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전어 - 김창근
한 접시 바다의 뼈를 발라
식탁 위에 눕혀 놓고는
소주 한 잔에 떠올리는
비린 추억의 가을
세월처럼 덩달아 가버린 날이
가지런히 누워 물결 포개면
밀려오는 갯가 일렁이는
파도소리 가을은 그렇게 남아
쓸쓸한 그늘 삽상한 손맛
함께 입맛 다시며 살아 있는
날들의 짙푸른 반추
천리의 근심도 만리의 우울도
한 접시 바다를 길어
한 잔 술로 풀어 마시며
풍편에도 소식이 없는 너의
안부를 버무려 식초를 친다 *
* 꽃게탕을 먹는 저녁 - 김영언
고작 서너 척의 낡은 고깃배들이 몇 배나 많은 횟집 불빛들을 휘황하게 잡아들이는 강화 선수 포구 강 같은 어둠을 타고 떠내려오는 바다 건너 席毛島의 불빛 찰찰 부어 한잔 또 한잔 마시며 어둠이 진하게 졸아들수록 얼큰해지는 꽃게탕 떠먹을 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국물 속에 가라앉으면서도 둥글넓적한 등판 옆구리에 뾰족하게 담금질하던 창끝과 끝까지 오므리지 못하고 벌겋게 경련하던 큰 집게발이 화끈화끈 가슴을 후벼대던 그 저녁 내내 우리도 마음 속 깊이 가라앉혔던 오기 한 자락씩을 갈아 세웠지 아무도 우리를 더는 가라앉힐 수 없도록 *
* 홍합국 - 한승수
출근길 밥상에
달랑 홍합국 한 그릇
양념하나 넣지 않고
급하게 물만 부어 끓였다는데
간도 적당하고
담백하니 참 시원하다
마주 앉은 아내
화장기 하나 없이
반짝이는 물빛 얼굴로
미안한 듯 나를 바라보는데
절로 우러나는 웃음살이
그대로 홍합국 국물 맛이다 *
* 홍합 -몸 이야기 30 - 권천학
취한 속 씻어내려고
홍합을 삶는다
덜그럭거리는 껍질 골라 까먹는 동안
시원한 국물 맛에 쓰린 속 조금씩 풀리고
구겨졌던 시간들도 허리를 펴는데
끝내 입을 열지 않는 홍합이 있어
칼을 들이댄다
끓여도 끓여도 열리지 않는 문
죽어서도 몸을 열지 못하는
그 안에 무슨 비밀 잠겼을까?
남의 속은 풀어주면서
제 속 풀지 못하는 홍합의 눈물
그토록 깊어 단단했구나
들이댄 칼로 내 속을 찔리고 마는
죽어서도 못 열 비밀 하나쯤
간직하고 사는 붉은 니 마음
내 알리
알리 *
* 가을 전어 - 정일근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 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 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약이 되고 맛이 되는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가을에는 시인의 몸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슬픔 있으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또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굵은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호기롭게 피워 올리자 *
* 가을 전어를 살리다 - 정일근
용주사에서 하안거 마치고 오신 현전 스님 앞에
두툼한 가을 시편들 자랑처럼 펼쳐놓았는데
시 수십 편 읽으시다 한 줄에 놀라 물러서신다
칼로 썰어달라니! 시에 피냄새 진동하는구나!
스님 주장자 들어 내리치신다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마음에 피 흘리지 않고
그분의 길 조용조용 따라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 시에서 풍기는 피냄새 내가 맡지 못했구나
어쩔거나, 시가 저 착한 것들 모두 썰어버렸구나
어쩔거나, 무심한 시가 칼이 되어 생명 저미었구나
가을전어들 시로 죽였으니 시로 살리기 위해
가을이 오는 바다에 시를 용서처럼 풀어놓는다
가을 전어들이여, 너희들 살아서 바다로 돌아가시라
몸속 서 말 깨는 탈탈 털어 세상에 던져버리고
현전 스님 들려주시는 화엄경 뼛속 살 속에 담고
그분의 바다로 돌아가 극락왕생 하시라 *
* 팥죽을 끓이며 - 임혜주
그새 또 잊었다
오랫동안 또글또글해졌을 팥
웬만해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옹골지게 굳은 팥에게도 껴안았던
햇빛 다 풀어 놓을 시간이 필요한 법
한 시간에 해치울 욕심 놓아두고
약한 불로 되돌린다 그제서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는 선
믹서에 마저 갈아 체에 거른다
헤쳐진 살 고루고루 퍼지게
잘 저어야 하는데 반죽 다듬는 사이
파르르 넘친다 아, 이 불같은 성질
저어주지 않으면 밑이 타지고
위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야 마는
천천히 있어야만
지 성질 온전히 풀어지는
압축된 열
그래서 팥죽은 붉다 *
* 그대가 두 손으로 국수 사발을 들어올릴 때 - 고정희
하루 일 끝마치고
황혼 속에 마주앉은 일일 노동자
그대 앞에 막 나온 국수 한 사발
그 김 모락모락 말아올릴 때
남도 해 지는 마을
저녁연기 하늘에 드높이 올리듯
두 손으로 국수사발 들어올릴 때
무량하여라
청빈한 밥그릇의 고요함이여
단순한 순명의 너그러움이여
탁배기 한잔에 어스름이 살을 풀고
목메인 달빛이 문앞에 드넓다 *
* 감자탕을 먹으며 - 강제윤
그대에게 줄 것이 없어
감자탕을 먹으며
뼈를 발라 살점 하나 건넨다
그대는 손을 젓는다
내 살이라도 뜯어주고 싶은데
고작 돼지 등뼈에 붙은
살점이나 떼어주는 나를
그대는 막는다
나는 그대의 슬픔을 모른다
그대 안에 깃들지 못하고
저녁 구름처럼 떠나간 그대의 사랑을 모른다
늦은 저녁
그대와 마주앉아 감자탕을 먹는다
그대 옛사랑의 그림자와
감자탕을 먹는다
그대는 그대의 슬픔을 모른다
그대는 그대의 쓸쓸함을 모른다
그대 옛사랑의 늦은 저녁
그대와 감자탕을 먹으며
내 뼈에 붙은 살점 하나
그대 수저 위에 올린다
* 함평세발낙지 - 이창수
낙지를 먹을 땐 머리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야 한다
무심코 다리부터 입안에 넣을 짝 시면
뻘밭에서부터 솟구쳐나오는 힘
바다로 미끄러지는 꿈
땡볕으로 자라나는 뼈마디의 저항이
정수리에 달라붙어
한꺼번에 당신을 뻘밭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토막을 내어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 고집
진흙 속에서 끌려나올 때는
사나운 파도와 닮은 성깔이지만
젖은 몸 달빛에 말릴 때에야
비로소 부드러운 마음 드러내는
함평 돌머리 바다의 세발낙지
몸 안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껍질 다 버리고서도
너른 바라 빛나는 물결 끝내 잊지 못하는 녀석
시장바닥, 바닷물 뽀글거리는
고무물통에 담겨 함부로 흐물거리지만
그대 튼튼한 이빨로는 결코 끊을 수 없는
문드러진 눈물과 날 세우는 파도의 꿈
개펄의 응집력으로 키우고 있다
* 묵은 지 - 김영천
싱싱하고 맵고 짜고
조금은 달콤한 생김치를 두고는
시어빠진 김치를
쭉쭉 찢어먹는 나를 웃으십시오
나는 아직도 저렇듯
겉저리에서 속잎 하나까지
고루 발효하여
부드럽게 시어지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감싸며
어깨 기대며
한 세월을 푹 삭으면
나도 세상 맛이 나겠습니까
오래 오래 당신들을
잘 견디면
이제야 사람 맛이 나겠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생김치를 먹듯
늘 생경하고 싱그러운
당신 앞에서
지금은 내가 외려 낭패하느니
아직도 숨을 죽이지 않은 새파란 이성이
더러 내 바깥을
넘겨다 봅니다
*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심장은 뛸 수 있을까 사십에
그까짓 눈에 속아
입천장을 데어가며 시든 콩나물 악보를 밀어넣는다 *
* 김치찌개 평화론 - 곽재구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춧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헐,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
*
시월에 - 양성우
이 산골짜기에 가을이 오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어느 한나절에 문득 찬바람이 불어오니
여기저기 계곡 물 흐르는 소리들도 잦아든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속절없이 왔다가 가는 것은
사람의 시간이다
살 속에 가시처럼 파고드는 여러 회한이여
길은 묻히고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숨을까
마치 쏟아지듯이 다시 오는 날까지 허공에 머물려고
떠나는 것들의 영혼들과 함께 가고 싶다
두런거리는 소리도 없이 아침저녁 다르게 시드는
풀잎, 떨어져 누운 마른 나뭇잎들에게는 미안하다 *
* 양성우시집[아침꽃잎]-책만드는집
* 벌판으로 - 양성우
저 벌판에 내가 가리라.온갖 근심들 다 지고 내가 가리라
무릎 찬 물여울을 건너 돌자갈을 밟고 붉은 흙 젖은 길 따라 내가 가리라
어느 거친 바람결에 뽑혀 누운 죽은 나무 흰 등걸들을 지나 수풀을 헤치며 내가 가리라
내 안의 모든 상처 아직도 아물지 않았느냐. 넋 두고 몸 하나로 내가 가리라
가다 보면 그 어디에 머물 곳 없으랴. 거친 바람 저 벌판에 내가 가리라
땅 끝 너머 아득히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
* 물오른 길 - 김사이
한가위 달빛이 무색하게 들썩이며 번쩍거리는 목포를 돌아 고향으로 가는 길 물오른 처녀 방뎅이처럼 탱탱한 둥근 달, 몸뚱이가
환장한다
쫄망쫄망한 아이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처럼 빙 둘러 티 하나 없이 까만 산봉우리들 경계 위로 보름달은 더욱 빛을 발하고 덩달아 내 몸 色色이 투명해진다 들뜬 택시기사 얼굴을 어루만지는 터질 것 같은 저 달, 아, 무섭도록 사랑의 기운이 충만해지며 숨소리마저 잦아들고, 토란잎 위에 또로록 굴러다니는 작은 물방울들처럼 총총한 별들은 내리쏟아지며 은빛 꿈을 잉태시키는데 저 까만 산그림자 아래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풍성한 달빛 온몸으로 받아 그 빛으로 사랑을 나누어보았으면, 흔적도 없이 달의 정령이 되었으면.....
* 김사이시집[반성하다 그만둔 날]-실천문학사
* 그 풀 - 문효치
그 풀의
그늘에 들어 쉬네
네가 날려 보낸
편지 속의 작은 새
아직 따뜻한 체온으로
그 그늘 덥히고 있네
가지런한 손등에서
언제나 발돋움으로 서 있던 광택
그 그늘 밝히고 있네
때론 먼 바다 보길도쯤에서 담아온
푸른 파도 한 보자기 풀어 놓고 있네
내 핏줄에 흐르고 있는
서늘함
그 풀의 그늘에 들어 쉬네 *
* 문효치시집[계백의 칼]-연인M&B
* 참외 꼭지 - 장철문
여러 날 따지 못했다
때를 놓쳤다
우리 부부는 싸웠고
참외는 개미가 먹었다
포식을 했다
줄줄 흘러내린 과즙은
까마중이 먹었다
물관과 체관을 지나고
흰 꽃을 지났다
아까 날아오른 두엇은
씨앗 도둑이다
내장으로 가서
곧 항문을 지날 것이다
내 참외를 천지가 먹었다
도둑놈! *
* 장철문시집[무릎 위의 자작나무]-창비
* 짧은 말 - 박순원
요새는 밥솥도 말을 한다 증기 배출을 시작합니다
백미 고압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쿠쿠
모기도 할 말이 있어 내 주위를 맴돌고
강아지는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 하다가 만다
버스를 기다리다 나무를 쳐다보면 나무는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는 듯이 딴 데를 본다
튀어나온 보도블록을 밟으면 찍하고
물을 뱉을 때가 있다
나는 주로 핸드폰에 대고 말을 한다
이제는 멀리 살고 전화번호도 바뀐 옛 애인도 지금
누구하고 밥풀 같은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
* 박순원시집[주먹이 운다]-서정시학
* 매생이국 - 안도현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 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는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 하나? 뜨거운 울음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
* 안도현시집[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 처음처럼 - 안도현
이사를 가려고 아버지가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냈다
바로 그 자리에
빛이 바래지 않은 벽지가
새것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집에 이사 와서
벽지를 처음 바를 때
그 마음
그 첫 마음
떠나더라도 잊지 말라고
액자 크기만큼 하얗게
남아 있다 *
* 해바라기 - 문성해
이 땅에는
경작할 전답 한 마지기 없어
허공 한 귀퉁이를
일궈놓은 이가 있으니
태양과 비가 가까워
저리도 탱탱하게 알곡이 여물었나니
허공의 족속들아
어서 와서 진밥을 지어 먹고
더 넓은 허공으로 볍씨를 뿌릴지어다 *
* 문성해시집[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 대숲소리 - 서하
구름이 달을 옆구리 끼고 있는
송광사의 밤은 푸르기만 한데
화엄전 월조헌 뒤뜰 대숲이 애터지게 운다
대숲은 마디마다 바다를 들여놓았나
쓰러질 듯 일어서며
쏴아 쏴아 쏴아
뱉어내는 파도소리에
내 몸이 자꾸 뒤로 쏠린다
탁 풀어놓지 못하고 참았던 울음보따리들
오늘은 모조리 불러내어
며칠 굶은 짐승처럼 퍼지른다
짓물러 짭쪼름한 저 울음은
창망대해 일었다 사라지는 씀벅씀벅한 허기
등 구부린 채 밤새 목탁 치는
스님은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 위의 소리, 비릿하다 *
* 냉이꽃 - 김영천
무슨 자잘한 생각들이 모여서
저리 우루루 피어났을까
땀으로 배여 소금기 서걱거리는 속적삼 같이
하얗게 피었구나
함부로 박힌 돌멩이도 피하지 않고
우리네 사투리가 닿는 곳이면
어디나 피어나서는
너를 볼 때마다
유년의 기억들이 황급하게 달려와
내 코끝을 매웁게 하는구나
하찮은 바람에도 옹알옹알거리며
이리저리 함부로 흔들리는
세상일에는 참 서투른 꽃
유년의 그 가시나처럼
가만히 이름을 부르다 만다 *
* 연잎에 고이는 빗방울처럼 - 이홍섭
연잎에 고이는 빗방울처럼
나 그대에게 스밀 수 없네
경포호수를 다 돌아도
닿을 수 없는 그대 사랑, 빗방울 소리
빗방울 굵어지고
연잎은 하염없이 깊어가네
나 방해정(放海亭) 마루에 홀로 서서
불어나는 호수를 바라만 보고 섰네
스밀 수 없는 그대 사랑
내 가슴을 열어
출렁이는 호수를 다 쏟아내어도
닿을 수 없는 그대 사랑, 빗방울 소리
나 이제 야위어 호수에 잠기네
나 이제 야위어 연잎에 잠기네 *
* 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휴먼앤북스
* 파꽃 - 조은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난다
너의 방을 두드리는
내 몹시도 발목이 비틀거렸다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여
가까이 하면 눈물이 나는 존재여
머리 숙이고 있어도 몇 발짝 앞
문 잠그는 너의 손가락이 보였다
간혹 보였다
눈이 다 감기도록 우울하고 신선한 존재여
긴 밤을 위해
핏줄 사이로 끈끈한
바람이 걸어다니기 시작한다
캄캄하게 채워진 내 몸의 단추 하나가
하나씩 하나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파꽃이여 *
* 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휴먼앤북스
* 11월 - 김은숙
내 안 깊은 우물의 바닥까지 다 비워낸
물기 없는 내가 스산해서
지는 해의 붉디붉은 신열 저만큼에 두고
한참을 서 있는 11월
오래 앓던 정신의 밀도도 내려놓고
생의 속도마저 지워가며 낮아지는
겸허히 서늘한 계절
순한 손이 깊숙이 고요를 들이고
깊숙한 고요로 잠기고 *
*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
* 소 - 이종문
소가
우두커니
마구간에 엎드려서
내리는 함박눈을 멍하니.....보고 있다
아침에 내리는 눈을
아침도
아니
먹고 *
* 고요 - 이종문
붉은
고추를 먹은
잠자리 한 마리가
억 년 고인돌에 슬그머니 앉는 찰나
바위가 우지끈, 하고
부서질 듯
환한
고요
* 마음 그릇 - 이정하
당신을 향한 사랑을 담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작은가 봅니다
이렇듯 미어 터질 듯하니 *
* 묵은 등걸에 핀 매화꽃 아래 - 이준관
묵은 등걸에 핀 매화꽃 아래
외진 집 한채 짓겠네
책 한 권 펼치면 꽉 차는
토담집 한 채 짓겠네
밤이면 매화꽃으로 불을 밝히고
산(山) 달은 산창(山窓)에 와서
내 어깨 너머로 고시(古詩)를 읊으리 *
* 초승달 기차 - 손택수
기차가 휘어진다//
직선으로, 무작정 내달려 온 땅을//
가만히 안아보는 기차//
상처투성이 산허리를//
초승달이 품는다//
달 속에서 기적이 울린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그리운 날 - 최하림
이렇게 연민들이 사무치게 번쩍이는 날은
우리 강으로 가, 강 볼까, 강 보며 웃을까 *
* 가을, 그리고 겨울
깊은
가을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들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
* 최하림시집[속이 보이는 심연으로]-문학과지성사
* 저녁 바다와 아침 바다
광산촌의 여인은 보고 있었다 물에 뜬 붉은 바다
날빛 새들이 날아오르고 물결에 별들이
씻겨져 제 모습으로 갈앉고
상수리나무가 한 그루 흔들리고 있었다
키작은 사내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일천 피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으나
가도가도 막막한 어둠뿐 모두 다 뜨내기와 갈보뿐
낡아빠진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어허와어허와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
불렀으나, 신참내기 전도사도 노래불렀으나 가슴의
멍울은 풀리지 않고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슬픔만 달빛이 내리는
나무 그늘이라든가 산등에서 아주 낮게
흘러내리고 어떤 적의도 없이 흘러내리고
밤이 가고 아침이 오고
새들 무리가 무의미하게 날아오르고
물결에 흔들리는 여인의 얼굴 위로
상수리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
* 아침 시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 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 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혹은
꽁지 붉은 비둘기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포르릉 날며 흘러
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
* 겨울산
그 해도 다 간 12월 초순 서울에서는 포근하고 새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우리는 눈길을 걸어 도선사로 명동으로 갔습니다. 도선사 모퉁이를 돌면
소나무 숲 저편으로 절간의 풍경들이 떼그르르 떼그르르 울고 고딕풍의
명동 성당에서도 성모 마리아님이 휜 이마를 들고 우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제 슬픔을 슬퍼하지 못한 우리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이여 죄가 있으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죽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죽음에서 살고 있습니까? 고다마의 어머니
마야님이여, 당신의 아들이 집을 나간 뒤로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이 세상에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저 먼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수만 명도 넘는
잘 생긴 아들들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얼마 전 시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수만 명도 넘는 어머니들이 시체를 맞아 들였다고 합니다.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님이여, 고다마의 어머니 마야님이여,
이런 날은 아들의 그리며 전태일의 어머님도 어느 길을 걸어가고 김남주의
어머님도 갈 것 입니다. 이런 날은 아무 죽음도 가지지 못한 저나 제 친구들도 갑니다.
나무들이 언 가지로 서 있고 차고 신선한 공기가 샘물처럼 흘러서,
수만 리도 더 멀리 뻗어가고 수만 리도 더 높이 솟아오릅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겨울산으로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 어디로?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저녁 예감
한로가 지나면
화원에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염소들이 서성거리고
돌밭으로는 물안개가 몰아오고, 검푸른
하늘이 바다 깊이 내려와 모습을
감춘다 발도 보이지않게 어스름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 수채 구멍 같은
골짝으로 내려간다 나는 빠르게
밭고랑을 걸어 집으로 간다
퐁당퐁당 시간들이 떨어지고
빈집들이 숨을 죽이고
골목이 두런거린다 *
* 공중을 빙빙 돌며
공중을 빙빙 돌며
새 한 마리 머뭇거리다가
버드나무 가지에 내려앉는다
순간 이파리들이 동요하고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닫히면서
햇살이 물밀듯 들어온다
미닫이를 통해 보면
햇살을 받아들이는 건 새도
버드나무도 들녘도 아니고 그 아래
일파만파로 파동을 일으키며 흘러가느
가을 강과 가을의 기억들, 수초들
눈여겨보면 어린 날의 물거미들도
파동을 타고 어디로인지 이동해간다
모든 것들이 간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강을 본다
여전히 물거미들은 이동하고
구름이 모여드는지 산기슭에서는
나무들이 흔들리고 새는
버드나무 위에 있다 가을에는
물물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 *
* 저녁 바람은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저녁 바람이 베란다를 넘나들며 논다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저녁 바람이 복도 끝으로 달려 갔다가 복도
끝으로 달려오며 논다
시인이 홀로 사는 집은 설거지하는 사람도 없어서 덜커덩덜커덩
설거지하며 논다
그리고 저녁 깊이 어둠이 깔려오면 저녁 바람은 어둠 속으로 들어
가 어둠이 되어 논다 *
* 내린천을 지나
내린천을 지나 인제로
미시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졌네
꿈도 꾸지 않았네
한줄기 별똥별도
흐르지 않았네
캄캄한 잠 속을 헤매고 헤맨 뒤
또르르또르르 물소리 같은 소리가
계속 귓바퀴를 울려 나는 일어났네
물소리 같은 소리가
집을 울리고
나무도 새도
울렸네
가을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
울고 있었네
지붕 위로 떼 지어 어스름이 달렸네
검은 바위들이 어둠에 잠겼네
아무것도 나는 알 수 없었네
경(經) 한 장 읽을 수 없었네 *
*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더 이상 종달이는 높이 날지
않는다 봄날은 지나가버렸다
긴 의자에 사람들 오지 않고
시간은 주춤추춤 고장난 시계처럼
흘러간다 나는 창문을 빠끔히 열고
시간의 자국들을 보고 있다
이태리 포플러들이 강 건너 연푸른
가지를 드러내며 가지런히 있다
무슨 신호를 공중으로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오오 포플러들아 포플러들아
멈칫거리지 말고 말하라 바람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날개에는 솜털 같은 은유들이 실려 있고
은유들은 희망도 없이 부서져내린다
들판은 멀고 멀다 개울로 흘러가는
물들은 병들었다 수세기를 두고
오염된 세상은 이제 종달이 하나
떠올릴 힘이 없다 *
* 침묵의 빛
뽀오얗게 새순이 돋아나는 봄날 마로니에 공원에는 병아리 같은 유치원 아이들이 하나 둘 하나 둘 소리하며 줄지어 걸어가고
나도 뒤를 따라서 걸어가고 사방의 나무들이 소리없이 하나 둘 하나 둘 그들의 소리로 외치면서 그들도 따라서 가고,
그런 움직임은 봄과 여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가을 되어 아이들 그림자도 뜸해지고
은행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도
그러나 나무들은 하나 둘 하나 둘
그들의 소리로 그리운 듯 되풀이하다가
눈이 내리고 하늘이 언 날
가끔 한 여자가, 한 남자가 허무처럼
서 있던 날 나무들도 침묵을 하고서
침묵의 빛으로 서 있었습니다.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
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
* 가을 - 김광림
고쳐
바른
단청빛
하늘이다
경내는
쓰는 대로
보리수 잎사귀
한창이다
잎 줄기에서
맺혀 나온
염주알
후두둑 떨어진다
벼랑 위에
나붓이 앉으신
참 당신
보인다 *
*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
* 가을 - 문인수
여러 번 붉게 큰물 지고 나서
어느 날은 차디차게 발목에 감기는
가을
하늘에다가는 달게 감홍시 하나 남겨 놓듯이
누군가는 또 한나절 땅에다가는
그러나 그랬달 것도 없이
어느 날은 넌지시 징검다리 놓이는 *
* 가을 - 박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 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리자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
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
* 가을 - 박경리
노오란 은행나무
군데군데
붉은 지붕 푸른 지붕
군데군데
고속도로 가득히
석양은 깔려 있고
들판 볕가리 위에
새들
하루 마지막을 쪼고 있다
초라한 내 생애의 가을
차창 밖에는
눈부신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
* 가을 - 양주동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 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
* 가을 -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보다도
마른 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며
눈 감은 채 고즈너기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 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등불 하나
켜놓고 싶어라
서 있는 이들은 앉아야 할 때
앉아서 두 손 안에 얼굴 묻고 싶은 때
두 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리거라 *
* 가을 편지 - 조찬용
그대가
내 주인이었으면 합니다
그대를 향해
붉게 달려가는
내 맘 아시겠지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시방 온 산과 들이
내 몸처럼 불입니다
그대 안에서
이 가을 활활 타버리는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 가을, 저녁강가 - 윤경희
단 한 번도
그대에게 가 닿지 못하였다
텅 빈 하늘
내려놓은 어스름 즈음 저녁강가
나직이 산자락 안고 제 몸을 비워가는
스러져간 기억의 편린 울컥 흘러갔다
잔잔한 물소리 야윈 등을 떠받고
검붉은 강바닥으로 조금씩 가라앉았다
별이 와서 지고, 꽃이 와서 또, 그렇게 지고
풀벌레들 까맣게 밤을 지세고 간
그 강가, 온종일 비가 내려 몸이 퉁퉁 불었던
때 늦은 雨氣가 남기고 간 맨 몸의 미루나무
내 갈증의 출렁임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는 지친 물소리 아픈 허리를 눕혀본다
* 가을밤 - 이해완
귀뚜라미여
잠시
울음을
그쳐다오
시방
하느님께서
바늘귀를
꿰시는 중이다
보름달
커다란 복판을
질러가는
기
러
기
떼
* 가을 - 이정하
가을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물들이며 옵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모두가 닮아 갑니다
내 삶을 물들이던 당신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나요?
벌써부터
나, 당신에게 이렇게 물들어 있는데
당신과 이렇게 닮아 있는데 *
* 이정하시집[사랑해서 외로웠다]-자음과모음
* 가을 강(江) - 김명인
살아서 마주보는 일조차 부끄러워도 이 시절
저 불 같은 여름을 걷어 서늘한 사랑으로
가을 강물되어 소리 죽여 흐르기로 하자
지나온 곳 아직도 천둥치는 벌판 속 서서 우는 꽃
달빛 난장(亂杖) 산굽이 돌아 저기 저 벼랑
폭포 지며 부서지는 우레 소리 들린다
없는 사람 죽어서 불 밝힌 형형한 하늘 아래로
흘러가면 그 별빛에도 오래 젖게 되나니
살아서 마주잡는 손 떨려도 이 가을
끊을 수 없는 강물 하나로 흐르기로 하자
더욱 모진 날 온다 해도 *
* 가을에 - 김명인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때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 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
*모감주-무환자과의 낙엽 교목. 절이나 묘지 부근.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다.
열매는 염주(念珠)를 만드는 데 쓰임
*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 나태주시집[시인들 나라]-서정시학
바람 - 김춘수
자목련이 흔들린다.
바람이 왔나보다.
바람이 왔기에
자목련이 흔들리는가 보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자목련까지는 길이 너무 멀어
이제 막 왔나 보다.
저렇게 자목련을 흔드는 저것이
바람이구나.
왠지 자목련은
조금 울상이 된다.
비죽비죽 입술을 비죽인다. *
* 바람 - 신경림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니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촉촉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 바람의 노래 - 이성선
수우족은 아니지만
어릴 때 들길을 걸으면서 알았다
내 영혼은 바람이 주셨다는 것을
지금도 걸으면서 느낀다
내 눈동자 속의 눈동자에서는
그분과 하나다
나는 이것을 그치지 않고
노래하기를 열망한다.
새벽 풀잎에 별이 흐를 때
나의 귀는 듣는다
밭고랑 감자가 냇물에게 들려주는 노래
메꽃 속에 늦잠 자는
벌레의 잠꼬대 소리
바람은 이들로 향기롭다
이들은 내게 와서
들판으로부터 나를 키웠다
수우족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안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작다
수우족이 그렇게 살고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 수우족-미국 대초원 지대에 거주하는 평원 인디언 부족
* 바람의 노래 -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
*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마종기시집[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지성사
* 바람과 더불어 -하나 - 장석남
동구 귀퉁이에 이빨이 빠져 물러난 접시 하나
접시 속에 다급한 사랑으로 괴어 있는데
나무라지 않고
달 지네
달 지는 언덕
드렁칡 위에
달리아 꽃 절창이네
관광버스에서 울긋불긋 내리는 가을
노을 속에서
붉게 짖는 사과들
이빨 빠져 물러난 접시 속에
다급한 사랑으로 괴어 있을 때
* 장석남[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 바람 부는 날 - 박성룡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머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 바람의 경전 -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버리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버리는 것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언제 어디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집도 절도 없이 애비 에미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삽질을 하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는다 *
* 김해자시집[축제]-애지
* 바람의 내력 - 박재삼
천 년 전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가락으로 불어
변한 데라곤 없네
언뜻 느끼기에는
가난한 우리집에
서글피 불던 바람과
저 큰 부잣집에
너그럽게 머물던 바람이
다른 듯 하지만
결국은 똑같네
잘 살펴보게나
안 그렇던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어차피 이 테두리와 같다네 *
*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 천상병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
* 바람이 오면 -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 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 도종환
바람이 그치면 나도 그칠까
빗발이 멈추면 나도 멈출까
몰라 이 세상이 멀어서 아직은 몰라
아픔이 다하면 나도 다할까
눈물이 마르면 나도 마를까
석삼년을 생각해도 아직은 몰라
닫은 마음 풀리면 나도 풀릴까
젖은 구름 풀리면 나도 풀릴까
몰라 남은 날이 많아서 아직은 몰라
하늘 가는 길이 멀어 아직은 몰라 *
* 도종환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 바람과 그늘 - 함성호
바람과 헤어지고
돌아와
북한산에 산수유 벚꽃 보러 갑니다
아직 잠은 오지 않습니다
어제는 후원의 층층나무 그늘 아래서
식구들과 전을 부쳐 먹으며
놀았습니다
그게 답니다
가다 못 가면 쉬어 가지요
이젠 노래도 지쳤습니다
앞산 벚나무는 새 音을 찾았는지
유난히 환하게 숨어 있습니다
바람과 헤어진
바다로 가는 후박나무 길에는
연등이 줄줄이 걸려
중국집 남경관의 붉은 간판이
무색해집니다
사월 초파일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물결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무런 시절도 그리워하지 않고
나는 환한 한 송이 앞에서
잡니다
어두운 것은 그늘뿐입니다
그게 답니다 *
* 바람 - 반칠환
저놈은 대단한 독서광 아니면
문맹이 틀림없다
열흘째 넘기지 못한 서적을
돈 세듯 넘겨놓고,
포플라 잎 팔만대장경을
일제히 뒤집어 놓은 채 달아난다 *
* 삼월의 바람은 - 이성복
삼월의 바람은 순하지 않다
연립 주택 옥상에 올라
기저귀를 내거는 뚱뚱한
새댁의 느린 걸음걸이
삼월의 바람은 출정하는 배들의
돛폭처럼, 흰 기저귀 하늘로
밀어올리고 뒤뚱거리는 새댁의 모습
귀지처럼 가볍게 눈앞에 떤다
다만 삭은 빨래집게의 풀어진
힘으로 우리를 이곳에 묶어두는
삶, 여러 번 살아도 다시 그리운,
*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 박정원
기다림은 그대로 좋은 것
바람이 불어와 너를 비우고 지나가듯
매듭짓지 마라
있는 그대로 마음 그대로
너는 한 가닥 바람으로
영원 속에 머물 존재리니
지금 네가 움켜쥐고 있는 너는
언젠가는 영원으로 돌려보내야 할
작은 빛이리니 *
*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 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 이병률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 바람의 씨 - 김재혁
아주까리씨 하나를 입에 넣고 잘게 씹는다. 입에서 한 무더기 꽃이 피어난다. 입은 점점 더 커져 풀무가 된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생각이 피워 올리는 폭포, 한 톨의 아주까리씨가 풀무를 돌린다. 꽃의 너울 속으로 넘나드는 바람의 혼절한 모습, 지나온 역을 향해 흔드는 손짓이 내 속에 다시 바람의 씨를 흩날린다. 바람은 언제나 늙은 꿈의 주름을 지우나니ㅡ *
* 바람 부는 날 - 윤강로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만을 보면서
오래오래
기다려 보았나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로
세상에 매달려 보았나
바라보는 눈매에 추워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되어 스친 것들을
잊어 보았나
삶이 소중한 만큼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를
사랑해 보았나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 이정하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태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그대여 이제 그만 마음 아파하렴 *
* 이정하시집[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푸른솔
* 손 - 박남수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야 했을 것이었다
내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울든가 어쨌어야 했을 것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으면
그나 내가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전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저 손을 잡는 것만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다시 보면 역시 그는
무엇인가 뜻 모를 웃음을 웃으며 있었다
자기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혼자의 기쁨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던 그도
혼자서는 버스를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헤어져 가며 부끄러운 손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조국을 지키던 그 자리에
두손을 그는 두고 온 것이었다
그에게는 손이, 손이 없었던 것이었다
* 손 - 박남수
물상이 떨어지는 순간,
휘뚝, 손은 기울며
허공에서 기댈 데가 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소유하고
또 놓쳐 왔을까.
잠깐씩 가져 보는
허무의 체적(體積).
그래서 손은 노하면
주먹이 된다.
주먹이 풀리면
손바닥을 맞부비는
따가운 기운이 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손은
빈 짓만 되풀어 왔을까.
손이
이윽고 확신한 것은,
역시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뿐이었다.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 손의 고백 -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 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 당신의 손 - 정호승
나는 누구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손을 먼저 살펴본다.
그것은 그의 손이 그의 삶의
전부를 말해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 사람과 악수를 해보고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여러 가지
감도를 통해
그가 어떠한 직업을 가졌으며
어떠한 삶을 살아왔으며
성격 또한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손이 바로 인간의 마음의 거울이자
삶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 천 개의 손 - 나희덕
그의 손은 천 개나 되고요
머리에 얹은 화불 또한 헤아릴 수 없어
손으로 잡으려 하면 뿔뿔이 달아나버렸지요
대체 그 많은 손을 어디에 쓰나
갸웃거리며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오는데
아, 천 개의 싸릿가지가 지나간 마당
고통의 소리를 본다는 그가
사람 마음에 따라
서른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그가
내게는 싸리비 든 손으로 와서
흙알갱이 어지러운 마음 바닥을 쓸고 갔네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져
나는 한 걸음도 내려서지 못하고
구름 난간 같은 계단에 앉아
빈 마당만 소슬하게 들여다보았지요
마음을 지나는 소나기떼처럼
싸리비 닳는 소리 아직 들리는 것 같아서요
* 목수의 손 - 정일근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 때 목수의 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 효자손 - 공광규
우체국 앞 가로수 곁에
아낙네가 죽제품 좌판을
벌여 놓았다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와 키와 죽침 따위에 섞여
효자손도 눈에 띄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황급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그 조그만 대나무 등긁이를 하나
사 왔을지도 모른다
노인성 소양증만 남고
물기 말라 버려 가려운 등을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장난삼아
간질간질 긁어 주던
고사리 같은 손
이 작은 효자손이 어느새 자라서 군대에 갔다
옆에는 나직한 숨결마저 빈자리
어둔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며
빨리 떠나라고
휴대폰 거는 소리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은 손
벽오동 잎보다 휠씬
커다란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
* 손에 대한 예의 -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번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힌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
* 정호승시집[여행]-창비
* 손을 흔든다는 것 - 정호승
잘 있어라
눈빛은 차마 너를 보지 못하고
잘 가거라
마른침을 삼키며
호스피스 병동 병실에 누워
마지막으로 너를 향해
손을 흔든다는 것
창가의 어린 나뭇가지를 향해
나뭇가지에 앉은 흰 눈송이를 향해
차마 슬프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흔든다는 것
인간이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말없이 손을 흔든다는 것
그것은 풀잎이 땅을 흔든다는 것
별들이 밤하늘을 흔든다는 것
그래도 어디에서든
그 어느 때든
다시 만나자는 것 *
* 정호승시집[여행]-창비
*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