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이의 사회에 대한 고뇌
"석담일기"를 읽고
역사학과 20090636
장해중
석담일기(石潭日記), 혹은 경연일기(經筵日記)는 율곡(栗谷)이이가 1565년부터 1581년까지 30여년간 조정에서 일어난 정치적 논쟁들과 해당 인물에 대한 평가를 곁들인 일종의 편년체(編年體)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당시에는 숨겨서 공개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그 당시 선비들이나 관료들 모두 이 책의 존재를 다 알게 되었다고 한다.1) 또한 이 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처럼 책에서 자신을 ‘이이’라 칭하는 3인칭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석담일기, 혹은 경연일기는 그동안 내가 알았던 율곡 선생에 대한 인상을 모두 걷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덕망 높은 인자에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은 학자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특별한 이유는 이 책에서 율곡 자신을 깎아내리는 표현보다는 칭찬하는 표현이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쓰면서 뿌듯해하는 율곡선생의 득의에 찬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역사 서술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직필(直筆)이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솔직하여야 한다. 율곡은 그 점에서 최대한 솔직하고 비판적으로 당시 역사를 기록한다. 비록 그의 스승이라고 해도 율곡의 비판적인 평가를 피하지는 못하였다. 율곡의 그의 스승인 백인걸(白仁傑)에 대해 ‘지기(志氣)는 뛰어났으나 학술은 거칠었으며 과감한 직언을 하기 좋아하였으나 역시 일에는 합당하지 못하였다.’2)라고 평하였으며 선조 4년인 1571년 7월의 대목에서 스승이 주착(做錯:잘못인 줄 알면서 저지름)하였다고 평가하였다.1571년 7월에는 사림을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이원경(李元慶)․정창서(鄭昌瑞)등이 백인걸을 이용하여 박순(朴淳)․이후백(李後白)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직필에 대해 실제로 백인걸의 집안에서는 율곡에 대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친구인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가족의 간곡한 요청으로 해당기록을 삭제하기도 했다.3) 이 외에도 당시 임금인 선조는 물론이고 문묘에 배향된 남명(南冥) 조식(曺植),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그리고 당시 관료 모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가히 ‘모두까기 인형’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율곡 선생은 타인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개인적 가까움과 멂, 상하를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론에서도 밝혔듯이 석담일기에는 책 전체를 통틀어서 율곡 선생 자신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도리어 ‘이이가 비록 물러나 있으나 열심히 나라일에 정성을 기울여 늘 선비들이 불화한 것을 근심하여 조정에 있으면서 조화시킬 책임을 맡으려 하였다.’4)라거나 천변이 일어나 임금이 연 어전회의에서 논의할 제 ‘좌우에서 차례대로 품은 바를 진술하였으나 좀스러워서 취할 것이 없었고, 오직 이이와 유성룡이 아뢴 바가 정치하는 대체를 말하였던 것이다.’5)라는 등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부심에 찬 문장을 이 책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검토의 과정이 미약할 수밖에 없는 사찬 역사서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율곡 선생이 정작 자신에 대한 직필은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이는 실제로도 그 뒤의 학자들이 석담일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근거가 된다.6)
또한 석담일기에서는 붕당의 맹아(萌芽)가 싹트는 대목과 그에 대해 율곡선생의 약간은 안일한 태도가 드러난다. 선조 5년인 1572년 7월에 영의정을 지냈던 이준경(李浚慶)이 죽을 무렵 조정 신료 사이에 붕당이 조짐이 보이니 논하라고 유언하였다.7) 하지만 선조8년인 1575년 6월 무렵에 이후 동인의 영수가 되는 김효원(金孝元)이 등장하는 대목이 보이고8) 점차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조정이 갈라져 싸우게 된다. 이이도 처음 석담일기에서 ‘끝내는 나라 망할 말로 임금을 그르쳐서 명예를 잃어버리다니 참 애석한 일이다.’9)라는 말로 이준경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후 붕당이 현실화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하게 되나 결국 막지는 못하였다. 이 책에는 붕당을 예측 못한 자신에 대해 평하는 내용은 없으나 동서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이이도 분명 그 때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후회했을 것이다. 민망해서 기록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석담일기의 시작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사망과 윤원형(尹元衡)의 몰락으로부터 시작한다. 훈구파의 몰락과 사림의 정권 장악. 이렇게 상황이 변해가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서 율곡 선생은 사림파의 아래에서 펼쳐질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관료생활 초기 국가를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10)
상이 즉위하자 일체 예법을 준수하였고 전왕(前王) 때에 내반(內班)12)의
장번 환관(長番宦官)13)이 매우 많았음으로 상이 반으로 줄이도록 하였으며,
항상 문을 닫고 가만히 앉았을 뿐 내시 내관들과 말을 건네지 않으시니,
조야(朝野)에서 성덕(聖德)의 성취를 우러러보았다.11)
상이 권지국사(權知國事)14)로 곤룡포와 면류관의 칠장복(七章服)으로
교외(郊外)가 나가 조서(詔書)를 맞이하고, 접대하는 데 예의가 어긋나지
않으므로 두 사신이 주목(注目)하여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감탄하기를,
“이러한 묘령(妙齡)으로 행동이 모두 예절에 맞으니, 이런 현군을 얻은
것은 동국(東國)의 복이다.” 하였다. 이때 상의 춘추(春秋)가 16세였다.12)
때문에 경연(經筵)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가리지 않고 군왕 선조(宣祖)에게 자신이 배운 바를 설파하면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다. 하지만 당시 관료들의 세태와 국왕의 미약한 의지 때문에 실망하기도 한다.
애석하다. 착한 마음이 한때는 나와도 끝내 정사에 베풀어져 폐단의 개혁은
볼 수가 없으니, 하늘이 어찌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어진 마음을 가지고도 어진 정치는 행하지
못하는가. 아! 한탄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13)
지금 상은 남이 말하는 것을 미워하여 남이 건의하는 것을 보면 문득
지나치다고 배척하고, 반드시 묵묵히 순종하고 말이 없어야 발탁이 되니,
이 방법을 준행한다면 비록 조참(曹參)이 소하(蕭何)의 뒤를 잇는다손
치더라도 오히려 잘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인데, 더구나 권력 잡은
간신이 어지럽힌 뒤의 허점(虛點)과 폐단이 많은 국사(國事)에 있어서
어찌하겠는가. 대체 이러하기 때문에 용렬하고 무능한 사람은 등용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은 결단코 물러가는 것이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면서
끝내 깨닫지 못하니, 아!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14)
신하 입장에서 내가 율곡 선생이었다면 모시는 군주인 선조에 대해 표출한 불만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율곡과 선조의 대화는 책 전반을 통해서 항상 같은 패턴으로 나타난다. 율곡이 “전하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면 선조가 “내가 불민하여 행하지 못하오.”라는 대화가 14년간 반복되고 있다. 나는 후손의 입장에서 이후에 조선이 당한 일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감정 이입이 되어 많이 화가 났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이런 말할 정도의 자격을 갖춘 인생을 살고 있지는 못하지마는 어떻게 저런 우매한 군주 치하의 조선이 이후로도 300여년이나 더 지속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임진왜란 전후로 국가전복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새가 깃들어 앉을 나뭇가지를 잘못 골랐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나라를 위해 전심으로 일하던 율곡 선생은 경제사 설치에 대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시점인 석담일기가 마무리된 1581년 이후 탄핵을 받아 상심하다가 1584년에 사망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15)
석담일기는 사실 읽기가 힘든 책이었다. 나는 왜 책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서문이 없는지 궁금했었는데 이 책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 없는 책이었다. 성학집요(聖學輯要)나 동호문답(東湖問答)같은 율곡 선생의 주저(主著)를 읽지 못하여 율곡 선생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로서는 책 내부에 숨어있는 선생의 통치 철학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비록 역사서로서 포폄(褒貶)의 균형을 잃었고 저자 자신에 대한 공정한 직필은 볼 수 없는 책이지만 조선이라는 국가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정치적 위기의 맹아적 상황에서 이를 막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주석>
1)최영성, 석담일기의 필법과 경세사상, 유교문화연구 제 13집, p.53
2)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석담일기, 솔출판사, 1998, p.66
3)최영성, 석담일기의 필법과 경세사상, 유교문화연구 제 13집, p.54
4)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석담일기, 솔출판사, 1998, p.407
5)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위의 책, p.545
6)최영성, 석담일기의 필법과 경세사상, 유교문화연구 제 13집, 2008 p.69-77
7)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석담일기, 솔출판사, 1998, p.142-143
8)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위의 책, p.297
9)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위의 책, p.143
10)최영성, 석담일기의 필법과 경세사상, 유교문화연구 제 13집, 2008 p.78
11)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석담일기, 솔출판사, 1998, p.30
12)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위의 책, p.31
13)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위의 책, p.31
14)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위의 책, p.438
15)최영성, 석담일기의 필법과 경세사상, 유교문화연구 제 13집, 2008 p.85
<참고문헌>
1. 이이, 민족문화 추진회 역, 석담일기, 솔출판사, 1998
2. 최영성, 석담일기의 필법과 경세사상, 유교문화연구 제 13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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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왜 자네가 일읽은 책의 번역자 언제 어디서 출판한 기본 서지사항이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