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예찬---출퇴근 길 4계
<1986년 7월 보령화력 사락배 제9호 수록>
내가 출퇴근하는 길은 꽃 길이며, 무심히 보아 넘길 수 없는 특징이 사시사철 펼쳐진다.
---봄---
만산홍화(滿山紅花)랄까 만산(萬山)에 진달래 좌악 깔린다. 구비구비 출퇴근길 양편으로 소나무
밑에 활짝 핀 진달래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멋있는 길이다.
진달래
소나무 우거진 그늘에서 겨우내 맺힌 추위 발갛게 녹히려나
새빨갛게 소리쳐 울지도 못하고 분홍 빛 서러움 안으로 삼키네
그래도 네 불러온 꽃 신호로 송학고개 넘는 길은 1년 내 꽃피는구나
---여름---
단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초하지절.
이런 날이면 출퇴근길 양편에 있는 모든 초목의 웃는 소리가 이다지도 즐겁게 들려온다. 하하 웃으며 쑥쑥 크는 소나무, 호호 웃으며 쏙쏙 자라는 모 포기, 산 중턱에 솟아있는 저 345kv 철탑마저도 허허 웃음 터뜨리며 더 깊이 뿌리를 내릴 듯 이토록 내리는 비가 고마운 초여름.
지난 주까지만해도 진한 녹색 바탕에 흰 꽃송이를 피워 짙은 향기를 뿜던 찔레는 가엽게도 이제는 다시 뽀족한 기다림의 가시가 되었다. 송학고개 넘는 골짜기마다 자연의 부케로 장식하던 찔레는 그래 연분홍 진달래 피었다 간 저 고개 멀리 함께 사라져버렸다.
찔레
흰 폭죽이 터졌느냐 그렇게 확 퍼지며
흘러내리는 줄기 그 마디마디마다
줄줄이 피었구나 소담스러운 꽃송이
가까이 보면 색신(色神)의 눈부신 흰 살점
멀어지면 소복히 담긴 한 광주리 꽃다발
허리낮춰 인사하는 무희의 부푼 치마폭
사뿐히 무릎 꾼 네 앞으로
으시대며 달려가는 나는 흑기사
저토록 벌 나비 잉잉 노래하며 모여드는 건
놓치면 어이하나 네 자태 때문인가?
아니면 그윽한 향기 때문인가?
회사 사택에서 출발하여 송학고개 넘어 마을을 지나면 또 하나 한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나타나고, 그 입구 쪽에 토정공 이지함 선생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만(古灣)포구 뒷산은 초록 일색일 때 그야말로 홀로 피는 하얀 산딸나무 꽃이 생전에 토정선생 입으시던 흰 도포처럼 희다.
토정 묘
송도에서 바라보면 좌청룡 우백호 뚜렷하여
토정공 쉬는 자리 명당중의 명당일세
지나가며 목례하면 일어나 반기실 것 같아
오늘도 옷깃여며 고개 숙인다
살아생전 나랏일 걱정하셨듯
산업의 대동맥 전력사업이
날로 날로 번창토록 살펴주소서
산딸나무 꽃이 층층이 새하얗게 피다 지면 계절은 어느새 여름의 막바지를 치닫는다.
---가을---
천수만(淺水灣) 물빛이 더욱 진해지고, 간척지 넓은 들에 벼 이삭이 영근다. 봉대산에서 흘러내린 옷자락 하나 송학고개를 이루었다. 가파른 산봉우리에 오르는 길은 갈비로 깔려 있어 미끄럽고 우거진 소나무는 대나무같이 곧다. 골짜기마다 참나무며 칡넝쿨 단풍이 들어 사방천지가 멋있는 그림 아닌가!
훠이훠이 정상에 올라 확 트인 사방을 둘러보면서 소주 한 잔 부어 놓고 외적의 침입을 알리던 봉화지기의 심정이 되어본다.
봉대산 높이 올라
봉대산 높이 올라 사방을 둘러보자
서해 넓은 물 가에 누워있는 성주산이
푸근한 품으로 보령시를 감싸고
멀리 서천 앞바다 춘장대가 보일 듯
점점이 섬들이며 길게 벋은 수평선
저기가 삽시도 그 앞이 원산도
안면도 효자도 월도 옆으로
삼형제바위 나란히 다정하게 서있다
어항에서 은포리로 오천항까지
크게도 개척했네 김 양식장
건너편 왕대사 비구니 독경소리
청아하게 들려올 듯 가까이 있고
한여와 송도의 염전에서는
바닷물이 소금되어 앙금이 익는 소리
급하게 밀려오는 천수만 밀물은
어청도 등대 밑 벼랑아래서
하이얀 파도되어 부서지다가
외연도를 감돌며 동백내음 싣고 오고
망치소리 요란하던 고정리 뻘 밭엔
웅대무비 보령화력 발전소가 서있네
낙조는 붉게 타며 절경에 채색하고
바다 속 깊이깊이 빨려 들어갈 제
갈매기는 귀항하는 통통배 위를 맴돈다
봉화 숯 검은 흙 된 허물어진 그 터에서
친구야 이 밤 모닥불 밝혀 놓고
외로운 봉화지기 넋을 위로하자
휘황한 발전소 불빛이 누리를 비추는 밤
대천 해수욕장 넓은 백사장엔
뽀드득 연인들의 발자국 새겨지겠지
해상공원이 아름답게 펼쳐진
봉대산 정상에 높이 올라서
널리 널리 마음의 봉화를 밝혀나 보자.
송학마을 앞쪽에 저수지 하나 있어 명경 같은 수면에 파란 하늘이 비쳐 운치를 더한다.
송학 저수지
연(蓮) 잎이 곱게 피어날 때
노란 보트 띄우고 월척하던 태공들이
겨울에도 못 잊어 다시 찾아와
두꺼운 얼음 깨고 붕어를 낚는
여기는 고정리 송학 저수지
지는 해 붉은 노을 물위에 비치면
딸랑딸랑 방울 울려 밤낚시 즐겁다
텐트 옆에 차려 놓은 코펠 속에서
매운탕은 보글보글 잘도 끓는다
아가씨야 어서 와 맛 좀 보세요
잊지 못해 다시 찾는 송학 저수지
---겨울---
해풍이 눈송이를 몰고 송학고개에 머물면 숱한 나뭇가지엔 설화(雪花)가 피어난다. 송학국민학교 주위의 노송과 봉대산 중턱의 춘란(春蘭)은 겨울을 모르는 초목이다.
설란(雪蘭)
이 겨울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눈 꽃
꿩도 산토끼도 고개를 쭈뼛
눈꽃 구경에 열심이다.
독야청청 소나무야 뽐내지 마라
바위 틈새 춘란도 초록잎 세우고
눈보라 아랑곳없이 겨울을 이긴다.
또 하나 피는 꽃은 자연의 꽃이 아닌 인간 의지의 꽃이다. 검은 꽃 ‘김’.
탕탕탕 요란한 경운기에는 할머니도 아저씨도 중무장하고 지게지고 소쿠리 챙겨 바다로 나간다. 이렇게 손시린 날에도 물 때 맞춰 따온 김을 추위에 말린다. 논둑에도 장독대에도 마을엔 온통 검은 꽃이 만발한다.
김
놀놀하게 구워서 양념간장 찍고
밥숟갈에 얹어서 입에 넣으면
사각사각 고소한 게 맛이 최고여
부서지는 건 매서운 추위고
고소한 건 인간의 노력인기여
내가 출퇴근하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 사계가 뚜렷하고 그 때마다 피어나는 특색있는 꽃.
오늘도 나는 이 길을 힘차게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