. 과거는 포기할 수 있지만 미래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지.”
준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교주는 준수가 반박을 할거라 생각했지만 준수의 얼굴은 생떼조차 쓸 수 없는 완패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어려워요...”
“대답을 안해주는구나.”
교주의 말에 준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검은 앞머리 아래로 교주의 동그란 두눈이 물끄러미 준수를 응시했다. 그는 곧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묻지. 나를 위해 네 과거를 버릴 수 있느냐?”
“아...”
준수는 말을 하려 숨을 들이마셨다가 곧 멈추었다. 생각을 읽히지 않으려 준수는 자동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는데 머릿속에는 이미 답이 나와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잊어야 하는 것이였다.
“잘 모르겠어요...난 설산이 그냥 꿈이예요. 지금껏 설산을 위해서만 움직였어요...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내 침소에 와 있는건 설산을 위한 일은 아닌것 같은데.”
교주의 말에 준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교주의 팔이 슬그머니 준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깨 위로 감겨드는 두 팔에 아무런 반항없이 준수는 한손으로 교주의 팔을 더듬었다.
준수의 귓등에 대고 교주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네가 설산을 위한다면 나와 결혼해야지.”
“하하하...”
준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돌려 교주를 쳐다보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교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교주는 큰 눈으로 교태스런 눈웃음을 짓고 있엇다. 그 아름다운 얼굴로 잔잔히 흐르는 색기에 순간 준수는 아찔해졌다.
교주가 한번만 더 물으면 정말 결혼한다고 답할 수 있을것 같았다. 준수는 감탄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정말 예뻐요.”
“그렇게 보이려고 웃었어.”
“하하하...”
교주의 입술이 가까워지자 준수는 한손으로 교주의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슬며시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마주친 말랑한 입술안에서 피가 뜨겁게 돌기 시작했다.
“지금...말하면 무조건 좋다고 말할게요. 진짜 후회 없이요.”
얼굴 가까이에서 교주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준수는 결혼을 제안하는 것을 예상하고 답할준비를 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쉰 교주는 높아진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다시 입맞춰 주지 않겠냐.”
“좋아요.”
준수는 아무렇지 않게 교주와 입을 맞췄다. 그 무방비한 입술은 좀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준수는 한손으로 거침없이 교주의 옷깃을 파고들어 따스한 살결을 쓸었다.
교주의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교주가 숨을 몰아쉬며 뇌까렸다.
“이제 됐어.”
“왜 결혼하자고 하지 않아요?”
준수의 질문에 교주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벌어진 옷깃 틈새로 준수의 손은 교주의 심장위에 닿아있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듯 앞섶이 헤쳐진 옷차림으로 교주는 팔을 괴고 준수를 바라보았다.
“원하면 직접 말해.”
“하하하...지금 묻지 않으면 후회하실텐데요?”
말하며 준수는 교주의 한쪽 어깨를 살며시 밀었다. 어깨가 밀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채 교주는 붉어진 입술로 답했다.
“아니. 후회안해.”
재중의 얼굴로 하얀 머리카락이 내려왔다. 위에서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화접, 하얀 머리칼을 드리운 그 얼굴이 신비로웠다.
곧게 뻗은 눈썹아래 우아한 눈꼬리를 바라보며 재중은 빙그레 웃었다. 신비한 것들은, 잡으려 하면 사라져 버리지. 문득 아련해진 눈빛으로 화접의 눈이 재중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그 짧은 찰나 시간이 느리게 지나갔고 화접의 눈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향기로운 숨을 내뱉으며 화접이 재중의 입술에 입맞췄다.
순간 입술에 닿는 말캉한 실체에 재중은 미소지었다. 이제 손을 뻗으면 그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의 결 좋은 살결과 한팔에 들어오는 늘씬한 허리와 그리고...
재중은 자신의 손이 찾고있는 세밀한 눈꽃문양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과거일까 미래일까. 재중의 손길에 가쁜 숨을 내쉬는 화접은 그저 강한 심장의 울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킬 뿐이였다.
그 심장소리는 자신의 것과 같았다. 아마 이것은 현재일 것이다. 성급한 미래에 대한 약속, 쉽게 내뱉는 사랑한다는 말처럼,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을 감수하더라도 쉽게 ‘좋아요’라고 허락할 어리석은 낭만. 문득 재중은 후회가 밀려올 것 같아 그의 온 몸을 꽉 껴안았다.
어쩌면 시아의 칼을 맞받는 것보다. 시아가 냉정하게 돌아서는게 두려워서 정전이라는 카드를 들이민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시아는 모를것이다. 이 교주가 왜 결혼을 하자고 하는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은 낭만이라는것이 얼마나 가볍고 변덕스러운지.
목께로 하얀 머리카락이 스치고 있었다. 서늘하고 섬세한 머리카락, 온 몸에 이는 전율을 느끼며 재중은 그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열어젖혀진 가슴팍으로 시아의 엷은 숨결이 불어왔다. 그는 대담하게 교주의 허리에 손을 댔다.
종이로 댄 하얀창을 통해 부드러운 노을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땅거미 지기 전 이르게 켠 등롱빛 같았다.
사위가 어두워지며 서서히 선비곡에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무영당주관. 무영당주가 사라진 후 무영당주관으로 지정된 방은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빈 무영당주관은 의외로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무영당 관할 시비들이 매일아침마다 새 주인을 위해 청소했기 때문이였다.
불을 켜지 않아 푸른 어둠이 감도는 빈 무영당주관을 유천은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정면에 보이는 흰 벽엔 붉은색의 휘장이 내려와 있었다.
휘장안에, 무영당을 상징하는 주작이 그려져 있었다.
동이백제 출신인 흑수대마제는 마교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당에 사방신이라고 불리는 영물들 표식을 그려주었다.
유천이 있는 무영당도 주작의 문양을 하사받았다. 항상 난초를 쓰던 무영당은 곧장 붉은색의 주작으로 표식을 바꾸었다.
선임은 붉은색을 눈에 띈다고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유천은 좋아했다.
당주관 뒤에 후채가 있었다. 마치 마교안의 것처럼 후채는 작은 정원을 딸리고 이어져 있었다.
일층의 작은 평수의 후채는 오직 수면을 위한 장소였다. 붉은 주작문양의 비단침구와 작은 소탁자, 세안을 위해 물을 받는 오톨도톨한 도자기그릇.
문득 벽면을 쳐다보다 유천은 술진열대를 발견했다. 그 안에 낯익은 것이 있었다. 검은색의 반질반질한 도자기로 만들어진. 교주의 모과주통, 유천은 진열대를 열어 모과주를 꺼냈다.
모과주통을 탁자에 내려놓고 조그마한 술잔을 꺼내드는데 문득, 약한 바람이 불어왔다. 앞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결에 유천은 문득 문쪽을 쳐다보았다.
후채의 문은 열려있어 어둠이 내린 작은 정원이 잘 보였다. 서늘한 바람에 실린 짙은 풀향기. 유천은 슬쩍 미소지었다. 아마 무영당원이 정찰을 하며 지나간 것이리라.
두터운 소리가 나는 과주통을 열고 유천은 작은 찻잔에 술을 따랐다. 노란 술이 상큼한 향기를 풍기며 떨어져 내렸다.
늦가을의 밤은 조용했다. 후채의 등롱을 희미하게 켜둔 채 유천은 모과주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안주가 아쉬웠지만 따끈한 안주가 있으면 이 차가운 평화를 깰것 같았다. 술기운이 적은 모과주는 달짝지근하게 입안에 감겼다.
이건 교주가 특별히 따로 만든 것이다. 유천이 좋아하도록 아주 달고 향기롭게, 유천은 쓴 술을 맛없어했다.
문득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금소리 같았다. 뚝뚝 뜯는듯한 그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외우는 것 같았다. 나는 한심한 무지랭이라네. 나는...
순간 유천은 머리가 몽롱해지는걸 느꼈다. 자신은 어느새 그 옛날 취각에 와 있었다.
하얀색의 화려한 옷자락을 두른 시아가 칼춤용 칼을 든 채 서 있었다. 시아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으므로 유천은 자동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정희루의 밝은 정자안엔 아무도 없었다.
유천은 다시 시아를 돌아보았다. 시아는 아주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흰손에 들려있던 두 자루의 칼, 유천은 칼과 시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는데 그건 칼을 든 시아가 유천에게 너무도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곱게 뜨인 두 눈에서 생기있는 눈동자가 유천에게 향했다. 둥글둥글한 입술은 웃고 있었는데 얼굴 위에 늘어진 상아색 머리칼과 연한분홍의 입술이 너무 아름다워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유천은 물러서지 못했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시아가 든 두자루의 칼이 서슬푸른 빛을 내고 있었음에도 이를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수룡선을 갖게 될 시아와 자신의 운명같았다.
유천은 눈을 꾹 감았다. 순간, 쩔렁 하는 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와닿는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귀에 불어오는 시아의 달콤한 숨소리. 유천의 몸을 휘감은 따뜻한 두팔, 시아의 가슴안에서 뛰고있는 심장박동이 느껴지자 마음속에 차오르는 행복감에 유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유천은 다시 무영당주관에 있었다. 아무도 없는, 쌀쌀한 당주관엔 정원에서 들어온 향긋한 풀냄새가 났다.
그 짧은 꿈에서 느꼈던 감촉이 너무 생생해 유천은 두 손을 펼쳐보았다. 희여멀건한 두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씁쓸한 미소를 띄운 채 유천은 두 손을 쥐었다. 눈을 감자 또 시아가 떠오를 것 같았다. 안돼. 시아는.
시아는 교주의 것이잖아.
엊그제 천방에서 보았던 등은 시아였다. 그의 매끈하고 유연한 등은 교주의 손길을 거쳤을 것이였다.
그를 다시 보았을때에도 그는 교주의 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 옷자락이 닿은 곳은 교주의 손이 닿았을 것이다.
교주의 침실안에서 몸과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 모두 교주의 것이 되어있을 것이다.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유천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유천은 짧게 내뱉었다.
“하지 마.”
이것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시아를 가진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하겠다는 교주? 아니면 가소로운 질투심에 젖은 자신. 아니면 묘한 환상을 보게 한 비혈금소리.
기이하게도 유천은 자신이 아직까지 시아의 환상을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꿈이라도 그 촉감이 달콤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천은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교주를 배신할 순 없었다. 교주와 똑같은 인간이 될 순 없었다.
“이제 좀...”
다시 금소리가 들려왔다. 비혈금이 공기에 음을 실어 이곳 당주관까지 띄워 보내는 것 같았다. 유천은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걸 느꼈다.
다시 과거로 가고 있었다. 예쁜 미소를 띄운 시아가 다시금 자신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시아가 안겨오는걸 느끼고 있었지만 유천은 제정신을 차리려했다.
은애는 시아의 손에 수룡선을 쥐어줄 것이다. 그리고 시아의 수룡선은 결국 유천의 목을 겨눌것이다.
문득 유천은 눈을 떴다. 당주관의 문지방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여러소리들. 유천은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밤이 지나고 있었다.
“회의는 어땠나요.”
주홍빛의 등롱이 옅게 켜진 은애의 방안, 네 다섯명의 마교당주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넓은 옥탁위로 찻잔을 하나씩 앞에 둔 그들은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일어서 있는 은애는 왠지 모르게 전과 달랐다.
그러나 그 은애의 알수없는 자신감을 마교당주들은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은애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뿐이였다.
“이미 알고 계실줄로 압니다만...이번에 요행으로 살아남았지만 백청아루 유천은 사형당할 겁니다. 교주님이 추진하시는 행사만 처리되면 그후에...”
매풍당주의 말에 은애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을 부정이라 생각한 매풍당주는 눈빛은 매섭되 좀 더 부드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유천이야 은애낭자가 마교의 대모만 된다면 훨씬 쉽게 해칠 수 있지요. 은애낭자가 교주님의 미움을 받는 상황인데 저희같은 당주가 어찌 전 첩이였던 유천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교주님이 절 미워하는게 제 탓인가요?”
은애는 의아한 눈으로 각 당주를 쳐다보았다. 매풍당주 옆에 앉아있던 천무부당주가 말을 꺼냈다.
“낭자. 낭자는 교주님의 마음에 들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소.”
“전 기생이 아니예요. 제가 마교 정통가의 딸이라서 제게 마교의 대모를 바라시는거 아닌가요? 그런데 저더러 기생처럼 남자앞에서 아양이나 떨라구요?”
은애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중년의 서문부당주가 픽 하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낭자는 가만히만 앉아있으면 계속 교주님의 여첩으로 남을 줄 아시오? 우리 당주들이 이렇게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 이유를 정녕 모른단 것이오?”
“당주님들은 제가 교주님의 아내가 되길 원하면서 한번도 절 도와준 적이 없잖아요. 그저 입맛에 맞는 거래만 할 뿐이죠. 당주님들이 보내주신 선물들이 제 자신보다 중요한가요?”
은애의 말에 매풍당주는 알게모르게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만약 유천의 사형문제를 제대로 처리 못했다고 저렇게 나오는 거라면 약간 압박을 줄 필요도 있었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매풍당주는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낭자. 뭐 백청아루 사형 문제는 처리할 필요도 없겠죠. 이제 마교에 새 대모가 생기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교주님이 화접과 결혼한다 하니 말입니다.”
순간 은애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말을 꺼낸 매풍당주는 굳은 은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시간을 잊은 듯 멍하게 허공에서 멎은 눈동자는 한순간 싹 풀리더니 분주히 주위를 살폈다.
“허튼소리 말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난 지금껏 그런소린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시아가 내게 알리지 않을리가.”
은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순간 흑풍부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은애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애가 움찔한 순간 매풍당주가 한손을 들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굳이 화접시아에게 확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교인들은 앞으로 화접시아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참수당하고 싶지 않다면 낭자는 섣불리 나서지 마시지요.”
은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매풍당주를 내려다 보았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늙은 당주와 꼿꼿이 서 있는 은애, 은애의 두 손이 주먹을 쥐는걸 보며 매풍당주는 침착하게 찻잔을 잡고 말을 이었다.
“낭자는 영리하니 굳이 설명 안해도 되겠지요...낭자가 여기 온 이유는 마교의 대모가 되서 교주님과 수뇌당주들 사이에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교주님은 화접에게 빠져있지만 낭자가 대모가 되어 교주님의 혈통을 생산하게 된다면 금새 화접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실 겁니다. 저희는 낭자가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랍니다.”
잠시동안 은애는 매풍당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매풍당주역시 은애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였다.
찻잔 내려앉는 소리만 유일하게 들리는 저녁. 환히 켜진 등롱아래서 은애는 냉랭한 눈으로 매풍당주를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당주님들은 지금 내 미래는 상관없이 그저 교주님의 애만 낳아주면 된다는 거군요. 죽은 아버지의 성묘도 가지 않은 분인데 그 분의 애를 낳아달라니!.”
은애는 기가 찬 얼굴로 당주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여있는 당주들 사이에 무언의 눈빛이 오고갔다. 은애의 차가운 표정을 보는 부당주들의 시선에는 긴장이 어려있었다.
누가 더 말을 꺼내기 전에 매풍당주가 은애에게 말을 꺼냈다.
“그러면 알겠습니다. 새 첩을 부르도록 하지요. 은애낭자께선 더 이상 마교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 백룡강으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괜찮겠지요?”
매풍당주의 물음이였다. 백룡강으로의 귀환, 그러면 마교의 일에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시아에 관해서도...
은애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초조함을 감추며 애써 담담하게 매풍당주를 내려다 보았다. 매풍당주는 슬쩍 고개를 들더니 은애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돌아가시는게 싫으십니까? 어차피 교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셨으면 마교를 떠나는것에 미련이 없으셔야죠. 아니면, 다른분이 생기신 겁니까? 예를 들어...교주님의 남첩 같은?”
“헛소리하지 말아요.”
은애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빛이 은애의 화려한 궁장을, 그 아래 심란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매풍당주는 살쾡이같은 두 눈에 웃음을 띄고는 찻잔을 들었다.
가만히 눈을 깔던 은애는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그와 난 친구사이예요. 그를 함부로 남첩이라 말하지 말아요. 그는 그렇게 하찮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는 교주님의 정부나 할 사람이 아니예요.”
“예. 이제 마교의 대모가 되게 생겼죠. 결코 하찮지 않습니다.”
서문부당주말에 덩치 큰 천무당주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은애는 당혹스럽게 두 당주를 쳐다보았다. 흑풍부대장은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쨌든 저희 당주들은 낭자가 협력해 주지 않겠다면 고이 백룡강에 모셔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교주님의 혼인이 진행되기 전에 새 여첩을 뽑을 겁니다. 좀더 뛰어난 분으로요.”
흑풍부대장의 ‘뛰어남’이 어떤것인지 은애를 포함한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은애의 평범한 외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였다. 은애는 잠자코 있다가 되뇌이듯 말했다.
“한마디로...여첩을 갈아치우겠다는 거군요...”
매풍당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살짝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서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가만히 은애의 모습을 지켜보던 매풍당주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은애낭자도 이제 백룡강에서 스스로의 삶을...”
“아무래도 좋아요. 하지만 새 여첩이 들어온다 해도 시아가 마교에서 나가주진 않을걸요? 만약 시아를 마교에서 쫓아낼 생각이라면 날 마교에 남겨두는게 좋을거예요.”
그 당찬말에 모두의 시선이 은애의 얼굴로 향했다. 자신있게 모두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적갈빛의 눈, 은애의 얼굴에 차오른 확신에 매풍당주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은애낭자는 어떻게 시아를 쫓아낼 생각이십니까?”
은애는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난 단지 시아를 잘 구슬려 마교에서 나가게 할 뿐이예요. 그의 미래를 위해서. 그를 교주님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난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거예요.”
“...그건 친구로서의 우정입니까?”
매풍당주의 질문에 은애는 가만히 매풍당주를 쳐다보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선 번쩍이는 두 눈이 은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애는 입을 꾹 다문채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지만 방안은 침묵에 가득 휩싸여 있었다. 모든 당주들이 은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일 뿐이예요.”
은애의 말에 매풍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그럼 일단 은애낭자를 믿어보도록 하지요. 낭자가 원하시는 것이...무영당주의 죽음입니까?”
매풍당주의 질문에 은애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아니요. 내가 원하는건 그의 마교 복귀예요.”
그 말에 당주들은 술렁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은애를 바라보고 있던 흑풍부대장이 음산하게 말을 꺼냈다.
“왜 그를 다시 복귀시키려는 겁니까.”
그렇게 질문하면서 당주들은 이미 얼마간 짐작하고 있었다. 화접만이 교주의 선처를 받아 감옥에서 나온게 아니었다. 무영당주 역시 교주의 선처를 받은 것이였다. 무영당주는 교주의 첫 번째 애첩이였다.
“내가 그를 포섭했어요. 그는 비혈금의 주인이죠.”
무림삼보중 가장 악명높은 비혈금. 모여있는 당주들의 진지한 얼굴을 쭉 둘러보며 은애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비혈금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두려울건 없어요.”
늦은 밤. 초라한 한 여관의 일층식당은 어둠과 고요에 잠겨있었다. 가까이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조용한 실내. 한 여인이 식당 구석에 앉아 작은 등불을 켜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인의 술잔 옆엔 원통형의 전보함이 단정히 놓여져 있었다. 달짝지근한 경단을 앞에 두고 여인은 전보지를 훑어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교, 무림맹과 정전 예정’
얇은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 잠잠히 끼워져 있다가 갑자기 살짝 팔랑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전보를 잡고 있던 여인 묘령화는 흠칫 놀랐다.
등불이 파르르 떨리더니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만에 술 한잔 하는구려.”
묘령화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자리에 하얀 백발을 짧게 깎은 잘생긴 사내, 준호가 앉아있었다.
검은옷을 입어 어둠속에 동화된 듯한 모습으로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묘령화는 날카로운 눈으로 대꾸했다.
“당신이 이런 밤중에 몰래 찾아온걸 보니 날 죽일 생각이군요.”
“그렇게 추측하는걸 보니 본인 잘못을 아는 것 같소.”
준호의 자상한 말에 뼈가 실려있는걸 알고 묘령화는 콧웃음을 쳤다. 두건아래서 묘령화의 두 눈이 살기를 띄웠다.
“날 죽여도 당신은 오래가지 못할거예요. 진실을 밝혀지게 되어있죠. 당신은 자기 동생을 죽이려 했고 그건 무림맹 전체에 퍼질거예요. 더불어 설산은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겠죠.”
“쉽게 그리 되진 않을거요. 화접 묘령화.”
말하며 준호는 묘령화의 탁자쪽으로 손을 뻗었다. 묘령화는 잠시 움찔했지만 준호가 술병을 잡아가자 곧 평정을 되찾은 표정을 지었다.
식탁밑에 있는 묘령화의 한 손은 날카로운 단도를 꼭 쥐고 있었다. 식탁아래에서 도사리는 날카로운 칼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호는 찻잔 하나를 집어 술을 따랐다.
“설산엔 차기당주 비무대회 라는게 있지. 본래 설산의 당주될 자는 자신의 형제와 싸워야 되오. 그게 좋건 싫건 설산의 평안한 미래를 위해 해야 하오...나같은 경우 이른바 적자생존이지. 하하...”
그는 재미없게 웃었다. 묘령화는 불빛에 너울거리는 그의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고 그는 술잔을 입술에 갖다댔다.
의도적으로 목을 젖히고 술을 넘기는 그를 보며 묘령화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의 자세가 목을 찌르라는 듯 보였다. 그건 살수의 직감이였다.
바로 공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감상적인 감정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 탁 하는 소리와 술잔이 내려왔고 절호의 기회가 날아갔다.
“이건 비밀인데...”
준호가 말을 꺼내자 묘령화는 준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취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유쾌해 보였다. 무언가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암습을 실패한 일 같은 것이. 준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준수는 애초부터 당주가 될 수 없는 운명이였소. 내 아버지께선 비무대회전에 내게 가문의 절기를 미리 선사하셨지. 잘 알거요. 설화난영참 말이오.”
그의 입에서 ‘준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묘령화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번도 자기 동생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른적이 없었다. 의아했지만 묘령화는 애써 웃음지으며 답했다.
“설화난영참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지요.”
준호는 미묘하게 웃었다. 그게 기뻐서 웃는건지 아부를 비웃는 건지 알수 없었다. 준호는 오랜 친구와 말하듯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소...그리고 그 기술을 내 스스로 터득한거라 믿은 어리석은 녀석은 설산에서 파문을 당하고 공력을 다 빼앗겨야 했소. 사실 그렇게 되면 몇 개월 살지도 못하지.
그러나 아버지께선 파면하지 않으셨소. 아버지로선 마지막 양심이였을 것이오. 그 분은 자신의 둘째아들을 화접단에 보내셨소. 그 가슴에 눈꽃을 남기고 설산의 첩자로 살라고 말이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두 번째 비무대회였소.”
또르르륵 소리를 내며 술이 다시 채워졌다. 묘령화는 묵묵히 준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준호의 한마디 한마디는 어릴때의 두 사람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설산파의 당주임을 증명하는 하얀 설산의를 입고 부두의 조직들을 처단하는 준호, 피바람 부는 화접단에서 정해진 대상을 살해하는 준수.
접근방식이 틀렸지만 준수는 설산이 원하는 인물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준호가 편지를 보냈을 때 준수는 마교를 쓰러트리자는 도전에 쉽게 응했다. 묘령화의 부탁에 따라 화접단에 돌아와 주지 않았다.
“난 전쟁을 일으켰고 그게 무리한 일인걸 알았소. 하지만 난 설산의 당주이자 무림맹의 맹주였고 준수가 맹주가 된다 해도 감히 꿈꿀 수 없는 업적을 세워야 했소.
무림 최고라 불리우는 마교의 수장을 죽이는 게 그것이지. 운이 따라주었는지 전쟁초부터 난 마교주와 한차례 싸워야 했소. 물론 패퇴로 끝났지만.”
“당신이 마교와 계속 싸워야 할 이유가 시아와의 비무 때문이였나요?”
묘령화의 말에 준호는 피식 웃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 놓고 말을 꺼냈다.
“그랬소. 덕분에 통곡의 검이라는 보물을 얻었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비무대회도 없소. 그 녀석에겐 자격이 사라졌소.
마교주의 첩이 되었으니 말이지. 그런데 설산의 당주인 내게 주어진 과제가 있는 것이오.
그게 바로 배신자 척결이고 녀석에게 설산문양이 남아있는 한 그 녀석도 설산을 배신한 배반자요. 그리고 난 배반자를 처단해야 하지.”
또렷한 두 눈으로 묘령화를 쳐다보며 준호가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 설령 동생이라도 말이오.”
고요한 식당안, 어둠속에 작은 등불을 두고 마주앉아있는 두 사람 사이로 잔잔한 파도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묘령화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일 모레면 난 무림맹에 가 있을것이고 모든걸 다 말할거예요. 당신을 막기위해서. 설산이 한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겠죠.
당신이 설산의 명예를 지킨답시고 동생이 없다고 거짓말하며 뒤로 몰래 그를 죽이려 한 일. 그를 이용해 마교에서 탈출했으면서 쉽게 버렸다는 사실 말이예요.
명문정파였던 설산은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안을 것이고 당신은 무림맹주에서 파면당할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일으킨 이 전쟁도 끝나겠지요.”
“그래서 내가 온거요.”
묘령화가 고개를 들어 반박하려는 순간, 새파란 빛이 눈앞에 어른거리더니 순식간에 칼날이 왼쪽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푹- 눈뜰새도 없이 왼쪽 가슴으로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칼날. 엉겹결에 당한 급습에 묘령화는 식탁밑의 단도를 겨우 붙든채로 그대로 고개를 들어 설산맹주를 쳐다보았다.
묘령화의 커진 동공에 설산맹주의 싸늘한 얼굴과 그의 손에 들려 자신의 몸을 꿰뚫은 푸르스름한 통곡의 검이 보였다.
“허...허...”
가쁜숨을 내쉬며 묘령화는 소리나지도 않는 기찬 웃음을 지었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을 찌른 통곡의 검이 묘령화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딸깍- 묘령화의 단도가 땅에 떨어졌다. 콜록거리는 입에선 피가 튀어나왔다.
“자객이 암습을 당하다니 우습지 않소.”
꺼져가는 눈으로 묘령화는 설산맹주의 입술을 보았다. 그 둥그런 입이 냉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였다. 묘령화는 숨을 잃고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준호는 단번에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묘령화는 인형처럼 탁자위로 쓰러졌다.
털썩-
하얀 손수건에 통곡의 검을 닦으면서 맹주는 싸늘한 눈으로 묘령화를 내려다 보았다. 중요한 일을 해결했는데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그는 묘령화의 자리에 놓여있는 원통형의 전보함을 발견했다. 뚜껑을 여니 한 장의 편지가 잘 말려 있었다. 묘령화가 자신의 눈앞에서 찢어버린 그 편지였다.
그걸 꺼내보려다 맹주는 그냥 뚜껑을 닫아버렸다. 개방방주가 필시 조사하러 나올것이니 시신을 잘 은폐해야 했다.
그래봤자 언젠가는 이 살해가 들키게 되겠지만 그건 마교주를 죽인 이후가 되거나 자신이 죽은 후가 될 것이였다.
몰려오는 피곤에 준호는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어둠과 쾌쾌한 피비린내 속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철썩-철썩- 등불빛은 여전히 아스라이 남아 그의 눈 아래 잔상을 남겼다. 설산맹주라는 위치는 그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묘령화가 누설했을 설산의 그 모든 진실을 떠올리면 눈앞이 깜깜해졌다. 설산을 지켜야 했다. 모든 불명예와 저속함 속에서. 설산맹주는 무림맹의 수장이자 정파무리들의 빛이였다.
빛, 맹주는 한손을 들어 등불의 불꽃을 쓸었다. 화끈한 불꽃의 감촉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빛을 일으키기 위해서 기름이 타들어가고 양초가 녹아갔다.
설산은 준호의 빛이였다. 문득 준호는 만약 준수가 자신이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의심많고 나약한 무리들을 이끌고 전쟁한다고는 안했겠지.
이 모든게 미친짓이야. 준호는 절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만약 자신이 아버지께 설화난영참을 사사받는걸 거부했다면, 그래서 정당한 비무대회로 당주가 되었다면 준호는 마교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마교에 들어간 준수와 만날 일도 없을 것이고 무림맹에, 거짓말을 덮기위한 또다른 거짓말을 지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모든 비밀이 다 밝혀지는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아...
준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깨달았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묘령화를 죽이지 않아도 됐을 거였다.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묘령화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피는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준호는 멍하니 앉아있다 불현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빨리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준호는 피를 닦은 수건을 챙기고 시신을 옮길 마대자루를 펼쳤다.
태호 근교의 자정, 구름 낀 하늘엔 달조차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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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곡〃
[무협기타]
회향곡(懷向曲)-202
미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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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2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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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준호도준호나름대로힘드네요역시ㅠㅠ초창기부터나왔던화접묘령화가죽으니까슬프네요ㅜㅜ유천이도불쌍하구
훔.. 묘령화가 죽었네요. 준수를 도와주던 중요인물이였는데 아쉬움.. 준호도 참. 설산당주가 설화난영참을 하사해줬으면 당주의 뜻인데 왜 저렇게 찔려하는지...
묘령화를 죽이다니.. 준호가 갈수록 왜저러는지ㅠㅠ 대체 은애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건지 종잡을수가 없네요..
미르희님 얼른 돌아오셔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느새 앞의 내용을 다 까먹었어요 ㅠㅠ 다시 읽어야겠어요 으항항
회향곡너무좋아요ㅜㅜ요즘재탕하고있어요!! 옛날부터 읽고있어요!!♥
와 미르희님 빨리 돌아오셔요..ㅜㅜ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