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조천읍 선흘리 2720번지. 낙선동 마을 주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마을성담)
1948년 11월 17일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대규모 집단학살과 마을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29일, 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2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은 이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었다.
당시 조천면 선흘리는 1948년 11월 21일 선흘국민학교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에 의해 온마을이 불타며 소개되었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 밀림 속으로 피난하여 생활하였다. 주민들은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목굴, 도틀굴, 벤뱅디굴 등을 피난처로 삼아 숨어 살았다.
소개령을 내린 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부터는 선흘리 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 젊은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으로 마을과 가장 가까운 도틀굴에 숨어 있었는데 토벌대는 한 노인을 찾아 총으로 위협하며 앞세워 도틀굴을 찾아내어 그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현장에서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일부는 함덕국민학교에 설치된 대대본부로 끌고가서 무자비한 고문을 한 후에 엉물, 서우봉 등지에서 학살하였다. 또한 미리 해변 마을로 피난한 주민이나 야산에 은신했다가 나중에 붙들려온 주민 중에도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학살당하였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하여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의 석성은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는 중산간 지역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견벽청야란 성벽을 튼튼히 하고 들판을 깨끗하게 하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튼튼하게 다지고 들판의 곡식을 모조리 거두어 들여 적의 군량 조달을 미리 차단하는 전술을 말한다.
이 성담은 사삼사건 때 일시 폐촌되었던 선흘리가 1949년 초부터 복구되면서 조천면민이 동원되어 인민유격대의 공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성으로 지금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당시 성의 규모는 가로 150m, 새로 100m, 높이 3m, 폭 1m로 총 500여 m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성은 기축년(1949) 봄에 한 달 동안이나 쌓았어. 함덕에 소개(疏開)되어 살면서 아침이면 올라가 경찰이 총을 들고 감시하는 속에서 성을 쌓다가 날이 저물면 해안 마을로 내려가곤 했어요. 북촌, 함덕 사람들도 다 동원되었지. 성을 쌓을 때는 아녀자, 할망 할 것 없이 동원되었고 국민학교 3,4학년인 우리들도 동원되었어. 밭담이나 산담을 허물어 지게나 둑지(등)에 돌을 지고 날랐는데 등가죽이 다 벗겨지고….”
"지금 성이 있는 곳은 원래 마을이 아니고 벵디왓이라는 밭이었어. 원래 마을은 북쪽에 있었지. 이 지형이 동산지고 구룽(봉천수)도 있고 해서 여기다 성을 쌓은 거라. 처음에는 함빠라고 하는 긴 집에 칸을 나누어 살았는데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정도라. 방은 고사하고 부엌도 없으니까 자다 보면 솥단지 밑으로 머리가 들어가 있고…."(선흘리 부홍률 씨) 높은 지대여서 사방을 감시하기에 좋기 때문에 이곳을 마을터로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함빠 = 일본어 はんぱ [半端,半坡,半端] 로서 ①다 갖추어지지 않음 ②끄트러기 ③자투리 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서는 다 갖추어지지 않은 임시 가옥을 뜻한다.
“요즘 사람들은 ᄀᆞᆯ아도 몰라. 함덕에서 이딜 오가멍 성을 쌓을 땐 먹을 게 어서노난 정심도 못 먹었주. 아침 저녁에 소앵이나 바다패에 물릇을 섞엉 ᄉᆞᆱ앙 먹거나 밀쭈시에 쑥 버무령 먹는 게 보통이랏주. 51년도엔 무장대가 습격ᄒᆞᆫ 다음날 아침 경찰 본서(함덕 주둔 대대)에서 완 무장대가 도망간 쪽이옌 선흘곶 쪽으로 박격포를 막 쏘더라고. 나중에 보난 우리 밭디 털어진 거라.”(고학봉 씨 증언. 오승국 글에서 인용)
성 안에는 함빠집(임시주택) 20여 동과 개인집 6동이 있었고, 공동통시를 성벽에 붙여서 중간마다 몇 개씩 만들었으며, 서쪽에는 지서를 마련하고 지서를 둘러싼 성담이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학교도 있었다. 임시주택의 내부공간은 바닥에 마른 고사리 등을 깔아 눕고 다른 구석에서 밥을 해먹으면서 살았고 외벽은 돌로 쌓고, 내부 칸막이는 억새로 막았으며, 한 동에 4세대가 살았다. 지붕은 근처의 나무를 베어다가 간략히 틀을 짜고 그 위에 억새를 덮었다고 한다. 이 마을 안에 약 200세대가 살았으니 마을 자체가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들이 거의 죽거나 입산해 버렸기 때문에 성을 쌓는 일에서 보초 서는 일까지 대부분을 여자들이 했다고 한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6․25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까지 남녀노소 구분없이 보초를 서야 했다. 16세 이상의 처녀들은 '여성대'라고 하여 격일제로 보초를 섰다. 성내의 4개 모서리에 초소가 있고 초소 사이에 간이초소 4개씩이 있었다.
보초막(초소) 하부에는 보초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상부에는 원두막의 형식의 집을 지었는데, 저녁 먹은 후에 보초막에 가서 철창이나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보초는 보통 2,3명씩 섰는데 피곤해서 잠이 들까 봐 자꾸 초소끼리 전달을 했어. '1번 초소 주의 전달' 하면 '2번 초소 주의 전달' 하고 외쳤어. 또 암호가 있었는데 나는 어려서 암호를 자꾸 잊어 버려서 불 피운 곳에 가서 암호를 물어 보곤 했지. 교대 시간은 시계가 없으니까 어느 집 닭 울면 교대한다고 해서 닭 울기만 기다리다가 그 닭이 울면 교대를 했어. 보통 하루 밤에 4-5번 교대를 하지."(당시에 보초를 섰던 할머니의 증언)
성 밖에는 폭 2m, 깊이 2-3m의 함정을 파고 거기에 철조망 대신 가시가 큰 나무를 베어다 놨다.
"일년에 몇 번씩 마을 사람들을 출역시켜서 가시나무를 잘라다 쌓지. 주로 몸에 잘 달라붙는 범줄기(실거리가시나무)나 가시가 큰 쿳가시나무(꾸지뽕나무), 탱자나무를 주로 베어 왔다. 또 경찰들은 산사람들이 숨어서 망을 볼지 모르니 시계(視界)청소를 하라고 해서 성 주변의 나무는 싹 잘라 버렸지. 성 위에는 사람 머리 모양으로 돌을 올려 놓아 위장하기도 했고."(선흘리 김창조 할아버지. 전교조 제주지부 역사기행 자료.1994)
성을 완성한 다음 1949년 단오날 식량과 의복을 구하러 내려온 유격대와 경찰의 전투가 있었다. 주민들 몇이 부상당하고 유격대 사람 몇이 수류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1951년 5월 5일 새벽에는 무장대가 습격하여 다음날 결혼 예정이었던 장덕순(20세)을 납치해 갔으며 한 무장대원은 성 위에서 연설을 하고 새벽닭이 울 때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날 무장대원 3명도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위에 소개된 날자가 둘 다 5월 5일인 것으로 볼 때 1949년과 1951년 중 어느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두 가지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곳 재건마을에는 경찰 3명 정도가 근무했는데 초소장인 강문경 경사는 호의적이었으나 서북경찰 우 순경은 지독해서 마을 사람들이 경찰에게 폭행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남편이 없는 낙선동 여성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선흘리 사람들 일부는 원래 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지어 재건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성안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는 13가구가 남아서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2002년 3월에 보니 성의 북쪽 일부(약 5-6미터)가 잘려나갔다. 성안에서 과수원 농사를 짓는 밭 주인이 기계를 들이기 위해서 허물었을 것이다. 이 자리는 지금도 마치 문이었던 것처럼 잘려진 채 놔 두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사업으로 2008년 7월 7일 국비 17억8400만원을 투입,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성곽복원 283m와 해자 복원, 성 내부시설(함바 1동, 지서 1동, 초소 5동, 통시 4동 등)을 재현하고 주변 화장실과 관리실, 전망대, 관람로와 주차장 등 편익시설을 갖췄다. 그러나 너무 깨끗하게 정돈되고 규격화되어 4·3 당시의 느낌을 전혀 재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가 북서쪽 성담 쪽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떨어지게 복원됐다고 하였으며, 지서 자체에도 상담을 쌓아 보호했다고 하는데 지서 성담은 복원하지 않았으며, 학교 터에 대해서도 표시도 하지 않았다.
성담의 남쪽 문이 있었던 곳 밖에는 커다란 폭낭(팽나무)이 우뚝 서 있는데 이 나무는 1949년 성을 쌓던 해에 고학봉씨가 심은 나무라고 한다.
《작성 041031, 보완 150320, 15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