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수령 칠천이백 년이 넘는 나무가 있다. 조몬 삼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시인이자 농부이자 철학자이고 대안문화공동체 운동을 했던 야마오 산세이의 책을 읽다가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놀랍지 않은가, 단군이 나타나기 이전에,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예수가 산상에서 복음을 전하던 시대 훨씬 전에, 노자와 장자가 살았던 시대보다도 더 전에 이미 그 나무는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에게 흙, 물, 바람, 나무, 불을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것들은 있었고, ‘나’도 그리고 수령 칠천이백 년이 넘는 조몬 삼나무도 언젠가는 죽은 뒤 그 원소들로 환원할 것이다. ‘나’의 모태, ‘나’의 원소들. 죽는다는 것은 모태, 즉 원소들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려운 일인가 ?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 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을 준 적이 없다.”
지표면 위로는 거대한 산맥들이 얽힌 지층들이 있고, 땅 속 깊은 곳에는 화산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용암들이 들끓고 있다. 지구의 주인은 대형 척추동물들이 아니다. 대형 척추동물들은 무수한 동식물과 미생물, 그리고 씨앗들과 함께 이 지구 위에서 공생한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거듭한다. 물리적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가간다. 해는 떴다 지고, 버섯들과 꽃들은 피었다가 지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수한 미생물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과 죽음을 거듭하고, 사람은 생로병사의 큰 흐름 속에서 살다 죽고, 그 사이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간다. 낡은 것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고, 새로운 것은 다시 낡아진다. 그 모든 우주적 사건을 보고 겪는 게 바로 ‘나’이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 야마오 산세이는 “나를 지탱하고 있는 내 안의 ‘의식’”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나’라는 지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존재인 까닭이다.
우리 사회는 성장주의와 실용주의의 격랑으로 빠져들 전망이다. 이 정부가 계획한 대운하 건설도 그런 성장주의와 실용주의의 정치 이념에 의해 힘을 받고 강행될 태세다. 대운하는 물길과 지형·지세의 변화뿐만 아니라 식물, 동물, 기후, 농업에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고, 사람과 생태환경에 어떤 끔찍한 재앙을 가져올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조만간 강바닥은 파헤쳐지고, 없던 물길들과 곳곳에 물을 가둔 댐들이 생겨날 것이다. 대운하 건설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운명이 걸린 심각한 현실적 의제다. 그러므로 대운하 의제에 대한 무관심은 죄악이다. 한 시인은 이렇게 충고한다. “매듭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라. 매듭이 풀어질 때까지.”(게리 스나이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필독서를 고르라면 나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들겠다. 장 지오노는 프로방스 고산지대를 여행하다가 혼자 살면서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양치기 노인을 만난다. 그 실제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 게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이 소설은 생태문학의 금자탑이다. 공기와 물과 야생동물과 자연 생태계를 훼손하고 멸절하며 위기로 몰아가는 모든 태도와 조직들에 경종을 올리는 문학 표현들을 생태문학의 범주로 삼는 것은 생태문학의 입지를 지나치게 좁히는 짓이다. 생태문학은 생태를 기반으로 하고 생물다양성이라는 그물 안에서 조화를 지향하는 영혼의 문학이며, 대형 척추동물에서 작은 균류(菌類)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무릇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생명문학이다. 생태문학은 밖이 아니라 먼저 제 안의 마음과 영혼을 살펴야 한다. 삼라만상은 밖에 있지만 제 안의 영혼 속에도 존재한다. 전지구적 생명 환경이 어떻게 변화해나갈 지,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는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달려 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혼자 살며 황무지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무를 심는다. 황무지에는 사람들이 떠나 버려진 집들이 몇 채 있었는데 비바람에 삭아 지붕은 사라지고, 작은 교회는 종탑이 무너진 채 오랜 동안 방치되어 있다. 샘들은 마르고,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은 황폐한 이곳에서 바람은 마치 짐승들처럼 으르렁거릴 뿐이다. ‘나’는 우연히 부피에의 집에 머물게 되고, 그의 얘기를 듣는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부피에는 이 황무지로 돌아와 양들을 치며 고독하게 살아간다. 가족을 잃은 부피에의 슬픔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어느 날부터 부피에는 이 황무지에 아무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나무를 심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무를 심는 일은 누군가를 위한 공동선이기 때문에 고결한 노동이다. ‘나’는 부피에를 보며 “나 자신과 관계된 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미래를 상상”하는 자신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 무엇보다도 더 ‘나’를 감동하게 한 것은 부피에의 철저한 고독이다. 과도하게 감정을 방출하거나 다변에 빠지는 것은 현대인의 특징들이다. 그러나 부피에는 철저하게 자기 안의 고독에 머물며 침묵한다. 부피에의 침묵하는 모습은 마친 선 수행자의 그것과 같다. 선 수행자들은 침묵 속에서 신성(神性)과 소통한다. 부피에의 모습에 존엄성과 위의(威儀)의 빛이 감도는 것은 그가 신성과 소통한다는 암시다. 고독은 침묵 속에서 가득한 텅 빔을 만든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의 육체와 영혼은 고독이 길러내는 직관과 지혜의 광휘로 환하게 빛나는 법이다.
지구는 물과 공기와 양분과 에너지의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가 사라진 황무지는 이 순환이 끊긴 곳이다. 순환이 끊긴 곳에서는 사람도 살 수가 없다. 사람들은 황무지를 떠나고 그 황무지에는 단 세 명만이 남아 산다. “그들은 난폭했고 서로 미워했으며, 덫으로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거의 원시인에 가까운 삶이었다. 버려진 집들을 쐐기풀이 덮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희망이 없었다.” 이 대목을 나는 반생태적 문명이 가져올 끔찍한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고 읽었다. 장 지오노는 부질없는 욕망, 이기주의, 윤리가 배제된 무한경쟁이 지구를 황폐하게 할 것이고, 결국은 인류를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부피에는 음울한 영혼, 심리적 염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공허의 요새 속에 갇힌 수인도 아니다. 그는 고요하면서도 동시에 놀라울 만큼 뛰어난 활력으로 주변을 바꾸는 사람이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가 이 노인에게 놀라우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강한 심장과 부지런한 손을 가진 부피에가 나무를 심으면서 이 황무지에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마치 이미 딱딱하게 경직된 사체에 숨결을 불어넣어 심장이 뛰고 온몸에 붉은 피가 순환하는 것과 같이 죽은 땅이 살아난다. 나무들이 자라면서 새들이 돌아오고, 말랐던 샘에서 다시 물이 흐른다. 죽었던 자연이 살아나자 이곳을 등지고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온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시골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소년 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황무지는 그의 시를 쓸 수 있는 백지다. 부피에는 문명세계의 저 반대편에 있는 황무지 위에 나무를 심으며 녹색 자연의 거대한 서사시를 썼던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절망과 싸워 마침내 일군 기적에 관한 이야기, 혹은 인간의 숭고함을 증언하는 이야기다. 아울러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에게 바치는 찬양의 노래요 시다. 기적을 일으킨 것은 배운 것 없는 한 늙은 양치기다. 늙은 양치기는 녹색에 미친 선승(禪僧)이요, 공동선을 위한 제 몸을 바친 사제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심은 나무들은 마침내 숲이 되었고, 사람들이 떠나갔던 헐벗고 단조로운 황무지를 낙원으로 되돌려놓았다. 나무는 꿈이며 희망의 표상이다. 장 지오노는 누구라도 꿈을 버리지 않고 가꾸어간다면 언젠가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감동과 용기를 담은 메시지를 전한다.
【독서토론】 나무를 심은 사람『장 지오노』 김희선 07.12.4
▶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 1895.3.30-1970.10.8)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로 프로방스지방의 마노스크에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하여 16세에 학업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문학 수업을 하였다. 은행원이 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고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전쟁반대, 무절재한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 참된 행복의 추구. 자연과의 조화들이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지오노의 글에는 뚜렷한 도덕적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참된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이다. 대표작으로 언덕, 보뮈뉴가의 한사람, 지붕 위의 경기병 등이 있다.
▶ 삽화(판화): 마이클 매커디(Michael McCurdy)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삽화가 가운데 한사람,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여러 책에 삽화를 그렸다. 특히 시에라 클럽북스의 존뮤어 도서관 시리즈에 그린 판화들이 유명하다. 어린이 그림책 ‘한나의 농장’의 저자이기도 하다.
▶ 애니메이션: 프레데릭 백(Frederic Back, 1924-) 당시 프랑스 영토였고 지금은 독일영인 자알브뤼켄 출신의 캐나다가 자랑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1948년 캐나다 출신의 질렌과 결혼한 후 이주하여 캐나다 퀘백주의 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존중에 대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우아하고 간결한 스케치로 따뜻한 인간애를 표현하고자 한다.
▶ 글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53년 발표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13개 언어로 옮겨져 읽히고 있다. 장 지오노는 그가 살던 남프랑스의 고산지대를 여행하다가 한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혼자 살면서 해마다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양치기였다. 그는 홀로 묵묵히 나무를 심어 황폐한 땅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었다. 이 소설은 순박한 늙은 양치기가 지구의 표면을 바꾸어 놓은 실제 이야기를 문학 작품화 한 것이다. 그는 첫 원고를 쓴 후 약 20년 동안 이 글을 다듬고 다듬어 작품을 완성하였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다듬어진 문장과 주인공의 성스런 삶이 깊은 감동을 준다. 그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심기를 장려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말했다.
프로방스지방의 어느 고원지대를 여행하던 주인공은 폐허가 된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한 양치기 노인을 만나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이 양치기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이고, 나이는 55세였다. 그날 밤 그는 엘제아르가 도토리 세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양치기 노인은 좋은 도토리들을 골라내 황폐한 고원에 나무를 심는 작업을 했다. 그는 나무가 부족하여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너도밤나무뿐만 아니라 떡갈나무도 수천 그루를 심고 가꾸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제1차 세계대전 후, 주인공이 다시 황무지를 찾아왔을 때 처음 파종한 나무는 10년생의 키 큰 나무로 성장해 있었다. 나무들이 자라 만들어진 작은 숲과 물이 흐르게 된 시내, 그리고 나무를 갉아먹는 양 대신 벌을 키우고 있는 엘제아르를 만나게 된다. 그 뒤 해마다 그를 찾아가게 된 주인공은 풍요로운 숲과 풍부한 수자원 속에서 평화로운 마을이 된 고원지대의 변화를 보며 한 인간의 숭고한 정신과 마주치게 된다.
주인공‘엘제아르 부피에’는 참으로, 세상을 변화 시키고 아름답게 바꾸어 놓는 것은 권력이나 부나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며 침묵 속에 서두르지 않고 속도를 숭배하지 않으며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 아름다운 혼을 가진 사람들이며 굽힘 없이 선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작품의 줄거리는‘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사람의 끈질긴 노력-새로운 숲의 탄생-수자원(水資源)의 회복-희망과 행복의 부활’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운 과정에 인간이 지닌 추하고 악한 또 하나의 측면이 대조를 이룬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절제한 탐욕, 앞날을 조금도 내다보지 못하는 무지, 나무를 마구 베는 자연파괴,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살육하는 두 차례의 전쟁들이다. 이처럼 선과 악이 교차하는 가운데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철저한 고독 속에 자신을 바쳐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삶을 일군다.
▶ 애니메이션 30분짜리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로 1987년 캐나다의 CBC와 소시에트 라디오캐나다(Societe Radio-Canada)에서 제작하였다.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사람을 모델로 한 장 지오노(Jean Giono)의 원작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프랑스 출신의 캐나다 애니메이션 작가 프레데릭 백(Frederic Back)이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광택을 없앤 아세테이트 위에 색연필로 작업하였으며 5년 6개월 동안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기위해 약 2만 장의 그림과 10∼30초라는 긴 시퀀스를 사용했다. 미묘한 자연의 움직임은 인상파적인 기법으로 처리했으며, 프레데릭은 이 작품을 그리느라 한쪽 눈을 실명했다.
인생을 관조하듯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파스텔 톤으로 그린 작품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한 나무 심기는 환경의 중요성을 망각해가는 이 시대에 그것의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프레데릭은 1981년에 제작한 크랙에 이어 1987년 두 번째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1987년에는 앙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대상,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프레데릭은 영화를 만들고 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무를 심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친 자신의 노력이 헐벗은 대지와 그 위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대지가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나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큰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과 지구 오랜 세월에 걸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문학작품 이전에 지구환경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숲이 마구 베어져 심지어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강 유역들의 열대림이 해마다 16만 평방킬로미터씩 벌채되어 지구 생태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워싱턴의 민간연구 기관인 ‘세계자원 연구소’에 의하면 전 세계의 원시림이 급속히 줄고 있으면 10~20년 이내에 전체 원시림의 40%가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세계도처의 자료를 2년 동안 수집 분석한 보고서에 인류역사상 지금처럼 삼림자원의 낭비가 심한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미 인류는 그 화에 직면해 있다. 세계육지면적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숲의 남벌 및 지구온난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 기아와도 바로 연결된다. 지구파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년에 2만5천~5만종(하루36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으며 이대로 간다면 현재 살고 있는 생물종의 약 25%가 30년 이내에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으로 추산 이를 46시간으로 친다면 인류가 지구에 존재한 것은 불과 6시간 전부터이고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1분 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1분 동안에 인류는 지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온 것이다.
지구온난화, 나무심기
● 지구온난화 이산화탄소와 다른 가스들은 태양열을 대기권에 가둬둠으로써 자연스럽게 지구의 표면을 따뜻하게 데워 준다. 이런 현상은 지구를 거주하기 좋은 환경으로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지구가족(자연, 인간)이 더불어 번영하였다. 하지만 무분별한 화석연료(석유, 석탄, 천연가스등)사용과 산림파괴로 지구 대기권에 이산화탄소의 양은 급속도로 증가 되었고, 기온은 계속 오르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미 진행 중인 지구온난화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활동으로 인한 결과이며 이것은 저항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온난화에 따른 지구의 변화는 이미 재앙에 이르고 있다.
- 카테고리 4와 5인 허리케인의 수가 지난 50년 동안 거의 두 배. - 말라리아가 해발 7000피트인 콜롬비아 안데스산맥 같은 높은 고지로 번짐. - 그린랜드에서 빙하로부터 비롯된 유동 얼음 양이 지난 10년간 2배 이상 증가. - 눈에 띄게 많은 생물(동, 식물)이 지구온난화에 반응, 극지방으로 이동 중. 온난화가 이대로 지속 될 경우 예측되는 재앙 -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명피해가 25년 동안 지금의 배가 됨. - 그린랜드와 남극 빙하의 해빙으로 해수면이 20피트 이상 오르고, 이미 태평 양상의 작은 섬들이 잠기기 시작 했으며 앞으로 전 세계의 근해지역이 사라짐. - 한발과 홍수, 자연발화성 화재가 빈번함. - 2050년 여름을 기점으로 북극해의 얼음이 사라짐. - 2050년 즈음 백만이 넘는 종의 동, 식물이 멸종됨.
우리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책임당사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마구 망가뜨린 우리는 혼신을 다해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며 하다못해 일상의 작은 노력이라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 나무심기 우리나라의 국립환경연구원이 1995년 4월 밝힌 ‘나무의 환경기여 분석’에 따르면 플라타너스 한 그루는 1년 동안에 6,905그램의 이산화탄소와 8.26그램의 아황산가스, 2.2그램의 이산화질소를 흡수한다. 공원 등에 많이 심는 가중(가죽)나무는 이산화탄소 2,842그램, 아황산가스 50.5그램, 이산화질소 13.2그램을 흡수하여 종합적으로는 측정 대상 활엽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대기정화 능력을 보여 준다. 침엽수의 경우엔 일본 잣나무가 이산화탄소 44,730그램, 아황산가스 136.6그램, 이산화질소 52.4그램을 흡수하여 1위를 차지했다. 나무가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연휘발유 사용 승용차 1대당 1년 동안 아황산가스 배출량이 700그램 정도이므로 가중나무 14그루만 심는다면 승용차 한 대가 내뿜는 아황산가스를 모두 없앨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나무는 매연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오염된 땅도 정화시킨다. 카드뮴 농도가 10ppm정도로 오염된 땅(자연함유량0.14ppm)에 은행나무를 심으면 5년 안에 카드뮴 오염을 모두 정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나무는 또 산소공장이다. 숲 1헥타르(약 3천 평)는 성인 50명이 1년 동안 마실 산소를 만들어 낸다. 이 밖에 숲은 거대한 녹색 댐의 역할도 한다. 우리나라 삼림의 연간 강수 저장량은 252억 톤으로 전국 다목적 댐의 최대 저장용량을 합친 것의 2.3배에 이른다. 또한 정부가 추산한 삼림의 공익적 기능을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3조 4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 우리나라의 나무를 심은 사람 임종국 선생은 1957년부터 약 20여 년간 253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 전남 장성군 서삼면 축령산 일대의 편백나무, 삼나무 숲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다고 한다. 민병갑 선생은 2차세계대전중 미군 장교로 한국에 왔다가 57년간 천리포 야산 18만평을 홀로 일구면서 1만 여종의 나무와 400여종에 가까운 목련으로 정원을 만들어 국제 수목협회로부터 2000년에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이라는 인증패도 받았다. 이 분은 본명 "칼 페리스 밀러" 라는 이름을 버리고 1969년 한국으로 귀화하여 민병갑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일군 모든 재산권을 공익 법인화하고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그 푸른 눈이 일군 푸른 숲은 천년을 푸를 것이다"라고 써있다.
● 물자아끼기: 이 지구상에 있는 자원은 유한하며 한사람, 한세대가 많이 쓰면 다른 사람과 후손들은 물자와 에너지 부족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지구가 견딜 수 없어 병을 앓게 된다. 소위 산업 문명이라는 현대문명은 불과 1세기만에 지금까지 사용해온 자원보다 엄청나게 많은 자원을 소비하였다.
● 시간에 쫓기는 생활: 현대인들의 무절제한 생활태도로 창조세계는 회복될 틈을 갖지 못한다. 계속적 파괴로 고통 속에 신음하게 된다. 인간이 쉬지 아니하면 자연도 쉴 수 없다. 바쁜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한다.
● 가난한 이웃과의 나눔: 잠언 19:17(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히 갚아 주신다)에서처럼 부요한 자의 나눔은 일방적 혜택이라기보다 오히려 가난한 자에게서 영적 도움을 받는 것이다.
● 고기 위주의 식문화: 2억 5천만 미국사람이 먹는 소를 키우기 위해 매년 1억 3천6백만 톤의 곡물이 사료로 사용된다. 이것은 4억 인분의 식량에 필적하는 양이다. 즉 곡물을 생산하여 양식으로 하는 것이 사료를 재배하여 고기로 공급하는 것보다 약 14배 이상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육류생산을 10%만 줄여도 6천만 명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식량이 생긴다. 또 지나친 육류생산은 열대우림파괴, 토양부식, 수질오염, 온실효과들을 가져온다. 2000년대 만성적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가 6억6천만 명에 이른다. 개도국의 11억1천6백만 명이 빈곤상태이며 그 중 6억3천명이 극빈층에 해당한다.
● 일회용이 썩는 기간 종이기저귀:100년 이상, 종이컵:20년 이상, 알루미늄접시:50년 이상, 알루미늄캔:100년 이상, 스티로폴용기:500년 이상, 나무젓가락:20년 이상, 음료수병(플라스틱):100년 이상, 칫솔:100년 이상, 우유팩:200년 이상
● 재활용의 경우 1리터우유팩-30매:화장지 약5개, 1500매:높이8m 지름14cm의 나무한그루 유리병1개:100w전구 4시간 분 에너지절약, 형광등 하루 종일 쓰는 전기절약 사무실폐지, 하루 6톤회수: 나무120그루, 연간3만3천 그루 전국 슈퍼마켓 비닐봉지제작비(연간1200억원):주택2000채, 승용차3만대생산 나무젓가락 1년 동안 쓰는 양:200만 그루 나무보호 알루미늄캔: 1개당TV3시간 보는 전기절약
『나 무』 -Joyce Kilmer(1886-1918)
내 결코 보지 못 하리 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A poem lovely as a tree.
단물 흐르는 대지의 가슴에 A tree whose hungry mouth is prest 굶주린 입을 대고 있는 나무 Against the earth's sweet flowing breast
온종일 하나님을 바라보며 A tree that looks to God all day, 잎 무성한 두 팔 들어 기도하는 나무 And lifts her leafy arms to pray...
눈은 그 품 안에 쌓이고 Upon whose bosom snow has lain 비와 정답게 어울려 사는 나무. Who intimately lives with rain.
시는 나 같은 바보가 만들지만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나무를 만드는 건 오직 하나님뿐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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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생 건설일을 하다가 퇴직후 조그만한 정원이라도 가꾸려고 조경공부를 하고 있던중 우연히 카페를 알게되고
너무 좋은 글과 나무사랑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숲연구소에서 숲생태에 대하여 공부하다보니 모아놓은 자료입니다.
좋은자료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페에 들려주시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