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가
이덕하
2008-10-04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1
진화 심리학.. 2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하는 점들.. 2
나는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가.. 4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1989년부터 동독과 소련에서 나온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라는 식의 제목이 붙은 책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책들은 당시 운동권들 특히 민중민주(PD) 경향의 필독서였다. 아마 적어도 1992년부터는 내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내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도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05년 4월 29일에
올린 「『빈 서판』에
대한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양가감정」이라는 글의 제목에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듯하다. 따라서 나는 적어도 13년
동안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다(나의 추정치는 15년이다). 어쨌든 나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어떤 면에서는 변절한 셈이다.
내가 마르크스주의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버린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진화 심리학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를 ‘다윈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명칭은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책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A
Darwinian Left: Politics, Evolution and Cooperation)』에서 따왔다. 피터 싱어도 좌파고
나도 좌파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터 싱어는 개혁주의적 좌파고 나는 혁명적 좌파 즉 혁명적 공산주의자라는 점이다(피터 싱어를 개혁주의적 우파로 분류할 사람도 많을 것이며 나도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이 글에서 주인공은 나지 피터 싱어가 아니다).
나는 혁명적 공산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동의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윈주의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단어보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를 뜻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많은 경우 스탈린주의를
뜻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라는 단어보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피터 싱어는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드물게도 진화 심리학을 옹호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피터 싱어는 진화
심리학이 옳다면 마르크스주의가 한 물 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진화 심리학이 옳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사상들 중 많은 것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와 피터 싱어의 생각은 엄청나게 다르다. 「피터 싱어의 다윈주의적 좌파론과
혁명적 공산주의 - 『다윈의 대답 1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비판」를 읽어보면
그 차이 중 일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하는 점들
마르크스주의가 온갖 것들을 뜻할 수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대충이라도 정의하고 넘어가야 혼동이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의 사상과 그 후계자들의 사상을 뜻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거의 동일시한다. 또한 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거의 동일시한다. 따라서 나는 스탈린(1930년대 이후)과 그 후계자들이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우기는 것을 어이없어
한다. 이런 식의 정의(?)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명확히 하면 나의 글을 읽으면서 혼동할 일이 줄어들기는 할 것이다.
나는 이전에 프로이트를 깊이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며 스스로를 거의 프로이트주의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꽤 긴 글 『나는 왜 프로이트주의자가
아닌가』를 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을 계속 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 비판에
별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앞으로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작업을 매우 깊이 있게
진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로부터는 거의 건질 것이 없는 반면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건질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프로이트에 비해 마르크스는 비판할 가치가 훨씬 많이 있다.
나의 프로이트 비판의 목적을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을 깔아뭉개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목적은 옥석을 가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옥인가? 물론 내가 마르크스주의와 공유하는 것이 나의 입장에서는 옥이다. 그것들을 몇 개 나열해 보겠다.
첫째, 개혁주의(reformism,
개량주의)가 아닌 혁명주의. 쉽게 말해서 나는
자본주의를 적당히 수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뒤엎고 공산주의
사회로 대체하는 것이다. 나는 극좌파(far left) 또는
혁명적 좌파다.
둘째, 개혁에 대한 존중. 혁명주의자들
중 일부는 오직 혁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개혁주의를 경멸할 뿐 아니라 개혁 자체도
경멸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통 초좌익(ultra left)이라고 부른다. 나는 개혁에 만족할 수는 없지만
개혁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셋째,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 나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현대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강화한 체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매우 비민주적인
공산주의 체제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체제를 지지하지 않는다. 나는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당연히
표현의 자유, 선거권, 다당제 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선거권이 총과 돈을 다루는 군 장성과 회사의 사장을 뽑는 데까지 확장된다는 점이다.
넷째, 민족주의가 아닌 국제주의.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는 애국주의나 애족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다. 나도 그렇다.
다섯째,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에
반대한다고 해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해방 투쟁 등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특수한 경우는
제외될 수 있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한다.
여섯째, 이윤 논리에 대한 적개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에의 이면에는 이윤 논리라는 핵심적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장 논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이윤 논리라는 용어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일곱째, 대중 계몽과 대중 행동에 대한 존중.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 같은
사람들은 소수의 선각자들이 무지한 대중에게 공산주의를 선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좌파) 테러리스트들은 대중 계몽과 대중 행동보다는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의 행동을 더 중요시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결국 대중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행동에 나서야 공산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서도 대중들이 거대한 시위와 파업 등을 벌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덟째, 전위 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 레닌은 공산당이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무정부주의자(anarchist)들의 반발을 샀다. 나는 공산당이라는 지도부가 대중을
지도하면서도 대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나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다면 나는 굳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할 생각이 없다. 나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우리 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가
위에서 썼듯이 내가 마르크스와 동의하는 점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반면 내가 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상당히 불명료한 점들이 있다. 내가 마르크스와 동의하지 않는 점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나는 왜 다윈주의적 공산주의자인가』라는 글에서 상세히
쓸 생각이다.
핵심적인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간 본성에 대해 매우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 (2002)』에서 상당히 쉽고도 잘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기 이전의 사냥-채집 사회를
원시 공산주의라고 부르며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상화는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가 사모아(Samoa)에는 강간도 성 억압도 없다며 이상화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이상화는 성선설과 연결된다.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해진 인간 본성이라는 것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빈 서판주의자가 되었다가도 성선설론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이유는 인간 본성의
사악한 측면들을 인정하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부장제 이론을 신봉하는 페미니스트들과 닮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그러다 보니
직관과 상식에 의존한다. 이런 면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류 사회학자들과 닮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상식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에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앞으로 어떤 허점들이 있는지를 파헤칠 생각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암묵적으로 성선설을 지지하다 보니까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파의 비판 중 가장 강력해 보이는 비판인 무임승차론에 대해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무임승차할 것이고 그런 무임승차를 막기 위해서는 결국 독재가 필요해질 것이라는 것이
무임승차론의 핵심이다. 나는 이런 문제를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2차 정모 때 얘기나눴던 주제네요.^^ 저로서는 가장 관심가는 주제 중 하나지요. 부디 덕하님의 연구가 큰 성과를 거둬서 저도 좀 받아먹었으면......헤헤헷^^;
오탈자 교정: 나의 프로이트 비판의 '목적을' -> 목적은
인간의 "본성" 이야기 - 계속(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728)은 찾았는데 그 전편은 못 찾았습니다. 없는 건가요?
저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넘어.. 어떠한 민족주의도 해롭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대한의 독립보다는 일본제국내부에서 개혁과 혁명을 도모하자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낳는 모태가 되듯이.. 제국주의는 국제혁명의 모태가 되지 않을까요.ㅎ
KKong 님의 의견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견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제가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레닌은 로자의 이러한 생각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을 지지했지요. 트로츠키는 여기서 나아가 민족해방혁명을 사회혁명으로 전화시키는 '연속혁명'을 주창했구요.
피억압민족의 저항이 일차적으로 민족주의적 운동이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레닌은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이 이런 민족해방운동을 진심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은 요원하다는 점을 직시했을 테지요. 트로츠키의 구상은, 피억압국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민족해방투쟁에서 으뜸가는 투사가 된다면, 그 신임을 바탕으로 혁명의 주도권을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본 것이죠. 혁명을 둘러싼 여건이 허락한다면, 민족해방투쟁에서 주도권을 쥔 노동계급과 공산주의자들은 그 투쟁의 승리를 사회혁명으로 연결할 수 있겠죠.
제가 아는 얼마 안 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해 본 건 이 정도네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제국주의는 국제혁명의 모태' 라는 말도 조금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