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문학회 평창문예대학
나눔 마당 - 명시 ‧ 명문 감상
제 14호(2016. 06. 29.)
[하서문학회] 누리집 http://cafe.daum.net/riverbookclub 전자우편 hamun2248@daum.net
두 번째 서른 살
인생은 어느 나이나 다 살 만하다고 한다.
스물은 스물 대로 좋고 예순은 예순 대로 좋다는 이야기다. 일흔과 여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예순까지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고기라도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고 네 절기도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함이 각기 다르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인생의 황금기는 서른 살이니라."
어떤 사람은 이팔청춘을 찾지만 아무래도 나이 열여섯은 너무 어리다. 두근거리는 가슴 하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감탄사 하나로 된 문장 같아서 느낌만 있고 주어가 없다. 거기에 비하면 스물은 정말 눈부신 나이다. 가슴은 뜨겁고 피부는 생기가 넘친다.
"술 없이도 취하는 나이" 그것이 스무 살이다. 그러나 병 없이도 앓는 나이가 또한 스무 살인가 한다. 이 질풍노도의 계절은 불안과 위험을 동반한다. 문장으로 말하자면 주어와 서술어만 있고 목적어가 없는 문장이다. 옛날에는 열다섯부터 관례를 올렸다. 요새는 스무 살이면 성년으로 친다. 그러나 나이 스물로 성인이 되기는 아직 이르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생에 대한 깊은 통찰까지겠는가.
육체적 성년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 인격체로서의 성년으로는 함량 미달일 수밖에 없다. 공자나 예수 같은 성인들조차 그들의 20대는 완전히 괄호 속에 묻혀있다. 공자가 스스로 '섰다'고 말한 것은 서른 살 때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른에 침례를 받고 비로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세계 명작 소설의 대부분이 그 작가의 30대에 이루어진 성과라는 사실이다. <좁은 문>,<페스트>,<전쟁과 평화>,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모두 그러하다.
인생 40은 어떨까? 그것은 내리막길이다. 실제로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지며 요통을 호소하고, 그리고 돋보기를 쓰기 시작하는 나이가 바로 마흔이다. 말하자면 빨간불이 켜진다는 이야기이다. 카사노바의 정력도 마흔 살부터는 날개가 꺾인 새가 되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내가 나의 나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 것도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던 해였다. 마흔이 된다는 것이 마치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두렵고 허망하였다. 섣달그믐날 저녁 나는 친구들을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 명동에서 시작한 것이 무교동을 거쳐 신촌에서 끝났다. 그리고는 신정 연휴 동안 내내 앓아야 했다. 숙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젊음이여, 그대 마침내 떠나는구나."
독일 시인 휠덜린은 서른에 자신의 청춘과 이렇게 이별했다. 그는 그 후 40년을 더 살았지만, 정신착란으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청춘이 다했다는 사실이 슬펐고, 나는 생의 절정으로부터 미끄러져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아무튼, 그 후 쉰 살이 되고 예순 살이 되어도 마흔이 되던 해 같지는 않았다.
서른 살은 물론 인생의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다, 서른 살은 분명 가을이다. 그렇다고 낙엽이 지는 계절도 물론 아니다. 서른 살은, 그러니까 늦여름과 초가을이 만나는 그 어름의 어디쯤이다. 초록빛 사과가 비로소 붉어지고 과육은 부드러워지면, 신선한 맛과 달콤한 과즙이 고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내가 만일 연애를 한다면 나의 상대는 결코 스무 살은 아닐 것이다.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이 익기를 기다릴 만큼 젊지도 않지만 그럴 만한 인내심도 나에게는 없다. 여자 나이 스물이 물오른 오월의 꽃나무라면, 서른 살은 열매가 가득히 열린 가을 나무라 해도 좋다. 이제 더는 남자가 두렵지 않은 나이, 자신의 박자에 맞추어 스텝을 밟을 줄 아는 나이, 그것이 여자의 서른 살이다.
"그녀의 춤추던 시절은 끝났다."는 말은, 그러니까 서른 살을 두고 하는 말은 분명 아닐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미로의 비너스는 분명 서른 살 여인의 몸매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나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인자한 모성의 구현상'이라는 이 여인도 분명 서른 살임이 틀림없었다.
완숙한 인격의 깊이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서 저 신비로운 미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빈치가 말하고자 한 여성다움이란 것에 대해 무언의 공감을 보내면서, 나는 잠시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도교에서 말하는 '불로장생'이란 몇 살의 상태로 그렇게 오래 산다는 뜻일까? 신선도에 나오는 백발노인의 상태로인가, 아니면 푸른 20대의 젊음으로써인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포박자’에 의하면 그것은 서른 살이라고 했다.
‘팽조’라는 사람이 800살을 살았지만 그는 언제나 30대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원한 서른 살, 그것이 모든 사람의 희망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황금기는 서른 살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선도의 늙은이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지 심신이 그처럼 늙어 버린 노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몸과 마음으로 삼천갑자를 산다고 상상해 보자, 그건 축복이라기보다 차라리 형벌일 것이다.
나는 가끔 교지 편집부 학생들로부터 이런 앙케트를 받을 때가 있다. "선생님 앞에 '젊음의 샘'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 자신에게 주의 시킬 것이다.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어린애가 되어서 내 손자와 함께 기저귀를 차는 그런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물로 돌아가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다. 더도 덜도 말고 서른 살이 될 만큼만, 포도주잔을 기울이듯이 아주 조금씩 그렇게 마실 것이다."
요새는 인생은 육십부터라고들 말한다. 소피아 로렌은 그녀의 예순 번째 생일을 맞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세 번째 스무 살을 맞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재치 있는 대답이다.
그녀의 황금기는 스무 살이라는 이야기다. 만약 그 기자가 실수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두 번째 서른 살을 맞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 서른은 모든 문장 성분을 제대로 갖춘 완결된 문장이다.
마음에 단물이 고이고 향기가 그윽해지며 때로는 곱게 단풍이 드는 나이, 조용히 떨어지는 하나의 꽃잎에도 잔잔한 파문으로 대답하는 호수의 수면 같은 나이, 그것이 서른 살이다.
서른 살은 고매한 철학보다 유행가의 가사가 때로는 진리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이이다. 모든 사람의 희망이었고 신선들도 잃고 싶지 않았던 그 영원한 서른 살, 나는 지금 두 번째 서른 살을 살고 있다.
손광성 수필가. 함경남도 홍원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다시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한국화를 전공. 졸업 후 서울고등학교와 동남대학 등에서 교편생활. 서울시립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창작 강의.
그의 수필은 피천득이 "한 편 한 편이 모두 시"라고 할 정도로 문학성이 뛰어났다. 특히 '수필은 말맛으로 쓰고 말맛으로 읽는다.'는 그의 주장처럼 문장의 중요성에 기초한 실기 지도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수필이 신변잡기가 아닌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형상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펴오고 있음.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 『달팽이』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등 다수의 작품집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