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리는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교우촌이다. 성 다블뤼주교가 거처하던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이며, 또한 성 손자선 토마스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본향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로 구성된다. 1836년 1월 13일(양)에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줌으로써 신리(거더리)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신리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 ~1866, 안토니오)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당시 전라도(현 충청도) 강경 나바위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의 사목 기간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러 지내던 장소이며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그리고 병오박해(1846년)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과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하여 초기의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신리는 손자선 토마스( ?~1866) 성인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못자리이기도 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樂韶, 1803~1866,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이들 5명은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다. 성 손자선 토마스도 체포되어 1866년 순교하였다. 그는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성인으로 유명하다.
▒ 다블뤼 주교 저서 및 번역서
○ 다블뤼 비망기 :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자들 시복청원을 위해 1856년부터 조선 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 자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다블뤼 주교는 이를 1858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는데 이것이 《다블뤼 비망기》다. 모두 5권이며 마지막 권은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이다. 이는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하는데 중요한 기본 자료가 됐다. 현재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전사본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소장돼 있다. 이를 복사한 것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다.
○ 신명초행(神命初行) : 상하권으로 이뤄진 묵상 서적
○ 영세대의(領洗大義) : 세례 준비서
○ 회죄직지(悔罪直指) : 죄를 성찰하고 통회하도록 권고하는 일종의 묵상서
○ 성찰기략(省察記略) : 올바르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방법과 내용을 담음
○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 (羅韓辭典, 라틴말 사전)
○ 천당직로(天堂直路)(번역서) : 신자들이 천당에 갈 수 있는 방법과 하느님 은총을 얻는 방법을 담은 신심서
○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번역서) : 장례에관한 옛 예식서로 예수회 선교사 불리오 신부가 저술한 한문본을 다블뤼 주교가 번역
○ 성교요리문답(번역서)
■ 신리성지에 성 다블뤼 기념관 및 순교자기념공원 조성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가 1845년 입국해 1866년 순교하기까지 10여 년간 은거하며 사목거점이자 주교관으로 쓴 ‘신리성지’에 성 다블뤼 기념관 및 순교자기념공원이 들어섰다.
대전교구 신리성지(주임 김동겸 신부)는 2014년 5월 6일 당진시 합덕읍 신리1길 61-23 성지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성 다블뤼 기념관 및 순교자기념공원 봉헌식을 하고, 다블뤼 주교의 영웅적 성덕과 업적, 순교를 기렸다.
이날은 다블뤼 주교가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등과 함께 시성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인 데다, 고향인 프랑스 아미앵교구에서 온 후손과 사제 15명이 함께 해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됐다. 루크 부이어헤 대주교 (브장송대교구장, 전 아미앵교구장)를 비롯한 이들은 미사 중 다블뤼 주교 유품과 그의 첫 사목지 로아본당에서 1차세계대전 당시에 썼던 총알 탄피를 녹여 제작한 십자고상을 신리성지에 선물했다.
‘신리성지 역사공원’은 지난해 4월 20일 기공, 충청남도와 당진시에서 30억 원을 지원받고 성지에서 15억 원을 투입, 1년 여에 걸쳐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기념공원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3만 61㎡에 달하는 성지에 지하 2층 및 지상 4층, 1262.90㎡ 규모의 성 다블뤼 기념관을 세워 다블뤼 주교 성인화와 유품, 이종상(요셉, 76)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가 ‘신리 기록화’ 20점을 전시키로 했다. 다만 이 교수의 기록화는 현재 지하 2층 전시실에 제작이 마무리되지 않아 우선 복제화 6점을 선보인 상태이며, 장차는 다블뤼 주교 전신 성인화, 초상, 사제서품과 순교 그림도 선보인다.
아울러 14m 높이 기념탑(전망대)에 오르면 내포 들녘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순교를 결심한 다블뤼 주교의 명에 따라 젊은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신리성지로 돌아오던 순교의 길을 돌아볼 수 있다.
또한 순교자기념공원에는 신리성지에서 잡혀간 다블뤼 주교와 오매트르ㆍ위앵 신부, 손자선(토마스)ㆍ황석두(루카) 등 다섯 성인을 기리는 야외 경당을 세워 봉헌하고, 순례자들과 방문객들이 영적 쉼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습지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또 순교자기념공원에는 프랑스 파카르드사 장인들이 제작한 3개의 종을 내걸었다.
신리성지는 다블뤼 주교가 한글 교리서를 저술 간행하고, 초기 조선교회 상황과 순교사적을 수집 정리해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다블리 주교 비망기」를 엮게한 사목거점이어서 오는 8월 열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와 제3회 한국청년대회에 참가한 우리나라와 아시아 청년들이 순교성인들의 신앙을 본받는 배움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흥식 주교는 미사 강론을 통해 “다블뤼 주교님 시성 30주년의 날에 다블뤼 주교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을 봉헌하게 돼 무척 기쁘다”며 “특별히 103위 시성 30주년을 맞으며 특별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다블뤼 주교님의 사목표어를 늘 기억하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봉헌식에는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와 전 신리성지 주임 김성태(합덕본당 주임) 신부 등 대전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함께해 성황을 이뤘다.
평화신문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성 다블뤼 주교 후손, 안 카트린 수녀 방한
“한국땅 묻히신 다블뤼 주교 … 프랑스교회도 감사할 일”
다블뤼 주교 여동생의 5대손, 사제 많이 탄생 ‘남다른 가문’
“조상들 신앙 영향 수도자 결심, 한국서 주교님 더 깊이 알게 돼”

안 카트린 수녀(주아르 베네딕도수녀회 수련장)는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성 다블뤼 주교(1818~1866)의 후손 대표로 6일 신리성지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봉헌식에 참석해 “오늘 봉헌식에서 살아 있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과 동시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침체된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달리 순교자를 현양하는 교회의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자세는 프랑스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카트린 수녀는 다블뤼 주교 여동생의 5대손이다.
카트린 수녀는 “30년 전 다블뤼 주교님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시성될 때, 저의 부모님이 시성식에 참석하셔서 주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오늘 봉헌식을 계기로 다블뤼 주교님에게 더 깊이 다가가게 됐다”며 “주교님께서 순교 후 한국 땅에 묻히고 그 유해가 지금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은 주교님이 평생에 걸쳐 한국에서 사목하신 만큼 프랑스교회로서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블뤼 주교에 대한 프랑스교회의 현양운동에 대해 카트린 수녀는 “주교님의 출신교구인 아미앙교구에서는 주교님을 알리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프랑스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주교님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카트린 수녀와 동행한 또 다른 후손인 피에르 다블뤼(74)씨는 다블뤼 주교의 서한을 수집, 정리해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가계도(족보) 편찬도 병행하고 있다.
카트린 수녀는 “성인을 배출한 우리 집안에서는 많은 사제가 탄생했고 아프리카에서 50~60년 선교사로 봉사하신 분도 계시며 저도 조상들의 신앙에 감화돼 수녀가 됐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2014-05-18, 제2895호]
■ 공소와 교우촌
◆ 공소
교회법에 따르면, '공소'란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를 의미하는데, 때로는 그 지역 신자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서의 '공소 집' 즉 경당(혹은 講堂)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따로 공소 예절이 행해지며, 사제의 방문으로 성사가 집행되거나 미사가 봉헌되는데, 사제의 첫 순방 날짜가 공소 설립일이 된다.
◆ 교우촌
천주교사에서 말하는 '교우촌'이란, 그 구성원들이 천주교 신자 즉 교우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 신앙 공동체(신자 공동체)형으로서의 자연 부락을 의미한다. 공소는 주로 이들 교우촌 가운데서 설정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공소는 넓은 '지역 본당'의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박해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 섞여 사는 혼거형(混居形) 공동체도 많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공동체는 교우촌으로 볼 수 없다. 이들 교우촌을 형태별로 보면,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공동체가 유지되는 정주형(定住形) 교우촌과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처음에 형성된 공동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전이형(轉移形) 교우촌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순교자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 성 민 루가 위앵 (Huin) 신부(1836∼1866)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1837∼1866)
프랑스 앙굴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3월에 안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1813∼1866)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손자선 토마스(1838∼1866)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떤 일로 갔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손자선을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그를 해미로 보냈다.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킨 손자선은 결국 공주(公州) 감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다블위 안토니오, 성 오매트로 베드로, 성 위앵 루가, 성 황석두 루가, 성 손자선 토마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다블위 안토니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교우들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 활성화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오매트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내에 사제 성소와 수도 성소의 증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위앵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수사 수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황석두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출판 사업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손자선 토마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 모든 농민들, 특히 교우 농민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