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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파수꾼이 되자!
에스겔 33:7~11
7.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너는 나에게서 경고하는 말을 받거든 그대로 일러주어라.
8. 내가 한 죄인에게 '너는 사형이다.'라고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
9. 그러나 네가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었는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너는 죽지 아니하리라.
10.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라. '우리가 거역하며 저지른 자신의 죄에 깔려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산단 말이냐?' 하는 자들에게
11. 일러주어라. '내가 맹세한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오너라.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오너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12. 너 사람아, 네 겨레에게 일러라. '죄 없는 사람이라도 죄를 짓는 날에는 전에 죄가 없었다고 해서 제 목숨을 구하지 못하리라. 죄인일지라도 제 죄를 청산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전에 죄가 있었다고 해서 망하지 않겠지만, 죄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을 저지르고서도 전에 죄가 없었다고 해서 살지는 못한다.
8월 26일 네팔-중국 티베트 국경 히말라야 지역에서 거대한 암반과 빙하가 함께 붕괴했습니다. 이로 인한 돌발 홍수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죠. 9월 3일 오전 7시(한국시간) 네팔 재난 당국 집계로 사망 1225명, 실종 4757명입니다. 이재민도 16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실종된 사람들 가운데는 39개국에서 온 외국인이 약 600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육로와 교량이 전면 유실되었고. 약 2만 채의 주택을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해발 5천M가 넘는 험준한 산악 지역 인데다 접근 도로조차 없어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수력발전 사업에 참여했던 우리 국민 9명도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거대한 암석·빙하 사면의 붕괴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주목하는 중요한 배경은 히말라야의 급격한 온난화입니다. 기온이 올라 빙하가 녹고 후퇴하면서 암석을 접착제처럼 붙잡고 있던 영구동토층(permafrost)까지 녹아 암반을 붕괴시켰다는 것이죠.
이걸 도식으로 보면 빙하·암석 붕괴 → 산사태 → 하천 차단 → 임시 호수 형성 → 댐처럼 막힌 물의 붕괴 → 돌발홍수 → 하류의 산사태와 토석류 발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사고 뒤에도 붕괴 잔해가 강을 막아 새로운 호수들이 생겼고, 2차 붕괴홍수 위험이 경고되었습니다.
이번 히말라야 돌발 홍수 사건은 일회성 사건이 아닙니다. 국제통합산악개발센터(ICIMOD)의 조사에 따르면 힌두쿠시-히말라야(HKH) 산맥의 크고 작은 빙하호는 2만5천 개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후변화로 새로운 호수가 생기고 기존 호수가 확대되면서 위험지역과 위험도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네팔 빙하·암석 붕괴는 네팔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힌두쿠시-히말라야(HKH) 전체의 빙하·적설 감소가 아시아 16개국의 물·식량·에너지 체계를 흔드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국제통합산악개발센터는 이 지역의 눈과 얼음이 12개 주요 하천을 통해 산악 지역 약 2억4천만 명과 하류 약 16억5천만 명, 합계 약 20억 명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평가합니다. 2026년 조사에서는 빙하의 얼음 손실 속도가 2000년 이후 약 두 배로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빙하가 녹으면 초기에는 융빙수가 증가하면서 홍수와 빙하호 붕괴, 산사태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빙하의 저장량이 충분히 감소하고 ‘피크 워터’를 지나면 건기에 공급되는 물이 감소라게 됩니다. 산악개발센터는 대체로 금세기 중반까지 물 공급이 증가할 수 있지만 이후 감소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으로 전망합니다.
따라서 위험은 크게 ① 빙하붕괴·빙하호 홍수 → ② 산사태·토석류 → ③ 댐·수력발전소 파괴 → ④ 농업용수 불안 → ⑤ 식량 생산 감소 → ⑥ 식량 가격 상승 → ⑦ 도시 식수난 → ⑧ 국가 간 물 갈등과 기후난민 증가라는 연쇄 구조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인근국가들 간의 물 전쟁이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팔은 기후위기에 가장 책임이 없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온실가스 배출 최하위 국가죠. 하지만 부유한 국가들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피해를 가장 먼저 때려 맞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개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공동체 전체가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왜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가, 누가 위험을 경고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너진 뒤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활동하던 기원전 6세기 초 유다는 거대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앗시리아가 몰락한 뒤 바빌로니아가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했고, 작은 나라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기원전 597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여호야긴 왕과 지도층을 포로로 끌고 갔죠. 에스겔도 이때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승전 후 바빌로니아는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하지만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은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죠. 결국 시드기야 왕은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 기원전 586년경 예루살렘은 함락됩니다. 성전은 불타고 왕조는 무너졌으며 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우리가 거역하며 저지른 자신의 죄에 깔려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산단 말이냐?”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에스겔을 향해 말씀합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너는 나에게서 경고하는 말을 받거든 그대로 일러주어라.” 7절 말씀입니다.
고대 도시에서 보초, 곧 파수꾼은 성벽 위 높은 망대에 서서 멀리 적군이 나타나면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고 나팔을 불어야 했습니다. 파수꾼의 임무는 적군과 직접 싸워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임무는 위험을 발견하고 사실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에게 주어진 예언자로서의 사명입니다. 예언자는 왕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성의 인기를 얻는 사람도 아닙니다. 공동체가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죄인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는다면 죄인은 자기 죄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하느님께서는 파수꾼에게 지우겠다고 경고합니다(8절).
이것이 파수꾼에게 주어진 책임 윤리입니다. 악을 직접 행하지 않았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위험을 알면서도 침묵했다면 그 침묵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책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권력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며, 공동체가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불이익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그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파수꾼이 충분히 경고했는데도 상대가 듣지 않았다면 최종적인 책임은 듣지 않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형수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죗값으로 죽게 되지만 파수꾼은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이죠(9절).
그러니 파수꾼의 책임 윤리는 양방향입니다. 파수꾼은 경고할 책임이 있고, 경고를 들은 사람은 그 경고를 듣고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이미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이스라엘은 망한 상태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가 된 백성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기보다 절망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나라까지 망했다. 이제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는가?’하고 말이죠(10절 참조).
그때 하느님께서 말씀합니다.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죄인이라도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고 사는 것을 나는 기뻐한다(11절a).”
하느님께서 파수꾼을 세우고 경고하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을 처벌하고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설령 그들이 죄인일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하느님은 간절하게 외칩니다. “너희는 돌아오너라. 나쁜 버릇을 고치고 돌아오너라. 이스라엘 족속아,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11절b)”
여기서 ‘돌아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브(שׁוּב)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가던 길에서 돌아서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회개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착취했다면 착취를 멈추고, 빼앗았다면 돌려주고, 잘못된 정책이라면 수정하며, 권력을 잘못 사용했다면 권력의 사용방식을 바꿔야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눈물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며, 말이 아니라 행동이란 것이죠.
12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과거에 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오늘의 잘못이 자동으로 용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과거에 잘못했던 사람도 오늘 돌이킨다면 과거의 죄 때문에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의인의 과거 공로가 현재의 악행을 면책하지 않고, 악인의 과거 역시 현재의 돌이킴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 어떤 과거의 공로도 오늘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과거의 잘못이 오늘날 의롭게 산 것에 대한 원죄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죠. 하느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과거에 누구였느냐만이 아니라,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본문의 메시지는 다음의 네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위험을 보았으면 말하라. 침묵에도 책임이 있다. ▲경고를 들었으면 선택하라. 자신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잘못된 길임을 깨달았다면 돌아서라. 회개는 후회가 아니라 방향 전환이다. ▲그리고 누구도 포기하지 말라. 하느님의 뜻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성전도 불탔습니다. 나라까지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폐허 한가운데서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죽으려고 하느냐. 돌아오너라. 그리고 살아라.”
도덕경 71장에는 “지부지(知不知)는 상(上)이요, 부지지(不知知)는 병(病)이라, 부유병병(夫惟病病)이니, 시이(是以)로 부병(不病)”이란 말이 나옵니다. “알면서 모르는 것이 최상이요, 모르면서 안다는 것이 병이다. 무릇 생각건대 병을 병으로 알면 이로써 병을 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부지(知不知)나 부지지(不知知)는 명사절 형태로 쓰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때문에 ‘알면서 모르는 것’, ‘모르면서 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걸 “모르는 걸 안다‘거나 ’아는 걸 모른다‘로 해석하면 문장의 뜻이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문장은 무지(無知)를 아는 것, 즉 부지(不知)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노자는 부지(不知)를 아는 것(知)이야 말로 두루 통하여 걸림이 없는 앎이며 그래야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병(病)이라는 기재(器材)를 동원합니다.
그렇다면 ‘알면서 모르는 것[知不知]’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알면서도 속아주거나 모르는 척 시치미 뗀다는 말은 아니겠죠. 오히려 아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과시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했던 말과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自覺)하라는 말이죠.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허구인가를 깨달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자각을 한 후에야 새로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에 나오는 ‘대각연후지대몽(大覺然後知大夢)’, ‘큰 깨달음이 있고 난 연후에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문장에서 ‘알면서 모르는 것[知不知]’이란 안다고 하는 것까지 오히려 알지 못한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진리 앞에서는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동시에 알지 못하는 것이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이 동시에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부지지지(不知之知)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보니 지부지(知不知)는 상(上)이요, 부지지(不知知)는 병(病)이라는 말의 뜻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부처가 깨달았다고 하면 이미 부처가 아니라는 금강경의 이야기와도 통하는 말이죠. 정말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이미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를 분별하는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죠.
하지만 뭘 조금 알았다고 해서 마치 모든 것을 깨달은 척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병(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되고, 힘을 갖게 되면 자신도 파멸시키고 남도 파멸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지지(不知知)’, ‘모르면서 안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모가 난 앎입니다. 한곳으로 치우치면 사단이 나고 모가 나면 시비가 이는 법이죠. 그러니 분쟁이 끊이지 않고 나라도 소란스러울 수 밖에...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요? 이제 부유병병(夫惟病病)이니, 시이(是以)로 부병(不病)하는 삶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병을 병으로 알면 이로써 병을 앓지 않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을 병으로 알면 그 병을 치료할 길을 찾게 되는 법. 그래서 결국은 그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죠. 하지만 그 병도 너무 깊어지면 치료하기 어려운 법이니 빨리 병을 병으로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의 파수꾼은 심판을 외치는 사람이기 이전에 생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어둠을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위험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며, 모두가 침묵할 때 나팔을 불어 공동체가 파멸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시대의 성벽 위에서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너는 보고도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죠.
9월 1일 '민주당TV(민티07)'가 개국했습니다. 김민석 당대표가 취임하면서 최우선적으로 추진한 일입니다. 특히 김 대표가 민주당TV를 ‘교과서’, 기존 친여 성향 민간 미디어들을 ‘학습지’에 비유하면서 진영 내 공론장 주도권을 둘러싼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항간에서는 뉴스 공장, 매불쇼, 새날 등 진보 유튜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민티07’ 첫 생방송에서 동 시간대에 방송하는 ‘뉴스 공장’과의 대결 양상으로 드러났습니다. ‘민티07’은 동시접속자 최대 5만8천 명인데 비해 ‘뉴스 공장’은 21만 명을 찍었고 슈퍼쳇은 5천5백여만 원으로 세계 1위를 기록했다고 하죠.
‘민티07’의 긍정적 평가는 '정당 중심의 공식 의제 설정력 회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당이 직접 정책 결정의 근거와 공식 입장을 선제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공론장의 첫 번째 기준점을 당 내부에 다시 세우는 시도라는 것이죠. 기존 민간 미디어들과 경쟁이 아닌 연대와 협력을 통한 품격 있는 공론장 생태계 구축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존재합니다.
반면 부정적 평가는 '관제방송화 및 미디어 통제 의도’라는 것입니다. 정책 설명을 넘어 특정 정치적 해석의 정당성까지 규정하려 들 경우,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는 '정답지'나 '관제방송'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진영 내 빅스피커(김어준 등)에 대한 견제 및 미디어 통제 의혹도 제기되고 있죠. 당대표 1인의 홍보 채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대권 행보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 중반으로 폭락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국민의힘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내란을 겪은 지 1년 10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또다시 정치지형이 원점으로 회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책임이 대통령과 민주당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과거처럼 국민이 나서 만든 혁명이 정치인들에 의해 무산되고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총선과 대선의 패배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다시 도탄에 빠지게 된다면 그 역사적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에스겔 본문의 메시지는 ‘국가가 위험한 방향으로 갈 때 누가 나팔을 불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와 지역 주민이 희생될 때 누가 위험을 경고할 것인가?’ ‘기후위기의 위험을 알면서도 무한성장만 외칠 때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AI와 첨단기술이 엄청난 부를 만들어내면서 그 비용과 위험을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에게 떠넘긴다면 누가 막을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병으로 알아 그 병을 치료할 길을 찾는 것은 오늘 우리 깨어 있는 국민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여 시대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한몫하여야 하겠습니다.
파수꾼의 사명을 깨닫고 그 일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