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야.석홍인가?나 용윤이네"
그저께 10월27일 이사하고 별일은 안하고 이사하는 것을 구경만 했는데도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어 있는데 아침 열시반에 국제전화라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촌형 신용윤이었다.그런데 휴대폰에 '이집트'라고 찍혀서 어디냐고 묻자 미국 뉴저지 집이라고 했다.
현지시간은 밤 열시반이라고 했다.
형님은 전화하시면서 "솔직히 우리 고금면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은 석홍이 너외에
누가 있느냐"고 하시면서 반가움을 전했다.
1981년도 2월초에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는데 내가 1998년 4월 4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해서
너무 쓸쓸해서 이민가면 어떨까하고 시장조사와 여행겸 미국에 간 것이 1998년 8월중 이었다.
그때 용윤형 부부로부터 너무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맨하탄은 그야말고 바둑판처럼
가로,세로가 딱 맞아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 있는 버스터미날도 지상 2층으로 정교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의 한국의 반포터미날도 그것을 보고 만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맨하탄 지하철 옆에서 델리샾(구멍가게)을 하던 청산의 깨복쟁이 친구 홍선이도 만나고
맨하탄 시내에 있는 브로드웨이며 몇백년 이상된 건물이며
미국의 역사,자유의 여신상에서 브로드웨이를 거처 L.A를 지나고 태평양을 건너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까지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는 말에 수백년전에 이미 그들의 과학적이고
체게적인 사고에 놀라기도 했다.우리나라의 엉성한 것이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많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 되었지만...
보름여 관광하다가 귀국했는데 벌써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흘렀네.
그간 종종 소식은 들었지만 깊은 이야기는 못하고,
귀국후 잠시 이민준비를 하다가 I.M.F 로 인해 이를 포기하고 방황을 했었다.
그런 형님이 어제 갑자기 3년여 만에 전화를 하신 것이다.
우리는 내가 미국 처음 방문했을 때 헝님과 형수님의 환대에 대한 고마움과
어머니와 얽힌 사연을 추억했다.그리고 형님이 그때 이민 떠날 때는 부부 둘이 었는데
미국 가서 아들.딸둘을 두었고 둘다 혼인해서 이젠 6 명이 되었다고 자랑하시듯 기뻐하셨다.
두자녀 모두 공부도 잘하고 매사 모범적이고 딸은 변호사가 되었고
아들은 컴퓨터 회사에 재직중이라고 했다.좋은 남편과 아내를 맞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딸은 내년 2월이면 또 하나를 생산할 예정이라서 이젠 7명이된다고 기슴 뿌듯해 해했다.
성경 말씀대로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참으로 창대해졌다.
사촌형은 20대 초반부터 키톨릭의 신앙에 깊어 뉴저지 성당에서 총회장을 여러번 역임했고,
이젠 일상의 모두가 카돌릭 신앙인 그 자체이다.
우리는 한시간 넘게 통화했다.
현재 한국에 있는 고려 사이버 대학 전기과에 재학중인데
내년 2월18일에 싸이버 대학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신다고 했다.
그때 오시면 보름정도 머물며 그간 그리웠던 분들을 다 만나고 가겠다고 하신다.
나이 70대 중반인 형의 향학열이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그때 꼭 하남 우리집 에서 묵기로 했다.
우연찮게 고대 동문이 되었다.졸업후 또 대학원에 갈 예정이라고 하셨다.
형님은 한국에 있을 때 따놓은 국제 전기면허 라이선스가 있어서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서
몇명 안되는 라이선스 소유자이며 지금도 일이 많아 벅찰 정도이고
또 미국에서는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하신다.
형수님은 지금도 도련님(석홍)님이 보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신다고 했다.
나도 다정한 형수님 뵙고 싶다고 했다.한국에서 간호사로 계시다가
미국 가서도 수십년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지금은 동네 보건소에서 자원 봉사하러 다닌다고 하신다.
18년전에 미국집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형님과 형수님이 더욱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