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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제17강 대승의 공사상 입장
https://youtu.be/u2-whflGIa4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17강 대승의 空사상 입장에서 본 소승교설의 비판
오늘은 대승의 공사상 입장에서 소승의 교설을 봤을 때
소승의 가르침에 무엇이 문제인가 비판하는 내용이다.
즉 부처님 가르침에 대승 소승이 따로 있다기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소승 수행자들에게
대승보살인 관자재보살이 잘못 이해한 부분에 대해 비판하면서 바로잡고 있다.
소승의 가르침은 나와 이 세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5온설 12처설 18계설이 있다 .
첫번째 5온설에 대해 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의 일부다.
이 무한한 세계 가운데 나란 티끌 같이 작은 존재다.
동시에 이 세계란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세계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계를 각각 달리 그리고 있다.
이 세계는 똑 같은 것 같은데 사람마다 이 세계에 대해 달리 그리고 있다.
옛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와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계는 다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아는 만큼의 세계 또는
자기 식대로 알고 있는 세계 이것이 각자가 알고 있는 세계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내 속에 있다. 나는 이 세계의 일부고
이 세계는 다시 나의 일부다. 정말 묘한 도리다.
세상은 한 없이 많은 티끌로 구성돼 있다.
티끌은 이 세계의 일부다. 그러나 한 티끌 가운데 이 세계가 또 다 포함돼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
이 세계는 내 마음 가운데 있다. 이 2가지를 가지고 일체라 한다.
결국 나와 이 세계를 통 털어 일체라 하는 것은 첫째 물질세계다.
이 세계는 색, 물질세계로 구성돼 있다. 그 물질로 이뤄져 있는 것이 나의 육체다.
이것이 색이다. 그러나 이 세계라 하는 것은 곧 내가 알고 있는 세계,
내 마음 가운데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러한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돼 있다.
물질을 대표한 것이 육신이라면 육신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이 물질세계를 육신의 세계라 하고, 정신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세계를 담고 있는 그 정신세계,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은 다시 4가지로 나눈다.
첫째 우리가 이 세계를 그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계를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런 것으로 나에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5감, 5가지 감각기관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작용 즉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작용이 受, 감수작용이다.
그 다음 이걸 받아들여서 그 정보를 저장한다.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면 쌓이게 된다.
저장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다시 기억해낸다.
저장했던 것을 꺼내 쓴다. 그 기억해낸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생각해낸다.
이것이 想으로 생각, 표상작용이다.
그 다음 밖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저장해서 살려내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정보를 생성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작용의 行, 의지작용이다. 뭐를 해야지 하는 것이다.
충동에 의해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또 간단히 지혜롭게 해나가는 것도 있다.
이것이 의지작용이다.
대부분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이런 것이 다 행이다.
그 다음 이런 결과로 소위 정보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정보가 분별돼 있는 그릇이다.
識 요별작용이다.
식은 일종의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정신작용의 가장 큰 토대다.
이 프로그램이 어떠냐에 따라서 똑 같은 정보가 들어와도 똑 같은 기억을 해도 달라진다 .
그래서 외부로부터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감수작용이지만 기존에 깔려있는 식,
업식 이 프로그램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반응을 하면서 쾌, 불쾌가 일어난다.
몸에도 감각이 일어나고 마음에도 Feeling이 일어난다. 이것이 수다. 수는 바깥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된다. 그러나 기본 토대 이 업식이 없다면 모든 사람은 똑 같은 정보가 들어오면 똑 같이 반응해야 하는데 반응이 다 달라진다. 그것은 각자 자신의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형성 되어진 토대가 있다.
이 형성된 토대가 있다 해도 외부의 정보가 다 달리 들어오면 반응이 달라진다.
토대가 없다면 외부의 동일한 정보가 들어오면 동일하게 반응할 것이고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달리 반응할 것이다.
그러나 토대가 있다면 토대가 있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달라지면 반응을 달리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동일한 곳에 가서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듣고 동일한 것을 냄새 맡고 동일한 것을 맛보고 동일한 것을 감촉해도 느낌이 다르다.
왜 느낌이 다를까? 이미 거기 형성돼 있는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동일한 업식을 갖고 있는데 이곳을 갔을 때와 저곳을 갔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왜 그럴까 ?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도 受고 그에 반응하는 느낌 몸의 감각 마음의 Feeling도 受다.
또 기본 토대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가 들어와 일으키는 생각도 다 다르다.
또 그 느낌에 반응하는 맹목적인 충동인 행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 어떤 정보가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에서 반응하는 기본 토대인 업식이 어떠냐 도 중요하다.
그래서 색하고 그 다음 뭐가 와야 하나 식이 와야 한다. 색식수상행 이렇게 순서를 둘수 있다.
그러나 왜 색수상행식 이라 했나? 하면 이렇게 반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의지를 불러 일으켜 행동을 한 그렇게 생산돼 저축된 곳이 식이다.
그래서 업식이 조금 바뀌게 된다. 과보가 그 행위의 결과물로 다시 쌓여서 프로그램이 조금 변화가 된다. 요즘 말로 하면 프로그램이 조금 업그레이드 된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는 5온이다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5온 밖에서 따로 세계를 찾아서는 안 되고
또 나라고 하는 것도 5온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어떤 독립된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구성돼 있고 계속 변한다.
밖의 경계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우주도 변한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육신은 생로병사하고 마음은 생주이멸한다.
항상 일어나고 머무르고 생멸을 거듭한다.
그러면 마음의 토대인 識은 어떤가?
이것도 사실은 형성되어지고 이렇게 머물다 공하고 업식이 앞으로 바뀌어 나간다.
담배 피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업식이 있는 사람은 밖에 담배가 있고
눈으로 보면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그러면 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그러면 피우게 된다.
그러면 다시 그 결과물로 답배 습관이 더 형성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이 기본은
담배 피우던 이 습관이 내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반응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식이란 것도 항상 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불법에서 말하는 열반, 지고의 행복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 다른 것이다.
우리는 욕구로 바라는 바가 이뤄지면 기분이 좋다. 그 기분 좋은 것이 행복이다.
그러나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는 그분이 싹 가라앉고 나쁘다. 이게 불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불행은 싫고 행복은 원한다. 불쾌는 버리고 쾌만 얻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면 마음이 들뜬다.
기분이 좋으면 마음이 들뜬다.
그런데 바라는 바에 근거해서 이뤄지고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이 바라는 바
자체가 사라져버려서 바라는 바에 지는 내 마음이 구애를 받지 않을 때
그때는 쾌도 없고 불쾌도 없고 행도 없고 불행도 없다 .
내 욕구에도 경계에도 구애받지 않는 상태 그때는 마음이 고요하다.
마음이 평정된 상태다. 그래서 적정이다. 열반적정. 그게 지고한 행복이다.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이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는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행복을 우리가 겪고 있는 행복과 동일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복을 구한다. 불교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욕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으로 해서 지고의 행복인 열반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욕구가 충족이 돼 얻는 기쁨과 혼돈하기 때문에 부처님 내 바라는 대로 좀 해주세요 하고
그것이 이뤄지는 곳이 극락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복화 된다.
기복적인 것이 좋다 나쁘다 그 얘기가 아니다. 불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스님도 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때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다 든다.
이것은 중생의 세계다.
이것은 늘 고와 락 행과 불행이 되풀이 되는 윤회의 세계다.
그러면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상황에서 살든 내가 거기에 마음을 구애 받지 않는다.
그래서 행도 불행도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쾌와 불쾌가 함께 사라져버린다.
그것이 열반의 세계다.
열반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 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난 세계다.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는 그런 행복이 아니다.
이것이 열반인데 열반에 대한 이해를 우리 식대로 얘기한다.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의 사고의 긍정 사물을 보는 세계관 철학 여기에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 그것만의 그것이라 하는 그 어떤 요소 이걸 기초로 두고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자신의 업식 자신의 세계를 보는 눈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와야 하는데
안경을 끼고 불법을 본다. 그렇게 해서 요소설을 받았다. 그러니 이것은 잘못됐다.
그렇게 첫번째 5온설에 대해서 앞에 ‘무’ 자를 붙여서 법에도 실체가 없음을 다시 깨우치고 있다.
두번째 소승교설의 중요한 것 중 하나가 12처설이다.
일체. 이 세계라 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아는 세계다. 내가 아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
이것은 눈이 있고 밖에 모양과 빛이 있어 눈과 빛이 만나 봄으로 해서 아는 것이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어 들어서 안다. 코가 있고 냄새가 있어 맡아서 안다.
혀가 있고 맛이 있어 맛보고 안다. 몸이 있고 감촉이 있어 아는 것이다. 머리,
의식이 있고 알음알이가 있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바깥 세계를 사실은 내 몸의 감각기관이 중요하다.
이걸 근본 뿌리다 해서 6근이라 한다.
6근 (6가지 감각기관). 인식기관 : 안이비설신의.
그러면 여기 대응되는 인식대상 객관세계는 6경이라 한다.
6가지 경계 : 색성향미촉법이다.
이때의 색은 물질이나 육신의 뜻이 아니다. 이때는 모양과 빛깔이다.
6가지 경계 6경과 6가지 인식기관인 6근이 만나서 결국은 우리들의 앎이 우리가 아는 세계가 형성된다. 세상이란 별 것 아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여러분이 보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고 감촉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는
그런 세계는 없다. 여러분이 뭐라 해도 다 그것을 눈으로 봤거나 귀로 들었거나 코로 냄새 맡았거나
혀로 맛을 봤거나 손이나 몸으로 감촉이 됐거나 아니면 머리로 생각을 했다.
그 밖에 따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일체라 하는 것은 이 12가지다. 그래서 12처다.
5온설과 12처설 이게 핵심이다.
이 5온설은 주로 마음작용으로 정신에 중점을 두었지만
12설은 일종의 유물론이다. 12처설 대로 하면 나라고 하는 건 별 것 아니다.
내가 아는 세계란 바깥 세계가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들어오고 머리가 알음알이 하는 그것이다. 이것만 갖고 설명하면 동일한 환경에 가면 동일한 세계가 형성된다 이렇게 얘기하겠지만 동일한 환경에서 사람을 키우게 되면 동일한 인격이 형성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낳자 마자.
왜 본 것이 똑 같고 들은 것이 똑 같고 냄새 맡은 것이 똑 같고 맛본 게 똑 같고 감촉한 게 똑 같고
그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유물론적 변증법과 비슷하다.
우리 의식은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의식을 자꾸 바꾸려 노력해도
바깥 세계가 바뀌어지지 않으면 늘 거기에 영향 받기 때문에 안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사회가 바뀌어버리면 인간의 의식은 따라 바뀐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 노력보다는 이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어버리면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다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
거기에 대해 종교인들은 세상 문제 갖고 얘기하지만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말한다. 너만 잘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로 여기 반해 사회주의는 사회문제로 본다. 그래서 대립된다.
한쪽은 유신론 무신론 하고 대립한다.
기독교 쪽은 우리는 유신론이라 하고 너희는 무신론이라 한다.
사회주의 쪽은 자신들을 유물론이라 하고 종교는 관념론이라 한다.
이렇게 갈등이 생긴다.
그러니까 불법은 그렇게 둘로 나누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을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하는 요소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자기 업식이 어떠냐에 따라서
똑 같은 환경에 대해서도 달리 반응한다 이런 요소도 있다. 이 2가지 요소가 다 있다.
그래서 원래 설명할 때도 인연과보라 한다.
인 직접적인 원인, 연 간접적인 원인.
그러니까 원인에 의해 결과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작동하는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성냥을 그어 버리면 화재의 직접적 원인이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주위에 인화물질이 있었느냐?
시멘트 바닥이냐에 따라서....
내가 원인을 제공해도 그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진다.
또 똑 같은 조건이지만 원인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똑같은 인화물질이 있는 환경이었지만 그냥 불을 버리지 않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성냥불을 버리게 되면 불이 일어난다.
우리들의 존재도 나로부터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있고
세계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 이 양자가 동시에 작용한다.
이 세상의 철학은 그 중 한 개를 가지고 판단한다.
그래서 인간성에 대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악하다 개입한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요소도 있고 악한 요소도 있다 말하지 않는다.
이는 불교를 좀 덜 이해한 것이다. 둘 다 동시에 다 본다는 것은 맞는데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본질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악하다고 말한다.
선과 악은 우리들의 의식에서 형성된다. 이렇게 사물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12처설은 환경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측면을 설명한 것이다.
반대로 5온설은 우리들의 내면 세계에 더 초점이 맞추어 설명된 것이다.
識이 느낌과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준다.
그러니까 똑 같은 환경에서도 달리 반응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둘을 보완해서 다시 설명한 것이 18계설이다.
5온설과 12처설을 보완한 것이다.
우리의 근본인 감각기관 인식기관이 6가지 있다.
6가지 인식기관 육근 + 6가지 인식대상 육경 + 형성되어진 업식의 인식활동 육식.
이 2가지만 갖고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는 형성되어진 업식이 있다.
그래서 이 12처설만 갖고 설명하면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것을 보면 동일하게 느껴야 하는데
안 그렇다. 왜 그러냐? 보는 놈이 있다 .
보는 놈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이렇게 각자에게 형성되어진 업식이 있다.
보는 데 작용하면 안식이라 하고 듣는데 작용하면 이식이라 하고 이렇게 6가지가 있다.
이렇게 18가지로 설명하면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게 12처설이다.
그래서 이제는 보는 식 안식 듣는 식 이식 냄새 맡는 비식 맛보는 설식 감촉하는 신식 생각하는 의식
그래서 이 5가지는 주로 몸둥이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전 5식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이 있다 없다 하는 6번째 識인 의식이 제 6식이다.
그래서 6가지 식이다. 식에는 6가지가 있다. 육식이라 한다. 6가지라 할 때 육식이다.
그런데 제육식 앞에 제 자가 붙는다. 제육식이란 것은 6번째 식이다 이런 얘기다.
6번째 식이다 할 때 그것은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식 =제육식. 6번째 식이다.
그런데 식에는 이렇게 ‘의식’만 있느냐 ? 6가지 식만 있느냐? 아니다.
식에는 7번째 식 8번째 식이 있다.
그러니까 이 6번째까지 의식을 표면의식 드러난 의식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잠재된 식이 있다. 그게 제 7식이 있고 제 8식이 있다.
제7식을 말라식. 제8식을 아뢰야식이라 한다.
그러니까 보고 듣고 작용하는 이런 6가지 식 말고 숨겨진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이 있다.
잠재의식, 무의식이라고 만 말하지 않고 7식과 8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잠재의식을 서양철학에서는 18C 들어와서 알았다.
프로이드가 꿈은 해몽이다.
프로이드가 19C 에 와서 잠재의식 무의식을 얘기해서 알게 됐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의식 밖에 따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의식에 영향을 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을 믿었다. 서양에서 신의 소리라 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내가 우주를 운영한다 그런 말 하신 적이 없다.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 그런 얘기한 적이 없다.
우주는 이런 법칙에 의해서 유지된다. 사람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생노병사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정신 작용에 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이 마음 작용이란 것은 Karma라
그래서 너는 이렇게 살아라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신에 의해 태어나 사주 팔자에 의해,
전생의 네가 한 행동에 의해서 사는 것이 다 숙명론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업이라 하는 것은 형성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되어진다. 즉 팔자는 바꿀 수 있다.
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이 괴로우라고 누가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
내가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지금 이렇게 보듯이 5온설 12처설 18 계설
모두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는 원리를 앎으로 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수행으로 나가기 위한 전 단계다. 이 자체는 수행법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해야 이를 기초해서 수행해 나가는데
사성제, 8정도 수행 같은 것을 이런 인간에 대한 것을 기초로 해서 나가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것들을 잘못 이해해
마치 12처설을 12요소설처럼 이해하고 있다.
이 세계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라 하는 12개의 요소로 구성돼 있고
그것들의 관계로 세계가 이뤄진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각각의 불변의 요소로 이해해버리면 이런 요소설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앞에 ‘無’ 자가 붙었다. 무안이비설신의 그 앞에 다 ‘空中’이라 붙었다.
공의 세계에서, 본질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볼 때...
안이라 할 것도 식이라 할 것도 없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 12처설을 잘못 이해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면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18계설에 대한 지적이다.
18계란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이다.
그게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기 때문에 ‘界’ 자가 붙었다.
그러면 안계 이계 비계 이렇게 다 계가 붙었다.
안이비설신의 첫번째 眼界 하고 그 다음 색성향미촉법은 다 생략이 되고
안식부터 의식까지 다 생략되었다.
그러니까 無眼界 乃至 하면서 16개가 생략됐다. 그리고 無意識界 한다.
그러니까 眼界도 실체가 없고 그리고 다 생략하고
마지막에 意識界도 실체가 없다 말한다.
이렇게 해서 5온 12처 18계에 대한 아견과 상견의 관점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부분을 바로 대승보살의 깨달음의 입장에서 다시 교정을 했다.
그래서 앞에 無가 붙었다.
소승교설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일부 수행자들이 잘못 이해했다.
잘못 이해한 사람을 소승이라 이름 붙였다. 잘못 이해했다.
그래서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