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큰스님을 뵈올 때
貞和|수원 정혜사 주지
내가 광덕 큰스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천노사(昭天老師)께서 서울에서 포교활동을 왕성하게 하실 때였다. 그 당시 큰스님은 아직 고 처사의 신분으로 계실 때였지만 환하신 얼굴과 빛나는 눈빛은 이미 어느 스님 못잖은 수행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말쑥한 승복 차림의 위의(威儀)는 사뭇 돋보였다. 나는 그분에게서 불교에 갓 발을 들여놓은 어눌한 신도로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큰스님의 용자(容姿)는 어느 때나 수특(秀特)하셨지만 젊은 날의 모습은 더욱이 단아청결하셨다. 잡다한 풍진 세상을 껑충 뛰어넘으신 듯, 고귀한 모습은 마치 학(鶴)을 연상시켰다.
큰스님의 성정(性情)은 때로는 온화한 봄볕 같은 따스함과 자상함을 보여 주셨고, 어느 때는 찬 서리가 내리듯 냉엄하고 칼날 같은 예리함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그런 큰스님에 대해서 불교를 배우는 초심자인 나는 항상 어렵고 조심스러워 먼발치에서 서성거리며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때, 나는 불교교리 공부에 의심이 일어 부득불 용기를 내어 큰스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소천노사께서 물과 불이 둘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하고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시면서,
“보살님은 참 지혜가 뛰어나십니다. 앞으로 부처님 공부 열심히 하면 큰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아마 그러한 큰스님의 격려에 힘입어 나의 입산 인연이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천노사님께 의지하여 불법을 공부하다가 출가했고, 큰스님 역시 소천노사님으로부터 많은 공부를 했을 뿐만 아니라 노사 생전에 법을 이은 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지중한 법 인연으로 인해서 비교적 나는 큰스님과 가까이 지낸 셈이다.
한편 뒷날, 큰스님께서 총무원 일을 하다가 위 절개수술을 하고 거의 회복되어 갈 무렵 맑은 공기 마시려고 오셨다면서 당시 내가 머물고 있던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백운산 백운사에 잠깐 오신 적이 있다. 큰스님을 뵙는 순간 무척 기력이 쇠잔하고 창백해 보였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너무 염려가 되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약(食補)을 준비할까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는데, 그만 무색할 정도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지금 생각만 해도 다시 얼굴이 붉어짐을 느낀다.
어느 날, 큰스님께 여쭙고 의논할 일이 있어서 나의 도반스님과 함께 큰스님 방에 조심조심 들어갔다. 이야기 끝에 둘이 함께인지라 나는 용기를 내어 개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남달리 풍부하고 섬세한 예술적인 감성을 지니신 분인데, 그 감성을 어떻게 다스리고 잠재우고 계십니까?” 하였더니 웃으면서 벽에 걸려 있는 긴 염주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내 악기이지요.”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곧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하여 보이셨다. 순간 방안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한동안 침묵이 흘러갔다.……
또 큰스님께서 부산 동래 온천장에 있는 금정사에 계실 때, 예전부터 큰스님을 잘 아는 나의 사형스님과 함께 찾아뵌 일이 있었다. 때마침 오월의 산은 온통 푸르름으로 무성했고 온갖 산새들의 노래가 끊이지 않고 태양은 싱그럽게 빛나는 날이었다. 방안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나 날씨가 좋았고 호시절이었던지라 자연스레 밖으로 나와 큰스님과 함께 뒷산을 잠깐 거닐었다.
오월의 녹향(綠香)에 젖어 있던 큰스님께서는 간간 옛 시조를 읊조리기도 하고 조사어록의 법문을 일러 주시기도 했다. 기분 좋으신 것을 눈치챈 우리가 슬쩍 노래 한 곡을 청했더니 무척 쑥스러워 하면서도 청년 시절에 잘 불렀던 노래를 나지막하게 부르셨다. 아마 우리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불렀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큰스님의 노래 솜씨에 몹시 놀랐다. 평소 큰스님의 성향은 밝고 리듬이 있었는데, 역시 밝은 노래 부르기를 무척 즐겨하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불광법회에서 노래로 많은 수행을 성취하신 것을 보고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아 혼자서 머리를 끄덕여 보기도 했다. 단정하게 회색 두루마기를 차려 입으시고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조용히 숲속을 거닐며 법문하고 노래하시는 큰스님의 그 모습, 우리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때의 광경을 다시 떠올려 보면 마치 한 폭의 신선도를 보는 것 같은 감회가 인다.
큰스님의 젊은 시절은 유난히도 훤출했다.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을 초월한 모습이었고, 또 지극히 출가수행자의 위의를 다 갖추었음에도 마냥 메마르기만 한 건조한 모습이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인간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추신 분이라고나 해야 할까. 큰스님의 노래는 그런 두 모습을 한순간에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인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스님께서 불러주신 그날의 노래는 무상(無常)을 자각한 한 구도자의 가슴에서 토해내는 숨결이라고 본다. 아니면 이상[菩薩道]의 날개를 펴고 영원을 향하여 비상을 시도하는 몸부림, 부처님께 올리는 뜨거운 공양(信心), 중생구제의 북받치는 열정, 그리고 구도의 길을 가는 위법망구의 서원이 어우러진 합주곡이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때를 조용히 회상하며 합장해 본다.
또 큰스님께서 금정사 소임을 맡고 계실 때의 일이다. 이것은 내가 큰스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절 밑 동네에 사는 여학생이 죽었는데 절에 49재를 부치고 영단에 위패를 모셨다고 했다. 그때 마침 영단을 수리 중이어서 딴 방에 병풍을 치고 위패를 옮겨 모셨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구병시식이 들어와 그 병풍을 가져다 쓰고 다시 그 자리에 원래대로 갖다 놓은 일이 있었는데, 아니 어느 날 그 여학생 어머니가 절에 올라와 큰스님께 꿈 이야기를 하는데 죽은 딸이 나타나 “엄마, 스님은 이상해. 내게 있는 병풍을 가지고 간단 말이야. 기분 나빠 죽겠어.” 했다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큰스님께 “이게 무슨 꿈입니까?”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하나도 틀리지 않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는 무릎을 치면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었다.
“그간 절에 사정이 있어서 꿈에서 여학생이 말한 것처럼 정말 내가 그렇게 했어요.”라고 하시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산에 올라가서 들꽃 산꽃을 한아름 꺾어 영단에 올리고, “정녕 네 어린 넋이 여기 와 있구나. 내 시식하는 문구의 뜻을 잘 새겨 줄 터이니 49일 동안 마음을 청정히 하고 정성스럽게 들으라.”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소녀의 위패를 모신 영단 앞에서 시식문을 새겨가면서 읽어 주셨다고 했다. 드디어 49재를 올리고 며칠이 지난 날, 여학생 어머니가 절에 와서 다시금 큰스님께 정중히 절을 올리면서,
“스님,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며칠 전 또 저의 꿈에 나타나 ‘엄마, 나는 이제 천상세계에 태어날 것이니 절대 슬퍼하지 말고 울지도 마세요.’하고는 사라졌습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큰스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이고 아직껏 잊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그 여학생과 어머니는 모녀간에 서로 염파(念波)가 잘 통한 모양이다.
어느 해인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불자 세명이 내가 있는 백운암에 올라왔다. 알고 보니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한 서울 아가씨들이었다. 나는 반가워서 얼른 큰스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큰스님께서는 요사이 경기도 남양주 보현사에 들어가셔서 서울에 나오시지 않는다고 했다. 큰스님께서 삼일 간을 법당 부처님 앞에서 꿇어 엎드려 통곡하면서 절규하셨다는 것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당시 조계종단이 내부적으로 대립하면서 분규가 심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한국불교의 앞날을 걱정하고 염려하여 큰스님께서는 뼈를 깎는 참회와 서원을 부처님께 올렸던 것 같다. 그렇게 큰스님께서는 사흘 밤을 참회의 울음으로 지새웠고, 그 후로도 내가 알기로는 수많은 세월동안 거듭되는 고뇌와 서원의 연속이었다.
큰스님께서는 그 후 일 년쯤 지났을 무렵, 드디어 적수(赤手)로 결연히 일어나 불광법회를 일으켰고, 내지 불광사 지을 땅을 구입하기 시작하여 많은 애로 속에 불광사가 탄생되어 도심 속에 감로법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그야말고 한국불교 대중화를 위하여 큰 물꼬를 트시고 목마른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 넣으셨던 것이다. 나는 큰스님을 모시고 이 위대한 불사에 동참한 많은 불광 불자님들께 항상 감사드린다. 그 수승한 인연 공덕으로 불광의 수행자들은 반드시 성불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한국불교의 현대화에 찬란한 빛을 남기고 가신 큰스님께서는 지금쯤 어느 별에서 자비의 보현보살로 화현하시어 중생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그 보현대행을 열어 가실까. 어느 국토에선가 큰스님의 대서원과 큰 신심의 우렁찬 진리행진곡이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시봉일기를 볼적마다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그리운것처럼 광덕큰스님이 참 그립다. 부처님이 내곁에 계신것처럼 광덕 큰스님 또한 처처에 계시는구나. 부처님 고맙습니다.부처님 잘하셨습니다. 부처님 미안합니다. _()()()_
일찍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_()()()_
큰스님을 지금 뵙고 있는 듯한 정화스님의 글입니다.
“스님께서는 남달리 풍부하고 섬세한 예술적인 감성을 지니신 분인데, 그 감성을 어떻게 다스리고 잠재우고 계십니까?” 하였더니 웃으면서 벽에 걸려 있는 긴 염주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내 악기이지요.”라고 하셨다. 라는 말씀을 옮깁니다.
늘 부처님 향한 마음 염주를 악기 삼아 염불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들의 생활도 다시 돌아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큰스님이 부르셨다는 노래는, 제 생각에 아마 슈베르트의 <보리수>일 것입니다. 불광의 남동화부장님 전언에 따르면, 어느 해인가 봄꽃 화사한 동산에서 불자님들이 큰스님께 노래 한 곡 청하자 큰스님이 노래를 하나 부르셨는데, 그 노래가 <보리수>였다고 합니다.
큰스님이 통곡하신 그 해 일은, 아마 봉은사 땅이 모두 팔린 그 해가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봉은사 주지를 하실 때, 주지도 모르게 종단에서 저 넓은 봉은사 땅을 몽땅 팔아버린 일이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깝고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물정 모르는 종단의 스님들은 땅 측정도 하지 않고 지적도도 몰라 봉은사 땅만 판게 아니라 봉은사 법당마저 포함된 땅을 팔아 법당마저 무너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큰스님은 그 일을 나중에서 아시고 백방으로 뛰어 봉은사 법당이 팔리는 일만은 막았다고 하지요. 당시 중앙정보부장인가 검찰총장인가 하시던 신직수씨가 큰스님의 학교 동창이었는데, 큰스님은 너무나 급해 신직수씨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 큰스님의 올곧은 성품을 잘 아시는 신직수씨께서 바로 조치를 취해 봉은사 법당이 넘어가는 일만은 막았다고 하네요.
큰스님은 봉은사가 팔리는 걸 막지 못하면 소신공양하시겠다고 부처님 앞에 서원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남양주 보현사 법당에서 사흘을 엎드려 우시던 큰스님... 언제나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임을 잊지 않고, 언제나 밝음으로 어둠을 물리쳐가시던 큰스님께서 오죽하시면 통곡을 하셨겠습니까... 가슴에 슬픔이 밀려옵니다...
저 무지(?)한 종단의 실력자들. 세간법은 하나도 모른채 산속에서 도만 닦다 오셔서 속인들에게 속아넘어기가기 일쑤인 선배도반들. 거기에 물욕까지.. 반면 대중들은 그저 극락정토왕생이나 바라고 입으로 부처님 구걸하기 바쁜 현실. 우리가 본래 무량생명이며 우리가 본래 부처님 무량공덕 덩어리임을 아무리 일러드리고 말씀드려도 꿈적도 않는 기존불교. 거기에 큰스님은 얼마나 절망하셨을까요...
그러다 마침내 모든 걸 포기하시고,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종단 일마저 뿌리치시고, 그렇게 열심이던 수행마저 버리시고, 단기필마로 우리 큰스님은 홀연히 불광을 일으키셨지요. 그 결과, 2천년 한국 불교는 잠을 깨고 오늘날 이 정도까지 온 것이라 저는 봐요. 그런데 큰스님 가시고 난 뒤, 이런 걸 아시는 분들이 몇분 아니 계세요.
입으로만 번지르르하고, 내 수행만 열심이었던 분들은 지금도 큰스님, 스승님 소리를 들으며 불자님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추앙도 받는데, 수행도 뿌리치고 부처되기도 포기하시고 오로지 우리를 위해 살아가셨던 우리 큰스님은 아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큰스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큰스님의 공부 경계도 도무지 모르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더욱 슬플 수밖에...
큰스님같은 분이 근대에 딱 한 분 더 계셨죠. 바로 흔적도 없이 화광동진하신 수월선사-공부가 얼마나 깊었으면 대중이 아무도 알지도 못할꼬. 공부가 정말 깊으신 분들은요, 우리 옆에 왔다 가셔도 왔다 가신 줄도 모른답니다. 정말로 상이 없기 때문이지요. 공부상, 수행상, 자비상도 없이 그저 중생들을 이끌어셨기에, 오신 줄도 가신 줄도 모르는 것이랍니다..._()_
고맙습니다._()()()_
광덕 큰스님, 고맙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광덕큰스님 법문. 행장은 늘 가슴아련하고 뵌적없지만 그리워집니다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오늘 광덕스님과 수월스님 다시 한번 두 분의 자취를 되새겨 봅니다...마하반야바라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어머니같으신 스님이십니다. 늘 우리들 뒤에 계시니 정작 우리는 알지도 고마운지도 모르고 지냅니다.
불현듯 가시고 나면 그림자 없어져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받을때쯤에야 알아채니 항상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체 불보살님도 또한 그러함을, 우리도 그렇게 아무 구함 없이 모두 다 섬기고 모시다 가는 그런 삶을 꿈꾸어야할까 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