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독재에 맞선 시민의 아픔을 함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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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남 주교가 4ㆍ19민주혁명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경향신문 복간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출처=서울대교구 화보집 「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
4ㆍ19혁명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경향신문을 방문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복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60년 4월 22일의 일이다. 당시 서울대목구에서 발행하던 일간 경향신문은 1959년 4월 30일 공보실에서 ‘신문 발간 허가 취소’ 통지서를 보내오면서 폐간된 상황이었다.
1959년 초부터 경향신문 기사를 문제 삼아 편집국장과 논설위원, 취재기자를 차례로 연행하고 있던 즈음에 터진 이 폐간 사건은 권력에 의한 언론 자유 탄압으로 비쳐 국민들을 경악시켰다.
특히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둔 시점이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로밖에 달리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의 교회 탄압이 시작돼고
경향신문 폐간과 복간 사건의 씨앗이 발아한 것은 이미 6ㆍ25전쟁 당시였다. 8ㆍ15해방 직후 조선정판사를 인수, 이듬해 10월 6일 노 주교를 초대 회장으로 창간한 뒤 정부 수립, 전쟁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정부와는 마찰이 없었다.
오히려 좌ㆍ우익의 갈등으로 얼룩진 해방 공간에서 사실 보도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논조로 국민을 계몽하는 본연의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독자들의 신뢰도도 높았고 정부와의 관계도 무난했다.
교회와 집권세력 간 관계가 틀어진 건 전쟁 발발 직후였다. 경향신문이 1950년 6∼9월 사이 벌어진 보도연맹 사건과 1951년 1ㆍ4후퇴 시기 국민방위군 사건, 1951년 2월 지리산에서 벌어진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과 관련한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면서 교회와 정권 간 관계는 악화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 주교를 ‘정치 주교’ 혹은 ‘야당 주교’라고 비판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교황청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경향신문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1959년 3월 교황특사로 파견된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에게 노 주교가 정부 비판과 교회의 정치 개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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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를 사수하자”고 쓴 현수막을 들고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서 4ㆍ19민주혁명의 최선봉에 선 동성중ㆍ고 학생들. 이 사진은 그간 대광고 학생들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최근 동성중ㆍ고의 4ㆍ19혁명 백서가 나오면서 바로잡혔다. 출처=「4ㆍ19혁명의 최선봉-동성」(동성중ㆍ고등학교, 동성중ㆍ고 동창회 펴냄) |
이어 그해 4월 30일 밤 미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해 지령 4325호를 끝으로 경향신문에 대한 전격 폐간을 통고했다. 경향신문 폐간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다울링 대사도 그해 5월 1일 성명을 발표,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해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경향신문은 이후 폐간 처분 취소 행정소송에 들어갔고, 1년간의 지루한 대정부 법정 투쟁을 벌인다.
계속된 탄압에 시민들 거리로 나서
경향신문 폐간에 이어 국가보안법 개정,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 등 독재와 억압의 정치는 계속됐고, 이는 결국 민중의 봉기와 저항을 불러왔다. 파국의 기폭제는 1960년 3ㆍ15 부정 선거였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뒤 그해 4월 10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사망한 채로 발견돼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1943∼1960)군 사체 발견을 계기로 4ㆍ19혁명이 일어났다.
장면(요한)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종용하는 뜻으로 당시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로 촉발된 4ㆍ19혁명은 학생들의 경무대 진출로까지 이어졌다.
특히 경찰의 실탄 발사로 맨 앞에 서서 시위를 하던 서울대 사대와 동국대생들이 흩어지면서 동성중ㆍ고 학생들이 혁명의 최선봉에 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학생들을 호위하듯 따르던 전창기 교장과 교사들은 일제히 학생들을 엎드리게 해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지만, 총상과 관통상 등을 입은 부상자는 12명이나 났다.
훗날 이들 동성고 시위학생 중 학생회장이던 김어상(토마스 아퀴나스) 서강대 명예교수 등 9명이 이 공로로 4ㆍ19혁명 공로건국포장을 받기도 했다.
또 혁명 당시 가톨릭학생회 담당이던 나상조 신부 등 사제들은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 중에 변사할까 우려해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을 돌봤다.
4·19혁명, 사회사목 활성화 이어져
서울대목구 혜화동본당 회장단은 인근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등을 돌며 시위 중에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문했다.
또한, 동국대 법정대 3학년이던 노두희(시몬)군이 시위 중에 희생당하자 노 주교는 4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직접 주례하고 고인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원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경향신문 발간과 반독재 투쟁, 4ㆍ19혁명과 관련된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은 1960년대 이후 교회의 사회사목 활성화를 촉진했고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증대시켰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음화에 사회 정의를 위한 투신의 비전을 통합, 한국 교회 안에서 ‘사회사목’ 활성화로 구체화했다.
이후 한국 교회가 전개한 인권과 정의 구현, 민주화 운동은 1950년대 한국 교회의 반독재 투쟁과 연결 선상에 있다.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