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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중보 기도와 기도의 차이점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중보자가 되어 기도해 준다고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므로 총회에서는 중보기도 용어를 사용
말도록 하고 있읍니다.
2002 년 9 월 24 일 - 27 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수원 창훈대교회에서 열려 총회 신학부에서 중보기도에 대한 사용중지 공고 와 각 노회를 통하여 사용 하지 말 것을 통지할 것을 결정했다.
2002 년 6 월 21 일자 본 교단 기관지 기독신문 17 페이지에 <중보기도사용 중지에 대한 공고> 문이 나왔다. 총회장, 신학부장명의로 발표되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대 유행이라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부전교회 원로목사님이신 한병기 총회 증경총회장께서 총회 목사 장로기도회에서 또 총신대 100 주년 기념대회에서 말씀하신 내용중
중보기도라는 용어 사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씀 하셨다.
총회 홈페이지에서 퍼온글과 함께 몇자 참고로 올린다.
이미 작년 11 월인가 기독신문에 총회 신학부에서 이 건을 다루고 2000 년 진주 총회에서 사용 부당성을 발표 했음에도 아직 사용하여 성도로 하여금 오도하고 있음을 통탄한 기사가 싫렸었다.
<통합측한국장로신문에 중보기도에 대한 칼름>
총회용어위원회 전문위원(숭실대교수)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칼름을 발표 --
<기독교 용어해설32> 2002 7/6. p9
'중보'(仲保)의 사전적 뜻 풀이는 '두 사람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 또한 '중보자'의 뜻 풀이는 '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 화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사람. 예수를 이른다'고 되어 있다.
기독교서회편 '그리스도교 대 사전'에서도 '중보자'에 관하여 '결정적인 화해자로서의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맡은 분이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이며 그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즉 유일회적인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영원한 화해가 이루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로 주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로마카토릭 교회에서는 성모마리아 역시 중보자라는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다.' 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딤전 2 장 5 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하여 예수님만이 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보자라고 할 때는 위의 뜻풀이와 동일하게 , 또한 성경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을 가리킨다. 또한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한다. 중보기도란 이처럼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기도다.
다시말하면 중보기도란 중보자(예수님)가 하는 기도란 뜻이며 중보자(예수님)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 시키는 기도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용어다. 우리는 이 중보기도의 뜻을 확실히 알고 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요즈음 교회안에서 중보기도란 말을 쓰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데 그 의미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이웃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부르면서 중보기도모임, 중보기도회 같은 이름도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에서 중보자 예수님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하는 기도가 중보기도임을 분명히 안 이상 이웃을 위해서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기도를 할자격이 없다.
다만 예수님 이름으로 그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이웃을, 때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우리가 감히 할 수도 없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써야 한단 말인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는 항용 '주기도'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중보자(예수님)가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중보기도라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우리들의 기도를 중보기도라 부르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2000 년 총회보고서 신학부 중보기도에 대한 보고서 >
** 사건개요 **
1.타인을 위한 기도가 중보기도사역으로 보고 교회안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 84회 총회에 헌의된 바가 있어 연구하게된 것이다.
2. 중보의 언어학적 배경 및 용어
1). 언어학적 배경 영어성경에는 'medi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있지 않으나 희랍어 신약성경안에는 '중보자(메시테스)'라는 용어가 6 회 사용되어 있고 이와 동일 어원을 지닌 '헤메시투세'가 하나님을 주어로 한번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양자간을 중재하며 이로써 일종의 보증을 제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중보자는 양자간을 중재함으로써 양편의 대리자가 되며 또한 양자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정의가 실행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보증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희랍어(헤메시투세)가 사용되어 있는 신약성경안에는 화해의 의미가 한층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효율성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히브리어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화해시킨 시로운 중재자라는 의미를 한층 더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적용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셨는데 이는 항상 '이질적인 것', '사이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서 이 용어는 흔히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대한 이미에 있어서 대화의 통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중보라는 용어의 용례 중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극히 모호한 용어 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종교에는 필연적으로 자연적인 것과 초 자연적인 것, 그리고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으며, 다양한 존재의 범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될 경우 여기에는 반드시 일종의 중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 중보의 개념이 종교적인 개념에 가까위 질 수록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중보의 개념은 반드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양식 사이의 분리에 대한 개념을 한층더 보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반역과 불순종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호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가 악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악한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일련의 계약들을 준수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의 모든 ㄷ도우심에도 불구하고 결코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그 스스로 방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를 인간에게 보내심으로써 강구하셔야만 했다.
중보자나 중보의 뜻은 '사이에 들다',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내려 오시는 것은 납득이 되긴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죄로 불가능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3. 중보란 무엇인가?
중보의 문자적인 개념을 살펴보면 먼저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중보하다(intersecede)는 "사이로 들어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투거나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중재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의 조정을 의미한다.
조정한다(mediate)는 (1)양 극단 사이에서 양자 모두의 친구로서 당사자들을 중재하다. (2)화해시킬 목적으로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하다.(3)화평을 조정하는 중보의 뜻으로 나타난다. 즉 조정(mediation)을 정의하고 중보가 조정을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중보의 개념은 조정하고 양자 사이에 들어가고 서로를 위해 변론하고 법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에 대해 한 쪽을 대표하지만 그러나 한쪽에 국한되지는 않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중보의 히브리어 '파가(paga)'는 '만나다'라는 뜻이다. 시 85:10 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라고 했다. 긍휼과 진리와 의와 화평의 하나님은 죄인에게 접촉될 수 없다. 죄를 멸하시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야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만 죄인인 우리가 의 자체가 되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요 14:6 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오 올 자가 없느니라"한 말씀과 딤전 2:5 에 "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였다.
이로 보건데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중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4.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딤전 2:1-2 에 보면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한 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를 섬기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기도의 네가지 종류인데 그 중 세번째 도고하는 용어는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도고(intercession prayer)는 글자 그대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이다.
<중보기도의 능력>이란 책에 보면 (35p) 중보기도에 관련된 용어로 첫째 합심을 말한다. 합심기도의 중요서에 대해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을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표현이 아니고 행 1 에 나타난 120 명의 성도들이 합심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지, 이것을 중보기도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인 것 같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의 중보기도에 보면 전체교회와 국가와 성직자와 귀족과 평민을 위해 중재하고 고인을 기리는 기도의 형태로 성공회 교회법 55조(1604년)는 설교에 앞서서 설교자들이 이 기도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기원을 보면 고대의 전례에서 설교나 복음서 낭독 이후에 등장했던 흔히 연도 형태의 도고 중보기도에 유래했다.
이것은 로마카토릭의 성 금요일 전례의 기도문과 일반 라틴 미사문의 독립된 오레무스에 잔존하여 있다
9 세기경 사제는 일요일과 축일의 미사에서 설교후에 모든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인을 추모아였다. 처음에 그것은 사제의 재량에 맡겨졌으나 점차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펴 나갔다.
오늘날 중보기도는 대학교와 재판설교와 국가 절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계에서 중보기도라 하여 많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것은 유감그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맺는 말
조직신학 기독론(p234)> 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시킬 중보의 자격은 성경에 명시되어 잇다. 중보의 자격은
1) 그는 반드시 사람이실 것이라 하였다. 그리스도가 천사의 성질을 취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성을 취해 입으신 이유는 그가 우리 인류를 구속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2) 그는 반드시 무죄하실 것이라 하였다.
3) 그는 반드시 신적 인격이실 것이다. 위의 내용은 예수그리스도를 지적한 것이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거나 개인의 기도를 부탁받아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 말 할 수 없고 다만 " 합심기도", "개인기도", "부탁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타당하다 보아야 겠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만 사용되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소위 요즈음 말하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 함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을 약화시킬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기도를 이웃을 위한 (남을 위한)기도라 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이상 85회 총회에 보고한 내용 발취한 것임 *******************************************************
중보기도란 ? 이름:조영식 (dna23key@korea.com) .홈페이지:http://korea21net.com .작성일:2001.4.22(일) 22:43 .way-board.htm (8KB, DN:14)
중보기도의 문제점
위에 기사는 2001 년 2 월 28 일에 중보기도의 문제점에 다한 나의 질의가 기독신문에 기고 되였다 <월간목회지 3 월호> 에 특집으로 기고된 내용이다
장신대교수 정장복 교수에게 질의한 문건을 월간목회에서 내가 올린 내용대로 기사화된것이다
나는 오늘 주일밤 설교중에 중보의 뜻에 대하여 설교를듣고 이글을 다시 올리는 것이므로 내가 착각을 하였는지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민중서관 국어대사전에 수록된내용
중보(仲保)(1)둘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사람
(2)<기독교>신과 사람과의 사이를 유화(宥和)매개 (媒介)하는일.
그리스도는 신과 사람과의 사이에 서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인류를 속죄(贖罪)하고 구제(救濟)하였음 중-보(重寶) 귀중한 보배. 귀중한 물건.
중보자(仲保者) 중보의 역활을 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
성경말씀 데모데전서 2 장 5 절
"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中保)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
문제점 1
여기에 기록된 한문 中保 는 仲保(국어대사전에 기록됨)의 해석 잘못이며 (원어의번역 잘못을 전문가 시인함)
문제점 2
설교시간에 인용한 로마서 15 장 30 절 에는 " 형제들아 내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로 되여있음 여기에는 중보기도의 뜻이 없음.
문제점 3
디모데전서 2 장 1 절에서 5 절 까지 1 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懇求)기도와(祈禱)도고와(禱告)감사를(感謝)를 하되"
(문제) 도고(禱告)=(원어=엔툭세이어): 해석: " 만남.모임.담화.인사.말.기도.탄원.애원.기원. 중재.조정.아무를 위한 기도" 등.
여기에 중재란 용어는
(1) 다툼질의 사이에 들어 화해(和解)를 붙임. 조정(調停)
(2) <법> 제삼자 또는 제삼국이 쟁의(爭議)를....
(3) <사> 노동쟁의 조정법.....
위에 나렬 된 국어의 내용이라면 중보기도란 우리들이 임의로 하여서는 모순이 있음을 상기 시킴 또한 중보자와 중보가 다르다고 하는 설교에는 이해가 안됨니다
예 : 중보자는 예수님이시고 중보는 사람이 할수 있은 것이라면
.국어사전에 나 디머데 전서 2 장 5 절에는 " 중보(中保)도"(성경대로임..원래는 仲保가맞음)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라 여기에서 중보를 사람이 할수있다고 한다면 위에 있는것과 같이 중보기도 하는 나도 예수님이 될수있다는 결론이 됨니다
문제점 4 도고의 관주해석 의 잘못 원어의 도고는 위에 나열된것과 같이 만남. 모임.담화.인사.말.기도.탄원.애원.기원. 중재. 조정. 아무를 위한 기도 .로 되여 있는데 왜 ("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의미함 ") 이라고 했느냐 하는 것이다
월간 목회지에 기고된 내용과 기독신문에 재게된 내용을 보면 신학자 들도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자제 할 것 ***************
<중보기도는 카톨리적, 성공회적 발상입니다 >
아래에 몇개의 토를 달았지만 잘못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더러 계신듯해서 간단한 글을 올립니다. 원래 카톨릭에서의 신부의 위치는 메디아 코트릭스(협동 중보자}입니다.
죄인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게 막고 앉아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중보자 역할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고해성사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카토릭신도들은 하나님께 직접 죄의 용서를 구하지 못하지요. 대신 신부들에게게 고해하면 '네 죄를 사하노라' 그러지요. 그러면 신자들은 죄가 사해진다고 믿도록 가르칩니다.
기도도 하나님께 직접 하지못하고 성인들의 이름으로 간접적으로합니다.
카토릭신도들은 죄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기도할 수 없다고 세뇌되고 그 결과 중간에 성인들을 통해서 하는것입니다.
물론 신부들도 중보자로서 하나님께대신 기도해주지요.
이런것을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이야말로 도둑놈들이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도록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주셨는데 이제 그들은 그 권리를 도적질한 것입니다.
성공회도 중간쯤 개혁한 교회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매우 희미합니다.
한국에서 개신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런 용어들을 남발하지요. 대천덕신부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예수원이나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같이 범하고있습니다.
그의 신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불신자 혹은 다른 사람들의 중보자쯤으로 착각하면서 중보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고,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용어입니다. 하루 속히 이런 잘못된 흐름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도고란 용어가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할때는 그 단어를 가르치고 사용하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중보기도란 용어를 생각없이 사용해운 분들은 당장 그것을 끊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바른 용어의 사용을 권합니다.
자신이 협동중보자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
<중보기도에 대한 소견 >
지금 게시판에서는 중보기도에 대한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괜찮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견해를 대하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용어 사용에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성도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고 중보기도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그래서 교계에서는 이 용어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어버린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뿐만 아니라 다른 용어에 있어서도 검토하여 교정을 해야한다.
성경에서 중보라는 용어는 죄없으신 예수님께만 적용되어진 용어이다.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는 예수님뿐이심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남을 구원키 위해서 였는데,오늘의 누가 남을 위해서 대신 죽음으로서 그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고 하여 예수님과 동등되게 메시야적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은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구원이지만 우리의 대신 죽음은 한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일뿐이다.그렇기때문에 메시야적 죽음이라고 말할수가 없듯이,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주님께만 적용되는 중보라는 용어를 붙여서 중보기도라고 표현함은
주님의 중보사역을 약화시키든지 성도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어서 교단에서는 이 용어 사용을 중지시켰다고 여겨진다.
성경 딤전2:1에 도고라는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고집함은 어떤 연유에서이겠는가?
오늘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준비찬송" 등의 용어도 너무 생각없이 사용되어지고 있지 않는가?
나는 나의 목회 현장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처음에는 습관적으로 그런 용어들이 튀어나왔었는데 조심하였더니 고쳐졌다.
중보기도에 대해 조영식님이나 여러분들이 올바른 해석을 나타내셨는데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성령님의 도움으로 사정을 아뢰는 것인데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경우를 목격하기 쉽지않은가?
이런것은 결국 우리가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별생각없이 사용하여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고치기가 어색한 것인줄 안다."그런 용어를 사용하여 피해를 본것이 있는가?"라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피해가 있기때문에 사용치 않아야 하는가? 올바르지 않으면 고치고 사용을 중단할수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용어 사용이 드러난 피해가 별로 없을지 몰라도 개인 신앙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만 살펴서는 안된다.그만큼 이 용어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
중보기도대님께서 2001-07-06 오후 1:28:34에 말씀하시길....
중보 기도와 기도의 차이점
모든 기도가 중보 기도는 아니다. 그러나 중보 기도는 모든 기도를 값지게 한다. 중보와 기도가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보란 단지 다른 사람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리라 여긴다. 하지만 디모데전서 2장 1절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바울이 중보와 기도에 분명한 차이를 두었다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한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중보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소위 일반적인 기도 이상의 무엇인가를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틈(Gap) 사이에 서기 위해.
라틴어에서 중보(영어로는 intercession)의 단어는 inter cedere이다. 이 단어의 뜻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투고 있는 두사람 사이를 의미하는 "갈라진 틈사이에 서다"란 말이다. 중보는 다른 사람 혹은 민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서는 것이다. 이 예로써 마르틴 루터는 그의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고 이로 인해 기소된 후 다음과 같은 고뇌에 찬 말을 하였다. "내가 여기에 서있는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 자리를 지키며 결과를 볼때까지 이를 위해 맞서기로 각오하였다. 중보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우리가 응답을 받을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예언서를 통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22:30) 성경의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서도 단지 한 사람의 중보자를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가 시편 106편 23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로 인해 중보자로 하나님 앞에선 모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중보는 삶이다.
중보 기도는 기도의 형태를 넘어서 삶 자체이다. 중보의 기도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계 열방과 민족을 보며 중보의 삶을 사는 것이다. 중보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드려지는 일반적인 기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 가서 중보 기도를 위해 한시간을 드렸다"라고 하기보다는 한시간 기도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을때까지 지속적으로 드려지는 전시간적 과제를 선택했음을 말하고 있다. 중보의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삶을 배우자. 예수님의 삶 자체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중보자로 선 삶이었다. 중보자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며 기도의 요청에 대한 계속적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한 항상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보일때까지 그의 마음과 의식속에 항상 기도의 목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중보는 일체화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기도할때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우리자신의 안전지대를 설정해 놓고 그 한 모퉁이에 앉아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일들을 아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면하신다. 그러나 중보자에게는 그가 기도하고 있는 대상과의 깊은 일체화를 요구하고 있다. 느헤미야서에서 다음과 같이 예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느1:4-6). 느헤미야는 그가 기도한 이들과의 완전한 일체감과 매우 견고한 방법으로 그의 어깨에 고통을 지웠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죄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죄요 우리의 문제가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는 그가 기도했던 이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의 기도는 어떤한 거리감도 없었으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기도에 대한 필요와 기도의 목표가 그를 따라다녔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선 것이었다.
중보는 희생이다.
중보가 희생과 전시간적인 개입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게되면서 우리는 중보가 바로 희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에서는 우리의 시간을 전적으로 희생하지 않지만 우리의 자신을 무엇인가와 혹은 누군가와 동일화할 때에는 우리의 매일의 스케쥴, 감정적인 개입, 우리 자신의 의지 등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중보자의 모델이다. 그는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애에서 3년간의 공생애 기간을 보내셨으며 그후 2000여년간을 중보자가 되셨다는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줄때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희생하였다. 우리의 희생이 결코 이와 동일한 방법일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없으며 죄를 대신 질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기도의 요청을 위해 드리며 우리의 시간과 자원들을 희생하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요구하는지 보실 것이다.
중보는 수치를 무릅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죄 뿐인 우리를 위해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예수님도 이것을 감당하기 힘드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것이 중보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참된 중보자는 이러한 수치스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이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 위해 수치심을 안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를 하였다. 의인 50명이 10명 까지 숫자가 바꿀때 마다 실망과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 비참하고 처절한 중보기도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롯을 구원하는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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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직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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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는 그리스도의 온몸을 의미하는 직무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관련하여 믿을수 없는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다. 소위 연합된 기도에 약속된 능력을 생각해 보라. "...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그러나 단지 회중의 소수만이 자신들을 중보에 참여시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축복의 일부를 놓치고 말것이다. 중보는 그리스도의 온몸에 있어서 한 지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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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는 하나님의 뜻을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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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하나님이 보여주시도록 열린 마음으로 그분께 물어야 하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앞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가 도무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주의깊게 듣는것은 중보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활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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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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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소망이 있어야 하며, 이 소망이 결단으로 이어지고, 다시 훈련을 통해서 한 사람의 중보자가 되어 지는 것이다. 중보 기도는 하나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배우기가 결코 쉽지는 않으나 가능함을 의미한다. 중보는 놀라울 정도로 도전을 주는 직무이다. 기도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많은 모임들은 단지 몇 분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하나님 앞에 사실은 위로와 휴식을 갖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도 모임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중보일 필요는 없다.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도 지속적인 훈련의 시간이 요구된다. 중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더 높이고 우리 자신을 더욱 기도에 헌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