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6일, 새벽 2시 47분.
서울 마포구, 한 오피스텔 12층.
컴퓨터 화면의 푸른 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USB를 뽑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나는 죽는다.'
그는 USB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세 번의 신호음.
"…여보세요?"
"저예요. 받으셔야 해요. 오늘 밤 안으로. 이거 없어지면 모든 게 끝나요."
전화는 그것으로 끊겼다.
남자는 USB를 낡은 책 사이에 숨겼다. 책 제목은 아이러니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흘 뒤, 그는 한강에서 발견되었다.
사인은 익사.
경찰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1월 12일. 서울지방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형사 윤강혁은 책상 위에 발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책상은 서류 더미와 반쯤 식은 커피캔으로 뒤덮여 있었다. 동료들은 그를 두고 말했다.
"저 인간, 자는 건지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
사실 윤강혁은 생각하는 중이었다.
책상 위 얇은 파일 하나. 표지에는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사망자: 박진수, 38세, 전 외교부 이란 담당 3급 공무원. 한강 익사. 자살 추정.]
파트너 형사 이소담이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그거 또 보고 있어요? 자살로 종결된 사건인데."
"자살한 사람이 죽기 사흘 전에 짐을 싸는 경우는 없어."
"짐을 쌌어요?"
"오피스텔 주인 말이, 박진수가 박스를 몇 개 정리했다고. 이사 준비하는 것 같더라고. 죽을 사람이 이사 준비를 해?"
이소담은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외교부 이란 담당이면… 혹시 나무호 사건이랑 관련 있는 건 아닐까요?"
윤강혁은 눈을 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거야."
박진수의 오피스텔. 마포구 염리동.
윤강혁과 이소담은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이상하리만치 깔끔했다. 너무 깔끔했다. 누군가 이미 한번 훑고 간 흔적이었다. 책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서랍은 모두 열려 있었다.
"먼저 다녀간 사람이 있네요."
이소담이 중얼거렸다.
윤강혁은 방 안을 천천히 걸었다. 그의 눈은 구석구석을 훑었다. 냉장고 뒤, 화장실 타일 틈, 에어컨 필터.
그리고 책장 맨 아래 칸.
책 한 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책들은 다 사라졌는데, 이것만.
《국가란 무엇인가》
윤강혁은 장갑을 끼고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겼다. 책 사이, 맨 뒤 쪽.
USB 드라이브 하나.
이소담이 숨을 들이켰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거야."
윤강혁은 USB를 조심스럽게 증거 봉투에 넣었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손끝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디지털포렌식실.
전문 분석관 최기태가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세 사람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파일은 세 개였다.
[CCTV_NAMUHO_20210104_23:17.mp4]
[IRAN_DIPLOMATIC_LETTER_KOR.pdf]
[NSC_MEETING_MINUTES_20210105.doc]
"열어봐."
첫 번째 파일. 영상이 재생되었다.
칠흑 같은 밤바다. 나무호의 갑판. 갑자기 나타나는 고속정 두 척. 총구에서 번쩍이는 불꽃. 엎드리는 선원들. 혁명수비대 대원들이 갑판으로 올라오는 장면.
이소담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두 번째 파일. 이란 외교 서한의 한국어 번역본.
"…한국 정부의 대이란 제재 협력 및 동결 자산 미반환에 대한 항의로서 본 조치를 취하였음을 통보한다. 한국 측의 경거망동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임을 명백히 한다."
세 번째 파일. 안보회의 회의록.
[1월 4일 23:40. NSC 긴급회의록.]
"강 실장: CCTV 영상 확보 완료. 이란 측 의도 파악됨. 대외 발표 보류 결정. 이유: 미국 제재 국면에서 외교적 파장 최소화 필요."
"외교부 차관: 이란 측 주장(한국 책임론) 대외 공개 금지 지시."
"결론: 언론에는 '파악 중' 입장 유지. 기간 미정."
회의록 날짜는 1월 4일.
나무호 피격 당일 밤이었다.
정부는 그날 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닷새 동안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최기태가 조용히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나온 거예요?"
"죽은 사람한테서."
경고는 빠르게 왔다.
이튿날 오전. 윤강혁의 상관 김태성 수사과장이 그를 불렀다.
"나무호 관련 자료 확보했다는 게 사실이야?"
"예."
"어디서?"
"수사 중 발견했습니다."
김 과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 형사. 이건 그냥 놔둬. 위에서 연락 왔어. 국가안보 관련 사안이래. 우리 소관이 아니야."
"위에서요? 어디 위요?"
"…그냥 놔두라고."
윤강혁은 과장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이소담이 뛰어왔다.
"형사님. 방금 박진수 씨 핸드폰 통화 기록 나왔어요. 사망 전날 밤 마지막으로 통화한 번호 추적했더니…"
이소담이 메모지를 내밀었다.
윤강혁은 번호를 보았다.
그의 눈이 좁아졌다.
02-XXX-XXXX. 청와대 직통 내선번호였다.
그날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
제보자는 먼저 와 있었다.
창가 구석자리.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여자. 윤강혁이 맞은편에 앉자 그녀는 조용히 마스크를 내렸다.
서른 초반으로 보였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잠을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박서연 씨죠?"
"…어떻게 알았어요?"
"박진수 씨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당신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외교부에 사표를 냈고요."
박서연은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갔다. 평범한 일상.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들.
"진수 씨가 죽은 건… 제 때문이에요."
"말씀해 보세요."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밤 NSC 회의가 끝나고, 진수 씨가 저한테 전화했어요. '이건 아니다, 이걸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저는 말렸어요. 겁이 났거든요. 근데 진수 씨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 파일을 USB에 담아서 저한테 전달하려 했어요. 그런데 그 전화 통화 이후로 진수 씨가 감시를 받기 시작했고… 사흘 뒤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윤강혁은 조용히 물었다.
"그 파일, 당신도 갖고 있나요?"
"…저한테 전달된 건 없어요. 진수 씨가 책에 숨긴 걸 형사님이 먼저 찾으신 거잖아요."
"박진수 씨 죽음, 자살이라고 생각하세요?"
박서연은 윤강혁을 똑바로 보았다.
"진수 씨는 겁쟁이였어요. 좋은 의미로요. 파일을 저한테 전달하고 싶었던 것도, 자기 혼자 감당하기 무서웠기 때문이에요. 그런 사람이 혼자 한강에 뛰어들 리 없어요."
윤강혁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타살 가능성. 배후. 청와대 연결고리.]
그날 밤 11시.
윤강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소담이었다.
"형사님. 지금 당장 나오셔야 해요."
"왜?"
"박서연 씨가…"
윤강혁은 이미 재킷을 집어 들고 있었다.
현장은 종로구의 한 골목이었다. 박서연이 카페를 나간 지 두 시간 뒤였다. 그녀는 골목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머리에 둔기로 맞은 흔적. 가방은 없었다. 핸드폰도 없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옮기는 사이, 윤강혁은 골목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은 메모지 하나.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돌에 눌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놓아둔 것처럼.
메모지에는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더 이상 파고들지 마라. 이건 국가안보의 문제다."
윤강혁은 메모지를 증거 봉투에 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국가안보. 참 편리한 말이야."
이소담이 옆에서 말했다.
"형사님. 우리 지금 엄청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래."
"그래도 계속할 거예요?"
윤강혁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밤하늘. 빛 공해에 가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있을 것이었다. 가려졌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박진수가 목숨 걸고 숨겨둔 거야. 우리가 포기하면 그 사람 죽음은 뭐가 돼?"
이소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골목을 걸어 나왔다.
국가안보실장 강도준.
윤강혁이 열흘간의 수사 끝에 도달한 이름이었다.
CCTV 영상 은폐를 지시한 자. 이란 외교 서한을 묻어버린 자. 그리고 박진수가 마지막 전화를 걸기 직전 청와대 내선으로 통화한 기록의 주인.
그러나 강도준에게 닿는 길은 막혀 있었다. 영장은 기각되었다. 상부의 압력이었다. 김 과장은 윤강혁을 다시 불렀다.
"윤 형사. 이건 진짜 끝내야 해. 더 가면 자네가 위험해."
"박진수는 이미 위험해졌습니다. 그 사람을 죽인 놈을 그냥 두라고요?"
"…자살이야."
"과장님도 그렇게 믿으십니까?"
침묵.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윤 형사."
그것이 대답이었다.
윤강혁은 다른 길을 찾았다. 국민의 알 권리. 언론. 그는 오래된 수첩을 뒤졌다. 한 이름을 찾아냈다.
윤재혁. 해양전문 저널리스트.
USB 파일이 기사로 나간 것은 1월 19일이었다.
윤재혁의 이름으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은 자료라고만 밝혔다. 나머지는 쓰지 않았다. 박진수의 이름도, 박서연의 이름도. 아직은.
기사는 폭탄이었다.
CCTV 영상 캡처. 이란 외교 서한 내용. 안보회의 회의록 발췌.
정부는 피격 당일 밤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닷새 동안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
세 시간 만에 기사는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광화문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즉각 반박했다.
"허위 정보에 기반한 왜곡 보도입니다.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이미 영상을 보았다.
영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3개월 뒤.
강도준은 사임했다. 표면적 이유는 건강 문제였다.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강도준은 출석하여 말했다.
"모든 결정은 국가와 외교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혼란을 드린 점은 유감입니다."
유감. 그 한 마디였다.
박진수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자살이었다.
윤강혁은 책상에 앉아 파일을 닫았다. 표지에 직접 쓴 글자들.
[미결]
이소담이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포기해요?"
"미결은 포기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윤강혁은 창밖을 보았다. 봄이 와 있었다. 서울의 가로수가 연초록 잎을 틔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참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계속한다는 뜻이야."
그는 새 파일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 맨 위에 이름을 적었다.
[강도준. 배후.]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 윤강혁 시리즈 2편에서 계속 —
"국가안보라는 이름 뒤에 숨은 거짓말은, 결국 국가 그 자체를 갉아먹는다."
— 형사 윤강혁의 수첩 중에서