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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5년 12월18일(금)
장소 : 반월당-천평-도개-소보-탑리-신령-청통-영천 국도변 문화유적
반월당(08:00 출발) - (28.9km. 36분) - 다부동전승기념비(08:36 도착. 관람 15분. 08:51 출발) - (14.0km. 12분) - 의우총(09:03 도착. 관람 15분. 09:18 출발) - (22.6km. 26분) - 낙산삼층석탑(9:44 도착. 관람 20분. 10:04 출발) - (2.5km. 8분) - 의구총(10:12 도착. 관람 15분.10:27 출발) - (3.7km.7분) - 전모례가정(井)(10:34 도착. 관람30분.11:04 출발) - (11.6km.15분) - 법주사(11:19 도착. 관람 35분.11:54 출발) - (32.9km. 40분) - 탑리수정골한우(12:34 도착. 점심1시간.1:34 출발) - (2.1km.4분) - 산운마을(1:38 도착. 관람40분. 2:18 출발) - (42.4km.45분) - 거조암(3:03도착. 관람 30분. 3:33 출발) - (5.2km.9분) - 보성리암각화(3:42 도착. 관람 10분. 3:52 출발) - (12.3km. 20분) - 영천숭렬당(4:12 도착. 관람 20분. 4:32 출발) - (36.6km. 50분) - 반월당(5:22도착)
다부동 전승비(Memorial of the "BOWLING ALLEY VICTORY")
소재지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금화 125-4
한국전쟁 최초의 대전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다부동전선의 붕괴위기를 막아낸 미 제 27연대(연대장 John H. Michaelis대령)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71년 2군사령부가 당시의 격전지에 건립하였다.
볼링액리 전투로 세계전사에 기록될만큼 미군의 포탄공격은 볼링핀을 쓰러뜨릴 때처럼 정확하고 맹렬하였다.
의우총(義牛塚.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06호. 경북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104-1)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 마련되어 있는 충직한 소의 무덤이다. 지름이 2m 되는 무덤과 그 앞에 비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는 가로 6.88m, 세로 0.8m, 폭 0.2 m 크기의 화강암에 의우도(소의 충직을 그린 그림)가 놓여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문수점(지금의 인덕리)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은 3면이 산이었다. 이 마을에는 김기년이라는 사람이 암소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해 여름 밭을 갈고 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소에게 덤벼들었다. 이 때 김기년이 괭이로 호랑이를 치려 하자 이번엔 호랑이가 김기년에게 덤벼들어 소가 뿔로 호랑이를 여러 번 찔러 도망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20일 후에 상처가 깊어 김기년은 죽었는데, 죽기 전에 가족에게 말하기를 내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소의 힘이니, 내가 죽은 후 소를 팔지 말고 늙어 죽어도 그 고기를 먹지말고 반드시 내 무덤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소는 주인이 죽자 그때 부터 3일간 먹이도 먹지않고 울부짖더니 죽고 말았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관에 알려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비석은 조선 인조 8년(1630) 선산부사 조찬한이 세웠고, 숙종 11년(1685) 화공이 8폭짜리 의우도를 남겼다. 1993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정비되어 그 행적을 기리고 있다.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 (龜尾 洛山里 三層石塔.보물 제469호. 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4 )
선산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와 인연이 있는 곳으로 거대한 석탑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일대의 경작지에서 연꽃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조각과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어 이 부근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탑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 가운데돌에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3개, 즉 한 면에 5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이 설치되어 있고, 방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동그란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머리장식을 받치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3개나 새긴 것은 초기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몸돌과 지붕돌의 구성방법은 다소 시대가 떨어지는 면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식은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국보 제130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유형이다. 돌의 구성에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를 짠 수법으로 보아 석탑의 건립시기는 8세기경인 통일신라 전기로 추정된다.
의구총(義拘塚.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05호.경북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산148)
일선리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개의 무덤이다. 주인을 구하려 목숨을 바친 개의 충직함을 기리고 있는데, 충성스런 개의 행적을 그린 의구도(義狗圖) 4폭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해평면 산양리에 사는 김성발이라는 사람이 기르는 개가 있었는데, 매우 영리하여 늘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주인이 이웃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 그만 길가에서 잠이 들었다. 마침 들에 불이나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개는 놀라 멀리 떨어져 있는 낙강으로 뛰어가 꼬리를 물에 적셔 불을 끄기를 여러 번 하다가 지쳐서 그만 죽고 말았다. 술이 깬 주인이 모든 상황을 짐작하고 감동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었다.
의구도는 각 폭이 가로 6.4m, 세로 6.6m, 폭 0.24m의 크기이다. 무덤은 사람의 묘와 비슷해 보이는데 지름 2m, 높이 1.10m이다. 조선 현종 6년(1665) 선산부사인 안응창이 의열도에 의로운 개의 이야기를 쓰고, 숙종 11년(1685) 화공이 의구도 4폭을 남겼다고 한다.
1952년 도로공사로 일부 파손된 것을 1993년 말끔히 정비하였다.
전 모례가 정(傳 毛禮家 井)(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360-4 지방 문화재자료 제296호)
이 우물은 도개리 마을 중앙에 위치하는데,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인 모례(毛禮)의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례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에 불교 전파를 위해 왔으나 탄압이 심해지자 자기 집에 굴을 파고 숨겨 주었으며, 후에 아도가 왔을 때도 자기 집에 3년 동안 머슴살이하면서 머물게 했다고 전한다. 우물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사용하여 큰 독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우물의 깊이는 3m이고 둘레는 단면이 원형이며 종단면은 가운데의 배가 부르고 상하가 좁은 형태이다. 밑바닥을 두꺼운 나무판자로 깔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나무판자는 아직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 우물과 도리사(桃李寺)는 신라 불교의 전파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신라 불교의 성지이다.
군위법주사왕맷돌(軍威法住寺왕맷돌.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2호. 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3길 215 (달산리))
청화산 기슭에 자리한 법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창건 당시에는 규모가 컸던 것으로 짐작되나 소실되었고, 지금의 사찰은 소규모로 다시 세운 것이다.
절에 남아 있는 왕맷돌은 위·아랫돌 모두 지름 115㎝, 두께 15.5㎝의 크기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맷돌로 알려져 있다. 맷돌이란 정성스레 다듬은 2개의 돌을 아래·위로 포개어 놓고, 위의 돌을 회전시킴으로써 곡물을 갈게 되는 것으로, 윗돌에는 곡물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고 아랫돌에도 곡물을 잘 갈리게 하기 위한 홈이나 구멍을 두는데, 이 왕맷돌은 모두 4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찰에서 남쪽으로 200m 쯤 떨어진 곳에 반쯤 묻혀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원래는 스님들이 기거하던 요사채 가까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하게 생긴 맷돌이 카자흐공화국 알마아타박물관, 우즈베크공화국 브라하박물관 등에도 전시되고 있어, 고대부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군위 법주사오층석탑(法住寺五層石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7호.경북 군위군 소보면 달산3길 215 (달산리))
법주사내의 보광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는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위층 기단과 탑신의 4층 몸돌·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이상의 몸돌은 크기가 거의 줄지 않았다. 1·2·3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 남쪽면에는 문모양과 글씨를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깊이 패이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5층만은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의 곡선도 밋밋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얹어 놓았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일부 석재를 잃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산운마을
금성산 아래 산운마을은 영천 이씨 집성촌으로 일명‘대감마을’로도 불린다. 금성산과 비봉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에는 학록정사와 운곡당, 점우당, 소우당 등의 유형문화재가 남아 있다. 마을에 들어선 생태공원에는 자연학습원, 잔디광장, 연못, 산책로, 생태전시관, 분수, 나무다리 등이 갖춰져 있어 체험학습장으로 그만이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면 산운마을의 유래, 동∙식물의 분류별 종류, 공룡화석, 지진과 화산활동, 인류의 진화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학록정사(鶴麓精舍. 경상북도유형문화재 242호)
이 건물은 영천이씨 산운리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1531 ~ 1609) 선생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영조 연간(18세기 중엽)에 건립하였다. 선생은 명종 17년(156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사,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때는 강릉부사로서 전공을 세워 당상관에 특진되었다. 산운마을 내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에 소시문(蘇始門)이라 편액한 솟을 대문이 있고, 강당을 중심으로 뒤에는 사당인 광덕사(光德祠)를 두고 여기에 삼부자(학동 광준, 경정 민성, 자암 민환)의 불천위를 합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으로 팔작 지붕과 문틀등은 당시의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학록 정사 현판은 표암 강세황(姜世晃)의 필적이다.
의성소우당 (義城素宇堂 중요민속자료 237호)
북쪽의 금성산과 남쪽의 창이들 들판 사이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수정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정확한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조선 명종 때 영천 이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는 운곡당·소우당 등을 비롯하여 30여채가 넘는 전통가옥이 있다. 소우당은 현 소유자의 7대조인 소우 이가발(李家發)이 19세기 초에 지었다고 전하며, 안채는 1880년대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감싸며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一자형의 문간채가 있고 그 서쪽에는 외측간이, 안채의 북서쪽에는 내측간이 있다.
의성운곡당(義城雲谷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374호)
현 소유자의 5대조 이희발이 영월부사로 있을 때 세운 집이라고 한다. 1800년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데, 안채는 약 60여년 전에 일부를 다시 지었다.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마을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의성점우당 (義城漸于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375호)
영천 이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있는 집으로 1900년경에 세웠다고 전한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헛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ㄷ자형을 이루고 있고 그 맞은편에 헛간채가 있어 튼 ㅁ자형 구조를 보인다. 평면 구성이나 기법에서 독특한 점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모습을 살필 수 있어 좋은 예가 되는 집이다.
은해사거조암(銀海寺居祖庵)
거조암은 은해사의 한 암자인데 직선 거리로 4km 가량 떨어져 있고, 들어오는 입구도 다르다.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라 하여 은해사보다 앞서 창건되었다. 신라 효성왕 2년(738)에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742∼764)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은해사와 거조사가 언제 한 울타리 안에 놓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로 하고 거조사를 말사로 편입하여 거조암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잡석이 불규칙하게 축조된 기단위에 길죽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는 앞 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길쭉한 맞배지붕 집이다. 공포, 보의 단면, 솟을 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중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안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단 하나뿐인 오백성중청문이란 책자가 있다. 이 책에는 5백나한상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제작연대는 알 수 없고 영파스님이 저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해사거조암삼층석탑(銀海寺居祖庵三層石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은해사에 딸린 암자인 거조암 영산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위층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갔고, 밑면에 계단모양의 받침을 새겨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고려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황해도 서흥(瑞興)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趙)씨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전남 청량사(淸凉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 i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하며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다. 이 정과 혜의 두가지는 일심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권수 정혜결사문> 1권, <직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 3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등이 있다. 입적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
부처님이 된 도둑들 - 설화
청통면 신원리에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거조암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안에는 526분의 나한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부터 1천 수 백 년 전에 이 암자에는 도를 터득한 스님이 한 분 살고 계셨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심산에 오직 바람과 짐승과 나무들과 이야기를 하며 생활하던 스님은 평야가 그리워 하루는 인가가 있는 마을 쪽으로 하산하였다. 때는 가을이라 엷은 빛살을 닮은 오곡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소슬한 바람은 객기마저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몇 번인가 고개를 흔들며 속된 생각을 떨치려고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달래었다. 그럴수록 하늘은 여인의 얼굴처럼 맑고, 바람은 풋솜처럼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스님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침 앉은 곳이 탐스럽게 여문 조 밭이었다. 스님은 조 이삭을 어루만지며 또 염불을 외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부터 벌어지고 말았다. 정신없이 염불을 외고 일어서려는데 앉은자리에 조이삭 세 개가 꺾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느 사람 같으면 아무런 느낌도 없었겠지만, 중생을 인도하려는 성직자의 마음은 살생으로 생각하여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땀과 정성으로 온 여름을 가꾸어온 농부에게도 크게 마음이 걸렸다. 스님은 결국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속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꺾여진 조 이삭은 어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농부에게는 무엇인가 보상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님은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무릎을 치며 일어났다. 그 길로 농부를 찾아 동네로 들어갔다. 동네어귀에서 스님은 주문을 외어 커다란 황소로 변신하여 조이삭 3개 대신 농부집에서 3년 간 일을 해주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황소의 방문에 농부는 무척 당황하였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 돌려보낼 방법도 없고 해서 우선 마굿간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동네는 물론 인근 마을까지 소를 잃어버린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소를 잃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농부를 소를 열심히 길렀으며, 소 역시 주인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며 유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영리하였던지 고삐도 필요 없고 일거리도 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스스로 일하고 처리하는 것이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소문이 떠돌자 하루는 험상궂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소라며 소를 몰고 가겠다고 하였다. 천성이 착한 농부는 두 말 하지 않고 그 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느냐고 위로를 하면서 선선히 소를 내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가 움직이지 않았다. 달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였으나 장승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오랜 시간을 버티다가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역시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찾아온 사람이 500명도 넘었지만 소는 꿈쩍도 않았다. 농부는 부처님께서 내려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흘러 가을이 가까워 오자 소는 가끔씩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농부는 소에게 병이 생긴 것이라 여겨 쉬게 하였으나, 소는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안스러워진 농부가 몰래 새벽 일찍 밭에 나가면 소가 미리 알고 먼저 나와 기다릴 정도였다. 가을이 무르익어 어느덧 3년 전 조 이삭 세 개를 꺾고 스스로를 응징하기 위해 소로 변신하여 농부 집으로 들어간 며칠 전날이었다. 아침나절 밖으로 나가려는 주인을 향해, “주인님 이제 헤어져야할 날이 온 것 같습니다. 모(某)일날 제 품삯을 주시는 셈치고 큰 잔치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인근 동네까지 알려 많은 사람이 모이게 해 주십시오.”소가 낭랑한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크게 당황하여 얼떨결에 그 자리에 부복하고 부들부들 떨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짐승이 말을 하니 육신은 짐승이오 혼은 사람이라, 바꾸어 말하면 짐승도 아니오 사람도 아니라 분명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농부는 어떻게 된 연유냐고 물었고, 소는 지나온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동안 무례가 많았습니다.”농부는 정중히 사과를 하고 소의 부탁이 아니라도 헤어지게 됨을 아쉬워하며 큰 잔치를 준비하였다. 마침 잔치날이 되자 풍악이 울리고, 술잔이 돌고, 모인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때 마굿간에 누워있던 소가 일어나 짙은 안개를 내뿜는 것이었다. 안개는 삽시간에 앞사람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안을 덮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안개는 차츰 걷히자 마굿간의 소는 간 곳이 없어지고, 붉은 장삼을 걸친 스님 한 분이 점잖게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의외의 사실에 넋을 잃고 부복을 하자 마당 가운데 정좌한 스님은, “내가 소로 있을 때 자기네 소라고 이 집을 찾아온 사람은 앞으로 나오너라.”위엄어린 음성이 떨어지자 좌중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왔다. 모두가 526명이었다. “나는 실수로 조 이삭 3개를 꺾고 그 죄 값으로 소가 되어 이 집에서 3년을 일해 주었는데, 너희들은 마음에 병이 들어 남의 소를 갈취하려 하였으니 무엇으로 죄 값을 치르겠느냐? 너희들은 한결같이 산적임을 내 이미 알고 있거늘 그 죄는 헤어날 수 없느니라. 나처럼 소가 되어 죄 값을 치르겠느냐? 아니면 나를 따라가 득도하여 성불을 하겠느냐?”이에 모두가 스님을 따를 도를 깨우치겠다는 약속 하에 입산을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이 거조암인 것이다. 결국 도를 닦은 526명은 성불하여 나한상이 되어 스스로 자리를 차지하여 앉게 되니 바로 오백 나한절의 주인으로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국보 제14호.경북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67, 은해사 거조암 (신원리))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영산전이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設)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중심으로 지은 법당이다.
이 영산전은 은해사 창건보다 앞서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 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영산정 보수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원년(1375)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조암 영산전을 얼핏보면 건물 전체가 경판고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으나 건물 내부에는 석가여래, 문수, 보현,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다. 간결하고 단순한 맛배집 건물이지만 내부공간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공간감이 훌륭하다. 또 중앙칸 벽에도 널직한 살창을 두어 조명과 환기의 구실을 하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기둥의 모습을 볼 때도 기둥의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되어 배흘림(엔타시스)이 특이하고 천장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주심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산전은 사언화상이 그렸다는 영산회상도와 청화화상이 앞산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526분의 나한성중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은 현재 국보 제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천 보성리 암각화(永川甫城里巖刻畵. 시도유형문화재 제286호 (영천시). 경북 영천시 청통면 보성리 666-2)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인다. 이 암각화는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바위 한 쪽 옆면에 7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그림을 새긴 면의 넓이는 최대 길이 337㎝, 최대 폭 130㎝이다. 포항 칠전리와 고령 양전동, 영주 가흥리에 있는 암각화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문화유형으로 추정되나, 각 그림의 세부형식이 조금씩 달라, 서로 시대가 달랐거나 혹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청동기 후기나 철기시대 초기 단계의 것으로 보이며, 선사시대 경북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숭렬당(崇烈堂 보물 제521호)
숭렬당은 조선세종 15년(1433년)에 건립된 중국식(中國式) 건물로서 그 구조와 형태가 아름답고 특이하다. 이 건물은 세종 원년(1419)쓰시마 정벌과 야인토벌 등에 혁혁한 공적을 남겨 일명 복장군(福將軍)이라 불리었던 명장(名將) 위양공 이순몽(威襄公 李順蒙)장군이 평소 기거했던 집이다. 1970년에 보물로 지정이 되어 그 후 해체복원과 담장보수 및 부속시설 공사로 진행이 되어 지금은 완전히 그 원형을 회복하고 있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정면이 5칸이고 측면 3칸의 별당식으로 6칸 대청이 기본이다. 그리고 대청의 양측면은 똑같이 2칸통의 온돌이 딸리고 있다. 이 방의 출입구는 전면과 대청벽쪽에 각기 2개의 여닫이가 있고 측면으로 한 개의 외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양쪽 온돌칸 기단부(基壇部)를 따내어 아궁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 1칸씩의 누마루로 되었고 전면의 주열(柱列) 바깥쪽으로 3칸에는 긴 툇마루를 부설하였다. 큰 부재(部材)의 익공, 부분적으로 완곡 유력한 한편 건실한 기풍을 띤 초각(草刻)행공 배바닥의 간략한 초각 등 조선초기의 수법이 보이고 있다.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이순몽(李順蒙 1386~1449) : 본관은 영천(永川), 조선 태종때에 병조판서를 지냈고, 영양군(永陽君) 응(膺)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세종초에 우군절도사,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일찍이 총제로 쓰시마를 정벌할 때 동료들이 다 패했으나 장군 홀로 부하 전원을 영솔하고 돌아 왔으며, 다시 파저강(婆猪江)에서 싸워 대승하여 세종대왕의 총애가 두터워 사람들이 복장군(福將軍)이라 하였다.
숭렬당 현판(대동단과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한 김가진의 글씨)
김가진(金嘉鎭) : 대한 제국 때의 문신·독립 운동가(1846~1922). 호는 동농(東農). 주일본 판사대신(判事大臣)으로 수년간 도쿄에 주재하였으며, 귀국 후 농상공부 대신을 지냈다. 대동단(大同團) 고문을 거쳐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요인으로 활약하였다
참고 자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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