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과 조선의 수난
9반 전명수
선조의 선위교지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등극하자 곧바로 왕권강화책을 실시하고 임해군과 영창대군, 능창군 등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과 그 주변의 소북파, 서인, 남인의 세력을 차례로 제거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그녀를 서궁에 유폐시키자 역모를 꽤하던 세력들이 이를 명분으로 무력정변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1623.3.12 밤에 일어난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의 주도자는 능양군이다. 능양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이자 신경희의 옥사 때 죽은 능창군의 친형이다. 그가 반정을 도모한 원인은 동생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하여 죽었음에 있으며 또 하나는 인빈 김씨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조는 인빈 김씨와 그의 소생들을 총애하였고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을 맞아 할 수없이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자로 책봉하게 되었다. 인빈 김씨와 그 소생들은 이에 불만이었고 광해군이 등극한 후에도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게 되었는데 광해군은 이들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성군은 이미 죽었지만 동복의 삼형제 중에 능창군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신경희 사건이 일어나자 능창군을 연루시켜 유배 후 죽여 버린 것이다. 이 때 부터 능양군은 무력정변을 추진하였고 1618년 인목대비를 유폐하자 이를 명분으로 거사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능양군과 서인세력은 외교 정치적인 면에서 대북파와는 철저하게 대치하였다. 서인은 대명사대주의 노선에 선조의 유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지지하며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었다. 이점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대북파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결국 대북파와 서인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광해군 역시 서인의 척결 없이는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능양군과 역모를 도모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귀, 김자점, 김류, 최명길, 이괄 등이었다. 역모세력들은 거사당일 밤 김류를 대장으로 700여명의 반란군이 홍제원에 모여 머리에 ‘의(義)자가 쓰인 띠를 머리에 두르고 궁궐을 향해 진격하였다. 창의문을 뚫고 창덕궁에 도달하니 그곳에는 능양군이 수하를 거느리고 나와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훈련도감 이확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고 반란군을 공격하지 아니하였다. 대궐밖에 진을 치고 있던 훈련대장 이홍립은 반란군과 내응하기로 약속되어있어 반란군의 진입을 도와주고 있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에 이르렀다. 금호문 수문장 박효립도 내응되어있어 무사통과, 돈화문에 이르러 불을 질러 승리를 알렸다. 광해군은 반란군이 대궐을 점거하였음을 알고 재빨리 궁을 빠져나가 피신하였다. 반란군은 광해군을 찾지 못하다가 이틀 후 의관 안국신의 집에서 붙잡게 되어 능양군의 거사 인조반정은 완전히 성공하였고 이가 2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제16대왕 인조이다.
인조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소생인 정원군의 아들이다. 광해군의 서 조카이자 인목대비의 서 손자인 셈이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우선 서궁에 달려가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하였으며 정인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대북세력 2백여 명을 숙청하였다.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배 중인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하였던 서인 김류, 이귀, 이괄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류해 정사공신훈호를 내렸다. 이렇게 인조는 광해군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정과 사회를 안정시켜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치려 하였지만 초반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반정이 성공한 당시 북방의 수비 책임자는 도원수 장만이었는데 평양성에서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이괄은 북방의 부원수로 영변에서 병사 1만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괄은 자신의 중요한 책무를 통감하고 군사조련, 성곽보수, 진영의 정비강화 등으로 여진족의 내침 방어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앙의 서인들은 남아있는 북인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1만 대군을 지휘하고 있는 이괄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1624년 정월에 문희, 허룡, 이우 등은 인조에게 간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괄이 그의 아들 이전과 한명련, 정충신등과 반역을 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이괄을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변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일단 조사를 해보았으나 역시 무고임이 밝혀졌다. 조사담당관들은 무고한 인사들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인조는 이를 듣지 아니하였다. 김류, 김자점 등은 자기들의 고변이 무고임이 밝혀졌음에도 이괄을 부원수에서 해임하고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조는 이괄의 국문은 묵살하고 대신에 그의 아등 이전과 한명련 등을 압송하여 국문하는 것으로 타협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자헌 등 역모협의자로 지목한 40여명을 하옥시켜버렸다. 금부도사가 이전을 압송하기 위해 영변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은 분노하였고 마침내 금부도사의 선전관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역모혐의를 받고 압송 중이던 한명련을 구출하여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출중한 용병력과 무인정신이 투철하고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이었으며 당시에는 최전방의 순변사로 재직 중 불시에 압송되고 있었다. 이괄은 1624.1.22 자기의 수하가 된 왜병포로 1백여 명을 선봉에 세워 전 병력 1만 명을 이끌어 영변을 출발하여 도성으로 진격하였다. 인조재위 10개월만의 일이었다. 도원수 장만이 있는 평양을 피해 곧바로 도성으로 향하여 진압군과 처음으로 접전한 곳이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황해도 황주였다. 그들은 이괄의 친구이기 때문에 정면 돌파하지 아니하고 급습을 통하여 대승하였다. 두 번째 전투는 개성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평산이었다. 관군은 방어사 이중로와 평산부사 이확이 이끌고 있었는데 역시 관군은 대패하였다. 세 번째 전투는 임진강 나루터 전투였는데 노련한 한명련의 작전계획에 의하여 관군을 대파하고 벽제로 진출하였다.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기자헌 등 옥에 갇힌 대북 세력들을 처형시키고 서둘러 공주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괄이 한성에 도착한 날은 출군 19일 만인 2.10일이었다. 이괄부대원들은 선조의 아들 홍안군을 왕으로 옹립한다는 방을 부치고 민심을 안심시켜 나갔다. 이괄이 도성을 점령하자 곧바로 뒤쫓아 온 장만이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북산의 갈마재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반란군은 백전노장 한명련이 선봉장에 나섰지만 이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전세는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괄의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해 버렸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 되었지만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내부의 반란으로 왕이 쉽게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자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하였고 이후에도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북방의 주력 부대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변방의 수비가 허술해졌으며 이것이 후금의 침략욕심을 자극시켜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인조가 청 태종 누루하치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굴욕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일부 정치세력들의 권력욕심으로 빚어진 헛된 모략의 결과는 엄청난 피해는 물론 국가와 백성들이 씻을 수없는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첫댓글 권력싸움으로 국력이 약화되군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의 나라에 무릎을 끓는 일이 벌어지네요. 이런 역사적 사실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배워야 될 것 같네요. 송하님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행복한 나날되세요.
정치는 외치, 즉 외교와 내치 등 안밖으로 잘 다스려야 백성들이 편안할 텐데 밖으로 시달리고 안에서는 권력싸움에 혈안이 되는 청치판이 되다면 백성들은 더욱 곤궁에 빠지게 되는 듯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매양 일반이라 봅니다. 고맙습니다.
대원군 연산군등은 모두 반정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조나 종으로 불리어 지지 못하고 군으로 남는것인가요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임금이 아니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을 당하여 후임 왕에 의하여 '군'으로 강봉된 왕입니다. 단종도 세조에 의하여 노산군으로 강봉, 영월에 유배되어 사사되었으나 숙종때 단종으로 복위되었습니다.
애나지금이나 권력사움에 눈이멀어 국력을 약화시켜 결국은 왜세에 무릅을 끌른 참담한 일이
벌어지네요 결국은 권력싸움 때문애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만 가난하게 만드은군요
역사에 대한 많은 자료 잘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잊지않고 찾아주시어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