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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충기 수필>
정처(定處)를 알 수 없는 인생 항로(航路)
한국전쟁(6.25) 전, 내 고향인 강릉의 현재 학산3리 금광평(金光坪)은 그냥 황무지(荒蕪地)와 소나무 숲이었다.
금광평 벌판은 온통 시뻘건 황토 흙으로 척박해서 농사도 잘되지 않았고, 특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매년 봄이 되면 대관령을 넘어오는 강한 편서풍(偏西風)으로 시뻘건 흙먼지가 항상 자욱했고, 겨울이면 시베리아로부터 불어오는 북풍이 벌판을 사정없이 휘몰아쳐서 눈 언덕이 생겨 길이 막히곤 했는데 심할 때는 눈보라에 휘둘려 걸어 다니기 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겨울밤이면 밤새도록 울어대는 문풍지 소리와 눈 무게에 못 이겨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설낭목(雪落木) 지는 소리, 또 밤새도록 부엉부엉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에 잠을 설치고는 했던 기억....
1948년 강릉시내 남산 밑 안땔골에 사시던 우리 부모님은 막내인 내가 뚜루루 한창 걸음마를 할 때 이곳 금광평으로 이주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위로 딸 여섯, 끝으로 아들 둘 8남매를 낳으셨는데 첫째 누님은 19살에 시집가서 이듬해 소생(所生)도 없이 장티푸스로 죽고, 6째 누님은 어려서 홍역으로 잃어 6남매가 자랐다. 금광평으로 이사 오기 전에 위로 두 누님은 이미 출가를 해서 이사 올 때는 넷째, 다섯째 누님과 끝으로 둔 아들 둘, 부모님까지 모두 여섯 식구였다.
우리아버지는 연곡면 가마소(釜淵洞)에서 출생하셨고, 열다섯 살에 주문진(注文津) 새말에 양자(養子)로 가셨는데 굉장히 넓은 농토를 가진 부자였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소달구지와 소지르마(길마)에 벼를 싣고 우리 집으로 오는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번의 이사(移徙)와 새로 지은 집이 화재로 소실하는 등 재산을 탕진하고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이었는데도 우리 아버지가 흰 두루마기에 중절모, 단장을 짚고 금강산 유람하시던 사진이 있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위의 누나들은 부잣집에서 허연 쌀밥을 먹고 자랐는데 그 귀한 아들 둘은 가난에 쪼들려 쌀밥 한 번 맘껏 못 먹인다고 푸념을 하시곤 했다.
1950년 내가 네 살 되던 해 한국전쟁이 났고,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1953년) 넷째 누님이 결혼했는데 다시 그 이듬해(1954년)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내가 8살, 초등학교 1학년 때 5월이었다.
내가 구정(邱井)국민학교 입학당시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어머니가 나에게 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니 집에서 나무나 하고 일이나 거들라고 하셨던 모양이다. 나보다 다섯 살 위였던 우리 형님은 모산(茅山/長峴)국민학교를 나왔는데 5,6학년 교과서만 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했다는 말....
‘어머이~, 나를 4학년까지만 가르쳐 주시개. 5학년부터는 허이 책으로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으니 혼자 할게~~’ 나는 국민학교 6년 동안 줄곧 1등, 반장(班長), 전교어린이회장, 졸업 때 강원도지사 표창....
졸업식 때 내가 상을 받아서는 어머니께 가져다주고, 또 가져다주고.... 하도 많이 받으니 옆에 앉았던 젊은 아주머니가 ‘아이구 손자가 우떠 저러 공부를 잘했소? 정말 장하네요~’ 하더라는..... ㅎㅎ
우리 어머니가 마흔 셋에 막내로 나를 낳으셨으니 당시 쉰여섯 정도였겠는데 시골 농사일에 찌들다보니 할머니로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960년,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는 중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그러나 행운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 마침 강릉농고 안에 관동(關東)중학교라는 학교가 새로 생기는데 교장선생님 추천이면 입학금이 면제니 충기를 중학교에 보내라.
어머니는 입학금은 면제라지만 책값이며, 교복값이며... 우리 형편으로는 어렵겠다고....
우여곡절 끝에 입학을 했는데 제법 살림이 넉넉했던 고모부는 ‘그 형편에 중학교라니...’하며 혀를 찼다하고, 과수원을 하던 동네 이씨네 어른(현 임마누엘 과수원/둘째아들 이두재가 운영 중)이 책값과 책가방, 모자까지 사 주셔서 우여곡절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훗날, 내가 교사 발령을 받고 첫 월급을 탔는데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으로 밥주발 세트와 은수저 한 벌을 사다 드렸다.
내가 관동중학교를 졸업하던 1963년, 구정국민학교 소사(廳夫)로 있던 형님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집안 살림이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중학 때도 공부를 곧잘 해서 강릉농고에서 3년간 전액 장학금을 줄테니 농고로 오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농사꾼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껴 포기하고 형님 빽으로 형님자리였던 구정학교 소사(廳夫)로 들어갔다. 3월부터 11월까지 꼭 9개월 간 청부로 있으면서 돈(입학금)을 모았다. 물론 소사로 근무하는 내내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 숙직실 부엌에서 불을 때며 수학공부를 하느라 2차 함수 책을 보고 있노라니 정○화 선생님이 무슨 책인지 좀 보자고 하여 드렸다. 몇 장을 넘겨보시더니 ‘난 하나두 모르겠다~~’ 하시며 도로 건네주시던 기억.... ㅎ
인문고인 명문 강릉고(江陵高)로 진학하겠다고 구정학교를 소사를 그만둔다고 하였을 때 어머니는 못내 아쉬워 하시면서도 네가 그렇게도 공부를 하고 싶다니 어쩌겠냐,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다니....
모르겠다 조상님들이 돌보신다면 어찌 되겠지 하시며 허락하셨다.
결국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진학했는데 강릉고에 입학해서도 입학금은 냈지만 당장 등록금이 문제였다.
우리 집안 형편을 아셨는지 실과선생님이 학교 교정의 정원수 전정(剪定)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
운동장 둘레의 쥐똥나무 전정을 하면 한 학기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정규수업이 끝난 후 보충수업을 받지 않고 쥐똥나무 전정을 하는 나를 보고 급우들이 모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렇게 하여 1학년 2학기 등록금은 면제받을 수 있었다. 1학년 2학기부터는 친구의 소개로 강릉철물점과 강릉여관에서 국민학생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며 등록금을 벌어 어머니한테는 손을 벌리지 않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시간 이상이나 걸렸고, 집에서는 먹는 것이 보잘 것 없었지만 가정교사를 하니 먹는 것도 훨씬 낫고, 등교하는 시간도 벌고.... 내 공부에 지장은 있었지만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그러나 참고서적 하나 사기도 어려웠고, 당시도 대학진학을 위해 과외를 받는 친구들도 제법 있었지만 나에게는 언감생심, 그저 사치로 보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내 마음속 어딘가에 여행(旅行-Travel)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수학여행(중3, 설악산 귀면암) / 무전여행(고1, 부산항 제1부두) / 금강산 구룡폭포(99년) / 만리장성(90년)
고등학교의 기억으로는 1학년 농번기 휴가 때 남한일주 무전여행을 했던 일인데 훗날 내 자칭(自稱)이긴 하지만 ‘세계 배낭여행가’로서의 첫걸음이라고 봐야겠다.
지금 미국 뉴욕의 맨해튼(Manhattan)에서 보석상을 하는 김주식 친구와 둘이 정말 땡전 한 푼 없이 시작한 무전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등학생들 무전여행이 유행이었고 교복을 입고 다니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먹을 것은 물론 용돈도 서슴없이 주던 좋은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 전, 뉴욕 맨해튼(Manhattan)에서 이 친구를 만나 얼싸안고 옛일을 되뇌며 눈물, 콧물을 찍어내던 기억이 새롭다.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웠는데 내게는 국립인 서울대학 아니면 다른 사립대학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특히 좋아했던 물리학(物理學)을 하려면 서울대는 좀 어렵겠고, 고대(高大)나 연대(延大)를 가라고 했지만 비싼 등록금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단 입학했더라면 고학이든 가정교사든 졸업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내 인생은 또 달라졌겠지....
결국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평소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등록금이 고등학교 수준인 교육대학을 가기로 했는데, 서울교대 입학원서를 써 달랬더니 네가 문과(文科)라면 몰라도 이과(理科)인데.... 조금 낮은 인천교대로 가라..... 서울교대나, 인천교대나 같은 경인권이니 비슷하다....
지금도 인천교대 입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허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이런 시험을 보려고 그 머리 깨지는 미적분, 삼각함수, log함수.... 물리학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초등교육학이 전공이 되었으니....
대학(敎大/2년) 때는 부전공으로 음악교육을 했고, 다시 야간대학에서 음악교육학으로 학부(4년)를 마쳤다.
1990년에는 한국교원대학(청주)에서 다시 6개월간 음악전문과정을 수료했으니 전공이 음악교육학이 되었는데 어릴 때 꿈꾸던 물리학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분야가 되었다.
그리고 교직에서 남보다 일찍 눈을 떴던 것 중의 하나는 컴퓨터 분야였는데 음악분야와 함께 연구논문으로 수차례 입상도 하였다.
또 하나는 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67년에 인천교대 신문(畿西學報)의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시와 단편소설을 출품했더니 단편이 당선하였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다. 제목은 ‘갈매기의 사념(思念)’
경기도 가평(加平)에서 시작하여 인천 연수구 청량(淸凉)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하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만 40년간의 교직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교장자리까지 이를 수 있었으니 나름으로 행운도 따랐던 것 같다.
교직생활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나는 주로 연구부장(硏究部長)을 많이 맡았는데 인천 건지(乾池)국민학교에 근무할 때 인천시 교육청의 컴퓨터연구학교로 지정을 받아 대한민국 최초의 학교 홈페이지인 ‘건지골’을 만들어 2년간 운영하였던 것이다.
연구발표 때(1994)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KEDI)에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수많은 연구진들이 방문하였는데 내가 발표를 하였을 때 큰 관심을 보였었다.
이듬해 인천부평남초등학교로 전근하여서는 전국 최초의 학급홈페이지인 ‘별똥마을’(1995)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그 이후 우리나라 각 학교들의 학교 홈페이지와 학급 홈페이지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는데 내가 선두주자였던 셈이다.
전국최초 학교홈피 ‘건지골’ / 전국최초 학급홈피 ‘별똥마을’ / 가현초 교가 / 황해문고(黃海文庫) 기사
또 이따금 교가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새로 개교하던 인천 건지초(乾地初), 가현초(佳峴初), 경명초의 세 학교 교가를 내가 작곡하여 현재도 아이들 입으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것도 뿌듯하다.
현재(2022년), 인천 청라지구에 있는 경명초에는 손자(초2, 초4)들이 다니고 있다.
2009년 2월 정년, 젊을 때부터의 꿈이었던 세계 배낭여행을 정년퇴직과 동시에 실천에 옮겼다.
현직에 있을 동안 배낭여행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지리, 역사와 문화사를 공부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영어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교감 때 내 책상위에는 항상 영어원서가 놓여있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았더니 선생님들이 모두 놀라워하던 기억...
이때 읽었던 해리포터(Harry Potter) 시리즈 원서 8권,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3부작과 부록 등 도합 4권의 영문 원서, 그 밖에도 섹스피어(Shakespeare) 단편선(短篇選) 등 몇 권....
테오티후아칸(멕시코) / 아바나(쿠바) / 페스(모로코) / 마추픽추(페루)
2012년에는 여행기를 묶어 여행기 ‘배낭 메고 세상 속으로’와 수필집 ‘살며 생각하며’를 발간했고, 2013년에는 인천 아시아 무도대회(武道大會)에서 개막식 무용수로,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영어통역(英語通譯)으로 자원봉사 했던 것도 즐거운 추억이다.
2013. 아시아 武道大會 무용수 / 2014. 아시안게임 영어 통역사 / 합창대회(이중창:국립극장) / 농부가 독창
또 인천노인복지회관 실버합창단(미추홀 은빛 합창단)에 들어가 합창을 했는데 전국대회인 ‘제7회 전국 골든 에이지 합창경연대회(2018)’에 출전했을 때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 홀에서 합창 중 내가 앞으로 나가 수백 명 청중 앞에서 독창을 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이 대회에서 우리 합창단이 우수상(2등상)을 받아 상금 500만원을 탔다.
인천노인복지회관은 3층 건물인데 등록인원이 4만 명이 넘는 인천시가 직영하는 최대의 복지회관으로, 개설된 강좌만도 90개가 넘는다. 2015년 12월, 평생교육 강좌가 끝나고 종강식과 더불어 각 강좌의 전시회와 작품발표 공연이 있었는데 대 극장에서 공연하는 17개 강좌 작품발표회 진행의 사회를 나더러 맡아 달라는 관장의 부탁이다.
좌석 600석의 대극장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된 공연의 사회를 맡아 진행했던 것도 큰 추억이고 보람이었다. 그 밖에도 인천클래식 기타(Guitar) 동호회 회장도 맡아 활동했고, 정년 후에는 여러 곳을 다니며 노후 설계에 대한 강의도 했다.
강의 제목은 ‘세계배낭여행’, ‘삶과 죽음에 관하여’ 등....
또 기회가 있어 학부모 한문교육(한자 급수 및 명심보감반) 및 초등학교 영어 기간제 교사를 맡아 용돈도 벌었고 여행경비에 보태기도...
나는 어릴 때부터 한문에 관심이 많았는데(동네 서당이 있어 공부했었음) 교장으로 재직시 인천 문학향교에서 사서(四書)를 대충이지만 모두 맛을 봤는데 그 후 취미가 되어 천자문(千字文), 사자소학(四字小學), 격몽요결(擊蒙要訣),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대학(大學), 고사성어(故事成語) 350개 및 한시번역(漢詩飜譯) 등 내 나름의 상세한 해설을 붙인 강해(講解)집을 만들어 무료봉사 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2015. 작품발표회 사회 / 인천 클래식 기타 동호회 회장 / 한문강사 / 초등학교 영어 기간제교사
신기한 것은 고향 강릉 학산 마을의 어린 시절 이른 아침에 마당 끝에 나서면 동해의 일출이 한 눈에 보였고, 밤이면 오징어배 불빛으로 온통 꽃밭처럼 휘황하게 밝혀진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랐는데, 교직생활 중 교감 초임(初任)이 서해에 면한 강화도 화도(華道)초등학교였고, 교장 초임이 우리나라 최서북단(最西北端)인 백령도(白翎島) 북포(北浦)초등학교, 퇴임을 한 곳도 연수구(延壽區) 청량(淸凉)초등학교로 송도해안이니, 교직생활 끝 무렵에는 서해의 낙조(落照)를 보며 마친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인생여정(人生旅程)에서 볼 때 우연인가, 필연인가, 아니면 행운인가??
아직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70중반에 들어서면서 옛일을 회고하노라니 나의 인생여정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뇌리에 스치고, 한편의 각본 없는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글로 써 보았다.
정녕, 인생 여정(旅程)이라고 하는 것은 정처(定處)없는 항로(航路)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