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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14:
0. 발터 보나티, 『내 생애의 산들Montagne di una vita』 서론 해제
0.1 발터 보나티Walter Bonatti(1930-1981)를 읽는다. 그가 1995년에 출간한 이 책 『내 생애의 산들Montagne di una vita』(Baldine & Castoldi)은 불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우리말 등으로 번역되었다. 영국에서는 보나티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출간되었다. 우리말로 번역한 김영도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영어, 독일어, 일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했다.(한352, *한은 한글 번역본, 불은 불어 번역본, 영은 영어 번역본을 뜻한다. 그 옆 숫자는 쪽수) 앞으로 모두 21회 동안 연재하게 될 글들은 서론과 이 책을 구성하는 전체 20장의 해제이다. 이 책의 각 장을 정독하면서 불어, 영어, 우리말 번역의 차이를 들여다보고, 이를 통하여 한국 산악문학에서 번역의 중요성과 정확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불어본 『Montagne d’une vie』(Jean et Marie-Noëlle Pastureau et Adrien Pasquali, Paris, Flammarion)은 1996년에, 독어본 『Berge meines Lebens』은 2004년에 처음 번역되었다고 김영도 선생은 번역본 역자후기에 썼지만, 아마존에 나와있는 독어본은 2000년 판이다. 영어본 『The mountains of my life』(Robert Marshall, Penguin Classics)은 2001년에 출간되었다. 영어본에는 책 앞에 저자의 영어 번역에 관한 노트 그리고 보나티의 등반 연대기에 관한 번역자의 글이 들어있다. 좋은 산악문학을 알아보는 혜안을 지닌 김영도의 이 책 번역은 매우 성실하고, 단어 선택에 있어서 촘촘한 편이다.
0.2 우리말 번역본 『내 생애의 산들』(김영도 옮김, 조선매거진)은 2012년에 출간되었다. 김영도의 우리말 번역본의 저본으로 보이는 일어본 『わが 生涯の 山々』(山と渓谷社)의 출간년도는 2003년이다. 김영도는 보나티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썼다. “발터 보나티가 갔다는 소식에 한참 말을 잃었다... 그의 타계 소식에 내가 이토록 가슴 아픈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알피니스트로서의 그가 나의 알피니즘의 세계에 누구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보나티가 갔다>, 산, 2011년 10월호, 통권 504호.) 김영도가 남긴 또 다른 글은, <발터 보나티와 만나며> (산, 2010년 9월호, 통권 491호)이다. 이제 보나티도, 김영도 선생도 모두 타계했다.
일어 번역본은 이이다 토시호飯田年穗, 곤도 히도시近藤 等, 이 두 사람이 공역했고, 발행년은 2003년이다. 이이다 토시호는 1948년생으로 동경에서 태어났고, 메이지明治大学 교수를 역임했다. 프랑스 근대사를 전공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교육공로상, 일본산악회 회원, 일본산악문학회 회원이다. 곤도 히도시(1921-2015)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고, 와세다 대학의 교수였다. 교토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와세다 대학 학생 시절에는 북한의 관모봉冠帽峰을 등정하기도 했다. 모리스 에르조의 『최초의 안나푸르나 8000미터』를 번역 출간(2012)했고, 가스통 레뷰파의 많은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가스통 레뷰파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불문학 교수, 알피니스트였다. 일어 번역본은 공역한 이들의 전공을 살펴보컨대 불어본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불어본과 영어본의 차례는 약간 다르다. 불어본은 전체가 20장으로, 영어본은 여러 장을 3개의 파트로 나누어, 전체가 27장이다. 한글 번역본의 마지막 20장, 알피니즘에 대한 고찰(1989)는 영어본에서는 부록 편에 수록되어 있어 전체 장의 숫자에서는 빠져있다. 영어본의 두 번째 파트인 20장-25장은 K2등반에 관한 내용들을 따로 빼서 구성했다. 이런 책들의 구성을 보면, 김영도의 한글번역본의 순서는 불어본, 일어본과 같고, 용어, 단어 선택을 보면, 일어본의 것들과 대부분 같다.(우리말 번역본과 일어 번역본을 비교하면, 각 장의 이름, 단어선택 등이 같다. (初陣(一九四八年);グラン・カピュサン東壁初登攀(一九五一年);ラヴァレドの北壁冬季登攀(一九五三年);K2遠征のイタリア隊とともに(一九五四年);ドリュの南西柱状岩稜初登攀(一九五五年);実現しなかった時期尚早の計画(一九五五年);モン・ブランのクリスマス(一九五六年);セロ・トーレ、消え去った夢(一九五八年);ガッシャーブルム4峰の征服(一九五八年);ブルイヤールの赤い岩稜にて(一九五九年)등.
0.3 서구 산악문학에서 가장 빼어난 책을 내게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이다. 보나타와의 첫 만남은 1982년 파리에서 산 배낭으로 시작되었다. 그 즈음 그의 명성과 책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다니던 소르본 대학 아랫 길 건너편에 있는, 등산 장비점인 ‘Au Vieux campeur’ 매장에서 구입한, 밀레Millet 사에서 제작한 ‘보나티 모델Modèle Bonatti’이란 작은 에티켓이 등판에 붙은, 빨간색 60리터, ‘르 셀파Le Sherpa’ 배낭이었다. 배낭의 머리 부분에는 탈부착이 가능한, 네모난 형태의 공격형 작은 배낭이 덧붙여 있다. 밀레 사는 1964년부터 보나티 이름을 새긴 배낭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유학 시절, 이 배낭을 메고 알프스 연봉을 이리저리 다녔지만, 40년이 더 된 이 배낭은 지금도 내 서재에 온전하게 자리잡고 있고, 나이가 든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의 책을 정성을 다해서 읽으면서, 내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고 있다.
등반을 철학했던 보나티, 등반으로 삶과 세계를 철학했던 그의 탁월함은 문장과 내용에서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지금도 이탈리아 많은 학교에서 학생들은 보나티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기술적인 장비의 발전으로 등반에서 불가능성이 사라진 현대 알피니즘을 비판했고, 알피니스트로서의 용기와 진솔함 그리고 인문적 깊이가 있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고 있다. 불어본 문고판으로 먼저 읽었고, 지난 10월, 탁월한 해외 산악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산서의 가치를 일깨워 준 김영도 선생의 운명 소식을 접하고, 선생이 번역한 우리말 번역본을 구해서 다시 읽었다. 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바다출판사, 2014)에 실린 <단독 거벽등반의 일인자>(188-195)를 읽기도 했다. 이 글을 보면, 알피니스트가 되기 전, 보나티는 회계원이었다.(189) 심산은 K2 원정에 대한 뒷 이야기, 프티 드뤼 남서 필러 등반, 마터호른 동계 단독 직등 등을 예를 들면서, 보나티의 성격을 “쌈빡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195)고 썼다. 이용대의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마운틴북스, 2007)에는 ‘40년 만에 불거진 초등신화’라는 작은 제목의 글(189-191)에서 보나티와 K2 원정대 비화를 설명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와 알피니즘을 반성했고 부정했던 보나티, 등반하면서 나무로 만든 피톤을 최소한으로 사용했던 보나티의 등반기를 읽으면서 행복했고, 주위의 여러 친구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산에서 핸드폰이나 GPS에 의지하지 않고, 철저한 고독을 경험하고자 했던 보나티의 저술 중에서 가장 빼어난 이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새겨야 할 문구와 문장이 많은 터라, 이 참에 불어본, 영어본, 한글본을 곁에 놓고 비교하면서 자세하게 읽으려 했다. 보타니의 등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은 Walter Bonatti, 『Magic of Mont Blanc』 (Vitor Gollancz Ltd, London, 1995)을 참조했다.
불, 영 번역본과 우리말 번역본을 대조해 가면서 읽게 된 계기는, 얼마 전, 불어본으로 읽었던 『Ailefroide:altitude 1954』(Jean Marc Rochette, Paris, Casteman, 2018)를 우리말 번역본 『엘프와드』 (조안나 옮김, 리리 퍼블리셔, 2021)를 읽고난 후부터였다. 해외 산악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오역이 없도록 더욱더 전문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겠다. 앞으로 『내 생애의 산들』을 서론부터 각 장을 차례대로 읽어나가려고 한다. 불어본, 영어본, 한글본 등을 비교해서, 생략된 부분, 오역 등을 살펴보면서 해제의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연재하는 글에 잘못된 해석,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댓글로 알려주길 부탁드린다.
0.4 ‘알프스의 왕The King of The Alpes, 현대 알피니즘의 아버지The father of modern alpinism’ 혹은 ‘몽블랑의 시민Citizen of Mont Blanc’으로 불렸던 발터 보나티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주 베르가모 출생으로, 어린 시절은 그 아래 지역인 몬짜Monza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그의 삶과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직물을 팔던, 노동자였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보나티가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그가 읽었던 책들은 잭 런던, 멜빌, 헤밍웨이의 소설들이었다. 뭇솔리니 파쇼 정부의 독재와 강제 아래에서 성장했고, 일찍부터 먹고 살기 위하여 삼촌의 농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보나티는 어릴 적, 산이 아니라 부모님 집이 있던 토리노의 포Po 강가에서 모험을 꿈꾸곤 했다. 2차 세계대전은 15살, 어린 그를 현실 삶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옮겨놓았다. “파시즘이 끝나고,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난 폐허의 자리”(장문석, 『토리노 멜랑콜리』, 문학과지성사, 2023, 132)였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가 산을 바라보게 된 계기는 제 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포 강 전투가 있은 지 열흘 만에 나는 전쟁이 벌어졌던 복판으로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대학살이었습니다. 강과 강둑 곳곳에 불타버린 차량과 시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때 강물에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생의 근원을 찾아 산을 바라보게 되었지요. 그 순간, 산과 등반이 내 삶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보나티가 존 크레이스와 나눈 생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2010, 06.30, http://www.mountainmuseums.org, Rocky life of a mountain man에서 인용) 1945년 4월에 있었던 토리노 시를 스쳐 흐르는, 알프스가 발원지인 역사적인 포Po(강 혹은 계곡) 전투에서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은 모습을 보았던 그의 회고이다. 전쟁이 끝난 후, 보나티는 1951년 몬짜의 Forti e Liberi 스포츠 협회를 통해 체조에 입문했다. 여기서 그는 체력과 균형의 터득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철강 노동자로 일하면서 등반에 몰두했다.
작은 황소라는 뜻의 토리노는 이탈리아 북서쪽 변방으로, 20세기 초부터 자동차 피아트를 생산하던 도시였다. 보나티의 성장에 큰 영향력을 미친 토리노는 알프스 기슭의 작은 도시이지만, 몽테뉴는 이 곳을 가장 아름다운 거주지라고 불렀다. 프랑스 니스에서 토리노에 이르는 약 200킬로의 알프스 산자락 길은 걷기에 참으로 매혹적인데, 2차 세계 대전기간 동안에는 잔혹한 전쟁터이기도 했다. 안토니오 그람씨 같은 혁명적 지식인도 알프스의 만년설이 배경을 이루는 이곳에 거주했다. 프리모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곳도 토리노였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데 있었다. 그런 이유로 토리노는 반파시즘의 도시라는 이미지(장문석, 83, 94.)를 지녔다. 장문석에 따르면, ”토리노는 서사적인 장렬한 투쟁을 통해 경제 혁명과 도덕 혁명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혁명을 성취하고, 그 과정에서 위대한 두 개의 자유를 탄생시킨 혁신과 반란의 도시였다.”(장문석, 217-218.) 이탈리아 변방인 토리노와 보나티의 삶은 닮아도 많이 닮았다. 파시즘 체제 아래에 있던 이탈리아 산악계와 알피니즘에서 정의와 자유를 주장하고 실천하면서, 알피니즘과 알피니스트의 도덕적 지평을 새롭게 했던 보나티와의 대립에 관해서는 본문 5, 20장을 해제할 때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노동계급 출신의 보나티는 파시즘에 저항했던 지식인들처럼, 토리노의 작은 거인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서론인 <이 책을 쓰며> 말미에, 보나티는 국가와 부패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오늘날 병들고 있는 것은 국가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국가기관들이 타락하고, 권력과 개인이 부정적으로 결탁하는 등 혼돈 상태에 빠져있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상실하거나 손상하게 되고, 이런 실정이 사회 전체에 파고들어 그 영향으로 사회가 취약해지고 질식하게 된다.”(한11-12, 불15) 이 부분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탈리아의 정부는 부패했고, (다른 존재에게) 부패를 전염시키는 병든 환자이다. 정부의 각 기관은 신뢰와 정당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과 개인의 이익 사이에는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결탁이 있고, 여러 가지 나쁜 풍문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이 잊히거나, 뒤집히게 된다.” 그럼에도 알피니즘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상상력imagination과 이상에 대한 목마름la soif d’idéal 그리고 앎에 대한 욕구le besoin de connaissance”(불14)를 강조해야 하고, 특히 앎에 대한 절실함이 친밀한 존재를 향할 때이다.(불어본에서는, 이 세 가지 가치 가운데, 이 마지막 차례cette dernière tournée surtout vers l’être intime이라고 쓰면서 다시 받아 부연하는데, 이것이 세가지 가치를 모두 말하는지, 맨 끝에 있는 앎에 대한 절실함을 재차 강조하는 것인지 해석이 어렵다. 이 글에서는 문맥상 마지막 가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었다.) 한글, 영어 번역본에는 “환상Fantasy, 풍부한 아이디어idealism, 지적 욕망quest for self-knowledge”(한12, 영xxiv)이라고 쓰여있다.
보나티는 3가지 가치 가운데 맨 끝, (앎 즉 진실)의 절박함을 강조했다. 이는 보나티가 K2 원정에서 대원들끼리의 몰이해, 중상모략, 거짓 등을 뼈아프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친밀한 존재L’être intime라고 한 대상은 가까운 대원 즉 보나티와 같은 젊은 대원을 뜻한다. 보나티는 그 아픈 경험에 대하여, 그것은 “산이 아니라 인간 세상, 세상 사람들에게서 왔다. 나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었고, 비판을 받았으며, 공격도 당했다”(한12)라고 이어쓰고 있다. 원문에는 “산악계 사람들, 알피니스트들 때문”(불16)이었다고 썼다. 그리고 그런 아픈 사실은 “동전의 뒷면에 지나지 않았다”(한12)라고 번역한 문장은 (그가 받은, 화려한*필자의 해석) “메달의 이면le revers de la médaille”(불16)에 불과했다고 썼다. K2 원정에는 알려진 것과 숨겨진 것들이 앞뒤로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혼의 풍요로움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는데, 비례적proportionnelle이었다. 즉 대가를 많이 치르면 치를수록 알피니스트로서 자유의 풍요로움을 가질 수 있다(불16)고 썼다. 한글 번역본에는 “나의 경우 그것은 상당한 정신적 피해였다”(한13)라고 간단하게 썼다. 보나티가 고독하게 산으로 들어가고, 홀로 탐험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당시 이탈리아 정부의 부패에 대한 서술은 영어본 서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김영도의 한글본과 불어본을 저본으로 한 일본어 번역본의 순서와 내용이 일치한다.)
보나티의 삶을 파시즘, 제국주의 알피니즘 그리고 반파시즘을 연동해서 현대 알피니즘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다. 전쟁 이후, 보나티는 열 여덟살에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 북벽을 4번 연속 등반으로 산에 입문했고, 스무 살 때에는 그랑 카프생Grand Capucin과 몽블랑을 단독으로 등반했고, 가셔브룸 4봉, K2 등반 이후, 이탈리아에서 뜨거운, 유명한, 젊은 알피니스트가 되었다. 그 당시 몬짜에 있는 집으로 귀향할 때 시민들은 그를 뜨겁게 환영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모든 것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영광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 보나티는 생애 내내, 자신의 영광 때문에 어머니를 잃게 되었다는 자괴감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가장 비극적인 일로 여겼다. 군복무는 일주일에 4일 동안 등반훈련을 하는 산악부대에서 했다. 나중에는 가이드로, 알피니스트로, 사진기자로, 작가로 자연보호운동가로 자신의 삶을 다했던 그였다. 알프스, 히말라야 K2, 카라코람, 파타고니아 안데스 등을 성공적으로 등반한 이후, 유콘 강, 탄자니아, 우간다, 아마존 등을 탐험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던 보나티, 1965년, 당대를 대표했던 알피니스트였지만, 산악계 환멸을 느꼈던 그는 이 책 17장 <알피니즘이여 안녕>이란 글을 남기고 산악계를 떠나 <에포카 Epoca> 기자로, 작가로 삶을 이어나갔다.
1965년 은퇴를 선언할 즈음, 보나티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네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고, 몽블랑 가이드들은 보나티의 차 타이어에 구멍을 내어, 그의 은퇴에 반대하기도 했고, 그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1980년에는 유명한 배우였던 로사나 포데스타Rossana Podestà를 만나 결혼했고, 생이 다할 때까지 토리노 산골 마을 두비노Dubino 오래된 집에서 같이 살았다. 1984년에는 전혀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알프스 몽블랑으로 되돌아 왔다. 보나티는 2009년에 샤모니와 쿠르마이어에서 열린 황금피켈상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이 때 심사위원장은 더그 스코트Doug Scott였고, 우리나라 산악인 디자이너 임덕용도 심사위원이었다. 이탈리아 꾸르마이에르Courmayeur에는 발터 보나티 이름을 붙인, 보나티와 함께 나누었던 산에 대한 열정을 기리는, 그의 친구들이 세운 보나티 산장Rifugio bonatti이 있다.(http://www.rifugiobonatti.it/en/walter-bonatti)
로사나의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된 보나티의 삶은 행복했지만, 로사나는 보나티의 죽음, 그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있을 수 없었다. 30년동안 사실혼 관계이지만, 결혼신고를 하지 않았던 터라, 그의 아내는 병상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췌장암을 앓던, 81세의 보나티는 2011년 9월 13일, 로마의 한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시신은 화장 후, 포르토 베네레Porto Venere 묘지에 안장되었다. 보나티를 사랑했고, 함께 했던 아내 로사나도 2013년 12월 10일, 7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녀가 운명하기 전 해인 2012년에 보나티와 함께 했던 30년 동안의, 산골마을 두비노Dubino에서 보낸 ‘아름다운 동화a true fairy tale’(Vinicio Stefanello, Rossana podestà and Walter Bonatti at Monte Rite, 2004)같은 삶을 증언하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 속, 돌로 지은 집은 꽃으로 가득했고, 집 안팎에는 존경과 사랑이 넘실거렸고, 그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감독이었던 비니치오 스테파넬로Vinicio Stefanello는 2016년 제 1회 을주 세계 산악영화제에서 크리스 보닝턴의 다큐멘터리 <삶과 등반Life and climbs>(2015)으로 소개되기도 했다.(보나티에 관한 영상자료를 비롯해서 다큐멘터리는 http://www.planetmountain.com에서 볼 수 있다. 보나티의 삶과 등반에 관해서는 Roberto Serafin가 쓴, 『발터 보나티: 인간에서 신화로Walter Bonatti: de l'homme au mythe』(Glénat, Grenoble, 2013)을 참고했다.
https://www.direzioneverticale.it/it/the-legends-of-climbing-in-newsstand-first-number-w-of-walter.htm
0.5 서론: 보나티 등반 이념과 삶의 중심어
이 책은 서론 이후, 첫 장이 시작된다. 김영도는 책의 서론을 <이 책을 쓰며>로 번역했다. 불어본 머릿말préliminaires과 영어본 서론preface은 같지 않다. 불어로 쓴 머리말은 이 책의 기원, 저자 보나티가 평생을 바쳐 남긴 전제라고 풀어쓸 수 있다.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 변모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알피니스트로서의 여정이 닿은 곳에 꽂은 깃발과도 같다. 영어본은 원본의 내용 가운데 많은 것을 줄였다. 김영도의 번역은 불어본을 저본으로 삼은 일어본 내용에 가깝다. 서론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중심어를 품고 있다. 서론이라고 하지만, 글자 그대로 préliminaires는 ‘확신하면서 최우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산이라고 쓰면서 산의 진실이라고 읽어야 하는 것, 단독 등반이라고 번역되었지만 고독한 알피니즘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 산의 가치라고 줄여 말하지만, 알피니스트는 산의 미적, 역사적, 윤리적 가치를 모두 말할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 산악인, 알피니즘, 알피니스트 이전에 시민사회의 도덕성, 책임을 다하고 헌신할 수 있는 미덕을 지닌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 알피니즘이 상업화된 시대에 중심에서 스스로 떨어져 있고, 미지의 세계에 다가가는 모험의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이른바 경쟁이 아닌 ‘모험의 한계les limites du possible’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 부패하고 병든 세계에서 존경받는 알피니스트가 되기 위한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 끝으로 알피니즘이야말로 창의성의 산물이라는 것을 두루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산이 아니라 산악계를 떠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0.6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서론의 핵심은 책의 첫 문장에 있다. “산은 나에게 처음부터 자아를 실현하는 최고의 장소an ideal school, le milieu qui convenait le mieux였다.”(한6, 불7) 보나티는 등반하는 삶 내내, 자신의 감정, 창조적이고 관조적인 충동과 자극에 항상 복종했다고 썼다. 산은 가장 어려운 학교a hard school였다고도 썼다.(영xxv) 보나티는 자신의 등반이념을 “대자연과 하나 되는 고독한 알피니즘”(l’alpinisme solitaire en accord avec la grande nature, 불 7.)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김영도는 단독등반으로, 불어본에서는 l’alpinisme solitaire로, 영어본에서는 solo climbing이라고 번역했다. 산은 그에게 이웃과 세계가 무엇인지, 그 진실을 찾는 관조의 대상이었다. 김영도가 ‘외로운 나그네 길의 길동무가 되어준 침묵’(한6)이라고 번역한 부분은, 홀로 하는 등반, 모험과 이 때 경험하는 ‘고독’을 뜻한다. 고독은 보나티 등반의 두 번째 핵심 정의이다.
보나티가 알피니즘을 정의한, 그가 실현한 세 번째는 산의 가치이다. 보나티는 이를 산의 미적esthéthique, 역사적historique, 윤리적éthique 가치의 융합이라고 여러번 썼다. 산과 알피니스트를 말할 때, 이 세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보나티 알피니즘의 바탕whole basis of my concept of alpinism(영xxii), la base de l’idée(불9)를 정의하면, 이 세가지 가치의 조화이다. 그러니까 등반은 이 가치들의 결과인 셈이다. 산은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이런 가치의 실현에 따라, 그리고 산에서 한 인문적 경험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을 때, 알피니스트라는 존재가 탄생되는 것이라고 여러번 강조한다.
0.7 보나티가 이 책을 쓸 때, 그는 도덕성이 부재하는 산악계를 혐오하고 떠나 있었다. 경쟁 중심의 산악계에 대해서, ‘가능성의 한계Les limites du possible’(한11, 불14)가 사라진 산과 등반의 가치를 잃어버린 알피니스트들이 모략으로 얼토당토않게 존경받는 것에 대하여 “경악과 환멸”을 지녔다고 썼다. 그가 경험한 이탈리아 산악계는, 특히 1954년 이탈리아 원정대의 K2 등반 이후, 얼굴을 숨긴 “몰이해, 질투, 무책임, 위선, 멸시”(한10)로 가득찬 곳이었다.(이 부분은 제 5장, <이탈리아 K2 원정>에서 자세하게 언급된다.) 자신은 이러한 “근시안적이고 당파적인 산악계une coterie sournoise et myope”(한10, 불12)를 견뎌낼 수 없었다고 했다. 글을 쓰던 때에도, 자신은 “그 고약한 후유증les effets délétères에 시달리고 있다”(한10, 불12)고 까지 토로했다. 이러한 산악계la communauté des alpinistes, mountaineering community의 무리들 때문에 산이 아니라 산악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보나티가 산악계를 떠난 이유를 밝힌 내용은, 본문 (한글본, 불어본 17장, 영어본 19장, 알피니즘이여 안녕Adieu, alpinisme, A farewell to Mountaineering)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만, 영어본 서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았다. 불어본 서문은 한글 번역본에서처럼 보다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0.8 보나티는 알피니스트로서 자신에게 긍지를 가지도록 하는 용기를 강조하고, 도덕성의 부재는 이 용기를 앗아갔다고 서론에서부터 썼다. 알피니스트의 삶을 기만하는 사회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과감하게 싸웠고, 알피니스트로서 유명했던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했고, 탈출했고, 자연을 성찰하는 순수한 산악인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평생 “(알피니스트로서의) 고독(을 경험하고)과 미지의 (산에 대한) 겸손함을 지니고, (등반의) 경이로움”(한11, 불14)을 추구했다. 한글본에 있는, 보나티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고독’이란 단어는 세속적인 산악계로부터 멀어짐L’isolement, 산과의 온전한 만남을 위한 알피니스트로서의 자세를 뜻한다. 보나티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알피니스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간으로서의 탁월함L’ingéniosité, 원천ressources(한11 불14)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알피니스트의 삶을 통하여,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왔는가를 알 수 있게”(한13, 불17)되었다고 결론맺는다. 위 인터뷰에서 보나티는 마지막으로, 후회할 것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아이거에 오르고 싶었어요. 두 시간 만에 낙석이 시작되고, 3분의 1 정도 올라간 적이 있어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아시다시피 등산의 진정한 본질은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을 사랑하는 것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정상에서 100m 떨어진 곳에 멈춰서 살아서 내려갈 수 있는 겸손humility과 자기 인식self-awareness을 갖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사람, 알피니스트였다.
0.9 책의 각 장은 보나티 삶과 등반의 철학을 연대기 순으로 밝히고 있다. 각 장의 전체적 내용은, 보나티가 말한대로, 그가 경험한 알피니스트로서의 삶 가운데 5 퍼센트 정도의 현실에 해당될 뿐이다. 나머지는 스스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꿈꾸어야 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The reality is five percent of life, Man must dream to save himself.) 그에게 등반은 중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자신과의 정직한 싸움이었던 셈이다. 보나티는 “자연의 광대함에 맞서는 인간의 나약함, 그 어긋남을 극복하려 한the mismatch of human frailty against the immensity of nature that Bonatti kept on overcoming”(위 인터뷰 마지막 문구 인용) 알피니스트였다. 순수의 정점에서 올바른, 고독한, 혁명적인 등반을 추구했던 발터 보나티가 쓴 이 책을 자세하게 읽고, 각 장의 내용을 해제하려고 한다. (안치운, 2023.11.30)
첫댓글 보나티하면 1961년 프레니 중앙릉 대참사가 가장 생각나네요~~~
앞으로 펼쳐질 리뷰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