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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모 (사)박정희대통령과육영수여사를 좋아하는사람들의모임 | 근면·자조·협동 회의자료 | 일 시: 2016.4.4(월) 19:00 장 소: 보훈회관 회의실 카페명: 다음(Daum) → 박정모 | |
전화 : 051) 302-8801 팩스 : 051) 302-8803 메일-pjm8801@daum.net | |||
∙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건립기금모금 - 부산은행 031-01-032121-0 박정모 | ∙ 회비∙찬조금 계좌번호 -부산은행101-2017-1674-08 사)박정모∙정분옥 | ||
박정희는 독재자이다~ 그러나 그 독재는 국가와 국민과 민족을 위한 독재였으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독재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꿈은 '복지사회 실현'이었다. |
1. 경과보고
가. 3월 운영위원회의 및 강연회 (2016. 3. 7(월) 18:30)
◦ 주요내용 - 김성진 부산대교수의 '현실과 동떨어진 괴담으로 대한민국이 흔들린다'
에 대한 강연
- 새로오신 회원-김순성·김 현·박병식‧윤승도‧이옥자 이사 (5명)
◦ 고액회비 및 찬조금 내신 분 (3월분)
금 액 × 인원 | 내 신 분 |
1,266,000×1명 | 정분옥 이사장 |
500,000×1명 | 이일출 일동전자 회장 |
360,000×1명 | 박찬실 자문위원 |
200,000×1명 | 장유수 이사 |
50,000×2명 | 강춘남 동구지부수석부회장, 김영아 이사 |
20,000×4명 | 김병걸부회장, 박정순·서옥원·정경진이사 |
◦ 회의자료 - 금세기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 박정희(Ⅲ)
- 현재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국민들의 여론
(역대 대통령들의 역할시리즈, 한반도를 강타한 주요한 사건씨리즈)
나. 연제구지부 제2지역회 3월 월례회의
- 2016 3.10(목) 19:00 - 장소 : 삼천포횟집(연산9동)
- 사무장 취임 : 장미연, (전임 정금주)
다. 부산진구지부 3월 월례회의
- 2016.3.11(금) 18:30 -장소 : 묵도리식당(가야2동)
라. 여성위원회 3월 월례회의
- 2016.3. 14(월) 12:00 - 장소 : 다이아몬드호텔 (연산5동)
마. 양산시지부 제9차 정기총회
- 2016.3. 14(월) 18:30 - 장소 : 조방낙지(양산시 북정동)
∘ 2015년도 결산, 감사선출(김승채 ← 전임: 박판동)
바. 연제구지부 제1지역회 3월 월례회의
- 2016.3. 14(월) 19:00 - 장소 : 신촌설렁탕(연산2동)
사. 연제구지부 제3지역회 3월 월례회의
- 2016 3.25(금) 19:00 - 장소 : 화신불고기(거제2동)
2. 공지사항
가. 본부사무실을 같이 사용하는 단체
∘ 단체명 : 민족통일 부산광역시 협의회(회장 : 정분옥)
∘ 사용시기 : 2016. 3. 1 부터
나. 여성위원회 춘계야유회 및 4월 월례회의
- 일시:2016. 4. 26(화) 07시 출발 - 장소:전남 영광군일원
3. 박정희 대통령 숭모전당 (기념∙도서관) 건립기금 모금현황
- 관리계좌 : 부산은행 031-01-032121-0 박정모 2016. 3.31현재
수 입 부 |
| 지 출 부 | ||||||||||||||||||||||||||||||||||||||||||||||||||||||||
과 목 | 금 액 | 과 목 | 금 액 | |||||||||||||||||||||||||||||||||||||||||||||||||||||||
기 금 | 60,110,000 | - | - | |||||||||||||||||||||||||||||||||||||||||||||||||||||||
이 자 | 3,545,656 | |||||||||||||||||||||||||||||||||||||||||||||||||||||||||
계 | 63,655,656 | 계 | - | |||||||||||||||||||||||||||||||||||||||||||||||||||||||
※ 50,000,000원 별도적립 별도이자 : 233,565원 발 기금 내신 분 (순서 - 금액별, 직위별, 가나다순) : 10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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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전 모으기에 동참하신 분
- 관리계좌 : 부산은행 140-12-023999-9 이현주 재무국장 2016. 3.31 현재
계 : 모금액 1,037,350 + 이자 2,753= 1,040,103 참여 : 48명 | |||||||
내신 분 | 금 액 |
| 내신 분 | 금 액 |
| 내신 분 | 금 액 |
정분옥 이사장 정병호 상임고문 김상훈 고문 박영수 고문 김점수 중앙위원 강순자 부회장 노명숙 부회장 박상종 부회장 박외숙 부회장 손찬이 부회장 이성균 부회장 추종구 부회장 강광대 이사 구맹회 이사 권정옥 이사 권희동 이사 김미화 이사 김상섭 이사 문필선 이사 문영자 이사 박영수 이사 박한수 이사 변종길 이사 사공문 이사 성남태 이사 손연자 이사 신기윤 이사 윤상수 이사 이차희 이사 임옥출 이사 장복녀 이사 조지향 이사 진혜정 이사 최숙희 이사 한기자 이사 남기영 양산前회장 천숙희 해운대회장 정기환 거창회장 신천팔 거창국장 김재곤 사무처장 우옥자 여성위원장 박옥희 여성위감사 | 93,200 2,460 2,120 8,580 329,160 2,140 103,390 7,160 34,810 12,380 7,550 8,000 11,000 51,000 4,940 160 3,280 760 9,000 7,200 4,300 15,040 5,440 630 4,150 27,490 4,440 1,600 990 10,000 1,250 4,480 17,930 150 12,000 8,370 10,850 22,400 19,800 2,000 70,800 19,000 |
| 이현주재무국장 김도원여성부장 이찬일 청년위원 전용기 홍보부장 연제구 제2지역회 무명인 (13.2/15참석하신분) | 8,130 9,240 17,750 12,960 27,010 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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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 박정희 (Ⅳ)
김일성 자서전에 당시 남침하지 못한 것 후회한다 했지 않은가.
그때,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아!!
이렇듯 굶어 죽지 않으면 공산화되기 일촉즉발의 풍전등화였던
나라를 구하고자 구국에 일념으로 박정희가 나타난 것 아닌가.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하지만 당시에 박정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당리당략과 사리사욕, 출세욕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고 보면 지금쯤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희들이 제일 좋아하는 축구가 월드컵 세계 4강에 올라 대한민국,~,
짝, 짝, 짝~, 하며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었을 것이며,
올림픽을 개최하여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수가 있었을까?
또, OECD경제대열에 오르는 오늘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아,
사업가는 10년, 정치가는 최소한 10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지혜가 있어야 하며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 추진력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대일 청구권으로 받은 돈으로 동남아 국가들은
호텔 짓고, 백화점 짓고, 선박 구입 등, 비생산적인 곳에 썼지만,
박대통령은 10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으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하며
이승만정권 때부터 14년이나 지지부진 하게 끌어 오던 한일수교를
결단, 결행, 단행하여
산업의 쌀이라 일컫는 제철공장 짓고, 고속도로등, 경제 재건을 위한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여 지금은 조선업, 철강업, 기타, 중공업 분야에서
세계 1,2위로 일본과 경쟁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는 지역간 격차를 줄이고 산업의 동맥으로 토목 건설,
기술 축적으로 지구촌 곳곳에 건설수주 외화획득, 매년 고도성장을
30년 이상 지속, 지금은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박대통령의 업적을 기반으로 가 아닌가.
- 박정희를 제대로 알고있는 어느 지식인이
땅에서 땀흘려서, 한국농업 배워 잘살아보세
- 하루 한끼도 못먹는 사람들 갈대로 만든 움막에 살아,
한국이 세운 새마을 훈련원 농업지도자 등 1000여명 양성하여
"한국처럼 발전하고 싶어요"
아프리카에서도 최빈국인 모잠비크는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됐다. 지난달 찾은 수도 마푸투에는 해안가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새 국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부는 흙길, 일부는 아스팔트만, 일부는 이제 막 차선이 그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남북 길이가 2000km에 가까운 모잠비크에서 지금까지 남북 연결로는 마푸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편도 1차로 1번 국도가 유일했다. 전 국토가 아프리카 남동부 해안에 면해 있고 경작지도 풍족하지만 지금까지는 국토 대부분이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1975년 독립한 이후 20여년 내전을 겪었고그 뒤로도 정정이 불안했다가 최근에야 안정됐기 때문이다.
새로 생긴 국도를 따라 100km쯤 올라가 모잠비크 최대 농업 지역인 마니싸군의 새마을 농업훈련원에 도착했다. 한국 국제구호단체인 기아대책(KFHI) 등이 모잠비크 빈곤 퇴치를 위해 만든 학교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포스코·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이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2011년부터 운영을 시작해 지금까지 농업 지도자 등 1000여 명을 양성했다.
이날 학교를 찾았을 때도 새마을 농업훈련원 로고가 그려진 빨간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학생 30여 명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교실 바깥의 실습용 밭을 따라 난 길에는 한국 농촌에서 자주 보이는 경운기를 탄 검은 얼굴의 청년들이 보였다. 경운기와 다른 농업용 기계들은 전부 한국에서 들여왔다.
이들은 수업 시작 전 모잠비크 국가를 불렀다. 실습생 벨린다 아멜리 타멜리(20·여)씨에게 국가 부를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모잠비크가 가치 있는 나라이고, 그 안에 속한 우리도 가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한다"고 답했다. 총 8남매의 맏이인 아멜리는 학교에서 15km 떨어진 마을에 산다. 아버지는 인접국인 아프리카 부국 남아공의 회사가 세운 사탕수수 공장에서 노동을 한다. 8남매 중 초등생 1명, 중학생 2명을 빼고는 남매들도 전부 일하지만,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먹으면 다행이라고 했다. 또 다른 실습생 아마릴두 무가비(23)씨는 "농업훈련원에서 배우는 것들이 나를 발전시킨다"면서 "농업 기술을 배워 마을 사람들에게 전수하면, 농작물을 생산해 돈을 벌고 마을 공동체가 변할 수 있다"고 했다. 모잠비크는 아직 인구 90%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다.
농업훈련원에는 기아대책에서 파견된 이상범 원장 등 한국인 3명이 교육·운영을 돕고 있지만, 교사 대부분은 이미 농업훈련원 교육이나 한국 연수를 통해 농업 기술을 전수받은 이들이다. 교사 다닐루 라울(39)씨는 "모잠비크 국기에는 책과 곡괭이와 총이 들어있는데, 여기에 우리의 목표가 다 있다"고 했다. 그는 "총은 나라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뜻이지만, 이보다 중요한 게 책과 곡괭이"라면서 "열심히 배우고 농업을 일으켜 한국처럼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한국은 모잠비크의 지향점이었다. 2013년 농업훈련원 1기 졸업생으로 현재 모잠비크 최고의 사범대학에 다니는 미구엘 주아웅 루이자 마르셀리뇨(24)씨는 모잠비크의 사회·정치 문제를 지적하며 "모잠비크는 능력보다 그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느냐만 보고, 정치인도 자기편이 아니면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의견을 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것은 능력 있고 노력하는 사람을 대우했기 때문 아니냐" 며 "한국을 더 배우고 싶다"고 했다.
현재의 한국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이후 아르투르 친단달리 마니싸 군수를 만나 "한국도 요즘 사회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자 그는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가 한국을 방문해 농업을 배우듯이 한국의 학생들, 사회 인사들도 모잠비크에 와 보면 어떨까요? 하루 한 끼도 못 먹고 갈대로 만든 움막집에서 살면서도 제2의 한국을 꿈꾸는 청년들을 보면서, 한국이 일어서게 된 초심(初心)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2015. 9. 21(월) 조선일보 국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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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민
- 고민이란 놈을 가만히 보니 파리를 닮았네.
게으른 사람 콧등에는 올라 앉아도
부지런한 사람 옆에는 얼씬도 못하네.
팔을저어 내쫒아도 멀리 날아가지 않고 금방 제자리에 내려앉네.
파리채를 들고 한 놈을 때려 잡으니
잠시후 또 다른 놈이 날아오네.
고 집
-고집과 함께 살고있는 사람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보아하니 저놈은 제멋대로만 하려고 하는 아주 버릇없는 놈이오.
당신은 왜 저런 못된 놈을 데리고 사시오? ”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그는 한숨을 깊게 쉬며 말했다.
“처음엔 저놈이 어떤 놈인지 몰랐어요.
알고보니 저놈은 힘이 무척 센 놈이에요. 내가 데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저놈이 날 붙들고 놓아 주질 않는 답니다.”
꽃과 바람
- 세상을 아름답게 살려면 꽃처럼 살면되고
세상을 편안하게 살려면 바람처럼 살면된다.
- 꽃은 자신을 자랑하지도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바람은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험한산도 아무 걸림이 없이 오른다.
남북분단 책임있는 일본, 이럴 순 없다
"韓 유효 지배 범위는 휴전선 남쪽" 日 방위상 발언에 아연실색
한반도 분단은 日 침탈에서 비롯… 직접적 책임 있다는 사료 넘쳐나
동의 없는 日 군대 한반도 진입, 용납될 수 없다는 마지노선 지켜야
한반도 분단의 책임 소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우리는 책임 없다"는 것이다. 1995년 무라야마 당시 총리는 국회에서 "일본 국민으로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자민당 등이 반발 움직임을 보이자 다음 날 바로 발언을 전면 번복했다. 그해 10월엔 고노 당시 외상도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공개 표명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일본에 사죄받고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할 수많은 역사적 상처를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남북 분단은 가장 뼈저리고 참담한 상처다. 2차대전 후 독일 분단은 패전국에 전쟁 책임을 물린 것이었다. 똑같은 전범(戰犯) 국가 일본은 그런 패전의 책임을 부과받지 않았다. 대신 피해자인 우리가 분단이란 징벌을 떠안았다. 억울하고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945년 이후 해방 공간에서 남북이 분단된 것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종전(終戰) 일주일 전에 참전해놓고 전리품을 요구한 소련의 치사함이었다. 미국은 그런 소련과 타협했고, 미·소의 냉전적 분할 점령이 38도 선을 경계로 한 분단 상황을 낳았다. 우리 잘못도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 정국에서 우리는 좌우로 갈라져 통일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역사관, 어떤 해석에 따르더라도 일본의 책임이 면제되는 법은 없다. 한반도 분단은 결국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强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단이냐 아니냐의 기로에 설 일 자체가 없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는 유례없이 엄혹했다. 35년 일제 지배를 겪으며 우리는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 역량이 쇠약해졌다.
일본에 분단의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사료(史料)는 넘쳐날 만큼 발굴돼 있다. 이 문제를 연구해온 최영호 하와이대 명예교수는 미국·소련보다 일본에 더 주된 책임이 있다고 단언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패전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일제는 일왕(日王)을 보호하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려는 망상을 품었다. 일본은 소련을 중재자 삼아 미국과 강화하려 했다. 그 바람에 항복이 늦어져 소련의 기만적인 '일주일 참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패색이 짙었던 1945년 5월 일본의 '최고 전쟁지도 회의'는 '소련을 움직여 일본에 유리한 중개자가 되도록 유도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전쟁 승리란 목표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일본 군부 내에선 전쟁에 져도 일왕이 계속 군림하도록 한다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가 최우선 목표가 돼 있었다. 더 기막힌 일은 결정문에 '조선을 계속 지배한다'는 계획이 명기된 점이었다. 스탈린의 도움을 받아 '천황'을 지키고 한반도를 '공영권(共榮圈)' 안에 붙잡아 두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소련으로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독일과 싸우던 전력을 극동으로 이동시킬 때까지 일본의 항복을 최대한 늦춰야 했다. 스탈린은 일본의 중재자 제안을 수락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틀 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불과 1주일간의 전쟁으로 소련은 북한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요컨대 소련 참전도, 남북 분단도 일제의 허황한 망상 때문에 벌어진 '역사의 실수'였다. 일본은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소련에 기대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어내려 시간을 끌었다. '천황제'와 '공영권'을 지키겠다는 욕심 때문에 스탈린의 책략에 놀아났다. 결국 일본은 '천황제'를 지키는 데 성공했지만 우리는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일본은 분단의 원인 제공자였던 것만이 아니다. 전후(戰後) 일본은 남북 분단 상황을 즐기며 거기에 편승해 국가 이익을 극대화한 수혜자이기도 했다. 6·25가 터지자 일본은 "신(神)이 도와준다"며 환호했다. 폐허가 된 일본은 6·25 특수(特需) 덕에 부활했고 재(再)무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의 안보 우산도 얻어 쓸 수 있었다. 제국주의 가해자가 도리어 성찬(盛饌)을 누리는 역설적 상황이었다. 역사는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유효 지배 범위는 휴전선 남쪽"이란 나카타니 일본 방위상의 발언이 우리의 가슴을 찔렀다. 국제법 논리나 우방에 대한 예의를 떠나 그 바닥에 깔린 역사관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로 우리는 아직껏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양심 있는 정상적 국가라면 안타까워하며 먼저 분단 해소를 돕겠다고 나서야 옳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마치 남의 일인 양 모르는 척하며 염장 지르는 소리를 해대고 있다.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은 군대 파견으로 시작됐다. 자위대의 동선(動線)에 우리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남이건 북이건 우리 동의 없는 일본 군대의 한반도 진입은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노선이 되어야 한다.
- 2015. 10. 23(금)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위원
총선에간판바꿔비집고나온從北통진당잔존세력
대법원이 '내란 선동 비밀 회합'으로 판단한 통합진보당 내 'RO(혁명조직) 모임' 참석자 12명이 이번 총선에 민중연합당이라는 간판으로 출마했다. 또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출신 출마자가 이들을 포함해 60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 중 대부분 민중연합당 소속이고 일부가 무소속이다. 만약 비례대표 정당 투표에서 이 당이 3% 이상을 얻으면 또다시 국회의원을 내게 된다.
2013년 5월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합정동의 어느 종교시설에서 열린 RO 회합은 전시(戰時)에 통신 시설, 정유 시설 같은 국가 기간 시설 타격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확인돼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대법원은 이석기 전 의원 등 회합 주도자에게 내란 선동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렸고, 헌법재판소는 이들의 이런 모의 활동과 함께 통진당 강령 자체가 민주적 헌정 질서에 위배된다며 헌정 사상 최초로 정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2014년 12월 통진당 해산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이 당의 핵심이라는 사람들은 "해산되면 다른 당을 만들면 된다"고 했었다. 그 사람들이 공언했던 대로 총선 정국의 틈새를 비집고 다시 유사(類似) 정당을 만들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현행법상 RO 모임 참석자라 해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정치 활동까지 막을 방법은 없다. 또 해산된 정당의 소속원들도 당 이름을 바꾸고 강령과 기본 정책을 감추고 손질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민주적 기본 질서를 유린한 사람들이 바로 그 민주주의 질서를 활용해 입법부에 활동 거점을 마련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RO를 구심으로 하는 통진당 종북파 사람들은 2005~2006년무렵 구(舊)민주노동당을 장악한 뒤 국고보조금과 당 조직을 틀어쥐고 온갖 패악질을 거듭했다. 2012년 19대 총선 때 만천하에 공개된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이후 수습 과정에서 노출된 폭력 사태는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를 똑똑히 보여줬다. 이번에는 자신의 통진당 전력(前歷)을 감추면서까지 정계 진출을 노리는 사람도 등장했다.
이번에 출마한 통진당 출신 모두를 과격 종북 세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민이 그들의 숨겨진 정체를 똑똑히 목격한 이상 이번 선거에서 그들이 노리는 대로 될 리가 없다. 다시는 이런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유권자들이 표로 똑똑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 2016. 4. 1(금) 조선일보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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