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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짐을 풀어주는 복음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서 할 말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아무 할 말이 없을 인생인데 주님으로 인해 할 말이 있고 들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된다. TV를 보면 ‘세상은 항상 똑같구나. 할 말이 저렇게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다. 복음을 교리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기 이전에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알아야 한다. 복음(福音)은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모든 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이 아는 복음은 죄 사함에 관계된 것이 대표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말씀 자체가 복음이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하셨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에게는 복음이다. 갈 곳 없는 사람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하신 것이 복음이다. 심지어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도 복음이다. 찾아오신 하나님이 복음이다.
일생을 살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죽음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못된다. 세상에서도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연산군의 어머니 성종 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던 분은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명령에 따라 갔고, 약을 먹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윤씨에게 입을 벌려서 약을 먹였다. 후에 연산군 이 임금이 되어 그 사실을 알고 그 사람을 죽였다. 자기 뜻이 아니지만 나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하였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축복이다. 우리가 이렇게 사역의 길에 들어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니까 교회에 오는 사람이나 오지 않는 사람에게나 어떻게든 행복한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축복이기도 하고 감사이기도 하다.
화장터에 가 보니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어두웠다. 그곳은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곳이고 “또 오세요.”라고 할 수 없는 곳이다. 장례용품을 파는 장의사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하기 어렵다. ”또 오세요.“라고 하기는 더 어렵다. 같은 장사를 하는데도 복이 안 되는 장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맛있는 음식을 팔면 “또 오세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더욱 복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을 전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나는 이것을 알고 난 후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누구를 만나도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그 문제의 시비를 가리기 전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이다. 심판하는 소식이나 계속 전하게 하신다면 내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남을 비판하는 말만 하고 다니면 나 자신도 평안할 수 없다.
나는 팔 년간 있던 교회에서 복잡한 일을 당했다. 마지막에 그 교회에서 나오게 된 이유는 나도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고 교회도 웃음이 없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당하게 겪은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 심령도 피폐했고 말을 할 때도 상대방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섞여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 대해서도 그런 불만이 생겼다. 당시에는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생각되니까 마지막 판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책 없이 뛰쳐나왔던 것이다.
적어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늘 복된 소식을 듣는다면 자연히 밖에 나가서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가 사는 사회도 아름다워질 것이고 사람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안 좋은 이야기만 하고 다니면 세상도 안 좋아지고 교회도 안 좋아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 말씀은 큰 복음이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면 사람을 다 복되게 하려고 좋은 말씀을 한다. 공자님인들 사람을 심판이나 하고 정죄나 하겠는가. 석가모니인들 그러하시겠는가. 공자님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사람을 살리려고 하셨다.
한양을 다녀온 사람이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니까 한 사람이 물었다. “남대문에 문턱 있어?” 직접 보고 온 터라 자신 있게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무슨 문턱 없는 문이 있어? 한양 다녀온 거 다 거짓말이지.”하며 비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 우기다가 공자님 앞에 왔다. 한 사람은 남대문을 보고 왔는데 그것을 보지 않은 한 사람은 문턱이 없는 문이 있을 리 없다고 우기다가 “만일 내 말이 틀리면 내 목숨을 내놓겠다.”고 했던 것이다. 안 보고 우기는 놈이 더 강하다. 그에게는 ‘문은 문턱이 있다.’는 원칙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로 문턱이 없는 문을 보고 온 사람은 그것 때문에 목숨을 바칠 일이 없다. 자기가 본 것이니까 아니라 해도 그만이다. 공자님은 두 사람의 송사를 듣더니 틀리면 죽겠다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제자들이 “저 사람이 틀렸는데 왜 저 사람 손을 들어주셨습니까?”라고 물으니 “저 사람은 틀리면 죽겠다는 사람이니 살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공자님도 예수님과 다를 바 없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인생의 근본적인 고난과 짐, 그리고 괴로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가시덤불이고 그 원인은 자기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 말은 아주 근본적인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값을 못 한다. 사람도 자기 위치에 있지 않으면 대우를 못 받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심히 좋다고 하셨지만 지금 누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사람을 정말 잘 만드셨구나. 심히 좋다.’라고 하겠는가? 그것은 사람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놓고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자기에게 오면 무엇을 어떻게 쉽게 해 주시겠다는 것인가? 어떻게 모든 사람을 상대해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어떤 뜻으로 말씀하셨든지 간에 그분으로서는 소소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위치를 이탈한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거나 “죄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보다 “위치를 이탈해서 그렇다.”고 말하면 더 듣기가 좋을 것이다.
죄 때문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슨 죄인지 모른다. 원죄에 대해서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냥 죄라고 한다. 그러니까 각자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 안 걸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다 죄가 있지 않느냐?”라고 해석하고 말지만 그 죄 속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죄도 많다. 그런데도 그 죄들이 다 이 말씀에 포함되어서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죄는 각자 사람이 아는 대로 다르다. 무슨 죄인지 아는 대로 다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래서 나는 죄라는 말에서는 무엇을 찾지 못했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고 알게 되었다. 위치만 바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무슨 죄로 갇혀 있든 간에 위치만 바뀌면 역전이 된다.
사람과 하나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정해 놓으셨고 만들어 놓으신 위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문제다. 위치만 바르게 되면 잘해도 되고 잘못해도 된다. 100% 잘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은 잘 못해도 상사에게 귀여움을 받는데 어떤 사람은 일은 열심히 잘 하는데 미움을 받는다. 그것은 상사와의 관계의 문제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위치의 문제다. 상사를 상사로 알아주지 않거나 무시하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로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 자체가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데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온 것이다. 원인은 이것이다.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면 그것처럼 쉬운 것이 없다. 사람으로 지어 놓으셨으니까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사람은 그렇게 지어졌다. 그래서 나는 위치 회복이 절대적으로 첫째가는 필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누가 과연 위치를 회복했는가. 어떻게 생긴 것이 위치를 회복한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위치를 회복하는 것인가? 그 대답으로 나는 예수 이상의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진짜 사람의 위치에 있다.
사람들은 그분을 신이냐 아니냐 하는데 신이든 아니든 무슨 소용인가. 위치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지 신이면 주님이 되고 신이 아니면 주님이 안 되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분이 신인가 인간인가에 관심이 많다.
초대교회 이후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이 문제로 싸웠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교리를 안다고 사람이 달라지는가? 그 교리에 대해 다 아는 사람도 없지만 그 교리 때문에 달라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교리 때문에 싸우고 죽이고 할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내가 참 인간으로 회복되느냐 안 되느냐, 내 위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여기 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나의 주시오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했다. 그런데도 그분은 십자가에서 극도의 제한을 받으셨다.
그렇게 제한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도 ‘신이냐 인간이냐?’하고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교리상으로 맞든 틀리든 ‘저 사람이 사람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구나. 사람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구나.’라고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분을 알기가 쉬워졌다.
나는 이분을 몰라서 애를 먹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혜택은 역력하게 기억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를 하는데 예수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한 일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데 나만 관계 정립이 되지 않았고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몰랐다. 이것이 오랫동안 나의 고민이었다. 이야기할 때마다 예수를 말하는데 그분과 내가 무슨 관계인지 몰라서 고민이었다. 이것이 나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나에게 “내려와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이렇게 하신 이를 십자가에서 만났다. 그분은 고난을 당했지만 나는 거기서 내 짐을 풀었다.
찬송가에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앞에 나가서 내 짐을 풀었네.’라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를 내 뜻에 맞추면 딱 맞는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나와 같은 사람의 위치에서 내가 받아야 할 극도의 고난을 받고 있는 분 안에서 내가 무슨 딴 근심을 할 것이 있겠는가? ‘십자가 앞에 나가서 내 짐을 풀었네.’ 내 모든 짐이 해결되었다. 그분이 죽으셨는데 나는 내 짐을 풀었다. 더 이상 내가 짐을 질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아, 이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과 무슨 관계인지를 몰라서 방황하던 내가 이렇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닌가! 복음이 따로 있겠는가. 내 인생의 문제가 여기서 풀렸는데 이것이 복음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나는 십자가에 달려서 뛰어내리지 못하는 예수를 계속 말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복음이고 이보다 쉬운 길이 없어서 이 말을 줄곧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론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있느냐. 예수님을 그렇게 격하시킬 수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느냐. 좀더 좋은 말은 없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로서는 뜻밖의 암초였다. 더 좋은 말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말이 없다. 그래서 그 말을 계속 했던 것이다.
뉴욕에서 어느 형제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분이 샌프란시스코에 사셨는데 전에 뉴욕교회에 다니셨고 뉴욕에 아는 분이 많아서 뉴욕교회에서 장례식을 했다. 김성식 형제가 장례식장에서 이 말씀을 전했다. 자기는 할 말을 다 했다고 하는데 내가 들어 보니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말을 하려니 많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지, 시원하고 확실하게 더 쉽게 말할 수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유를 위해서 뛰어내리지 않고 그냥 죽으셨다.” 이 말에는 아무도 의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이때까지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이것이 묻혀 있었다.
분명히 성경을 보나 도의적으로 보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속과 직결된다. 그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 사실보다는 사랑이 극진하신 분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분이라는 식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세상의 상식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을 존경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분이 사랑이시라는 것 때문에 다 존경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 같은 분은 종교를 떠나서 누구라도 다 고아의 어머니로 존경한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분의 행동이 누구나 존경할 만하다.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면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자기가 자랑스러워하는 것만 뽑아서 세상에 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기 주님이 뛰어내리지 못해서 죽었다고 하면 주님이라고 하기가 창피하지 않겠는가.
종도 주인에 따라서 위상이 달라진다. 같은 일등병이라도 대장 밑에 있는 사역병과 중장 밑에 있는 사역병은 위상이 다르다. 정승 집 종과 원님 집 종은 위상이 천지차이다. “우리 주인은 이런 분이다.”라는 말이 자기 자랑인 것이다. 그와 같이 “내가 섬기는 예수는 이런 분이다.”라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것만 전파된 것 같다. 구속과 직결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런 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 사랑을 하신 분으로 이해를 하려니 굉장히 어려웠던 것이 나와 예수님의 관계였다. 그분과의 동질감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어려웠다. 나도 그분처럼 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고난을 억지로 견딜 사람이 못된다. 내 주님은 그런 분인데 나는 엉뚱하게 편한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분과 나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처럼 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해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만일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 자기 구속이 되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국에 돌아가신 분의 부인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목사님이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정 반대 아닙니까.”하는 것이었다. 이래도 문제가 되고 저래도 문제가 된다. 내가 말하는 목적이 뛰어내렸느냐 못했느냐에 있는 줄 오해하지만 사실은 거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는 데,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구속이 내 구속이 되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도 문제를 삼고 저렇게 말해도 문제를 삼는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소원대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려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으신 분 안에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 뛰어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참고 거기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었다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해당될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셨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거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에게 이렇게 썼다. “다 좋지만 그것은 너무 어려워서 나는 쉬운 길을 택했습니다.”라고, 사실이다. 나는 너무 어려워서 쉬운 길을 택했다. 사람들을 쉽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하나님께서 “야, 이놈아, 네가 어떻게 내 아들 예수를 그렇게 너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격하시킬 수 있느냐.”하시고 진노하시겠는가? 오히려 “내 아들을 잘 알아줘서 고맙다.”고 하실 것 같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다. “네가 신도 되고 사람도 되는 예수를 마음대로 격하시켜서 순전하게 너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다니 그것이 말이 되느냐?”하시고 나에게 채찍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목적도 그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 아들을 통해서 구속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신 말이 딱 들어맞는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을 얽매인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거창한 문제가 아니라도 사람들을 쉽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 어렵게 만들거나 옭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다.
혹시 이의가 있으신 분이 있겠지만 나는 급하니까 ‘아, 이런 복음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내가 해맸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자꾸 하는 것이다.
“왜 저런 말을 자꾸 하는가.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가?”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이 있다.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사람들이 있다. 일부러 어려운 것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것이 가장 쉬우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고 싶지 않다.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더라도 짐을 가볍게 해 주고 싶다. 가볍게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와서 자유를 얻지 못하면 어디 가서 자유를 얻겠는가. 세상 어디에 가서 자유를 달라고 소리치겠는가. 세상에서는 자유를 달라고 소리쳐 봐야 안된다. 누가 나에게 자유를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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