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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1) 땅의 사람들, 땅없는 사람들 역대하 35:15-21
오늘부터 역대기상하입니다. ‘역대기(歷代記)’는 영어로 ‘Chronicles’로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시간에 흐름에 따라 어떤 시대나, 어떤 나라에 대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구약성경의 역대기상하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한 책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스케일이 어마 어마 합니다. 마치 누가복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한 족보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기록을 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그 족보가 거꾸로 올라가는데, 아브라함을 넘어 누구까지? 네, 아담까지, 그리고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우리의 구원, 예수님의 시작이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지금 이 역대기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태초의 사람 아담으로부터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기대와 축복 속에 시작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지요? 네, 지난 시간 열왕기하를 마무리하면서 확인하셨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부던히도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시고, 다시 이어오신 나라가 다시금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북왕국이 멸망당하고, 주전 587년 남왕국 마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남왕국의 마지막 다시 읽어볼까요?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왕하25:1)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왕하25:7)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왕하25:9-11)
역대기서는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 왜 하나님으로부터, 저 에덴동산의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부터, 회복으로 다시금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길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내용을 오늘 역대기상하에 담아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역대기서는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를 2년동안 했는데, 또 헌대유? 하면서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그 이후에 일어난 ‘멸망’이라고 하는 안타까운 길을 걸었던 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약속과 성취를 향한 길이 되도록, 그리고 그 이후가 저들같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요, ‘영광’이요, ‘승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더욱 이 책을 깊이 성찰해야 것입니다.
자,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번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하여 창세기 11장에 이르는 원역사(primordial history-하나님의 천지창조, 인간창조, 인간타락, 실낙원, 살인, 홍수심판, 바벨탑)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원역사에서부터 인류가 경험했던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땅으로부터의 추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홍수가 일어나 땅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되고, 또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모두가 흩어져서 살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때부터 사람들은, 죄와 악의 결과로 말미암는 땅없는, 땅잃은(landless people) 존재가 되었던 것이지요.
왜요? 하나님이 악독하고 포악하셔서가 아닙니다. 늘 인간편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선악과를 먹었고, 찾아오시고 기회를 주셨건만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만들었고, 120년 기회를 주셨건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렇게 노아의 여덟 식구로 새로이 시작된 인류였으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또다시 하나님처럼 되고자, 아니 하나님께 도달해 하나님나라를 침공하여 무너뜨리고자,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했기에 흩어짐을 당했던 것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11:4,8)
그러나 다시 하나님이 이어가시지요?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주시지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
네, 큰 민족이 되게 하실 것과 땅을 주실 것, 그리고 복을, 구원하는 힘을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에게서는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민족도 되질 못했고, 땅은 더더욱 없었으며, 이름이 창대해지는 복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변치 않는 한 가지,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땅 없음’(landless)의 현실로 그의 제 2의 인생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작디 작은 아브라함을 손에 쥐시고, 모든 일을 이루어 가셨던 것이지요.
이어지는 역사는 창세기 12장부터 여호수아서 24장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들로,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되고 성취되어감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430년의 애굽생활, 그리고 그 이후, 출애굽사건, 시내산 언약, 40년 광야생활, 가나안 정복과 땅의 분배, 그리고 세겜언약으로 이어집니다. 어떻게 되요? 물론 여러 우여곡절들이 가득했지만 결국, ‘땅 없는 백성’(landless people)이었던 야곱의 자손들이, ‘땅을 차지한 백성’(landed People)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 기간을 거치면서 땅도 없고 자식도 없고 가진 것도 없던 아브라함 부부로 시작한 이스라엘은 , 장정만 60만이 넘는 큰 민족이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었으며, 시내산 언약은 물론, 저 세겜 언약을 통해 열방을 구원하는 축복의 통로로서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때요? 여호수아를 알던 장로들마저 다 죽고 난 이후, 저 이스라엘은 다시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지요. 사사기는 그 전체가 다른 세대, 떠난 세대를 넘어 이제는 돌아선 세대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대의 특징, 한 구절로 이렇게 표현이 되었었지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하나님이 왕이셔야 하는 백성이, 왕이 없어졌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지요? 네, 모든 복이 회수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땅(민족, 복)을 차지한 백성’(landed people)이 ‘땅 없는 민족, 땅 잃는 백성’(landless)으로 추락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시작으로 사무엘상하를 거치고 열왕기상하에 이르게 되면서, 이들은 결국 땅은 물론, 민족도, 복도 다 잃어버린 백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땅 없는 민족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왜 모두가 시기하기까지 부러워하던 민족이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마주해야만 했을까요? 이 모든 것에 대한 물음, 그에 대한 답, 또 그 모든 것의 회복을 위한 길을, 오늘 이 역대기상하서가 기록하여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 땅과 민족을 지키고 확장하고 번성하게 하는 원동력, ‘복’이 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3가지를 다시 생각해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더욱 그 영토(땅)가 확장되었으며, 그 땅을 지키고 유지하는 군사력과 외교력, 그리고 다윗의 말년에 그 숫자를 확인하고 싶을 만큼 그 민족이 번성하고 강력해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한 가지, 그 나라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으나, 계속해서 복의 근원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일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열방을 향한 제사장 나라, 오늘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힘 있게 가르치고 전하는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너와 나, 모두가 공의와 정의를 배우고, 이루고, 지키고, 사랑과 긍휼을 누리고 베푸는 아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요?
네, 그 땅과 민족이 하나님의 것임을 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새 땅도 민족도 인간 왕의 소유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지계표를 옮기고 다른 이의 것을 탐내고 희년의 정신이 사라지고, 부유한 지주와 가난한 소작농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430년 노예생활을 해왔으면서도 또다시 사람들을 종삼고 학대하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이고 악한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과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과 음란하고 악한 이방문화를 탐닉하며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복의 근원’이 되는 일, 하나님 기대하고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방에 장자로 서는 일에 실패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이 되는 힘’을 잃어버린 저들은, 결국 주전 922년 솔로몬의 죽음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지는 분열을 겪었으며, 결국 그 광활하고 아름다웠던 땅이 나뉘어지고, 온 세계가 두려워하던 강력했던 나라와 민족이 오히려 원수가 되어 서로 적대시하고 피흘리며 싸우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 돌이킬 수 있었고,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주어졌으나, 어때요? 저 남유다도 북이스라엘도 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힘의 우상을 쫓아 인간의 판단과 결정을 따라 움직이다가 결국 또다시 ‘땅 없는 민족’(landless people)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앗수르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다고요? 네, 복의 근원이 되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무엇인데요? 지난 주일 저녁 최항재 목사님 오셔서, 느헤미야의 말씀 인용해 주셨었지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그런데 어때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모든 언약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의 하나님 백성됨을 거부하며 살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상호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야하는데,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인간 왕들이, 어느 새 하나님을 ‘성전화’하였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을 성전의 건물 안에, 저 사사시대에는 저 아비나답의 산속에 쳐박아 두고, 나아가 제도와 의식 속에 묶어두고 필요할 때만 찾는 수단이요, 도구요, 험하게 표현해서 짐짝 같은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아니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대접하고 있으니, 의당 백성에 대한 태도마저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왕실의 ‘노예화’합니다. 하나님의 종들로 존귀히 여기고 섬기는 것이 아닌, 왕실의 부귀와 영화를, 왕실의 뜻과 비전을 이루기 위한 왕실의 종들을 삼았던 것입니다. 늘 노역과 부역을 감당하게 하고, 늘 세금과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억압과 굴레 속에 살도록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됨을 박탈하였던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몇몇 손가락에 꼽는 왕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들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 ‘종’과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폐기해버리고, 대신 하나님도 백성도, 자기의 소유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혹은 소모품을 삼아버렸던 것입니다.
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신정정치’(theocracy)로부터 ‘제정정치’(ontocracy)로의 전환이요, 배신이요, 타락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가운데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 속에 성경은 놀라운 증언 하나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피한 심판’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당신이 지으시고, 당신이 찾아오시고, 당신께서 이어오신 이들을 향한 의지와 구원이, 다시 한번 저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시고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냥 심판하시지 않으시지요? 당신의 손으로 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앗수르와 ‘이방’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을 하시는 데, 이것이 오늘 저 이스라엘이 남유다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것이지요? 어찌하여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저 원수 이방나라 앗수르와 바벨론을 세워, 들어, 높여, 벌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먼저, 오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 그릇된 선민의식, 특권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에 도전하여 깨뜨려 주시려는 바로잡아 주시려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었던 것이지요. 또한 동시에, 저 이방나라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존재들이요, 저들 역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포하는 나라가 되어 구원해야할, 하나님께서 아끼는 존재들인 것을 또한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끈질기게 경고하고 말씀해주셨건만, 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과 그들의 그릇된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는 바뀌질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던 모든 복에서 멀어지는 사람들, 땅도 민족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도 오시기 한참 전의 이야기를 왜 성경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 오늘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처해있는 자리가 오늘 우리의 자리가 아니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어느 지점에 와 있습니까? 땅 없이 살다가, 부르심을 입어 땅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여정 중에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이미 복을 받아서 약속의 성취로 아름다운 땅을 허락받고 복에 복을 더해주시는, 온 열방이 사모하는 은총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땅을 차지하고 살곤 있는데, 금새 언제라도 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길을, 귀막고 마음문 닫고, 모든 기회와 요청을 뒤로하며, 오늘도 고집스럽게 걷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어찌하여! 왜 나에게!를 외치고 계신 것은 아니겠습니까?
역대기상하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 특별히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족보를 길게 기록하며 말씀합니다. 우리의 뿌리는 아담으로부터요, 아직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구원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또한 저 다윗과 솔로몬을, 하나님 기뻐하셨던 모델들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다시 땅을 회복하고, 민족을 회복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길이 있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대기상하는 그렇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우리의 하나님 백성됨을 회복할 것을 초청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다시한번 소망으로 희망으로 우리를 기대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역대기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은 좀 암울하셨지요. 땅을 잃어버렸다. 그 땅이 황폐하였다. 그러나 제가 읽지 않은 말씀 22-2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대하36:22-23)
건축하라, 올라가라! 다시 기회를 주시는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그래요. 우리가 회복되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 무너지고 훼파된 성전을 다시 세워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을 향해 너와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다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부터 더욱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오신 모든 분들은 지금처럼, 지금보다 더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했던 분들은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오셔서 우리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그리고 목숨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셔서,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회복을, 이전보다 더욱 큰 영광을 누리시고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역대기서를 통해 주시는 말씀들 통해서, 더욱 땅과 민족과 복을, 넓혀가시고 번성해 지시고, 더하여 누려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기를 통해 우리에게 외치고자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두 군데만 함께 읽으시고 기도하겠습니다.
역대하 7장 14-16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7:14-16)
역대하 30장 8-9절,
“그런즉 너희 조상들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와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의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들과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들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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