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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2020년 산행 위시리스트에 특별한 산 네댓 개를 올려 두었었다. 그중 하나였던 제주도 한라산 산행을 친구 M의 제의로 결행하게 되었다. 때마침 주중에 한라산 정상부에 첫눈이 내렸다고 하니 눈 구경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대된다.
근 일 년 만에 공항버스를 예매하고 04:40 야탑 발 리무진 버스를 타고 05:30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06:28발 아시아나 A321-100기에 탑승했다. 대중교통과 항공편이 예약한 시간의 톱니바퀴를 따라 오차없이 맞물려 출발하고 도착하는 형국에 스릴감마저 느껴진다. 건초 더미 모양의 구름 다발이 다다미 방처럼 깔린 하늘 위를 날아 바다에 잠기듯 구름 속으로 하강한 비행기가 50여 분만에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꼽아 보니 제주도를 6년 만에 다시 찾는다. 택시로 30여 분만에 산행 들머리 관음사 탐방지원센터에 직행하니 오전 8시가 살짝 지났다. 코로나-19 이전 하루 5만여 명이던 방문객 수가 1만 명 대로 줄어들었다는 기사님 얘기다.
한라산 탐방코스는 백록담까지 오르는 관음사와 성판악 코스가 있고, 그 외에 어승생악, 어리목, 영실 및 돈네 코스가 있다고 한다. 관음사 쪽에서 정상 백록담으로 올라 반대편 성판악 쪽으로 내려설 요량이다. 대략 18km 8시간 코스다. 두세 명씩 몇몇 산객들이 모여 산행 채비를 하는 센터 앞 드넓은 주차장과 널찍한 들머리 주변은 한산하다.
들머리에서 6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는 관음사는 숙종 때 제주목사에 의해 폐사, 1912년 비구니 봉려관이 다시 창건, 1948년 4.3 항쟁 때 전소, 1968년 중창 등 부침을 겪었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제주도 기념물 제51호 수령 70여 년 왕벚나무가 자리한다는데, 한라산 해발 5~900m에서 자생지가 발견됨에 따라 일되으로 잘못 알려져 있던 본적을 되찾았다니 천만다행한 일이다.
산행 시작점의 고도가 해발 600미터쯤이니 1950미터 한라산 정상과는 1300여 미터의 고도 차이가 있어 녹록지 않은 산행이 예견된다. 탐방센터 넘버링 게이트를 지나니 푸른 조릿대가 융단처럼 깔린 성긴 숲을 깡마른 나목들이 하늘 높이 가지를 뻗치고 서있다.
검은색 현무암 자연석이 깔린 산길은 평탄하다. 그 오른편으로 주상절리처럼 뚝 잘려나간 가장자리, 공룡 알처럼 생긴 둥근돌 무더기, 숲을 담은 검은빛 물이 고인 웅덩이 등 용암과 시간이 빚어 놓은 계곡이 산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계곡 밑으로 뚫린 442미터 길이의 구린굴은 석빙고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그 주변에 집터와 숯 가마터 흔적도 보인다고 한다. 현무암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큼지막한 화덕 모양새의 숯 가마터는 초록빛 무성한 이끼로 덮여 있다.
조릿대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사이 간간이 절임 배춧닢처럼 잎사귀 다발을 축 늘어뜨린 굴거리나무가 섞여 있다. 눈 속에서도 초록빛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는 상록활엽수 굴거리나무는 해발 780미터 이정표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군락을 이룬다.
출발점에서 3.2km 지점에 깊게 파인 탐라계곡이 산객 앞을 막아선다. 아래로 깊숙이 내려갔다가 계곡 위 목교를 건너며 고개를 쳐드니 맞은편 능선 위로 검은 암벽이 우뚝 솟아 있다. 들머리 부근에서 산객을 반기던 까마귀를 대신하여 산새들 소리가 잠시 동안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탐라계곡 목교를 건너고 나서부터 개미등과 개미목을 지나는 해발 1500미터 삼각봉 휴게소까지 3km여는 산행 안내도에 빨간색 선으로 표시된 고난도 구간이다. 가파르고 긴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탐라계곡 대피소 자동심장충격기 함 위에 앉은 새까만 까마귀 상이 산객의 눈길을 붙잡으며 숨 고르기를 권한다. '해발 1000m'라 표시된 현무암 바윗돌을 스쳐지나 오른쪽 산정으로 뻗은 완만하고 긴 능선을 올려다보며 개미등을 타고 삼각봉으로 향한다.
해발 1050m 지점에 1982.2.5일 대통령 경호작전 수행을 위해 이동하던 수송기가 기상악화로 추락하여 특전사 장병 등 53명이 산화한 곳이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등로 우측 150m 지점에 추락 원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등로 옆 또다른 안내판은 좌측이 탐라계곡 쪽 낭떠러지라고 알린다. 갑자기 나타난 곧게 뻗은 노송 군락이 반듯한 현무암 블록이 깔린 등로를 따라 좌우에 서서 산객을 호위하듯 이어진다.
베트남인 젊은이 하나가 스마트폰에서 동화같은 설경 속 사슴像을 보여주며 어디냐고 묻는다. 산굼부리라 알려주었는데 나중에 검색해 보니 닮은꼴 백록像이 1100고지에도 서있다.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이 노루의 선한 눈빛을 닮은 열대몬순 지역 출신 그 청년이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정상에서 눈을 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길을 재촉했다.
등로 옆 모노레일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도 없는 운전자 한 명을 태운 전동차 한 대가 산객을 지나쳐 산정 쪽으로 사라진다. 노송 숲과 그 아래 조릿대 군락은 더욱 무성하고 새치처럼 희끗희끗하던 잔설은 백발처럼 더욱 짙어지고 등로 여기저기가 눈길로 바뀌었다.
산객들은 산정으로 난 긴 등로를 따라 서로 간에 때론 추월하고 때론 추월당하며 한 번 들어서면 탈출로가 없는 외길을 따라 스스로를 다독이고 보채며 산행을 이어간다. 멀찍이 앞서 간 M을 뒤쫓아 페이스를 지키며 쉬지 않고 삼각봉까지 쉬엄쉬엄 홀로 걷는 길이 호젓하다. 개미목 가파른 계단과 씨름하며 삼각뿔 모양으로 우뚝 솓은 봉우리를 올려다보며 해발 1500m 삼각봉 휴게소로 올라섰다. 산객들이 휴게소 건물 안과 바깥 여기저기에 앉아 발과 몸을 쉬게 하고 있다.
이슬비로 바뀌었던 안개는 가는 싸락눈으로 바뀌었고 산정 부근은 짙은 안개에 묻혀 있다. 예정시간보다 앞선 산행은 하산 길에 사라 오름에 다녀올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게 했다.
신비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은빛 자작나무들이 맞이하는 능선 기슭의 나무 데크 길로 들어섰다. 왼편 높은 능선 위에서 우뚝 솟은 왕관바위가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산객을 내려다본다. 탐라계곡 위에 놓인 용진각 현수교를 건너기 직전 계곡 가장자리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샘물을 신령한 약수라도 되는 양 몸을 숙여 한 모금 받아 마셨다.
현수교 위쪽에 정상 북벽, 장구목, 왕관릉, 삼각봉으로 둘러싸인 곳에 용진각 휴게소터가 자리한다. 1974년에 건립된 용진각 대피소는 2007년 태풍 '나리'가 몰고 온 폭우로 북벽에서 암반과 함께 쏟아져 내린 급류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왕관릉을 좌측에 둔 능선 위 헬기장을 지나면서 고도 1700m를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한라산은 색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가장자리를 노란색으로 칠한 나무계단 길 좌우로 키 작은 구상나무의 푸른 잎과 은빛 자작나무의 가지마다 상고대가 눈꽃처럼 맺혔고 하얀 뼈대를 드러낸 고사목들이 솟대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구상나무는 이곳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등 우리나라의 높은 산에만 자생한다는 귀한 나무다. 눈으로 덮인 크리스마스트리를 이곳에서 미리 보는 느낌이다.
왕관릉을 좌측에 둔 능선 위 헬기장을 지나면서 고도 1700m를 알리는 표지석과 함께 한라산은 색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발판 가장자리를 노란색으로 칠한 나무계단 길 좌우로 키 작은 구상나무의 푸른 잎과 은빛 자작나무의 가지마다 상고대가 눈꽃처럼 맺혔고 하얀 뼈대를 드러낸 고사목들이 솟대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구상나무는 이곳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등 우리나라의 높은 산에만 자생한다는 귀한 나무다. 눈으로 덮인 크리스마스 트리를 이곳에서 미리 보는 느낌이다.
관음사 탐방지원센터에서부터 약 250m 간격으로 놓여 있던 거리 표지판, 그 33번째 표지판이 '동릉정상 0.10km 5-33구간'이라고 알린다. 두근대는 마음과 새삼 솟구치는 기운을 다독이며 온통 짙은 안개에 싸인 정상으로 올라섰다. 2004년 10월 3일 개천절에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를 오른 지 16년 만에 우리 땅 남쪽 끝 한라산 정상에 서니 감회가 남다르다.
오른편으로 펼쳐져 있을 백록담은 구름바다에 잠겨 보이지 않고 그 가장자리 주변의 커다란 현무암 바위들만 안갯속에서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백록담은 동서 남북 둘레 길이 각각 600m, 400m, 1.72km의 타원형 화구로 설문 할머니, 옥황상제, 신선, 흰 사슴 등 다양한 배역들이 등장하는 여러 전설들이 그 이름의 유래를 들려준다.
현무암 자연석에 '白鹿潭'이란 흰색 글씨가 쓰인 정상 표지석 앞에서부터 성판악 쪽으로 나무 데크 위에 남녀노소 산객들이 긴 줄을 만들었다. 네댓 시간을 힘겹게 올라왔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기다릴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안개비와 내려간 기온에 연신 옷깃을 여미며 30여 분간 차례를 기다렸다. 표지석 옆에서 숨을 참으며 인생 샷 한 장을 챙기고 얼른 마스크를 다시 썼다.
제주특별자치도가 금년 2월 초에 시행했다가 코로나 19로 인해 중단했던 '한라산 탐방예약제'를 2021.1.1일부터 다시 시행하여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 각각 탐방인원을 1000명과 500명으로 제한하는데, 내년 첫날 성판악 코스는 예약이 마감됐다고 한다. 새해 첫날 한라산 정상에서의 해맞이는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백록담을 덮은 진한 안개처럼 마음에 이는 진한 아쉬움을 떨치고 성판악 쪽으로의 하산 길을 잡았다. 누렇게 색이 바랜 풀과 검은 현무암이 섞인 산기슭 모습이 이국적이다. 나무계단과 현무암 너덜이 번갈아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많은 산객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안개비는 보슬비로 바뀌었고 안개로 별다른 조망도 없는 하산 길은 자못 지루하게 느껴진다. 진달래밭 휴게소에 건물 안팎에 많은 산객들 휴식을 취하거나 음식을 들고 있다. 우리도 무거운 걸음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배낭을 열고 허기를 채웠다.
이곳 휴게소에서 사라오름 입구까지 1.5km, 속밭 대피소까지 3.2km, 성판악 탐방안내소까지는 7.3km 거리다. 속밭 대피소를 스쳐 지나고 먼발치에 보이는 사라오름도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구름으로 인해 조망을 기대할 수 없어 그냥 지나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 전역에는 360개가 넘는 높고 낮은 소형 화산체인 오름이 있다고 한다. 그중 명승 제83호로 지정된 사라오름은 제주의 오름 중 가장 높은 한라산 정상 동북쪽 사면 해발 1338m에 위치해 있는데, 분화구 내에는 노루들이 모여 살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호수에 물을 마시면서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도 900m 표지석을 지나며 해발 750m 성판악까지 남은 거리 2km의 완만한 길이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 성판악 휴게소로 내려서며 8시간 18km의 산행을 맺는다.
성판악 정거장에서 16:35에 터미널행 버스에 올랐다. 한라산 자락을 따라 제주시 쪽 반시계 방향으로 굽이도는 1131번 516路를 빠르게 내닫는 버스에 의지한 몸이 좌우로 흔들린다.
1969년 개통된 516도로는 한라산 동쪽 해발 750m 능선을 넘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횡단도로로 두 도시 간 이동시간을 5시간에서 1시간 30분 여로 앞당겼다고 한다. 당시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익한 한라산 횡단도로를 뚫는다고 미친 짓이라는 비난이 많았지만 지금은 제주 발전을 앞당긴 효자 도로로 칭송 되고 있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터미널 앞 순두부집에서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 산행의 여운을 음미하면서 저녁을 들었다. 어제 한라산 산행을 했더라는 옆 테이블에 홀로 앉은 노 신사에게 막걸리 한 잔을 권하며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5년 전 교직을 은퇴하고 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데, 동행 없이 홀로 여행을 한다는 그분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라산 산행 후 시간이 허락하면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했던 K의 연락을 받고 공항 2층 그의 사무실로 가서 커피를 들며 얘기를 나누었다. 금년 8월에 발령을 받고 제주로 내려온 그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서로 안녕을 기원하며 탑승장으로 들어섰다.
신혼여행과 가족여행, 그리고 두 번의 출장에 이어 다섯 번째로 방문하는 제주도에서의 한라산 산행은 짧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지 싶다. 20:30 제주발 아시아나 A320-200는 예정된 시각에 이륙해서 예정된 시각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6년 전 시월 출장차 왔다가 자투리 시간이나마 제주를 살짝 둘러보려던 계획은 '한라산' 소주에 취해 물거품이 되어 아쉬움이 컸지만, 세 가지 아름다움(三麗)을 알고 가는 것으로 애써 위안을 삼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2020년 위시리스트를 접어야할 시간을 눈앞에 두고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부지런을 떨며 벼락치기로 산행 하나를 챙긴 꿈같은 하루로써 위안을 삼는다.
예 듣자니
여자 돌 바람이 많아
三多島라던 제주도
三無공원 둘러보고
도둑 대문 거지
없는 것도 알았고
벗 만나서
三麗도
알고 가네.
- <제주 삼려>, 2014 -
*三麗 : 따뜻한 인심, 아름다운 자연, 독특한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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