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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바구리’와 ‘바구니’ |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의 농기구에는 ‘바구리’라는 운반용구(運搬用具)가 있다. 옛적 우리 고향(故鄕)에서 은밀히 이르던 후배위(뒷치기)로서의 ‘바구리(빠구리)’와는 다른 말이다. ‘대나무 오리’로 만든 것은 ‘대바구리’, ‘싸릿대’로 만든 것은 ‘싸리바구리’라고 한다.
바구리(바구니)
용례(用例)로는 “감자밭 디배 논 데 ‘바구리’ 하나썩 들고 가가 감자 쫌 조오 담어라(감자밭 뒤집어 놓은 데 ‘바구니’ 하나씩 들고 가서 감자 좀 주워 담아라)”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모심기 노래에는 “개령 김산 살매물에 상추 씩넌 저 처자야, 이파리 훌터 ‘바구리’에 담꼬, 속에 속대길랑 나를 도고(개령 김산 맑은 물에 상추 씻는 저 처녀야, 잎은 훑어 ‘바구니’에 담고, 속에 속 대궁일랑 나를 다오)”라는 용례도 있다.
상추 씩거 오는 처자
위에서 말한 ‘개령 김산 살매물’은 ‘개령과 김산의 맑은 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개령 김산’이란 옛적 경상북도(慶尙北道)의 군(郡)단위 행정구역의 명칭이다.
‘개령’은 개령군(開寧郡)을 말하는데, 통일신라시대 이후 경상북도 김천시 및 구미시 일부 지역의 행정구역이었다.
또한 ‘김산’은 1914년까지 존속한 경상북도의 행정 구역인 김산군(金山郡)을 말한다. ‘개령’은 지금도 김천시(金泉市) 개령면(開寧面)으로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살매물에 서답 씩는 처자들
그리고 ‘살매물’의 ‘살매’는 한자로 ‘薩買’라고 쓰는데, ‘매(買)’가 어미(語尾)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인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 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었다.
결론적으로 모심기 노래에서 나오는 ‘개령 김산 살매물에 상추 씩는 저 처자’는 ‘개령 김산 맑은 물에 상추 씻는 저 처녀’라는 말이 된다.
이두문자(吏讀文字 ; 옛적 우리말을 적는 방식의 한 가지)에서도 ‘살매(薩買)물’을 ‘푸른 물’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푸른 물’은 ‘맑은 물’을 말한다.
소백산맥의 맑은 물이 김천시(金泉市)와 구미시(龜尾市)의 전신인 옛적 개령군(開寧郡)과 김산군(金山郡)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었을 때의 얘기다.
개령 김산 살매물
‘바구리’는 표준어(標準語)로 ‘바구니’를 말하는데, ‘바구니’는 대오리나 싸릿대를 쪼개어 둥글게 결어 속이 깊숙하게 만든 그릇을 말한다.
그리고 ‘꽃바구니’는 ① 꽃을 꺾어 담은 ‘바구니’ ② 꽃들을 담아서 꾸민 ‘바구니’ ③ 아름다운 무늬를 넣어 만든 ‘바구니’ 등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오리’의 ‘오리’는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가늘고 긴 대나무 조각을 말하는데, 강원도와 경기도, 경북(慶北)에서는 ‘오라기’라고도 한다. 실이나 갯버들, 싸릿대로도 ‘오리’를 만든다.
대오리
또한 ‘눈깔바구니’는 가는 ‘대오리’로 구멍이 많게 결은 ‘바구니’를 말하고, ‘대바구니’는 대로 엮어 만든 ‘바구니’를, ‘색동바구니’는 색깔로 염색(染色)한 ‘골풀’ 등으로 엮은 ‘바구니’를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골풀’은 골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땅속줄기가 옆으로 뻗어나가고, 여기서 나온 줄기는 긴 송곳처럼 밋밋하고 밑동에 비늘 모양의 잎이 붙어 있으며, 초여름에 녹갈색 꽃이 핀다. 줄기는 흔히 자리를 만드는 데 재료로 쓴다. 골속 또는 등심초(燈心草)라고도 한다.
색동 바구니
본론으로 돌아간다. ‘바구리’는 주로 대나무 오리를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통풍(通風)이 잘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른 나무와 달리 대나무는 잘게 쪼개어 써도 탄력(彈力)과 힘이 있고, 오래 써도 잘 썩지 않는 특성(特性)을 지녀 인기가 있었다.
꽃바구니
초기(初期)의 ‘바구니’는 과일, 곡식, 견과, 식용식물(食用植物)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또는 어로(漁撈)를 위해 사용되었다. ‘통발’은 특별히 어로를 위한 ‘바구니’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 ‘바구니’는 주로 장식용(裝飾用) 목적으로 쓰인다. 기독교회에서 사용하는 ‘부활절 바구니’는 부활절(復活節) 의식을 할 때 쓰이는데, 지금은 보통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며 누빈듯 한 무늬가 주종을 이룬다.
부활절 바구니
또 명절에 주로 주고받는 선물(膳物) 바구니는 과일이나 술, 꽃과 같은 선물들을 운반할 때 쓰이며, 몇몇 바구니는 레드와인을 따르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크리스털 유리로 된 바구니는 장식적·실용적(實用的) 측면을 모두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옛적 정월 대보름날에는 ‘오곡밥’을 지어 ‘대바구니’에 담아 ‘실건(살강)’ 위에 얹어놓기도 하고, 이 ‘오곡밥’을 ‘단지’해 먹을 때도 ‘바구니’를 사용하곤 했었다.
실건(살강)
위에서 말한 ‘실건’은 표준어(標準語)로 ‘살강’을 말하는 외동읍 사투리로 부엌의 벽 중턱에 드린 선반으로 그릇을 얹어 두기도 하고, 여름에는 보리쌀 삶은 것을 ‘바구니’에 담아 얹어 놓곤 했었다.
“살강 밑에서 숟가락 얻었다”라는 속담(俗談)은 “남이 빠뜨린 물건을 얻어서 횡재(橫財)했다고 좋아하나 실상은 물건의 임자가 분명한즉 헛 좋았다는 말”이기도 하고, “아주 쉬운 일을 하고 자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물바구니
애기가 나온 김에 ‘단지’얘기를 조금 더 보탠다. ‘단지놀이’에는 정월대보름의 ‘오곡밥 단지’가 가장 인기 있는 ‘단지’였다.
잔칫집의 ‘단지’는 머슴들과 총각들, 부녀자(婦女子)들이 한 곳에 모여 그 대표(代表)들을 보내 잔치음식을 얻어 와서 나누어 먹는 것이지만, 정월대보름의 ‘오곡밥 단지’는 한 마디로 ‘음식 훔쳐 먹기’라 할 수 있다.
구체적(具體的)으로는 가정마다 대보름날 먹기 위해 만든 오곡밥과 나물을 열 나흗날 밤에 몰래 숨어들어 훔쳐 와서 나누어 먹는 놀이를 말한다.
오곡밥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이 되면, 머슴들이나 총각들, ‘마실가기’에서 만난 새댁들이나 처녀(處女)들이 가정마다 지어 놓은 ‘보름밥’과 나물을 훔쳐오는데, 이를 ‘단지해 온다’고 하고, 그 행위를 ‘단지’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잔칫집 ‘단지’는 생략하고, 정월대보름날 오곡밥 훔치기 ‘단지’를 조금 더 살펴본다.
‘오곡밥 훔쳐먹기’를 ‘단지’라고 하는 것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항아리 즉 ‘단지’를 들고 다니며, 조금씩 훔쳐 온데서 생겨난 말로 추정(推定)되고 있다.
백가반
밥이든 나물이든 물기가 있어 ‘광주리’나 ‘바구니’는 밥알이 빠져나가거나, 나물국물이 흘려내려 ‘단지(항아리)’를 들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조금씩 훔쳐오도록 만든 제도(制度)에서 지어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오곡밥 훔쳐먹기’를 ‘백가반(百家飯)’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은 한 집의 것을 몽땅 가져다 먹지 말고, 여러 집의 것을 골고루 조금씩 가져다 먹음으로써 어려운 살림에 어렵싸리 지어 놓은 오곡밥을 주인집에서 제대로 먹을 수 있도록 배려(配慮)하라는 교훈을 내포하여 명명(命名)한 것으로 보인다.
정월대보름 나물재료
(위에서부터 고사리․가지․시래기 등 검은 계통의 나물들, 무․도라지․
콩나물 등 흰 계통의 나물들, 시금치․취나물․호박 등 초록계통의 나물)
‘오곡밥 단지’는 서민이 서민의 가정을 대상으로 행하는 절기행사(節氣行事)로 구중궁궐(九重宮闕)같이 높은 담을 쌓아놓고, 육중한 대문(大門)을 걸어 잠근 부잣집은 당연히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설(俗說)과 전래어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백가반(百家飯)’이라 하여 여러 집의 오곡밥을 먹어야 좋다는 말이 있다.
‘백가반’은 아이들이 ‘조리’를 들고, 이집 저집 다니면서 오곡밥을 얻어 와서 먹는다 하여 ‘조릿밥’이라고도 한다.
오곡밥 재료
‘조릿밥’은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성(姓)씨 세 집 이상의 밥을 얻어먹어야 좋다고 하며, 이렇게 얻은 ‘조릿밥’을 디딜방앗간에 앉아서 먹으면 버짐이 피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정월 열 나흗날 저녁이면 동네 머슴들을 비롯한 청년들과 부녀자(婦女子)들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갖고 간 ‘단지(항아리)’에 오곡밥을 몰래 담아 와서 나눠먹곤 했었다.
대보름 나물
그러나 당시의 ‘오곡밥 훔쳐 먹기’는 지금과 같은 절도행위(竊盜行爲)로 보지는 않았다. 열려 있는 삽짝문(사립문)과 정지문(부엌문)으로 들어가 부뚜막이나 실건(살강)에 둔 ‘밥 바구니’와 ‘나물바구니’의 ‘바뿌재’를 걷어내고, 갖고 간 ‘단지’에 조금씩 덜어와 나누어 먹는 절기행사(節氣行事)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집 주인은 청년들과 부녀자(婦女子)들이 밥과 나물을 훔쳐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했었고, 가정에 따라서는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부엌의 잘 보이는 곳에 ‘오곡밥’과 나물을 ‘바구니’에 담아두기도 했었다.
정월 대보름 달
여러 집을 다니며 훔친 밥과 나물을 가지고 마을의 일정한 장소(주로 큰 집 사랑방)에 모여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보냈다.
그리고 ‘바뿌재’는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쓰는 말로 ‘밥보자기’에서 진화(進化)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니가부지 밥사에 파래이가 달러드는데 ‘바뿌재’ 쫌 더퍼라”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너희 아버지 밥상에 파리가 덤벼드는데 ‘보자기’ 좀 덮어라”라는 말이다.
바뿌재
‘바뿌제’는 음식상(飮食床)을 차려두거나, 농사철 모내기와 논매기 때 내어가는 점심바구니나 새참바구니를 덮고 다니기도 하고, 추석(秋夕)에 송편을 빚기 위해 햅쌀을 빻으러 갈 때나, 설날에 인절미와 가래떡을 빼려고 불린 쌀을 이고 떡 방앗간에 갈 때도 덮어 가곤 했었다.
방앗간 앞에 줄지어 있는 양푼이나 ‘다라이’들은 신문지(新聞紙)나 수놓은 ‘상보’를 씌우기도 했지만, 당시의 시골에서는 ‘베’조각으로 만든 ‘삼베 바뿌재’를 주로 사용했었다.
자수 보자기
서민가정에서는 신문(新聞)을 볼 줄 아는 이가 없어 보지도 않았고, 값비싼 ‘자수(刺繡)보자기’를 만들 수 있는 사정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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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옛적의 ‘바구니’는 ‘나물바구니’가 그런대로 인기(人氣)가 있었다. 산나물은 주로 ‘다래끼’를 매고 가서 뜯어오고, 들나물은 항상 ‘바구니’를 이용하여 뜯곤 했었다.
예쁜 ‘나물바구니’를 옆에 끼고, 논두렁과 밭두렁을 옮겨 다니면서 달래와 냉이, 씀바귀를 뜯는 댕기머리 처녀들은 한 폭의 그림이 되기도 했었다.
나물 캐는 처녀들
그리고 그 시절 ‘나물바구니’에 담긴 사연(事緣)들은 뭐니 뭐니 해도 댕기머리 처녀들의 ‘산나물 바구니’와 그 ‘바구니’마다에 깃든 추억(追憶)들일 것이다.
예쁜 ‘나물바구니’를 옆에 낀 '점순이'가 괘릉리(掛陵里) ‘하이골’ 아흔아홉 골짜기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한 해 선배인 아랫마을 ‘오빠야’가 산더미 같은 ‘물거리’지게를 지고 내려오면, 갖은 눈짓과 손짓을 다해 지게를 받치게 한다.
그리고는 ‘바뿌재’에 돌돌 말아 ‘나물바구니’에 숨겨온 ‘쑥 개떡’ 한 덩어리를 몰래 건네주면서 "체하지 안쿠로 천처이 묵어라"면서 안쓰레 쳐다보던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追憶)으로 남아 있다.
나물바구니
온 얼굴이 ‘홍시’가 되어 ‘사랑의 사연’을 전해주고는 '나물바구니'로 얼굴을 가리고, ‘도라지 맘보’를 흥얼거리면서 암팡진 엉덩이와 댕기머리를 출렁거리며 친구들을 따라 뛰어가던 그 시절 '점순이'의 모습도 지금까지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그 때의 '점순이'도 몇 해 전 노환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점순이’가 즐겨 부르던 심연옥의 ‘도라지 맘보’ 가사를 음미해 보기로 한다.
도라지 맘보
심연옥 노래 탁소연 작사 라화랑 작곡
도라지 캐러가자 헤이 맘보 바구니 옆에 끼고 헤이 맘보 봄바람에 임도 볼겸 치맛자락 날리면서 도라지를 캐러가네 헤이 맘보 임 보러가세 도라지 맘보 봄바람 불어오는 심심 산천에 한두 뿌리만 캐어도 헤이 맘보 대바구니 찬데요 헤이 맘보 한 두 뿌리만 캐어도 헤이맘보 대바구니 찬대요 헤이 맘보 임 보러 가세 도라지 맘보 도라지 캐러가세 헤이 맘보
도라지 캐러가자 헤이 맘보 바구니 옆에 끼고 헤이 맘보 봄바람에 임도 볼겸 치맛자락 날리면서 도라지를 캐러가네 헤이 맘보 임 보러 가세 도라지 맘보 봄바람 불어오는 심심산천에 한두 뿌리만 캐어도 헤이 맘보 대바구니 찬데요 헤이 맘보 한 두 뿌리만 캐어도 헤이 맘보 대바구니 찬데요 헤이 맘보 임 보러 가세 도라지 맘보 도라지 캐러 가세 헤이 맘보 도라지 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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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 캐는 여인들
제2부 ‘바구니’에 얽힌 사연들 |
다른 파일에서도 말씀 드린바 있지만, 필자네는 여섯이나 되는 형제(兄弟)가 모두 사내아이들이라 어렸을 때는 할머니나 어머니를 따라 가끔 산나물이나, 들나물을 캐려 다니기도 했었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야트막한 야산(野山) 기슭으로 나물을 뜯으러 갔다. 햇볕이 잘 드는 계순이네 할아버지 무덤 주변으로 갔다. 아직 겨울이라 고개를 내민 나물들이 보이진 않았다.
냉 이
“에이, 할매. 나물도 없네.”하고 입 튀어나온 소리를 하면, 할머니는 조금 습한 고랑에 쌓인 상수리나무의 마른 잎들을 쓰윽 밀어내신다. 신기(神奇)하게도 마른 잎들 밑에는 냉이·쑥·꽃다지 같은 봄나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른 갈색(褐色) 잎 밑으로 물기에 젖은 시커먼 낙엽(落葉)을 헤치면, 지난 밤새 뚫고 나온 듯한 어린 싹들이 제법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물 뜯는 재미에 빠지면 쪼그리고 앉은 다리가 저려 절뚝거려도 언제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언덕배기에 있는 계순이네 할아버지 무덤에서부터 시작한 봄나물 채취(採取)는 어느새 시냇가로 옮겨 갔다. 시냇가엔 산이나, 들에서 못 보던 나물들이 많이 있었다.
계순이 할아버지 무덤 앞 나물 캐기
시냇가에는 ‘별나물’이라고 부르는 ‘돌나물’에 ‘달래’와 같이 줄기가 긴 나물들이 특히 많았고, 이것저것 캐어 담고 보니 할머니의 ‘대바구니’는 어느새 여러 가지 나물들로 가득 찼다.
“인자, 내래가자, ‘나새이’로 딘장국 끼래주꾸마(이제 내려가자, ‘냉이’로 된장국 끓여 줄게)” 겨우내 먹던 지겨운 된장국이지만 ‘냉이’나 ‘달래’가 들어간 된장국은 나름대로 별미(別味)였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렇듯 나물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나물 캐는 여인
그리고 그것에는 겨울동안 맛보지 못 했던 새로운 맛이 있었다. 또 ‘쑥버무리’나 ‘달래전’, ‘두릅전’, ‘쑥개떡’과 같은 여러 가지 주전부리가 있었기에 나물에 대한 기억(記憶)은 싫지가 않다. 여기에서 잠시 김태호 작사 박태현 작곡의 동요(童謠) ‘봄맞이 가자’를 음미해 본다.
봄맞이 가자
김태호 작사 박태현 작곡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부르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 쉬고 버들피리 만들어 불면서 가자 꾀고리도 산에서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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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끼와 나물 캐는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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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적 오일장(五日場)에는 바구니가 빠지면, 장이 서지 않을 정도로 바구니 세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 시절 오일장 주변(周邊)을 잠시 살펴본다.
시골 농부(農夫)네 부부가 장에 간다. 남자는 소에게 짐을 잔뜩 실은 ‘구루마(달구지)’를 끌게 하고, 손에 회초리를 들고 소를 몰고 간다.
풀을 빳빳하게 먹여서 다려 입은 옷은 부풀어서 마치 풍선(風扇)을 입은 것 같다. 평생을 농삿일로 살아온 농부의 다리는 O자 형으로 굽어있다.
시장가는 달구지
달구지에는 이웃집에서 내다 팔기로 한 ‘오통가마이’ 쌀 서너 가마니와 팥 자루 두어 개가 중간에 실리고, 농부가 지난 한달 여 동안 공들여 만든 ‘바구니’ 다발이 앞쪽에 실려 있었다.
위에서 말한 ‘오통가마이’란 ‘오통(5통)가마니’, 즉 ‘다섯 말(斗)들이 가마니’라는 말로 벼나 보리를 다섯 말 담은 ‘가마니’를 말한다. 물론 ‘사통(4통) 가마니’는 ‘네 말을 담은 가마니’를 말한다. 그리고 한 ‘통(筒)’은 한 ‘말(斗)’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5통가마니와 4통가마니
(아랫쪽 두 개는 4통가마니)
맨 뒤쪽에는 고구마와 무를 담은 헌 ‘광주리’와 ‘바구니’가 빼곡하게 실려 있다. 농부는 머리에 낡은 밀대 모자를 쓰고, 이따금 소에게 가벼운 매질을 가한다.
소는 꼬리를 흔들어 등에 앉은 파리를 쫓고 있고, 몇 발자욱 뒤를 아낙이 잰걸음으로 이들을 따르고 있는데, 겨드랑이에 들고 가는 ‘대바구니’에는 계란(鷄卵)이며 ‘초배기’가 들어있다.
초배기(초박이)
계란은 시장(市場)에 내다 팔아 아들아이 사친회비(師親會費)를 줘 보내려는 것이고, 밥이 담긴 ‘초배기’는 하루 종일 ‘바구니’를 팔면서 점심으로 먹으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초배기’는 고리나 대나무로 엮어 만든 도시락 통으로 ‘초박(草朴)’의 뜻이다. “지게 가재이에 ‘초배기’ 하나 달랑 달고, ‘이노무 팔짜 무신 일로 지게목발 몬 민하고...’ 캐사머 산에 올로 가더라”라는 용례가 있다.
“지게 가지에 ‘도시락 통’ 하나 달랑 달고, ‘이놈의 팔자 무슨 일로 지게목발 못 면하고....” 하면서 산에 올라 가더라”라는 뜻이다.
대바구니
여기에서 잠시 옛적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평생 동안 애지중지(愛之重之) 사용했던 ‘대바구니’와의 일생을 노래하고 있는 어느 아낙의 ‘대바구니 전설’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대바구니 전설
무명적삼 흠뻑 적시며 겉보리 서 말 머리에 이고 이십리 길 걸어 장에 가던 날
곱고 고운 네 모습에 반해 너와 인연 맺으며
네게 행복을 담고 한(恨)을 담으며 지나온 세월
헛간 구석에 앙상한 몰골을 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네 모습
50년 내 손때 묻고 내 설음 내 추억이 서린 너를 보듬고 한숨 짖는 이 늙은이
네 속에 담았던 수많은 사연들
행여 꼭 한번 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세월을 거꾸로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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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
옛적에는 ‘삐삐선’으로 ‘바구니’를 만들기도 했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었던 6.25의 산물(産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삐삐선’이란 군용(軍用) 야전전화선(野戰電話線)을 말하는 것으로 ‘피피선’이라고도 했는데, 그 용도(用度)는 무궁무진했다.
올가미로 만들어 꿩을 잡거나 노루와 토끼를 잡기도 했고, 집에서 기른 개를 잡는데도 쓰였다. 마당에 거는 빨랫줄도 ‘삐삐선’으로 만들었고, ‘광주리’나 가방, 소쿠리까지 ‘삐삐선’으로 만들어 썼으며, 심지어 나뭇단이나 볏가마니까지 그것으로 묶었다. 새끼처럼 꼬아 소 ‘이까리’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삐삐선 바구니
‘삐삐선’은 또 가정용 전기선(電氣線)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기선은 전류가 잘 흐르는 도체인 동선(銅線)이어야 하는데, 강철선이 내장되어 있는 ‘삐삐선’을 전깃줄로 사용하면, 여차하면 합선(合線)이 되거나 과열(過熱)이 되어 타버린다.
순식간에 외피(外皮)가 타면서 두꺼비집의 ‘휴즈’가 절단되기 때문에 거의 화재(火災)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셋집인 경우 주인으로부터 호된 질책(叱責)을 받거나 쫓겨나는 설움을 당하기도 했었다. 금쪽같은 자기 집을 태울 뻔 했다는 이유(理由) 때문이다.
삐삐선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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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선’ 얘기가 나왔으니 이에 얽힌 사연들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말한 ‘삐삐선’ 바구니는 6.25전쟁이 휴전된 후 전국적으로 사용하던 바구니로 바구니 재료(材料)인 대나무 대신 군용 야전전화선(野戰電話線)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바구니를 만들기도 했지만, 주로 기방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삐삐선 가방
‘삐삐선’ 바구니는 물건(物件)을 보관(保管)하거나 건조(乾燥)시킬 때, 주로 사용했고, ‘삐삐선’ 가방은 주로 운반(運搬) 도구로 사용하였다.
6.25 당시 필자가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에 다닐 때는 영지저수지 호반(湖畔)이나 미군의 야영주둔지(野營駐屯地)인 주변 야산에는 온통 ‘삐삐선’ 투성이였다.
삐삐선 마끼
괘릉리(掛陵里)와 신계리 경계선에 설치한 미군의 야전비행장 경비병력(警備兵力)과 조종사들이 영지저수지(影池貯水池) 호반에 주둔하다 떠나면서 수백가닥의 전화선을 모두 그냥 두고 북진(北進)했기 때문이다.
대형 ‘삐삐선’ ‘마끼’를 그냥 두고 가버리기도 했다. 때문에 다른 지역에는 ‘삐삐선’이 귀했지만, 필자의 향리(鄕里) 괘릉리와 신계리(薪溪里) 등지에는 ‘삐삐선’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당시의 괘릉리 야전비행장
하학 길에는 미군들이 저수지에 버린 박격포탄(迫擊砲彈)을 건져내어 뇌관(雷管) 쪽에 있는 프로펠러에 ‘삐삐선’을 묶어 비포장도로(非鋪裝道路)에서 신나게 끌고 다니기도 했다.
포탄(砲彈)에 대한 관련 지식이 전혀 없어 그러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간이 배밖에 나온’ 위험천만(危險千萬)한 행동이었다.
삐삐선 가방(장바구니)
어쨌든 당시의 괘릉리(掛陵里)에는 온 동네가 ‘삐삐선’ 천지였다. 나중에는 엿장수 아저씨들이 엿과 바꿔줄 정도로 인기(人氣)가 있었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이를 걷어 가지도 않아 길옆에 그냥 방치(放置)되어 있었다. 전쟁 당시 여차하면 잡아다가 지독한 고문(拷問)을 했기 때문에 감히 손을 못 댄 것이다.
영지(影池)에서 괘릉리의 야전비행장(野戰飛行場)에 이르는 도로, 그리고 지금의 7번 국도(國道)변에도 ‘삐삐선’이 다발로 깔려있었다.
영지 저수지
‘삐삐선’은 6.25당시 이른바 악질경찰(惡質警察)들이 양민들을 고문(拷問)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무런 혐의도 없는 무지렁이들을 수시로 잡아들여 ‘빨치산’에 부역(賦役)을 했다는 자백을 강요하면서 전기고문(電氣拷問)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동리에서 구장(區長)이나 면서기, 악질적(惡質的)인 일제 순사(巡査)출신 경찰들에게 밉보이면 귀신도 모르게 경찰서(警察署)에 잡혀가서 부역자나 통신용(通信用) 전봇대를 자른 혐의(嫌疑)를 뒤집어쓰고, 전기고문을 당했다.
삐삐선과 바구니
고문방법은 당시에는 전기(電氣)가 없었기 때문에 ‘삐삐선’을 군용전화기(軍用電話機 ; EE-8)에 연결하고, 다른 한쪽을 바케스로 물을 뒤집어씌운 농부들의 등짝이나 가슴팍에 짓누르면서 전화기를 고속(高速)으로 돌려 전기를 일으켜 감전(感電)을 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잔악한 그들은 고문에 못이겨 허위자백이라도 하면 가차없이 총살을 시켰다. 일본순사(日本巡査) 출신 조선인 경찰관들이 그들의 상관(上官)이었던 일본 헌병(憲兵)들에게서 배운 고문방법을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순박(淳朴)한 우리 국민들을 상대로 써먹은 것이다.
당시의 일제경찰 출신 악질 경찰관들
(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위에서 말하는 ‘EE-8 전화기’는 6.25전쟁 당시 야전(野戰)에서 사용하던 군용전화기로 1950년대에 미국에서 생산한 자석(磁石) 및 반(半) 공전식(公電式)으로 운용하던 전화기였다.
휴대(携帶)에 용이(容易)하고, 교환기에 가입하여 운용되었는데, 통달(通達)거리는 19km내지 32km로 신호방법은 가청(可聽)신호를 사용하였다. 송ㆍ수화기 가운데에 나비식 스위치가 장치되어 있어 송화 시 이 스위치를 이용하여 송화(送話)를 하곤 했었다.
EE-8 군용전화기
‘삐삐선’은 또 정월대보름 쥐불놀이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될 소품(小品)이었다. 미군(美軍)들이 온 산천(山川)에 버리고 간 ‘간스메’를 주워 대못으로 구멍을 송송 뚫은 후 그 구멍에 ‘삐삐선’을 여러 가닥으로 줄을 만들어 달면 훌륭한 손잡이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간스메(カンづめ)’란 일본어(日本語)로 ‘통조림’을 말한다. 일부에서는 이 말을 경상도(慶尙道) 사투리라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 역시 잘 모르거나 처음 들어보는 말은 무조건(無條件) 경상도 사투리라고 폄하(貶下)하는 풍토에서 비롯된 말이다.
쥐불놀이 깡통
어쨌든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깡통은 새끼줄이나 다른 줄로 묶으면 불에 금방 타버리지만, ‘삐삐선’은 속에 철사(鐵絲)가 들어있어 깡통속의 불에도 타지 않았다.
이렇게 만든 깡통에 헌 고무신짝 하나만 있으면, 오랜 시간 불 깡통을 돌릴 수 있었고, 뒷동산에 가서 관솔이나 뽕나무 삭정이(밑둥치가 마른 나무 가지)를 가득 채워 넣고 빙글빙글 돌리면 그렇게 재미가 있을 수 없었다.
쥐불놀이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삐삐선’은 개 도살용(屠殺用) 목 조리개 줄로 자주 사용되었다. 당시의 경우 서민가정(庶民家庭)의 경우라도 가정마다 한두 마리의 개를 키웠고, 1년에 한 마리 정도의 개를 잡아먹을 때였기 때문에 개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을 수 있는 단단하고 질긴 끈이 필요했었다.
싸리나무 껍질이나 칡넝쿨로 꼬아 만든 밧줄이나 ‘지게꼬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6.25전쟁 이후 한동안은 ‘삐삐선’으로 홀치기를 만들어 목에 걸어놓고, 담 너머에서 당기기도 했고, 생 울타리에 심은 오동나무 가지나 집 뒤 야산(野山)의 소나무가지에 걸어 잡아당기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잠시 그 당시 개를 잡는데 사용했던 ‘삐삐선’과 관련하여 박철이 쓴 ‘한 식구에 관한 추억’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한 식구에 관한 추억
박 철
댓돌 아래 할딱이던 개가 있었다.
댓돌 아래 돌아와 서성이는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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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지방에 따라 ‘나물서리’라는 것도 있었다. ‘서리’라면 일단 주인 몰래 훔쳐가거나, 훔쳐 먹는 것을 말하는데, ‘나물서리’는 나물을 뜯어 부잣집을 찾아가서 물물교환(物物交換)으로 파는 행위를 말한다.
보릿고개 길고 긴 날, 아이들은 배고파 울고, 먹일 양식(糧食)은 없고, 그렇다고 구걸은 못하겠고, 너무나 괴로운 고비가 다가온다.
그 고개가 얼마나 가팔랐던지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아이들은 그 고개 마루턱에서 거의 절반(折半)이나 죽어나갔다.
보릿고개 시절 아이들
이 엄청난 고통(苦痛)의 세월을 헤쳐 나가기 위해 그 시절 사람들은 ‘나물서리’라는 풍습(風習)을 만들어 내어 부잣집 문전에서 적선(積善)을 구하곤 했었다.
이른 봄, 산과 들에 파릇파릇 나물이 돋기 시작하면, 동네 아낙들은 아침 일찍 산에 올라 산나물을 뜯어다가 잘 고르고 다듬어 커다란 ‘바구니’에 이고는 그 마을의 부잣집으로 간다.
산나물(참나물)
부잣집 마당에 ‘나물바구니’를 살며시 내려놓고는 안주인을 찾는다. 안주인은 물어보지 않아도 이들이 왜 왔는지를 알고 있다. 밝은 얼굴을 한 부잣집 마나님이 큰 바가지에 곡식(穀食)을 가득 담아 와서 내려놓고는 “벌써 봄나물이 한창이네!”라며 반색을 하면서 ‘나물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덕분에 보릿고개를 맞은 가난한 서민들은 자존심(自尊心) 상하지 않고 양식을 얻을 수 있었고, 부잣집에서는 이웃을 도와주고 값을 치룬 맛있는 산나물을 제때 먹을 수 있었다.
이 일련(一連)의 과정을 ‘나물서리’라 부르는데,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아름다운 우리민족 고유의 풍속(風俗)이었다.
나물 캐는 여인
어쩌면 그 시절 우리들 어버이의 생계수단이 되기도 했었던 ‘바구니’가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취를 감추고 나니 아쉬움이 더해진다.
그 시절과 같이 빈한(貧寒)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 여인들이 손에손에 ‘광주리’와 ‘바구니’를 들고, 산야(山野)를 누비던 모습들이 너무나 그리워진다.
나물 바구니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을 동서로 달리는 금오산맥(金烏山脈)과 동대산맥(東大山脈), 그 사이를 이어주는 토함기맥(吐含氣脈)에는 골마다 기슭마다 도라지와 산나물이 지금도 지천으로 돋아나 자라고 있다.
그 시절 그 ‘도라지’와 ‘산나물’을 캐고 뜯기 위해 봄마다 하얀 저고리에 밤물처매(검정치마)를 두른 처자(처녀)들과 새댁들이 옆구리마다 ‘광주리’와 ‘바구니’를 끼고, 오르내리던 모습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나물 뜯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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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에 얽힌 추억이나 사연(事緣)이 제법 있을 것으로 알고, 단일주제(單一主題)를 만들기는 했는데, 막상 뛰어들고 보니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다. 때문에 최근의 글 중에서는 가장 짧은 기사(記事)로 마감하는 것 같다.
게다가 ‘바구니’에 대한 소재음악(素材音樂)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시절 우리들 어머니들의 애환(哀歡)이 서린 ‘바구니’ 노래는 더 더욱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은 대바구니 옆에 끼고 산나물 뜯어오던 도라지꽃 산골마을을 그린 박재란의 ‘도라지 피는 산골’을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대바구니
가사(歌詞)에 ‘바구니’는 나타나지 않지만, 도라지를 캐려면 어차피 ‘바구니’가 따르게 마련이고, 한두 뿌리만 캐어도 철철 넘치는 ‘대바구니’도 있어야 할 것이기에 이 노래를 선곡(選曲)하였다.
조금은 생뚱맞기도 하지만, 이런 핑계로 박재란의 처녀 때 목소리도 한 번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회원님들의 깊으신 양해(諒解)를 부탁드린다.
나물바구니
“아름다운 꿈이 자란 정든 옛 마을, 영(嶺)을 넘는 구름 속에 종달새 울고, 산기슭에 목동(牧童)들이 노래 부르는, 아~ 그리워라 옛 마을 도라지 피는 산골”, 다함께 따라 불러보시기 바란다.
도라지 피는 산골
박재란
도라지꽃이 피는 산골의 마을 아름다운 꿈이 자란 정든 옛 마을 영을 넘는 구름 속에 종달새 울고 산기슭에 목동들이 노래 부르는 아~ 그리워라 옛 마을 도라지 피는 산골
장미빛 노을 지은 저 하늘가에 초생별이 파랗게 깜박일 때면 별도 하나 나도 하나 헤어 가면서 노래하던 그 시절이 어제와 같이 아~ 떠오르는 내 고향 도라지 피는 산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